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은 쓸모없는가?: 인문학 및 교양교육에 대한 짧은 성찰

Critique 2014. 10. 31. 05:07

최근 온라인 학교 커뮤니티에서 인문학 위기에 관해 다음과 같은 논의가 인기라고 한다. 내게 이야기해준 이의 요약을 따르면, 인문학은 "삶을 풍요롭게 하는" 고급취미고 따라서 더 많은 교양강좌를 설치하되 일자리가 부족한 현재 상황 상 인문학 전공 및 그 전공자의 수를 축소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얼핏 한편으로는 시민교양을 확대해야 한다는 일각의 요구를, 다른 한편으로는 인문학 전공자들의 경제적인 어려움을 고려해야 한다는 현실적 감각을 갖춘 듯 보인다. 그러나 이 주장이 토대로 하고 있는 인간관을 조금만 주의깊게 살펴보면 실제로는 이러한 주장이 오늘날의 인문교양교육의 이념이 완벽하게 무력화되었으며 그것을 대체하여 공리주의가 더욱 더 강력하게 우리의 의식을 지배함을 보여주는 하나의 사례임이 분명하게 드러난다(가장 경악스러운 점은 이 주장을 하는 이가 스스로를 인문학 전공자라고 밝혔다는 것이지만). 나는 여기에서 한편으로 이 주장의 공리주의적 성격을 드러내는 동시에, 인문학과 교양교육의 역사적 기능을 간략하게 되짚음으로서 논의를 조금 더 상식적인 맥락으로 끌어오고자 한다. 최종적으로 현재의 상황에 대해 조금 더 타당한 인식을 제공하는 게 이 글의 목표다.



1.


인문교양을 "고급취미"로 간주하고 인문학 전공자들의 경제적 어려움을 살피는 '배려심 깊은' 시선으로부터 다음과 같은 사실을 읽어낼 수 있다. 이러한 시각은 근본적으로 우리의 삶을 두 가지 영역으로 바라본다. 개인은 재화와 자본을 획득하는 직업적인 삶과 자신의 취미생활을 지닌다. 서구 근대사를 조금이라도 공부해보았다면 이것이 전형적인 19세기 부르주아적 인간관임을 알 수 있는데, 여기에서 직업적인 삶의 괴로움은 사적인 취미 향유(고전적 부르주아 삶의 모델에서는 당연히 가정 "home, sweet home" 이 포함된다...정상가정을 구축하기 위한 물질적 토대가 위협받는 오늘날 한국의 조건에서는 보다 완벽한 개인=1인가구의 삶이 그 자리를 대체할 것이다)를 통해 위로와 보상을 받는다. 인문교양은 사적인 삶에서 즐거움을, 조금 더 노골적인 용어로 쾌락을 제공하는 하나의 수단으로 기능한다.


오늘날의 도시적인, 자본주의적인 삶을 너무나 잘 묘사하는 것 같은 위의 이해가 실제로는 무척이나 비현실적이라는 사실, 그러니까 가장 깊숙하게 이데올로기에 침윤되어 있다는 사실은 다음과 같은 질문 하나로 분명해진다. 실제로 우리 삶이 저 두 가지로 구성되어 있는가? 우리는 직업인으로서의 정체성과 특정한 취미를 향유하는 인간(이 극단적인 형태가 오덕이다)이라는 정체성만을 가질 뿐인가? 아마 평생 안락하게 가족의 보살핌을 받아온 학생이라면 이 두 가지 정체성 이외의 다른 삶을 생각하지 못할 수도 있겠지만--이는 오늘날 지배계급의 교육이 자승자박하는 결과에 도달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가장 분명한 사례다--, 당연히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우리는 가장 쉬운 반례를 최소 2년에 한 번 꼴로 투표에 참여하여 정치적 대변인을 선출해야 한다는 상식으로부터 찾을 수 있다; 다시 말해 정부와 의회라는 기관은 우리가 부분적으로 공적 주체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정부, 의회, 지역, 가족, 학교, 조합 및 기타 등등과 같은 수많은 집단들은 우리의 삶을 무수한 관계들이 가로지르고 때로는 뒤얽히는 광대한 시공간으로 만든다. 이러한 현실을 직업적인 정치가나 정치행위를 자신의 취미로 가진 극소수를 제외하고는 위의 주장에 함축된 인간관으로 전혀 설명될 수 없다.


