5월 31일 일기. 첨삭. 책들. 푸코와 덕성.

Comment 2015.05.31 18:42

- 일단 아직 과제를 안 낸 학생들 글을 빼고는 페이퍼 첨삭을 끝냈다. 1차 페이퍼와 비교하면 전반적으로 문장은 훨씬 읽을만해졌는데 전반적으로 마음에 드는 글은 더 드물어졌다. 평점은 상대평가로 들어가니까 점수를 억지로 잘 줄 필요는 없지만 내가 지나치게 엄격한 잣대를 갖고 있는 게 아닌지 자문하게 된다; 지도교수님이 최종 점수를 줄 때 보통 나보다 10점 만점에 1점 정도 후하게 주시는 편인데, 이번에는 간극이 좀 크지 않을까 걱정된다. A4 5-6쪽 짜리 글을 쓰고 기획해본 경험 자체가 없어서일까, 부분부분이 재밌는 글은 좀 있으나 긴 호흡을 버텨낼 서사를 구축한 글은 보이지 않는다.

 전체로서의 글은 사실 하나의 서사로 읽힐 수 있다(논증은 엄밀히 말해 수사의 한 종류이자 서사의 부분이다). 부분적인 서술이 조악해도 전체의 서사가 설득력 있다면 글로서는 그게 더 나을 수 있다; 요약을 해보면 그 차이가 선명해진다. 인문대 학부 글쓰기 교육에서, 특히 문학전공들에서 가장 아쉬운 점은 전체적으로 논증적 서사를 구축하는 방법을 거의 가르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결과 많은 문학전공자들은 졸업 후 디테일한 내용들은 볼 줄 알지만 주장의 큰 흐름이 어떻게 작동하는지는 보지 못하기 십상이다(이데올로기에 거스를 수 있는 사유는 항상 부분을 전체의 맥락과 대조하여 읽도록 요구하는 변증법에 기초한다는 걸 감안한다면, 우리의 읽기/쓰기는 이데올로기에 대한 저항력을 제대로 길러주지 못하는 게 아닐까 의문을 던져봄직 하다).

 문장을 정갈하게 잘 쓰는 것, 독특한 리듬을 갖는 것은 매력적인 일이지만 사실 건전한 논증을 분별하고 구성할 수 있는 능력이 좀 더 요긴하며--페이퍼에서 오류논증들이 어떠한 자의식 없이 제시되는 경우는 흔하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글을 하나의 전체로 읽고 사고하고 쓸 수 있게 해주는 훈련이다. 우리가 범박한 필자라는 의미에서의 에세이스트를 길러내는 일 이상을 하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 고민할 필요가 있다. 어제 영미연에서 (대중적인) 교양교육 대 (영문학) 전공교육의 갈등구도를 보면서 교양교육이 애초에 왜 필요한지, 또 좋은 교양교육의 요건이 무엇인지 합의가 되어있기나 한 건지 의문이 들었다.


- 보고서를 마무리하고 다음 주부터 새로운 일을 시작해야 한다...방학 때는 공부 시간을 얼마나 확보할 수 있을까?


- 마이네케(<국가권력의 이념사>)와 루소(<쥘리 또는 신 엘로이즈>)를 읽기 시작했다. 전자는 국역본의 문장에 불만이 좀 있다. 애초에 국역자의 문장이 꽤 '독특'한데, 그걸 필터링해줄 편집/교정이 제대로 된 것인지 의심스럽다. 종종 이상한 문장 때문에 멈춰서 머릿속에서 원래의 의미를 재구성해야 하는 상황은 짜증난다. 매우 흥미롭고 중요한 책인데도 그렇다. 후자는 책세상에서 나온 루소 전집판을 보고 있다. 전집을 내는 건 좋은 일이지만 간단한 생애는 둘째치고 텍스트 서지사항에 대한 주석조차 없어서 비평판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고독한 산책자의 몽상 / 말제브르에게 보내는 편지>를 읽어보면 심지어 각각의 텍스트가 언제 집필되었는지, 어느 순서로 쓰였는지도 전혀 알 수 없다). 후주는 지나치게 간략해서 큰 도움이 되는지 잘 모르겠다. 불어나 독어로 집필된 책의 한국어 역을 읽으면서 "그냥 영어판으로 읽어"라는 소리를 듣는 걸 좋아하지는 않으나, 판본에 기울이는 공을 보면 Norton Critical Edition 까지는 아니더라도 Penguin이나 Oxford World's Classics 처럼 비교적 대중적인 판본에도 미달한다.


