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드(Sade)에 대한 노트: 주체화의 문제.
Comment 2015. 5. 17. 17:53<사랑의 범죄>(국역본은 원본에 실린 11편의 단편소설 중 3편만 싣고 있다...그나마 서문 소설론이 함께 번역되어서 다행이랄까. 참고로 영역본 Oxford World's Classics ed. 은 7편을 수록)를 읽고 <쥘리에트 혹은 악덕의 번영>(Histoire de Juliette, ou les Prospérités du vice)을 보고 있다. 인명 표기에서 L과 R이 똑같이 "르"로 표기되는 걸 보면서--예를 들어 <규방철학>의 돌망세Dolmancé를 "도르망세"라 표기한다거나--일어중역판일 가능성이 매우 높은 동서문화사 판본 <악덕의 번영>인데, 일어중역답게 종종 이상하게 엇나가긴 하지만 대체로는 한국어로 잘 읽히고, 보부아르의 논문 "Faut-il bruler Sade?"(영어로는 "Must We Burn Sade?"로 옮기는데 동서문화사판에서는 아마도 일역을 참고해서였을지 "사드는 유죄인가?"로 옮겼다)가 앞에 수록되어 있다. 동서판으로 최대한 빨리 읽어치우고 나중에 좀 더 엄격한 논의를 할 때는 영역본으로 보아야겠다; 그때까지 현재 1권만 출판된 성귀수 역의 사드 전집이 빠른 진척을 보여준다면 좋겠지만 현재와 같은 질적 수준을 유지하면서 빠른 출간을 바라기는 어려울 것이다.
아직 <소돔 120일>을 읽지 않아서 완전한 계보를 그리긴 힘들지만, <사제와 죽어가는 자의 대화>가 도덕과 쾌락에 관해 사드의 가장 기초적인 논의를 담고 있다면 리베르탱(방탕아, 난봉꾼 등등으로 번역되는데, 실제로는 쾌락추구적 자유지상주의자 쪽에 가깝다), 유물론, 신체에 관해서는 <규방철학>에서 완성된 형태를 보이며, <쥘리에트>는 여기에서 리베르탱과 악의 문제를 깊게 파고들어 본격적으로 하나의 세계를 구축한다; 어떤 면에서 <대화>를 <규방철학>의 초기 스케치로, <규방철학>을 <쥘리에트>의 덜 완성된 형태로 읽어도 크게 무리는 아닐 것이다. 실제로 서사의 공간적 배경을 참고한다면, <대화>가 침실을 배경으로 삼고 두 사람이 주로 등장하며, <규방철학>이 귀족의 외딴 저택/성에서 여러 남녀가 벌이는 일을 그린다면, <쥘리에트>는 파리, 나아가 프랑스 전체를 배경으로 하며 하나의 사회 자체를 담고 있다. 상상력의 공간적/물리적 크기라는 측면에서 <쥘리에트>는 문자 그대로 국가에 대한 비틀린 상상에까지 이르며(여기서 사드는 분명히 루소의 입장을 겨냥하고 그것을 전도시킨다), 주체의 형성이라는 모티프에서도 가장 전개된 형태의 사고를 보여준다.
일반적인 독자에게 사드의 텍스트로부터 교육과 주체형성의 문제를 읽어내는 게 낯설게 느껴지겠지만, 그의 저작 전반에 걸친 루소의 영향력을 생각한다면 비교적 이른 시기의 저작부터 교육의 모티프가 중요하게 등장한다는 사실은 그렇게 괴상한 것은 아니다. 가장 이른 시기에서부터 집필된 <소돔 120일>과 <알린과 발쿠르>를 문헌학적으로 검토하기 전에는--이 일은 내 능력을 벗어난다--정확한 시점을 특정하기 어렵겠지만, 적어도 1795년 출간된 <규방철학>은 명백히 젊은 외제니Eugénie가 돌망세와 생앙쥬 부인의 교육을 통해 리베르탱의 길로 입문하는 여정을 그리는 이야기이며, 이 이야기와 핵심적인 구도를 공유하는 (아마도 보다 먼저 쓰여졌을) "외제니 드 프랑발"Eugénie de Franval에서도 리베르탱이 자신의 딸을 주도면밀하게 교육시켜 리베르탱으로 길러내는 과정을 꽤나 공들여 그려낸다; 아마 루소의 신봉자라면 특히 "외제니 드 프랑발"을 읽으면서 <에밀>에 대한 악취미적 패러디라고 분개할지도 모르겠다.
