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병철의 이데올로기: <오늘날 왜 혁명은 불가능한가?> 비판적 논평.

Critique 2014. 10. 17. 01:14

원문주소: 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660120.html (기사 하단 참고)



"신자유주의 지배체제는 전혀 다르게 짜여져 있다. 여기서는 체제를 유지하는 권력이 더이상 억압적이지 않고, 유혹적이다."


나는 한병철의 저술 및 그 주장에 대해 지금까지 어떠한 지적 매력도 느껴본 적이 없다. 이번 글을 통해 내 입장을 수정하지 않아도 됨을 확인하게 되어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그가 현실에 대한 분석이 아닌 관념론적인 스케치에 머물고 있음은 이 기고를 통해 분명히 드러난다. 오늘날 남한사회--다행히도 그는 남한 사회를 자신의 주요한 사례로 들고 있는데--를 살고 있는 이들 중 지배적인 권력이 억압적으로 작동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극단적으로 순진한 이들을 제외하고는 드물 거다. 신자유주의적 권력은 개개인의 자기소진을 유발할 뿐 (그래서 저항적 다중multitude의 발생을 불가능하게 만들 뿐) 직접적으로 억압적인 권력이 작동하지 않는다는 한병철의 분석은 당연히 남한사회의 현실과 정면으로 충돌한다. 그 자신도 이를 아예 무시할 수 없었는지 남한사회를 언급하면서 최초의 신자유주의적 정책 도입기에 억압적 권력이 작동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듯 물러선다--그리고 오늘날 가시화된 지배권력의 억압적 성격을 지적하는 대신 마치 오늘날의 남한사회에는 시민주체들의 가열한 자기소진 및 서로 간의 적대만이 남아있는 것처럼, 한 마디로 억압적이지 않은 권력만이 남아있는 것처럼, 그래서 실질적으로 어떠한 저항도 불가능한 것처럼 이야기한다.



직설적으로 말하자. 왜 한병철이 심지어 보수적인 사람들을 포함해 수많은 이들에게 인기를 끄는 것일까? 나는 그 이유 중 하나로 그가 사회를 분석하는 대신 몇 가지 인상에 기초한 스케치를 그린다는 것, 사회의 실질적인 지배구조를 논하는 대신 도래한 파국을 '미학화'한다는 것을 꼽고 싶다; 한 마디로 그의 분석은 진정으로 지적인 것, 진실을 직시하는 것과 거리가 먼 이데올로기에 불과하다. 그는 위험을 이야기하되 위험을 극복하기 위해서 우리가 감수해야 하는 실질적인 어려움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는다. 권력을 이야기하지만, 어느새 권력은 슬쩍 사라지고 거기에 무력화된 주체만이 남는다. 푸코가 권력을 편재하게 만들어 저항을 무력화시켰다는 오해를 그렇게나 많이 받았지만, 사실 한병철의 논의야말로 진정으로 권력의 전능화와 주체의 무력화에 가깝다; 그리고 그 일관된 입장에서 그는 또 다른 대안적 모델이 (물론 나는 리프킨의 주장이 실제로 유효한 제안인지 검토하지 않았다) 불가능함을 주장하며 그 끝은 전혀 지적이지 않은 수사들로 채워진다. 그는 지배가 무엇인지, 지배체제가 무엇인지 전혀 분석하지 않는다. 요컨대 단지 파국이 왔고, 우리는 이 파국을 (마치 <피로사회>의 후반부에 나오는 기분좋은 피로처럼) 다소 마조히스틱하게 즐기기만 하면 된다. 이처럼 매력적인 '종말론'이 인기를 끄는 게 지금의 한국사회에 특별히 놀랄 일은 전혀 아니다. 사람들이 지적인 분석과 고통스러운 실천보다는 이데올로기가 제공하는 안락함에 파묻히는 건 흔히 있는 일이니까.



