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은 쓸모없는가?: 인문학 및 교양교육에 대한 짧은 성찰

Critique 2014. 10. 31. 05:07

최근 온라인 학교 커뮤니티에서 인문학 위기에 관해 다음과 같은 논의가 인기라고 한다. 내게 이야기해준 이의 요약을 따르면, 인문학은 "삶을 풍요롭게 하는" 고급취미고 따라서 더 많은 교양강좌를 설치하되 일자리가 부족한 현재 상황 상 인문학 전공 및 그 전공자의 수를 축소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얼핏 한편으로는 시민교양을 확대해야 한다는 일각의 요구를, 다른 한편으로는 인문학 전공자들의 경제적인 어려움을 고려해야 한다는 현실적 감각을 갖춘 듯 보인다. 그러나 이 주장이 토대로 하고 있는 인간관을 조금만 주의깊게 살펴보면 실제로는 이러한 주장이 오늘날의 인문교양교육의 이념이 완벽하게 무력화되었으며 그것을 대체하여 공리주의가 더욱 더 강력하게 우리의 의식을 지배함을 보여주는 하나의 사례임이 분명하게 드러난다(가장 경악스러운 점은 이 주장을 하는 이가 스스로를 인문학 전공자라고 밝혔다는 것이지만). 나는 여기에서 한편으로 이 주장의 공리주의적 성격을 드러내는 동시에, 인문학과 교양교육의 역사적 기능을 간략하게 되짚음으로서 논의를 조금 더 상식적인 맥락으로 끌어오고자 한다. 최종적으로 현재의 상황에 대해 조금 더 타당한 인식을 제공하는 게 이 글의 목표다.



1.


인문교양을 "고급취미"로 간주하고 인문학 전공자들의 경제적 어려움을 살피는 '배려심 깊은' 시선으로부터 다음과 같은 사실을 읽어낼 수 있다. 이러한 시각은 근본적으로 우리의 삶을 두 가지 영역으로 바라본다. 개인은 재화와 자본을 획득하는 직업적인 삶과 자신의 취미생활을 지닌다. 서구 근대사를 조금이라도 공부해보았다면 이것이 전형적인 19세기 부르주아적 인간관임을 알 수 있는데, 여기에서 직업적인 삶의 괴로움은 사적인 취미 향유(고전적 부르주아 삶의 모델에서는 당연히 가정 "home, sweet home" 이 포함된다...정상가정을 구축하기 위한 물질적 토대가 위협받는 오늘날 한국의 조건에서는 보다 완벽한 개인=1인가구의 삶이 그 자리를 대체할 것이다)를 통해 위로와 보상을 받는다. 인문교양은 사적인 삶에서 즐거움을, 조금 더 노골적인 용어로 쾌락을 제공하는 하나의 수단으로 기능한다.


오늘날의 도시적인, 자본주의적인 삶을 너무나 잘 묘사하는 것 같은 위의 이해가 실제로는 무척이나 비현실적이라는 사실, 그러니까 가장 깊숙하게 이데올로기에 침윤되어 있다는 사실은 다음과 같은 질문 하나로 분명해진다. 실제로 우리 삶이 저 두 가지로 구성되어 있는가? 우리는 직업인으로서의 정체성과 특정한 취미를 향유하는 인간(이 극단적인 형태가 오덕이다)이라는 정체성만을 가질 뿐인가? 아마 평생 안락하게 가족의 보살핌을 받아온 학생이라면 이 두 가지 정체성 이외의 다른 삶을 생각하지 못할 수도 있겠지만--이는 오늘날 지배계급의 교육이 자승자박하는 결과에 도달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가장 분명한 사례다--, 당연히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우리는 가장 쉬운 반례를 최소 2년에 한 번 꼴로 투표에 참여하여 정치적 대변인을 선출해야 한다는 상식으로부터 찾을 수 있다; 다시 말해 정부와 의회라는 기관은 우리가 부분적으로 공적 주체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정부, 의회, 지역, 가족, 학교, 조합 및 기타 등등과 같은 수많은 집단들은 우리의 삶을 무수한 관계들이 가로지르고 때로는 뒤얽히는 광대한 시공간으로 만든다. 이러한 현실을 직업적인 정치가나 정치행위를 자신의 취미로 가진 극소수를 제외하고는 위의 주장에 함축된 인간관으로 전혀 설명될 수 없다.


나는 지금 다루는 주장, 조금 구체화하기 위해 공리주의적 인간관(의 한 변형)이라는 명칭을 붙이고 싶은 주장이 단순히 틀렸다는 지적에 그치는 대신 이를 조금 더 음미하고자 한다. 핵심은 공리주의적 인간관이 내가 제시한 반례를 설명하지 못한다는 사실이 아니라 왜 설명하지 못하는가를 풀어내는데 있다. 앞서 살짝 힌트를 남겼지만, 국가와 민족(한국에서 찾기 힘든 진정한 세계시민이나 우주인에게는 잠시 양해를 구한다)에서 가정, 동호회에 이르는 집단들을 반례로 들었을 때 이는 우리의 삶이 사회적인 것, 조금 더 직접적으로 우리가 속해 있거나 속해 있지 않더라도 영향받을 수 있는 갖가지 공동체/집단들에 의해 구성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심지어는 직업적인 삶조차도 일감과 임금을 제공하는 집단이 없다면 성립할 수 없다(90년대 중반까지 한국사회에서 직장은 동시에 공동체로 간주되기도 했음을 기억하자). 직접적으로 말하자면 우리의 삶은 절대로 순수하게 개인적이고 사적인 영역만으로 구성될 수 없다. 삶을 직업과 취미로만 간주하는 관점은 사실상 우리의 삶을 철저히 개인적인 것으로 바라보며 사회적인 영역을 탈각시킨다는 점에서 근본적으로 이데올로기적이다; 나는 마거릿 새처의 "There's no such thing as society"라는 말을 떠올린다. 이러한 관점은 단순히 현실에 대한 잘못된 인식에 기초할 뿐만 아니라 우리의 삶을 오도한다는 점에서 분명히 비판받아야 한다.