루소 또는 18세기의 로맨스 전통에서 인간이 교육과 경험을 통해 덕성에 도달하는 성숙bildung의 과정이 서사를 구축하기 위한 철골과 같이 자리잡고 있다면, 사드적 성숙에서 인간은 한편으로는 '자연과학적', 그러니까 유물론적 우주론을 수용하고다른 한편으로는 신체적 감각에의 집중을 위한 기예들의 단련을 거쳐 신체와 정신 양자 모두를 세밀한 지점에까지 정련한다. 이 정련의 과정은 가장 강렬한 반 도덕적 혹은 반 자연적 사건을 보면서도 한 치의 흔들림 없이 '이성적으로' 쾌락에 탐닉할 수 있는 무감정한 주체의 형성을 지향한다는 점에서 17세기 이래 신 스토아주의neo-stoicism의 전통을 떠올리게 한다; 보부아르가 사드로부터 스토아주의적 모티프를 읽어내는 것은 전적으로 타당하다. 전통적인 미덕이 스스로의 내적인 고양/성장을 통해 타자를 감화시킨다는 데서 자아와 타자의 경계를 넘어서는 힘으로 작동할 때, 사드의 악덕은 한편으로 타자를 거리낌없이 쾌락/범죄의 수단으로 활용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리베르티나주(리베르탱적 사고방식)를 추구하고 실천하는 이들간의 공통된 쾌락 영역을 연다.
<쥘리에트>는 적어도 내가 지금까지 읽은 사드의 텍스트 중에서 이러한 (후기 푸코의 용어를 빌리자면) '자기배려'Souci de soi / Care of the self의 모티프를 가장 선명하게 보여준다. 쥘리에트는 최초에는 수녀원에서 리베르티나주를 접하며 가족의 파산 이후 매음굴을 거치고 다른 리베르탱들을 만나면서 더욱 철저하게 악덕에 근접한다. 통상적으로 미덕/덕성의 대응이 부패와 타락이라면, <쥘리에트>의 인물들은 고양된 악덕의 인간형을 새로운 지향점으로 삼고 여기에 접근해나가며 쾌락의 기예를 익히고 나아가 자기 스스로를 형성하는 작업은 이 독특한 '성숙' 과정의 핵심이 된다. 막대한 권력과 부를 보유한 리베르탱들은 단순히 동일한 성적/범죄적 쾌락을 반복하는 대신 더 진하고 극단적인 형태의 실천으로 나아가기를 멈추지 않으며 이러한 실천과정에서 움츠러들 정도로 유약하거나 자기 자신의 감정과 신체를 충분히 엄격히 다스릴 수 없는 이들은 곧바로 먹잇감으로 전락한다; 쾌락/악덕의 추구는 높은 수준의 자기통제와 엄격함의 반복적인 실천을 요구하는 과정으로서 그 자체로 주체화의 한 방식이 된다. 누아르쇠나 생퐁의 가르침, 크레아빌과 생퐁의 논쟁을 비롯해 <쥘리에트>는 리베르탱들이 스스로의 사유를 전개하는 지면을 여러 차례에 걸쳐 제공하는데 이런 대화들은 특히 18세기 사상사/관념사의 관점에서 주의깊게 읽어볼 만하다; 사드의 리베르탱들이 악덕과 쾌락추구의 문제에 관해 서로 다른 입장들을 피력하는 대목은 이 주제를 사드가 꽤 깊게 고찰했음을 보여준다.
<미덕의 불운>(Les infortunes de la vertu, 1787) 및 그 확장증보판 <신 쥐스틴>에 이르기까지 쥘리에트의 자매 쥐스틴의 미덕/덕성을 조소하는 텍스트들이 적어도 주체화와 실천의 문제에 있어서 비교적 단조로운 면모를 보여준다면(나는 국역된 <미덕의 불운>만 읽고 나머지는 시놉시스만 봤다...직접 읽으면 또 어떨지 모르겠다), <쥘리에트>는 적어도 주체화 문제에 있어 갖가지 의미체계들의 보다 풍성한 뒤얽힘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사드의 정수에 좀 더 가깝다. 루소의 사유에서도 자연철학, 유물론, 감각론과 덕성의 체계가 혼재하는 양상을 보여준 것처럼, 사드의 텍스트에서 또한 서로 다른 형태의 체계들이 이어져 있다. 도덕, 종교, 관습을 냉소적으로 비판하는 공리주의적 유물론이 기저에 있다면, 명백히 이것을 초월하는 스토아주의적 주체형성의 모티프가 있다. 양자를 매개하는 항으로 17세기 이래의 감각론(사드는 공포의 문제를 제기하면서 직접적으로 홉스를 인용하지만, 실제로 사드가 보여주는 감각론은 <리바이어던>의 그것보다 훨씬 복잡하게 전개되어 있다), 특히 감수성(sensibility)의 논리가 전도된 형태로 등장하는데, 악한 정념에 더 쉽게 이끌려 이를 실천하는 이들이야말로 더 많은 역량을 지닌 이들이라는 사고는 <에티카>의 선함과 역량의 문제를 연상시킨다; 사드가 직접 스피노자를 읽지 않았더라도 전자에게서 감수성과 역량, 악덕과 같은 개념들이 결합되어 있다는 점에서 스피노자에게서 볼 수 있는 의미체계를 뒤집힌 형태로 발견할 수 있다는 사실은 흥미롭다.
<쥘리에트>를 끝까지 읽은 뒤에 추가적으로 정리할 게 있으면 정리해보겠다. 어쨌든 이 텍스트는 사유체계의 역사를 추적하는 입장에서 무척이나 흥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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