신자유주의적 지배체제를 가장 명확하게 드러내는 남한에 대한 구체적인 분석을 조금만 시도해보면 한병철의 논리를 완전히 뒤엎는 건 전혀 어려운 게 아니다(나는 남한 "사회"라고 한정짓지 않는데, 왜냐하면 저 단어는 한병철이 사용하고 있는 것처럼 "국가"/"정부"라는 주체를 사실상 지워버리기 때문이다!). 분명 그가 지적하듯 남한의 시민주체들이 경쟁구도에 놓여 '소진'될 때까지 노동을 착취당하는--물론 그는 이 노동의 결과물이 실제로 누구의 이익이 되는지는 이야기하지 않는다--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신자유주의적 자기경영주체"의 탄생과 함께 이러한 조건을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현재의 조건을 유지하기 위해 작동하는 지배권력의 작동을, 즉 국가와 대자본의 결탁을 봐야만 한다.


 오늘날 한국의 정치경제적 구조에 조금이라도 익숙한 사람은 잘 알고 있듯이 기본적으로 우리는 대기업 위주의 수출주도형 체제에 속해 있다. 쉽게 말해 시민주체들의 노동력을 착취해 대자본에 부와 자원을 집중하고, 대신 이렇게 얻은 이윤을 (낙수효과 등에 따라)  시민주체에 재분배한다. 98년부터 지금까지 일어나고 있는 일들의 요점은 자본의 국제적인 경쟁압력의 심화에 따라 부가 대자본으로 집중되는 경향은 가속화되는 반면 집중된 부/이윤의 재분배는 심각하게 줄어들었다는 것이다. 비유컨대 오늘날 한국의 정치경제적 구조는 낙수효과가 아니라 뿌리로부터 물과 영양분을 한껏 빨아들여 맨 윗가지의 꽃을 피우는데만 집중하는 나무에 조금 더 가깝다. 이때 노동착취를 가속화시키기 위해 (한병철이 말한) 신자유주의적 경쟁구도의 심화가 제공된다. 즉 실업자들, 산업예비군들의 폭증에 의해 자본가들은 더 적은 비용을 지불하고 더 많은 것을 착취한다. 당연히 반작용으로 저항이 발생하는데, 이를 무력화시키기 위해 (시민주체들의 원자화를 촉진시키는 이데올로기와 함께) 자본과 결탁한 국가가 전면에 등장한다. 오늘날의 정부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국가/정부는 직접적으로 시위를 진압할 뿐만 아니라 정치적 저항세력들을 감시 및 억압한다. 전교조 및 노조를 포함한 전통적인 '중간세력'은 합법적이거나 법을 우회하는 갖가지 수단을 통해 공격받는다. 이를 억압적인 권력이라 부를 수 없다면 우리는 사전에서 억압이라는 단어 자체를 지워야 할 것이다.


 한병철이 말하는 '소진된 주체'는 적어도 남한의 맥락에서는 저항을 분쇄시키는 원인만이 아니라 분쇄된 저항의 결과물이기도 하다. 몇 차례의 대규모 반정부시위는 국가권력의 대처로 인해 무위로 돌아갔으며, 선거를 통해 정권을 교체하려는 시도는 실패했고(물론 이 선거에 국가정보기관과 군대의 직접적인 개입이 있었음을 기억하자; 여기에서도 권력은 충분히 가시적으로 움직이고 있다!) '합법적인' 권력을 틀어쥔 우파들은 자본의 시민사회에 대한 착취를 보다 강화하기 위해 직접적으로 활약한다; 휴일수당을 삭감하고 연장노동시간을 늘리는 것, 한 마디로 더 많이 일하고 더 적게 받으라는 의지가 선명히 드러난 법의 추진은 바로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단순히 무한경쟁구도만이 아니라 이러한 패배감과 무력감이 사람들을 소진burn-out시키는 것이다. 오늘날의 정치경제적 구조가 가속화된 착취와 생활수준하락을 통해 행복은 물론 생존 자체를 위협받는 이들을 양산한다면, 지배권력의 역할은 시민주체들을 정치적 저항의 주체가 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신자유주의적 지배체제에서 (가라타니 고진의 표현을 빌리면) 자본=국가=네이션은 이데올로기와 가시화된 권력의 층위 모두에서 능동적으로 시민사회의 주체화를 억압한다.