인간의 삶을 순전히 사적인 영역으로, 그리고 (직업을 통한) 재화의 취득과 (취미를 통한) 쾌락의 추구로 한정했을 때--그래서 나는 이 "인문학 전공자"의 '숨겨진 아버지'로 제러미 벤담을 꼽고 싶다--인문학 혹은 교양지식이 "삶을 풍요롭게 하는" 고급취미라는 완벽히 무지에 기초한 주장이 나오는 것은 필연적이다. 오로지 개인의 쾌락과 자본의 추구만을 바라보는 시각에서 바로 그러한 영역 이외의 삶을 다루는 앎을 바라보았을 때  후자가 쓸모없거나 (가끔 쾌락을 가져다주는) 고급취미로 밖에 보이지 않으면 오히려 이상하다. 애초에 인문학 혹은 교양이 어떻게 근대교육의 일부로 간주되었는가를 역사적으로 간략하게 살펴보면, 이러한 관점이 한편으로는 공리주의적 이데올로기의 산물이며 동시에 인문학 전공자들이 자신의 근원을 제대로 알지 못할 때 이데올로기에 얼마나 쉽게 투항할 수 있는가를 보여준다는 사례임이 한층 더 분명해질 것이다.



2.


근대사회에서 인문학 또는 인문학 내 분과학들의 근본적인 뿌리는 인간의 삶이 총체적이고 사회적이며 인간은 이 사실을 자각해야 한다는 태도에 기초한다. 오늘날 한국에서 값싸게 쓰이는 교양취미라는 단어는--물론 서구근대를 공부한 사람이라면 취미taste라는 단어 자체에 걸린 역사의 무게를 그냥 지나칠 수 없겠지만--본래 인간에게 그 사회적 삶의 맥락을 온전히 이해시키고 나아가 그러한 맥락 위에서 자신의 삶을 가능성을 실현시킬 수 있도록 이끄는 앎을 지칭한다. 18세기에 영국에서 비평과 취미를 두고 행해진 갖가지 토론(취미의 기준에 대한 흄의 에세이나 도덕감정에 관한 스미스의 저술을 보라)이나 18-19세기 독일 대학의 역할을 두고 칸트, 훔볼트, 헤겔 등이 취했던 입장을 간략하게 스케치한다면 (후에 '문화' 개념으로 이어지는) 취미가 본래 개인적인 삶과 사회 전체적인 삶을 매개하는 항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취미는 개인에게 그가 소속된 사회적인 삶으로 인도하는 역할을 한다. <판단력 비판>에서 취미판단의 (선험적이지 않은) 보편적 성격을 통해 공동체를 재구축하려는 현대의 이론적 논의들은 이러한 논리적 틀에 기대는 것이다.


교양교육의 이념은 이러한 맥락 위에서 봐야 올바르게 이해될 수 있다. 한편으로 교양교육은 인간을 온전한 사회적 존재로 만든다. 개인은 교양교육을 통해 삶을 그 자신에게 즉각적으로 다가오는 범위로만 이해하는 우를 범하지 않을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 교양교육은 인간을 전문화된 직업적인 삶, 곧 생존을 위해 특정한 기술만 반복적으로 익히는 협소한 삶에서 벗어나도록 한다. <국부론>에서 스미스는 저 유명한 핀 공장의 예에서 분업과 협업에 의한 폭발적인 생산성을 칭송하지만--"보이지 않는 손"만 말하는 사람은 이 책을 전혀 읽지도 이해하지도 못했다고 보면 된다--동시에 특정한 노동만 반복하는 분업화된/전문화된 삶이 인간에게 끼칠 해악 또한 염려한다. 인간의 도덕감정, 즉 공감능력(당연히 취미와 연결되어 있다)을 통해 개인의 내면과 사회를 종합적으로 설명하는 체계를 구축하는 <도덕감정론>이 <국부론>의 보완물로 읽히는 것은 이런 맥락에 근거한다. 곧 취미와 교양은 인간을 전문화된 직업적 삶의 감옥으로부터 구출하여 보다 넓은 사회적 삶의 가능성으로 인도하는 역할을 맡는다. 17~19세기의 영국혁명, 미국독립, 프랑스혁명과 같은 배경을 깔자면, 대장장이든, 농부든, 투자가든, 변호사든 자신의 직업을 초월하여 공적이고 사회적인 삶의 가능성을 실현할 역량을 지녔다는 점에서 모두가 평등하면서도 또 탁월하게 될 수 있으며 취미와 교양의 교육은 그것을 가능케하는 도구가 된다(헤겔이 대학에서 철학자들이 전문관료를 가르쳐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도 이러한 맥락과 근본적인 뜻을 같이한다). 인문학이나 교양지식이 귀족들의 전유물이었다는 설명은 적어도 근대적인 취미/교양교육의 관점에서는 완전히 틀린 이야기다.