나는 지금 다루는 주장, 조금 구체화하기 위해 공리주의적 인간관(의 한 변형)이라는 명칭을 붙이고 싶은 주장이 단순히 틀렸다는 지적에 그치는 대신 이를 조금 더 음미하고자 한다. 핵심은 공리주의적 인간관이 내가 제시한 반례를 설명하지 못한다는 사실이 아니라 왜 설명하지 못하는가를 풀어내는데 있다. 앞서 살짝 힌트를 남겼지만, 국가와 민족(한국에서 찾기 힘든 진정한 세계시민이나 우주인에게는 잠시 양해를 구한다)에서 가정, 동호회에 이르는 집단들을 반례로 들었을 때 이는 우리의 삶이 사회적인 것, 조금 더 직접적으로 우리가 속해 있거나 속해 있지 않더라도 영향받을 수 있는 갖가지 공동체/집단들에 의해 구성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심지어는 직업적인 삶조차도 일감과 임금을 제공하는 집단이 없다면 성립할 수 없다(90년대 중반까지 한국사회에서 직장은 동시에 공동체로 간주되기도 했음을 기억하자). 직접적으로 말하자면 우리의 삶은 절대로 순수하게 개인적이고 사적인 영역만으로 구성될 수 없다. 삶을 직업과 취미로만 간주하는 관점은 사실상 우리의 삶을 철저히 개인적인 것으로 바라보며 사회적인 영역을 탈각시킨다는 점에서 근본적으로 이데올로기적이다; 나는 마거릿 새처의 "There's no such thing as society"라는 말을 떠올린다. 이러한 관점은 단순히 현실에 대한 잘못된 인식에 기초할 뿐만 아니라 우리의 삶을 오도한다는 점에서 분명히 비판받아야 한다.


인간의 삶을 순전히 사적인 영역으로, 그리고 (직업을 통한) 재화의 취득과 (취미를 통한) 쾌락의 추구로 한정했을 때--그래서 나는 이 "인문학 전공자"의 '숨겨진 아버지'로 제러미 벤담을 꼽고 싶다--인문학 혹은 교양지식이 "삶을 풍요롭게 하는" 고급취미라는 완벽히 무지에 기초한 주장이 나오는 것은 필연적이다. 오로지 개인의 쾌락과 자본의 추구만을 바라보는 시각에서 바로 그러한 영역 이외의 삶을 다루는 앎을 바라보았을 때  후자가 쓸모없거나 (가끔 쾌락을 가져다주는) 고급취미로 밖에 보이지 않으면 오히려 이상하다. 애초에 인문학 혹은 교양이 어떻게 근대교육의 일부로 간주되었는가를 역사적으로 간략하게 살펴보면, 이러한 관점이 한편으로는 공리주의적 이데올로기의 산물이며 동시에 인문학 전공자들이 자신의 근원을 제대로 알지 못할 때 이데올로기에 얼마나 쉽게 투항할 수 있는가를 보여준다는 사례임이 한층 더 분명해질 것이다.



2.