- <푸코 이후>를 포함해 최근에 난장 및 김상운 선생을 통해 소개되는 일본쪽 푸코 논의를 간간히 보고 있다. 일본 내에서야 아예 하나의 필드가 구성된 것 같으니 따라가서 얻을 게 분명히 있겠지만, 최근 70년대 중반 이후의 푸코를 이해하고 활용하려는 한국의 노력에서 아쉬운 건 근대 사상사적 맥락의 결여다. 푸코가 적어도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에서부터 <생명관리정치의 탄생>에 이르기까지 수행하는 것은 가장 표층적인 수준에서 말하자면 근대의 정치사상사를 다시 읽는 작업이다. 사목권력이나 국가이성, 그리고 고유의 리듬을 갖는 '자연'으로서 시장의 등장은 기본적으로 우리가 정치행위를 이해해온 방식의 역사에 속해 있으며, 푸코 역시 정치사상사에서 행해진 연구를 활발하게 끌어온다. 당연하지만 푸코가 제시한 통치성의 역사연구는, 적어도 근대에 이르기까지는, 그 하나만 따로 빼내서 볼 게 아니라 정치사상사라는 보다 광범위한 분야에 견주어 볼 때 흥미롭게 읽힐 수 있는 내용이 더 많다. 더불어 캠브리지의 연구자들을 포함한 정치사상사 연구자들도 지난 40년간 놀고 있던 게 아니라서 엄청나게 많은 연구가 쌓였고--나는 서구 근대 정치사상사가 인문학의 여러 필드 중 지난 40년 간 지적으로 가장 생산적이었던 필드일지도 모른다는 인상마저 든다--그중에서는 푸코가 다루었던 주제들을 더 깊이 음미할 수 있게 해주는 것들도 있다.


 아마도 가장 아쉬운 점은 '통치'governing라는 키워드가 더 깊게 사고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많은 독자들은 통치성과 푸코 말년의 주체화 문제가 어떻게 연결될 수 있는지 여전히 의문이겠지만, 고대에서 근대까지 계속해서 등장했던 공화주의적 담론의 핵심키워드라고 할 수 있는 덕virtue은 스스로를 통치하는self-govern 능력을 포함하는 개념이다. <주체의 해석학>에서 플라톤의 <알키비아데스>를 인용하면서 자기의 통치와 국가의 통치 사이의 불가분을 내비쳤을 때, 국가와 개인 사이의 갈라짐을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인 자유주의적 독자들은 고대의 미개한 사고라며 비웃겠지만 (한국에서는 연구자들에게나 친숙한) 공화주의적 전통에서는 자명한 사고다. 어떤 점에서 우리는 푸코가 (70년대 중반 영국에서 대대적으로 전개되고 있던) 정치사상사의 공화주의적 흐름을 자기 나름대로 수용하고 있던 게 아니었을까라는 물음을 진지하게 검토해볼 필요가 있다.


 물론 덕이라는 개념은 고대의 것만이 아니다. 18세기 영문학을 어느 정도 공부한 사람이라면 18세기의 로맨스들이 온통 덕virtue라는 단어로 덮여있는 걸 똑똑히 볼 수 있다(심지어 이 전통에 대한 가장 극단적인 비판자인 사드조차도 덕과 악덕의 수사를 여전히 중요하게 활용했다). 주지하다시피, 예컨대 최근에 작고한 피터 게이가 잘 보여주었듯, 초기 근대부터 18세기 계몽의 시대에 이르기까지 고대 그리스/로마 텍스트들을 읽고 어떻게 해석하느냐는 각 시대의 담론을 형성하는 주요한 자원이었고, 이중 공화주의적 의미에서의 덕성 개념은 17세기 중반부터의 영국혁명기에 폭발한다. 심지어 자유주의 이데올로그로 불리는 로크만 해도 정작 <교육론>을 읽어보면 스토아학파 적인 교육, 인간의 덕=자기통치를 함양하는 교육을 주장한다. 어떤 면에서 근대사회의 이데올로기의 역사는 고전적인 덕성의 언어가 자신이 소화할 수 없는 현상들, 예컨대 새로운 과학이라거나 국민경제, 국제무역, 근대국가, 시장과 같은 개념들을 억지로 소화해가면서 변해가다가 결국 극히 제한된 영역으로 밀려나는 과정이기도 하다(개개인의 덕과 공동체의 덕을 연결시키는 논리는 적어도 프랑스혁명기에 이르기까지 활발했으며, 심지어 토크빌에게서도 마찬가지의 사고를 볼 수 있다).