3.


나는 인문학과 교양교육의 역할을 이와 같은 역사적 맥락에서 잠시 꺼내어 오늘날의 여건에 맞추어 다소 간략하고 거친 형태로 다시 설명하고 싶다. 앞서 공리주의적 관점을 비판하면서 이야기했듯, 핵심은 삶이 공간적으로 비유하자면 이윤 및 쾌락추구의 영역보다 훨씬 더 커다란 장소임을 이해하는 것이다. 전문적인 연구로서의 인문학은 이처럼 포괄적인 삶을 구성하는 다른 영역/맥락들을 살피고 연구하는 것이며, (전문화된 인문학을 포함한) 교양교육은 각각의 사람들에게 자신의 삶을 사회 안에서 종합적으로 이해하고 또 그렇게 형성할 수 있는 능력을 기르는 역할을 한다. 엄밀히 말해 인문학이 쓸모 없는 거라는 '현실주의적'(혹은 단순하게 속물적) 태도와 여기에 반발하여 '쓸모 없는 것의 쓸모 있음'을 주장하는 신비주의적 태도는 양자 모두 인문학과 교양교육의 역할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잘못된 것이다.


전문연구로서의 인문학의 기능을 설명하기 위해 문학에서 간단한 예를 들어보자. 19세기 미국 노예해방을 둘러싼 대중적 이데올로기 투쟁에서 해리엇 비처 스토의 <톰 아저씨의 오두막>이 수행한 기능처럼, 문학/문화산물을 설령 주관적으로는 즐거움을 위해 읽는 독자라고 할지라도 실제로는 그러한 읽기로부터 삶의 다른 영역을 이해하는 틀까지 제공받고는 한다. 이는 오늘날 한국에서도 마찬가지다. 소설 및 영화로서의 <도가니>가 불러일으킨 사회적 이슈라거나, 극단적인 케이스로 일베에서 만들어진 합성물이 종종 극우파적 사고방식을 촉발하는 경우를 생각해보면 이는 지금도 일상에서 흔히 이루어지는, 높은 확률로 이 글을 읽는 분들의 의식형성과정에도 이루어지고 있을 일이다. 이처럼 텍스트가 어떻게 읽히는가, 그리고 독자의 의식을 어떠한 방향으로 인도하는가를 가능한 엄밀하게 해석하는 일은 문학연구분야에서 수행하는 수많은 연구 중 하나다. 오늘날의 문학연구가 정치적이고 역사적인 성격을 강하게 띠는 것이 아무 이유가 없는 게 아니다(통상적인 정치학이 사회과학으로서 사회의 관점에서 이 문제에 접근한다면, 문학/문화텍스트와 읽기의 관점에서 사태에 접근하는 게 인문학적 연구라고 할 수 있겠다; 물론 학문은 계속해서 변하기 때문에 양자는 종종 조응해왔고 앞으로도 접촉할 것이다).


 불행히 심지어 전공자들에게도 오해받곤 하지만, 전문연구로서의 인문학은 귀족적 취미/지식의 습득이 아니라 우리 자신 및 우리가 살아가는 삶에 대한 앎을 추구하는 일이다. 인문학 전문연구를 축소하라는 압력은 (실제로 많은 대학에서 이루어지고 있는데) 우리의 사회가 자기 자신을 이해하고 개선시킬 정신적 여유조차도 없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우파들은 "과거를 모르면 실패를 되풀이한다"고 외쳐대지만 실제로 지금의 우리들 자신이 어떤 방식으로 생각하는지, 어떻게 그렇게 생각하게 되었는지를 이해하려는 최소한의 노력조차도 보여주지 않는다. 인문학 축소 움직임은 동시에 인문학 전공자조차 자신의 학의 근본적인 역할이 무엇인지 질문하지 않는 희비극적 상황의 결과이기도 하다. 공부하고 사유하고 질문하는 게 특기라고 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자기 자신의 직업이 갖는 의미조차도 해명하지 못하는데 다른 이들이야 오죽하겠나.


교양교육으로서의 인문학의 역할은 근본적으로는 앞서 설명한 바와 같다. 다만 조금 더 구체적으로 인간을 사회적이고 총체적인 삶을 이끄는 교육행위들에 관해 언급하겠다. 인간의 사회적인 삶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당연히 그것은 의사소통이다.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사람들에게도 해당되듯 우리는 타인의 의사표현을 이해하고 내면화하며 다시 자신의 의사를 표현하는 과정을 통해 사회적으로, 즉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산다. 교양교육의 기초가 문헌을 읽고 해석하는 능력과 자신의 사고를 가능한 명확하게 표현하는 교육으로 이루어진 건 우연이 아니다. 심지어 대학생들조차도 읽기와 쓰기 교육을 지겨워하며 무시하는 태도를 취하곤 하는데 우리가 대중화된 교육이라고 폄하하는 미국 대학에서조차도 (좋은 학교일수록) 한국의 대학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이 읽고 쓰게 교육한다. 오바마를 포함한 미국 정치인의 '스피치'를 칭송하고 그러한 능력을 갖고 싶어하면서도 정작 그와 같은 정치적 언어표현능력이 어떠한 훈련을 통해 만들어졌는지는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이 이끌어가는 한국사회가 낮은 문해율과 수많은 '정치적 문맹'을 자랑하는 건 특별히 놀랄 일은 아니다.