근대사회에서 인문학 또는 인문학 내 분과학들의 근본적인 뿌리는 인간의 삶이 총체적이고 사회적이며 인간은 이 사실을 자각해야 한다는 태도에 기초한다. 오늘날 한국에서 값싸게 쓰이는 교양취미라는 단어는--물론 서구근대를 공부한 사람이라면 취미taste라는 단어 자체에 걸린 역사의 무게를 그냥 지나칠 수 없겠지만--본래 인간에게 그 사회적 삶의 맥락을 온전히 이해시키고 나아가 그러한 맥락 위에서 자신의 삶을 가능성을 실현시킬 수 있도록 이끄는 앎을 지칭한다. 18세기에 영국에서 비평과 취미를 두고 행해진 갖가지 토론(취미의 기준에 대한 흄의 에세이나 도덕감정에 관한 스미스의 저술을 보라)이나 18-19세기 독일 대학의 역할을 두고 칸트, 훔볼트, 헤겔 등이 취했던 입장을 간략하게 스케치한다면 (후에 '문화' 개념으로 이어지는) 취미가 본래 개인적인 삶과 사회 전체적인 삶을 매개하는 항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취미는 개인에게 그가 소속된 사회적인 삶으로 인도하는 역할을 한다. <판단력 비판>에서 취미판단의 (선험적이지 않은) 보편적 성격을 통해 공동체를 재구축하려는 현대의 이론적 논의들은 이러한 논리적 틀에 기대는 것이다.


교양교육의 이념은 이러한 맥락 위에서 봐야 올바르게 이해될 수 있다. 한편으로 교양교육은 인간을 온전한 사회적 존재로 만든다. 개인은 교양교육을 통해 삶을 그 자신에게 즉각적으로 다가오는 범위로만 이해하는 우를 범하지 않을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 교양교육은 인간을 전문화된 직업적인 삶, 곧 생존을 위해 특정한 기술만 반복적으로 익히는 협소한 삶에서 벗어나도록 한다. <국부론>에서 스미스는 저 유명한 핀 공장의 예에서 분업과 협업에 의한 폭발적인 생산성을 칭송하지만--"보이지 않는 손"만 말하는 사람은 이 책을 전혀 읽지도 이해하지도 못했다고 보면 된다--동시에 특정한 노동만 반복하는 분업화된/전문화된 삶이 인간에게 끼칠 해악 또한 염려한다. 인간의 도덕감정, 즉 공감능력(당연히 취미와 연결되어 있다)을 통해 개인의 내면과 사회를 종합적으로 설명하는 체계를 구축하는 <도덕감정론>이 <국부론>의 보완물로 읽히는 것은 이런 맥락에 근거한다. 곧 취미와 교양은 인간을 전문화된 직업적 삶의 감옥으로부터 구출하여 보다 넓은 사회적 삶의 가능성으로 인도하는 역할을 맡는다. 17~19세기의 영국혁명, 미국독립, 프랑스혁명과 같은 배경을 깔자면, 대장장이든, 농부든, 투자가든, 변호사든 자신의 직업을 초월하여 공적이고 사회적인 삶의 가능성을 실현할 역량을 지녔다는 점에서 모두가 평등하면서도 또 탁월하게 될 수 있으며 취미와 교양의 교육은 그것을 가능케하는 도구가 된다(헤겔이 대학에서 철학자들이 전문관료를 가르쳐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도 이러한 맥락과 근본적인 뜻을 같이한다). 인문학이나 교양지식이 귀족들의 전유물이었다는 설명은 적어도 근대적인 취미/교양교육의 관점에서는 완전히 틀린 이야기다.



3.


나는 인문학과 교양교육의 역할을 이와 같은 역사적 맥락에서 잠시 꺼내어 오늘날의 여건에 맞추어 다소 간략하고 거친 형태로 다시 설명하고 싶다. 앞서 공리주의적 관점을 비판하면서 이야기했듯, 핵심은 삶이 공간적으로 비유하자면 이윤 및 쾌락추구의 영역보다 훨씬 더 커다란 장소임을 이해하는 것이다. 전문적인 연구로서의 인문학은 이처럼 포괄적인 삶을 구성하는 다른 영역/맥락들을 살피고 연구하는 것이며, (전문화된 인문학을 포함한) 교양교육은 각각의 사람들에게 자신의 삶을 사회 안에서 종합적으로 이해하고 또 그렇게 형성할 수 있는 능력을 기르는 역할을 한다. 엄밀히 말해 인문학이 쓸모 없는 거라는 '현실주의적'(혹은 단순하게 속물적) 태도와 여기에 반발하여 '쓸모 없는 것의 쓸모 있음'을 주장하는 신비주의적 태도는 양자 모두 인문학과 교양교육의 역할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잘못된 것이다.