 정치철학 쪽으로 시야를 돌려본다면, 알래스데어 매킨타이어나 찰스 테일러와 같은 공동체주의자들이 테일러의 표현을 빌자면 "인간 주체가 된다는 것이 무엇인가"("what it is to be a human agent,"_SoS_ ix)를 이야기할 때, 이것은 덕에 대한 논의이기도 하며 푸코적인 의미에서 자기통치과정을 다루고 있는 것이다. 20세기 후반기 광범위하게 자본주의적 사회를 장악했던 (심지어 좌파들까지도 합류했던) 자유주의적 인간관의 물결이 포착하지 못한 지점들을 짚어낸다는 점에서 푸코도, 공동체주의자들도, 정치사상사의 공화주의 논자들도 유사한 문제의식을 공유한다; 나는 특히 시민성의 문제가 전면화된 한국 사회의 맥락을 고려한다면 이 문제가 여전히, 오히려 지금 더 절박한 의미를 갖는다고까지 말하고 싶다. 이러한 맥락에서 당연히 이들의 작업을 서로 견주어 검토하는 작업은 중요하다--심지어 푸코를 더 깊이 이해하고 활용하기 위해서 말이다.


 나는 지금 동시대에 영미권에서, 일본에서 행해지고 있는 광범위한 푸코 르네상스의 기조를 쫓고 소개하는 작업의 중요성을 폄하할 생각은 조금도 없다. 그러나 푸코를 다시 맞이하는 작업에서 그것만이 전부일 수는 없다; 지난 20년간 사실상 이론을 수입하고 심지어 해석하는 작업조차도 완성된 가공품을 들여오는데 만족해야 했던 시기를 반복한다면 이론은 더욱 더 지적 허영의 부산물 이상이 되기 어려울 거다. (이론의 '실천적인 적용'에 대해서는 여기서 언급하지 않겠다) 그런 점에서 나는 상술한 과제가 우리가 따라가볼 수 있는 또 하나의 길이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 위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사고를 검토해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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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개선비 2015.06.02 23:16 신고 Modify/Delete Reply

    형님 역시 통치성에 대한 부분 얘기는 항상 흥미로운 것 같아요.
    얼마전에 아는 선생님이랑 술 한잔하면서 비젼 제시의 부재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는데,
    그 선생님은 가족담론으로 해결책을 제시하려고 하더라고요.
    방향은 달라도 확실히 통치성에 대한 부분(덕성까지 나아가는 부분)은 결국 돌아올 수밖에 없는 부분인 것 같아요.

    • BeGray 2015.06.05 02:04 신고 Modify/Delete

      가족담론이 해결책이 된다는 게 어떤 이야기일지는 잘 상상이 안갑니다만(가장 순진하고 이데올로기적인 이야기부터 의외로 중요한 이야기까지 너무 다양한 이야기가 나올 수 있어서 ㅎㅎ), 푸코는 처음부터 끝까지 면밀하게 읽어두면 도움이 됩니다!^^

    • 개선비 2015.06.10 18:32 신고 Modify/Delete

      형님 저 현준ㅋ

      저도 가족담론으로 어떻게 해결한다는지 가늠이 안 된다고 하니
      "그 부분부터 다시 짜봐야지요"라고 하셔서 당황
      솔직히 지금 상황에서는 시민론이 가장 그럴듯한 답안인듯합니다.

      푸코 얘기를 들어보면 푸코를 단순히 포스트모더니즘 분류로 보는 것은 푸코의 풍부한 담론을 한정짓게 된다는 생각이 듭니다.
      굉장히 풍성한 얘깃거리가 있는듯 합니다.

    • BeGray 2015.06.10 22:14 신고 Modify/Delete

      애초에 일급의 사상가들은 특정한 카테고리로 쉽게 포착될 수 없죠. 그렇게 믿는 사람은 지성을 형성하는 복잡한 기제들을 지나치게 단순화할 수 있는 사람들 뿐일 겁니다. 저는 다양한 분야에서 제기된 지적/정신적 경향으로 포스트모더니즘을 정의할 수는 있지만 특정한 사상가를 그 표현 안에 묶어두기란 무척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심지어 가장 포스트모던한 결론에 가까웠던 리오타르조차도 말이죠. 푸코는 말할 나위도 없는데, 푸코를 포스트모더니즘의 일부로 간주하는 사람은 푸코를 읽지 않았거나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고 밖에 말할 수 없습니다 ㅎ

      결론은 직접 읽어보세요!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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