읽고 쓰기와 함께 교양교육의 기초를 이루는 것은 문화교육이다. 통상 우리는 문화하면 영화나 소설, 음악 같은 예술을 떠올리곤 한다. 그게 틀린 건 아닌데, 문화의 핵심적 기능은 인생을 즐기라는 데 있는 게 아니라 특정한 정체성 및 사고/지각방식을 갖추도록 인도하는 데 있다. 쉬운 예를 들자면 우리는 외국인들과 접촉하여 서로의 상이함을 발견할 때 '문화가 다르다'는 표현을 종종 쓰곤 한다. 그건 우리와 그들이 향유하는 예술이 달라서가 아니라, 서로가 갖고 있는 정체성 및 그와 결부된 의식적/무의식적 사고방식의 차이에서 비롯된다. 심지어 자신이 극단적으로 합리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조차도 한 발자국만 떨어져서 보면 특정한 문화적 사고방식을 그대로 답습하는 걸 관찰할 수 있다. 이는 그가 무지해서라기보다는 우리의 정체성과 사고방식 자체가 문화적 산물들의 축적을 통해 형성되기 때문이다. 마치 우리의 언어 그 자체처럼(물론 실제로 문화의 핵심은 언어다; 영미권에서 영문학교육이 차지하는 불합리할정도로 엄청난 비중은 이 때문이다) 문화는 우리의 사유를 구성하며 그 바깥에서 사고하는 것은 고통스러울 정도의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 한 어렵다. 교양교육은 한편으로 사회의 문화를 교육하며 다른 한편으로 보다 나은 문화를 선별하는 기능을 한다; 문화적 다양성을 강조하는 이들은 여기에 반발할지 모르겠지만, 우리가 성차별주의나 인종주의, 지역주의, 각종 차별 등을 가르치지 않는다는 사실은 문화교육에 명확히 선별의 기능이 담겨있음을 보여준다.



4.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자. 최근의 인문학과 교양교육의 위기는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공리주의적 관점이 전면화되는 것을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는가? 부분적으로 이러한 상황은 단순히 누군가의 주관적인 무지와 이데올로기라기보다는 객관적인 현실을 보여준다. 대학에서 인문학 전공자가 축소되는 것, 사회 전반적인 교양의 축소는 분명히 우리 사회가 자기 자신을 이해하는 일, 그리고 사회구성원들 간의 소통이 얼마나 중요한지조차도 망각할 정도로 심각한 어려움에 봉착했음을 보여준다. 분명한 사실은 어려움에 처할수록 상황을 지성적으로 이해하려는 태도가 더욱 더 요구된다는 것이다. 나는 감상적인 태도에서가 아니라 현실적인 이유에서 한국 사회의 인문학 및 교양교육이 더 확대되지는 못할지언정 축소되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현재와 같은 상황일수록 우리는 우리 자신의 사유를 구성하고 또 제약하는 갖가지 조건들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 그 역할은 사회과학자들 못지 않게 인문학 전공자들의 역할이기도 하다. 우리는 아직도 우리 자신에 대해 잘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더 많은 연구자들이 필요하다.


더불어 현재 한국사회가 직면한 포괄적인 의사소통의 위기는 단순히 입으로만 소통이 중요하다고 떠들어서 해결될 수 있는 게 아니다. 한편으로 의사소통 자체를 불가능하게 하는 물질적/제도적 층위에서의 모순이 분명히 있으며, 다른 한편으로 우리는 단순히 서로의 상이함에서만이 아니라 타인의 사유 자체를 이해할 능력이 저하되는 사회에 살고 있기도 하다. 최초에 의견이 다른 이를 비난하기 위한 용도로 사용되던 '난독증'과 같은 표현은 어느새 우리의 진짜 상태를 가리키는 용어가 되어버렸다. 이런 상황에서 당장 기업자본에서 인간의 노동력을 활용하지 못한다고 기초교양을 전문화된 교육으로 대체하는 흐름은 (당연하지만 대학은 사회에 책임을 지지 자본에 복무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에게 자료를 읽고 해석하는 능력조차도 박탈하는 자멸적인 행위에 다름아니다. 당연하지만 글을 읽고 해석하며 자신의 의견을 표현하는 능력이 떨어질수록 기업자본의 작동 자체에도 지장이 생길 수밖에 없다. 실제로 우리가 소통의 위기를 겪고 있다면, 이는 부분적으로 소통의 능력 자체를 기르는 실질적인 교육의 증대로만 해결될 수 있다. 직접적으로 말해 우리에게 필요한 건 교양교육의 축소와 철폐가 아닌 개혁과 확장이다.