전문연구로서의 인문학의 기능을 설명하기 위해 문학에서 간단한 예를 들어보자. 19세기 미국 노예해방을 둘러싼 대중적 이데올로기 투쟁에서 해리엇 비처 스토의 <톰 아저씨의 오두막>이 수행한 기능처럼, 문학/문화산물을 설령 주관적으로는 즐거움을 위해 읽는 독자라고 할지라도 실제로는 그러한 읽기로부터 삶의 다른 영역을 이해하는 틀까지 제공받고는 한다. 이는 오늘날 한국에서도 마찬가지다. 소설 및 영화로서의 <도가니>가 불러일으킨 사회적 이슈라거나, 극단적인 케이스로 일베에서 만들어진 합성물이 종종 극우파적 사고방식을 촉발하는 경우를 생각해보면 이는 지금도 일상에서 흔히 이루어지는, 높은 확률로 이 글을 읽는 분들의 의식형성과정에도 이루어지고 있을 일이다. 이처럼 텍스트가 어떻게 읽히는가, 그리고 독자의 의식을 어떠한 방향으로 인도하는가를 가능한 엄밀하게 해석하는 일은 문학연구분야에서 수행하는 수많은 연구 중 하나다. 오늘날의 문학연구가 정치적이고 역사적인 성격을 강하게 띠는 것이 아무 이유가 없는 게 아니다(통상적인 정치학이 사회과학으로서 사회의 관점에서 이 문제에 접근한다면, 문학/문화텍스트와 읽기의 관점에서 사태에 접근하는 게 인문학적 연구라고 할 수 있겠다; 물론 학문은 계속해서 변하기 때문에 양자는 종종 조응해왔고 앞으로도 접촉할 것이다).


 불행히 심지어 전공자들에게도 오해받곤 하지만, 전문연구로서의 인문학은 귀족적 취미/지식의 습득이 아니라 우리 자신 및 우리가 살아가는 삶에 대한 앎을 추구하는 일이다. 인문학 전문연구를 축소하라는 압력은 (실제로 많은 대학에서 이루어지고 있는데) 우리의 사회가 자기 자신을 이해하고 개선시킬 정신적 여유조차도 없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우파들은 "과거를 모르면 실패를 되풀이한다"고 외쳐대지만 실제로 지금의 우리들 자신이 어떤 방식으로 생각하는지, 어떻게 그렇게 생각하게 되었는지를 이해하려는 최소한의 노력조차도 보여주지 않는다. 인문학 축소 움직임은 동시에 인문학 전공자조차 자신의 학의 근본적인 역할이 무엇인지 질문하지 않는 희비극적 상황의 결과이기도 하다. 공부하고 사유하고 질문하는 게 특기라고 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자기 자신의 직업이 갖는 의미조차도 해명하지 못하는데 다른 이들이야 오죽하겠나.


교양교육으로서의 인문학의 역할은 근본적으로는 앞서 설명한 바와 같다. 다만 조금 더 구체적으로 인간을 사회적이고 총체적인 삶을 이끄는 교육행위들에 관해 언급하겠다. 인간의 사회적인 삶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당연히 그것은 의사소통이다.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사람들에게도 해당되듯 우리는 타인의 의사표현을 이해하고 내면화하며 다시 자신의 의사를 표현하는 과정을 통해 사회적으로, 즉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산다. 교양교육의 기초가 문헌을 읽고 해석하는 능력과 자신의 사고를 가능한 명확하게 표현하는 교육으로 이루어진 건 우연이 아니다. 심지어 대학생들조차도 읽기와 쓰기 교육을 지겨워하며 무시하는 태도를 취하곤 하는데 우리가 대중화된 교육이라고 폄하하는 미국 대학에서조차도 (좋은 학교일수록) 한국의 대학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이 읽고 쓰게 교육한다. 오바마를 포함한 미국 정치인의 '스피치'를 칭송하고 그러한 능력을 갖고 싶어하면서도 정작 그와 같은 정치적 언어표현능력이 어떠한 훈련을 통해 만들어졌는지는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이 이끌어가는 한국사회가 낮은 문해율과 수많은 '정치적 문맹'을 자랑하는 건 특별히 놀랄 일은 아니다.