 한병철은 여기에서 자본과 국가의 실질적인 작동을, 다시 말해 억압을 지워버린다. 남는 것은 주체가 되지 못하는, 곧 착취대상으로만 존재하는 시민들 뿐이다. 억압 및 억압의 주체가 지워진 한병철의 이데올로기적 세계관에서 유일하게 남은 항은 (주체가 되지 못한) 시민-덩어리들일 뿐이며, 단 하나의 항만 존재하는 세계에 어떤 실질적인 저항이나 사회의 변혁을 이야기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 사태의 변증법적 전개는 모순을 설명하기 위한 최소 두 개 이상의 항을 요구하는데, 한병철에게는 오로지 시민-덩어리들만이 남아있으니 이 세계의 종말을 제외하고는 그가 무엇을 이야기할 수 있을까; 그의 '분석'에서 대안의 존재는 논리적으로 또 구조적으로 불가능하다. 이러한 체제를 만들어낸 권력과 제도, 자본의 작동에 대한 논의도 있을 수가 없다. 그가 신자유주의는 맑스주의로 분석될 수 없다고 말하는 건 당연하다; 애초에 정치경제적인 영역, 물질적인 것을 다루지 않는데 맑스주의적 분석이 어떻게 존재할 수 있겠는가? 자연스레 한병철의 충실한 독자들은 실질적으로 사회에 개입하는 지배권력의 작동을 망각하며 이미 도래한 파국에 슬퍼하거나 즐겁게 살아가거나 할 수 있을 뿐이다(그가 <피로사회>에서 피로가 원자화된 주체들을 갈라놓는 간극을 무력화시킬 수 있다는 독특한 대안을 이야기할 때 그는 '묶음'이라는 단어에서 기원한 파시즘에 한걸음 더 다가간다). 이게 이데올로기가 아니면 무엇이란 말인가?




 결론은 무엇인가? 쉽지 않고 고통스러운 일이지만, 한병철이 반-유물론적으로 떠드는 것과 달리 우리에겐 사태를 이해하고 변화시킬 가능성이 실제적으로 존재한다. 이데올로기와 물질의 층위 양자에서 우리를 탈-주체화로 이끄는 지배권력의 작동을 직시하고, 그러한 권력을 가능하게 하는 장치와 실천을 무력화시키면 된다(굳이 신자유주의에 대해 이론적인 파악을 도와주는 사상가가 필요하다면, 2014년의 한병철보다 1978년의 미셸 푸코의 강의록들이 훨씬 도움이 된다--<안전, 영토, 인구> 및 <생명관리정치의 탄생>; 훨씬 짧은 분량이고 도식적이지만 사토 요시유키의 <신자유주의와 권력>도 좋은 정리다). 적은 분명하다. 맑스가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교훈은, 그게 신자유주의건 고전적 자유주의건 간에 자본주의는 필연적으로 사회 내 지배자와 피지배자 사이의 분할선을 그린다는 것, 그래서 그렇게 구조적으로 만들어지는 사회적 적대와 모순을 직시하고 그로부터 계급투쟁의 계기를 이끌어낼 수 있어야한다는 것이다. 나는 모두가 굳이 맑스주의자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할 생각은 없으며, 동시에 지금 당장 내 글을 읽는 사람들에게 자본주의를 포기할 준비가 되었냐고 물을 생각도 없다. 요점은 지금 우리는 사람이 살만한 세상에 살고 있지 않으며 세상을 이렇게 만드는 구조가 존재하고 그 구조는 바뀔 수 있고 바뀌어야 한다는 것이다(나는 적어도 단기적으로 피케티주의자들--그런 게 있다면--하고도 얼마든지 협력할 수 있다). 



덧. 한병철의 주장이 소개될 때 이제 좀 비판적인 논평이 붙어서 들어왔으면 좋겠다. 우리는 우리의 지성이 모욕받지 않도록 요구할 권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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