당연하지만 위의 모든 일들은 인문학 및 교양관련 종사자들이 자신들의 행위의 근본적인 의미를 묻는 작업과 분리될 수 없다. 자신을 설득할 수 없는 사람들이 남을 설득하기를 바랄 수 있을까. 동시에 학문을 지금의 조건에 맞추어 개선시키는 작업 또한 전공자들의 몫이다. 19세기 유럽의 교양은 19세기 유럽의 것이며 곧바로 오늘날 한국의 교양이 될 수 없다. 모든 학문이 그렇듯, 교양 또한 사회 및 사회구성원들에게 진정으로 의미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질문할 때 그 생명력을 보존한다. 우리는 외국 학자들과의 대화가 중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그게 우리가 속한 현실적인 사회에서 어떻게 활용될 수 있는가에 대한 고민없이 행해진다면 이는 문자 그대로 사물화된 

행위에 불과하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언급하자. 지금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대중적 인문학/교양교육을 고무적으로, 희망에 차서 바라보는 사람들이 있다. 물론 그 다양한 활동들을 싸잡아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만 나는 조금 더 회의적이다. 예컨대 서울대의 짭짤한 수익산업 중 하나인 AFP, 인문학 최고지도자 과정과 같은 각종 기업가/고소득자를 위한 인문학 교양교육은 어떤 역할을 하는가? 그들이 고전과 예술을 즐기면서 영혼이 윤택해지는 것 같다는 주관적인 착각을 하는 거야 탓할 생각이 없지만, 해당 교육과정이 그들에게 고전/학술의 이데올로기적 수사를 제공해주는 것 이상의 역할을 하는 듯 보이지는 않는다. 그러한 교육과정은 학문이 돈에 팔려서 비판받아야 하는 게 아니라, 실제로 그들의 사고방식과 사회에 대한 이해를 더 나은 방향으로 이끌어가는 대신 한국사회 지배계층 간 친목모임의 장--때로는 그 자녀들의 교류창구로도 활용된다--을 제공해주는 데 그치고 있기 때문에 비판받아야 한다. 다른 한편으로 이른바 대중적 인문강좌들의 상당수 또한 사람들의 사고를 보다 커다란 맥락으로 이끄는 대신 속물적인 의미에서의 취미교양, 그러니까 허영심을 채우는 데 복무하거나 일종의 자기계발담론의 도구로 기능하는데 만족하고 있다. 이건 인문 교양의 올바른 역할이 아닐 뿐더러, 안 그래도 한국 사회에 널리 퍼져 있는 인문교양에 대한 잘못된 이해를 더욱 넓게 퍼트린다는 점에서 인문학과 한국사회 양자에 모두 해롭다. 클레멘트 코스를 비롯해서 한국사회에 대중적 인문학 교육이 퍼진지 벌써 수 년이 흘렀지만 최초의 기대와 달리 사회의 소통은 더욱 어려워졌으며 인문학 학술서는 더더욱 팔리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는 정도로 충분할 것이다. 특히나 인문학 전공자들은 이러한 흐름에, 그들이 다른 모든 것들에 그래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비판의 촉각을 곤두세울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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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Л 2014.10.31 10:31 신고 Modify/Delete Reply

    잘 읽고 갑니다. 노동과 '향유'로만 삶을 나누는 강신주식 이해가 첨에는 그럴듯 하면서도 곧바로 의문이 들었는데, 이 글을 통해 해소됐어요 ㅎㅎ 기업자본(나아가 총자본)의 이해에 되려 해악이 된다는 진단은 탁견인 것 같아요! 많은 분들이, 특히 (그럴 능력이나 의도가 전혀 없겠지만)정부와 기업이 이런 의견을 진지하게 수용하고 사고해야 할텐데 말이지요 ..

    "인문학 축소 움직임은 동시에 인문학 전공자조차 자신의 학의 근본적인 역할이 무엇인지 질문하지 않는 희비극적 상황의 결과이기도 하다. 공부하고 사유하고 질문하는 게 특기라고 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자기 자신의 직업이 갖는 의미조차도 해명하지 못하는데 다른 이들이야 오죽하겠나."

    • BeGray 2014.10.31 12:19 신고 Modify/Delete

      정작 현실의 SNULife에서 제대로 독해되지조차 않고 있는 글이라 정부와 기업의 인식변화에 관해서는 조금 더 비관적이 됐습니다 ㅋ 어느 철학 전공자인지 모르겠지만 공리주의 개념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른다는 코멘트를 받으니 조금 황당하더군요 ㅎㅎ

  2. 소년의 노래 2014.11.01 15:21 Modify/Delete Reply

    사람들은 '변화'를 회의하는 것보다 '순응'하는 데 더 익숙한 것 같아요.(놀라운 건 이걸 진보적이라고 여긴다는 것)'대학에서 인문학의 영역이 축소되고 있는 현실'이라는 의제에
    '당연한 것 아니겠느냐' 내지는 '어쩔 수 없지 않겠느냐' 식으로 나이브하게 대꾸하는 것만 봐도...탈인문학화 돼버린 인문학의 풍경이네요.

    추가로, 오늘날 인문학의 영역은 이미 과학으로 대체가 됐기 때문에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흐름이라는 진화론적인 시선들도 있더군요

    • BeGray 2014.11.02 01:42 신고 Modify/Delete

      생각하지 않는 게 편한 법이니까요. 그런 점에서 비판이든, 학이든, 지적인 작업이든 사람들에게 수고로움을 요구한다는 점만큼은 분명합니다. 사실 인문학과 교양교육을 담당하는 사람들부터 바로 그 수고로움을 짊어지고 살아야겠죠.


      저는 과학을 존중하지 않는 건 아닙니다만, 마지막에 말씀해주신 주장은 인문학에 대해 최소한의 성찰을 결여하고 있군요. 그렇게 순박한 '진화론'이라니, 18세기에나 보던 이야기를 21세기에 보는 기분이란...