읽고 쓰기와 함께 교양교육의 기초를 이루는 것은 문화교육이다. 통상 우리는 문화하면 영화나 소설, 음악 같은 예술을 떠올리곤 한다. 그게 틀린 건 아닌데, 문화의 핵심적 기능은 인생을 즐기라는 데 있는 게 아니라 특정한 정체성 및 사고/지각방식을 갖추도록 인도하는 데 있다. 쉬운 예를 들자면 우리는 외국인들과 접촉하여 서로의 상이함을 발견할 때 '문화가 다르다'는 표현을 종종 쓰곤 한다. 그건 우리와 그들이 향유하는 예술이 달라서가 아니라, 서로가 갖고 있는 정체성 및 그와 결부된 의식적/무의식적 사고방식의 차이에서 비롯된다. 심지어 자신이 극단적으로 합리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조차도 한 발자국만 떨어져서 보면 특정한 문화적 사고방식을 그대로 답습하는 걸 관찰할 수 있다. 이는 그가 무지해서라기보다는 우리의 정체성과 사고방식 자체가 문화적 산물들의 축적을 통해 형성되기 때문이다. 마치 우리의 언어 그 자체처럼(물론 실제로 문화의 핵심은 언어다; 영미권에서 영문학교육이 차지하는 불합리할정도로 엄청난 비중은 이 때문이다) 문화는 우리의 사유를 구성하며 그 바깥에서 사고하는 것은 고통스러울 정도의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 한 어렵다. 교양교육은 한편으로 사회의 문화를 교육하며 다른 한편으로 보다 나은 문화를 선별하는 기능을 한다; 문화적 다양성을 강조하는 이들은 여기에 반발할지 모르겠지만, 우리가 성차별주의나 인종주의, 지역주의, 각종 차별 등을 가르치지 않는다는 사실은 문화교육에 명확히 선별의 기능이 담겨있음을 보여준다.



4.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자. 최근의 인문학과 교양교육의 위기는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공리주의적 관점이 전면화되는 것을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는가? 부분적으로 이러한 상황은 단순히 누군가의 주관적인 무지와 이데올로기라기보다는 객관적인 현실을 보여준다. 대학에서 인문학 전공자가 축소되는 것, 사회 전반적인 교양의 축소는 분명히 우리 사회가 자기 자신을 이해하는 일, 그리고 사회구성원들 간의 소통이 얼마나 중요한지조차도 망각할 정도로 심각한 어려움에 봉착했음을 보여준다. 분명한 사실은 어려움에 처할수록 상황을 지성적으로 이해하려는 태도가 더욱 더 요구된다는 것이다. 나는 감상적인 태도에서가 아니라 현실적인 이유에서 한국 사회의 인문학 및 교양교육이 더 확대되지는 못할지언정 축소되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현재와 같은 상황일수록 우리는 우리 자신의 사유를 구성하고 또 제약하는 갖가지 조건들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 그 역할은 사회과학자들 못지 않게 인문학 전공자들의 역할이기도 하다. 우리는 아직도 우리 자신에 대해 잘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더 많은 연구자들이 필요하다.