  3. 소년의 노래 2014.11.02 09:44 Modify/Delete Reply

    http://www.pgr21.com/pb/pb.php?id=humor&no=222492&divpage=38&sn=on&ss=on&sc=on&keyword=%EA%B5%AC%EB%B0%80%EB%B3%B5%EA%B2%80&cmt=on

    철학자들로 무려 순위 매기기(?)나 할 정도의 병맛스러운 글과 댓들이지만...좋은 글들도 많이 올라오는 곳입니다. 맨 아래 댓글 보시면 그런 주장이 있습니다.

    • BeGray 2014.11.02 12:45 신고 Modify/Delete

      저 리스트가 상당히 이상한, 특별히 참고할 가치가 없는 것임이야 명약관화하고...

      구 모 라는 분의 정신분석이랑 문학이론이 어쩌구 하는 댓글은 문학전공자 입장에서 일고의 가치가 없네요. 저는 그분이 탁월한 문학이론가/비평가들 중 과연 누구의 어떤 저술을 읽어봤는지 무척이나 의아합니다. 본인이 제대로 지적인 훈련을 받은 사람이라면 자신과 다른 필드에서 어떤 훈련이 이루어지는지에 대해 한번 정도 생각해보고 무언가 말을 할텐데, 저는 그의 코멘트에서 그가 제대로 훈련받아본 적이 없는 독학자에 가깝다는 인상을 받습니다.

      맑스가 헤겔의 열화판이라는데 헤겔을 읽고 이해하기나 했는지 의심스럽고... 학문을 조금만 '역사적'인 시점을 갖고 따라가면 저런 이상한 소리를 하지도 못하겠죠. 자연과학과 철학, 그리고 양자보다 조금 더 큰 '인간의 자기 이해'의 역사는 생각보다 복잡합니다. 저 리스트 끄트머리에 들어가 있고 아무도 언급하지 않는--아마 제대로 읽어보지도 않았을테니까요--푸코만 숙독해도 학문들 사이의 관계에 대해 꽤 다른 방식으로 생각하게 됩니다. 애초에 철학의 '전통 영역'이라고 불리는 범위 자체가 비교적 근래의 것일 뿐더러 그 또한 유동적입니다. 벌린 경-테일러-바이저 등으로 이어지는 철학사 연구자들은 저기서 언급되는 '철학의 전통영역'(솔직히 웃깁니다; 고대철학이나 중세철학 전공자가 그런 말을 하면 예의상 그냥 고개를 끄덕이겠습니다만...)에 들어가지 않지만 철학을 공부할 때 당연히 저 댓글들의 논의들보다 좀 더 읽을 가치가 있는 사람들이겠죠.

      제대로 공부도 하지 않았으면서 저렇게 자신감 넘치는 코멘트를 하는 이상한 독학자들을 저는 별로 존중할 기분이 들지 않습니다. 저 자신은 라캉에 특별한 호의도, 관심도 없는 사람이지만 라캉을 둘러싼 댓글들 중에서 라캉에 대해 자신의 판단을 내릴 수 있을 정도로 읽은 사람이 없다는 건 확신할 수 있습니다. 자신이 잘 모르는 내용에 대해 함부로 판단하지 않는 것은 학적 논의의 거의 가장 기본적인 원칙에 속하고, 저는 그래서 댓글의 전문가인양 하는 사람들을 학적 논의의 기본도 모른다고 평할 수 있을 듯 하군요.

      요점은, 저는 저 커뮤니티의 의의를 폄하할 생각은 없습니다만, 저 게시물에 달린 댓글들과 같은 주장은 무시해도 된다는 겁니다. 공부하는 사람들이 술자리를 가질 때 (자기들도 농담이라는 걸 알면서) 나누는 이야기 비슷합니다. 학문의 진화 혹은 학문 내에서 더 좋은 연구와 아닌 연구를 가르는 기준은 이야기할 가치가 있는 주제이지만, 저런 식으로는 아닙니다.

  4. 소년의 노래 2014.11.02 14:20 Modify/Delete Reply

    BeGray님//

    별 것도 아닌 제 댓글에 너무 성실하게^^;;;답글을 달아주셨네요. 쓸데없이 흥분하게 만들어 드린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송구스럽네요.

    제 나름대로의 의견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저 댓글들을 통해 저는 이런 의문이 들더군요.

    '왜 사람들은 무언가를 부정하려고 할 때, 부정하는 게 아니라 다른 무언가로 대체하려고만 하는
    걸까?' 결국 저 댓글들 속에서도 느껴지는 건, '나는 부정한다.'가 아니라 '더 좋은 게 나왔으니 이제
    너는 쓸모가 없어.'라는 일종의 '소비자의 심리'가 작동하고 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무튼 성실한 답변 감사드립니다. 이 블로그는 어디까지나 님의 편안한 안식처가 돼야 한다고 생각하므로 이 이상의 답글은 달지 않겠습니다.

    • BeGray 2014.11.02 14:52 신고 Modify/Delete

      특별히 흥분하지도, 편안한 안식(?)을 침해당했다고도 생각하지 않으니 사과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의견이 있으시면 자유롭게 말씀해주셔도 되고요--어차피 이 블로그가 바로 그런 용도를 위한 곳인걸요ㅎㅎㅎ

      "소비자의 심리"에 대해서는 깊이 동감합니다. 심지어 지식의 대중적인 소비자들만이 아니라 학적인 분야에서도 그와 같은 심리는 쉽지 않게 발견되죠(문학연구도 예외는 아닙니다...어떤 면에서 그런 유혹에 더 취약합니다).

  5. 조현준 2014.11.30 15:31 Modify/Delete Reply

    전 여기 나온 인문학도가 꼭 그런 이유에서 저런 주장을 했을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다른 인문학은 잘 모르니 철학만을 놓게 얘기하겠습니다.
    전 철학이 본래적으로 사회지향적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근대부터(사실 고대 및 중세에도 그런 경향은 분명히 있었습니다) 사회적 구성원으로서의 역할을 하기 위한 교양 교육이 중요시된 것은 사실이지만, 철학의 전부가 그랬던 적도 없고 그럴 필요도 없다고 생각해요. 플라톤의 국가만 하더라도 정치철학서로 읽을 수도 있겠지만, 인식론 및 존재론 서적으로도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인식론 및 존재론의 대부분의 문제는 사실 사회의 발달에 직접적으로는 도움이 된 적이 없었습니다. 과연 '수란 무엇인가?', '우리가 정말로 알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자유의지란 무엇인가?', '(언어의) 지향성이란 무엇인가?', '감각질이란 무엇인가?' 따위의 문제가 직접적으로는 사회에 어떤 기여를 하는지는 모르겠습니다.(물론 수란 무엇인가의 문제에서 컴퓨터가 발명될 수 있는 이론적 토대가 나오긴 했지만 '직접적'으로는 그런 목적은 없었지요) 전 이러한 문제들이 철학의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하고 가장 고차원적인 목표라고 생각합니다. 낯설게 보기, 의사소통 능력 함양하기는 부수적인 것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많은 철학자들은 철학이 역사같은 학문이 아니라 수학같은 학문이 되길 바랬습니다(그래서 철학과 역사는 대립됩니다. 물론 이런 도식을 헤겔은 부정하겠지만서요). (혹시 오해할까봐 말씀드리는 역사같다는 것은 역사를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context를 중요시 하는 학문이란 의미입니다.) 철학의 중요한 목표는 철학적 주장들을 내적인 완결성을 통해 증명하는 것입니다.

    사실 이런 측면에서 보았을 때, 맨 처음 주장을 한 인문학도가 굳이 공리주의적인 인간관 및 세계관을 가졌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을 거 같습니다. 그 친구가 보았을 때 인문학은 예전부터 지금까지 비주류들의 팬시(Fancy)한 소일거리에 불과해보였을 수도 있죠. 철학적 문제들에 대해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한다면 철학의 문제들은 사소한 말장난에 불과해보일 수도 있으니까요. 물론 그 이후의 얘기(인문학과의 통폐합 등 실용주의적인 논리)는 공리주의에 입각한 시각임이 분명하다는 데에는 동의합니다. 하지만 굳이 공리주의적 세계관을 당연시하지 않아도 '사실 인문학은 고급취미에 불과하지'란 생각은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게다가 역사적으로 보았을 때 실제로 철학이 팬시한 부분도 많았고, 고전적인 철학의 목표(형이상학-> 윤리학-> 삶의 규범에 이르는 '좋음'에 이르는 길)가 붕괴하면서, 철학의 영역이 축소되어서 더욱 그렇게 보이기도 하고요.

    한 가지 궁금한 점이 있는데, 비그레이님이 어떤 이유에서 공동체주의를 지지하는지 자세히 듣고 싶습니다. 전 특별한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하고 개인주의자로 스스로를 인식하게 되었습니다(사실 우리시대의 모습을 그려본다면 이것도 당연한 것 같습니다) 그러다가 이진경씨가 공동체주의가 끌린다고 하면서 지금 비그레이님이 지적한 것과 비슷한 논리로 공동체주의를 주장하였는데, 그때는 무신경하게 지나쳤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니 그 때 아무런 반성없이 지나친 게 후회되네요. 그런데 제가 생각하기로는 비그레이님의 논리나 이진경씨의 논리나 본질적이지는 않습니다. 사회적 현상을 통해서 인간을 분석하고 그것을 추상화하여 인간의 본성을 논한다면 순환논리에 불과하지 않겠습니까?(즉 사회적인 인간의 모습을 추상화하여 인간성의 본질에 사회적인 본성이 있다고 결론내리는 방식은 선결문제요구에 불과하지 않냐는 것입니다) 인식적으로 고립되어 있는 자아들이 어떻게 공동체주의로 나아갈 수 있는지 비그레이님의 의견을 듣고 싶습니다.

    그리고 제가 아까 언급했듯이 저는 무비판적으로 개인주의를 수용하였는데, 개인주의가 어떻게 이데올로기가 되었는지 조금 더 자세히 알고 싶습니다. 자유주의가 과거에는 진보적 입장이었고 공동체주의가 보수적이었는데, 그 도식이 어느순간 바뀌었는지 제대로 파악하고 있지 못하고 있습니다(양차대전 이후는 분명한듯한데, 그 이유가 파악이 안 됩니다)

    • BeGray 2014.12.01 00:33 신고 Modify/Delete

      상세한 읽기 및 코멘트 감사합니다^^. 몇 가지 쟁점들을 추려볼게요.