더불어 현재 한국사회가 직면한 포괄적인 의사소통의 위기는 단순히 입으로만 소통이 중요하다고 떠들어서 해결될 수 있는 게 아니다. 한편으로 의사소통 자체를 불가능하게 하는 물질적/제도적 층위에서의 모순이 분명히 있으며, 다른 한편으로 우리는 단순히 서로의 상이함에서만이 아니라 타인의 사유 자체를 이해할 능력이 저하되는 사회에 살고 있기도 하다. 최초에 의견이 다른 이를 비난하기 위한 용도로 사용되던 '난독증'과 같은 표현은 어느새 우리의 진짜 상태를 가리키는 용어가 되어버렸다. 이런 상황에서 당장 기업자본에서 인간의 노동력을 활용하지 못한다고 기초교양을 전문화된 교육으로 대체하는 흐름은 (당연하지만 대학은 사회에 책임을 지지 자본에 복무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에게 자료를 읽고 해석하는 능력조차도 박탈하는 자멸적인 행위에 다름아니다. 당연하지만 글을 읽고 해석하며 자신의 의견을 표현하는 능력이 떨어질수록 기업자본의 작동 자체에도 지장이 생길 수밖에 없다. 실제로 우리가 소통의 위기를 겪고 있다면, 이는 부분적으로 소통의 능력 자체를 기르는 실질적인 교육의 증대로만 해결될 수 있다. 직접적으로 말해 우리에게 필요한 건 교양교육의 축소와 철폐가 아닌 개혁과 확장이다.


당연하지만 위의 모든 일들은 인문학 및 교양관련 종사자들이 자신들의 행위의 근본적인 의미를 묻는 작업과 분리될 수 없다. 자신을 설득할 수 없는 사람들이 남을 설득하기를 바랄 수 있을까. 동시에 학문을 지금의 조건에 맞추어 개선시키는 작업 또한 전공자들의 몫이다. 19세기 유럽의 교양은 19세기 유럽의 것이며 곧바로 오늘날 한국의 교양이 될 수 없다. 모든 학문이 그렇듯, 교양 또한 사회 및 사회구성원들에게 진정으로 의미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질문할 때 그 생명력을 보존한다. 우리는 외국 학자들과의 대화가 중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그게 우리가 속한 현실적인 사회에서 어떻게 활용될 수 있는가에 대한 고민없이 행해진다면 이는 문자 그대로 사물화된 

행위에 불과하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언급하자. 지금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대중적 인문학/교양교육을 고무적으로, 희망에 차서 바라보는 사람들이 있다. 물론 그 다양한 활동들을 싸잡아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만 나는 조금 더 회의적이다. 예컨대 서울대의 짭짤한 수익산업 중 하나인 AFP, 인문학 최고지도자 과정과 같은 각종 기업가/고소득자를 위한 인문학 교양교육은 어떤 역할을 하는가? 그들이 고전과 예술을 즐기면서 영혼이 윤택해지는 것 같다는 주관적인 착각을 하는 거야 탓할 생각이 없지만, 해당 교육과정이 그들에게 고전/학술의 이데올로기적 수사를 제공해주는 것 이상의 역할을 하는 듯 보이지는 않는다. 그러한 교육과정은 학문이 돈에 팔려서 비판받아야 하는 게 아니라, 실제로 그들의 사고방식과 사회에 대한 이해를 더 나은 방향으로 이끌어가는 대신 한국사회 지배계층 간 친목모임의 장--때로는 그 자녀들의 교류창구로도 활용된다--을 제공해주는 데 그치고 있기 때문에 비판받아야 한다. 다른 한편으로 이른바 대중적 인문강좌들의 상당수 또한 사람들의 사고를 보다 커다란 맥락으로 이끄는 대신 속물적인 의미에서의 취미교양, 그러니까 허영심을 채우는 데 복무하거나 일종의 자기계발담론의 도구로 기능하는데 만족하고 있다. 이건 인문 교양의 올바른 역할이 아닐 뿐더러, 안 그래도 한국 사회에 널리 퍼져 있는 인문교양에 대한 잘못된 이해를 더욱 넓게 퍼트린다는 점에서 인문학과 한국사회 양자에 모두 해롭다. 클레멘트 코스를 비롯해서 한국사회에 대중적 인문학 교육이 퍼진지 벌써 수 년이 흘렀지만 최초의 기대와 달리 사회의 소통은 더욱 어려워졌으며 인문학 학술서는 더더욱 팔리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는 정도로 충분할 것이다. 특히나 인문학 전공자들은 이러한 흐름에, 그들이 다른 모든 것들에 그래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비판의 촉각을 곤두세울 필요가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