      1. 저는 학문의 도구성을 현준 씨가 쓰는 "사회지향적"이란 말보다 보다 넓게 정의합니다. 요컨대 현준씨의 댓글에서 학문이 "직접적으로 사회에 보탬이 되는 영역"과 "고급취미"라는 항으로 구성되어 있다면, 제가 생각하는 학문의 도구성은 현준씨의 도식 상의 전자보다 조금 더 넓은 범위입니다. 예컨대 인간의 자기인식과 같은 주제는 당연히 학문의 도구성이 충족되는 사례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그리고 현준 씨께서 사례로 제시하신 인식론 및 존재론의 질문들은 거의 대부분 인간학 및 윤리학을 구성하는데 결정적인 토대로 작용하는 것들입니다. 오히려 저런 질문들 없이 근대의 다른 사회적 학문들이 성립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해요...한국의 대학에서 철학은 마치 독립분과처럼 취급되고 있지만, 학문의 역사로 보면 오히려 그쪽이 예외적입니다). 당연하지만 현준 씨가 "고급취미"라고 설정한 영역 또한 저의 그 표현이 지칭하는 바와 다를 듯 합니다.

      여기서 제가 저의 입장을 조금 더 길게 늘어놓을 수도 있겠지만 이 대화의 건설적인 목표를 위해 현준 씨가 설정한 두 영역의 범위가 어떤 것인지, 그리고 그 범위의 분할이 어디로부터 온 것인가를 먼저 질문하고 싶군요^^(당연히 여기에는 현준씨가 "사회적인 것"이라고 부르는 게 대략적으로나마 어느 정도의 범위를 차지하는가가 포함됩니다).

      참고로, 현준 씨가 "부수적인 것"에 불과하다고 생각한 실용적인 목표들이 역설적으로 대학과 같은 제도를 통해 철학 및 기타 인문학이 생존하는데 상당한 역할을 했다는 사실은 덧붙일 수 있겠죠. 본문에 암시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만, 제가 학문의 역할과 기능을 이야기할 때 근본적으로 '제도로서의 학문'이라는 시각은 거의 항상 들어가 있습니다. 사회적 자본과 노동의 투입을 요구하는 제도로서 학문은 항상 사회에 대한 자기 정당화를 필요로 합니다; 이건 이것대로 하나의 항목을 쓸 수 있는 주제입니다만, 어쨌든 칸트의 논쟁적인 글들도 이 사례에 포함시킬 수 있겠죠. "철학적 주장들을 내적인 완결성을 통해 증명하는 것"이 철학적 논변의 중요한 세부목표들 중 하나로는 제시될 수 있겠지만, 그 자체가 제도로서의 학문을 성립시키고 또 정당화시킬 수 있는 목표는 되지 않습니다. 애초에 저런 진술이 성립할 수 있게 된 것도 근대학문의 특수한 조건과 떨어질 수 없을테고요. 실용적이고 경험적인 이야기를 해본다면, 장학금과 연구과제에 학자로서의 삶의 물질적 토대가 직결된 삶을--그러니까 대학원생의 삶^^;;--경험해본다면 제 이야기가 조금 더 잘 와닿을지도 모르겠네요 ㅎ.


      2. 제가 원문에서 표적으로 삼은^^; 주장을 여러 항들로 분리시킨 뒤 그중 하나의 항이 꼭 그 항들의 종합을 함축하는 주장에 해당하지 않을 수 있지 않느냐는 지적은 맞는 듯 하면서도 좀 어색한 논변이라는 느낌이 듭니다. 요컨대 해당 부분에서 저의 논리를 간략화 해보면 제 비판의 대상이 A,B,C라는 특성을 보여주고 이것이 공통적으로 U라는 입장에서 파생된다는 것인데, A는 꼭 U에서만 나오는 게 아니지 않냐는 비판은 그 자체로는 맞을 수 있지만 이게 원래의 논변에 유의미한 비판이 되는 건 아니지 않나요?^^;


      3. 제가 지지하는 입장을 공동체주의라고 부를 수 있다면, 우선 두 가지 이유가 떠오르네요. 첫째, (이게 현준 씨가 선결문제요구라고 부른 것과 어떻게 맞닿고 다른지는 잘 와닿지 않지만) 실제로 인간의 사회적 경험, 인식 및 행위를 설명함에 있어서 타인의 존재 및 사회적 맥락은 필연적이라는 것입니다. 인간을 사회적 요소와 무관한 독립적인 개인으로 놓는 설명틀보다 사회적 맥락이 인간에게 끼치는 영향을 감안한 설명틀이 훨씬 제가 이해하는 현실에 부합합니다. 둘째, 앞서의 이유와 이어지는 것이지만, 특히나 우리 행위의 당위적 층위, 곧 윤리 및 사회적 행위의 층위에서 인간을 독립적 개체(아도르노의 표현을 조금 끌어오면 "창문없는 단자")로 간주하는 이론은 매우 부분적으로 밖에 적합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즉 학문을 통해 인간 행위의 당위적 방향을 지시함에 있어 사회적 맥락을 고려하지 않는 이론보다 고려하는 이론들이 기술적으로도 훨씬 적합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건 현준 씨의 질문이 조금 더 세분화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만, 제가 연구자 및 사회적 행동주체로서 사회적 이론(공동체주의?)을 지지하는 이유, 개인적으로 공동체주의를 지지하는 이유--그러니까 연대와 상호대화 등을 개인적 행동양식으로 받아들이는--등등이 조금씩 다를 수도 있겠습니다. 어느 차원을 질문하시는지 조금 더 구체화되면 저도 그만큼 더 구체적인 답을 드릴 수 있는 듯 합니다.


      4. 개인주의, 공동체주의와 보수, 진보의 문제는 조금 더 복잡하게 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컨대 사회주의는 (사회주의자들이 정권을 잡은 극소수의 사례를 제외하면) 거의 모든 사회에서 공동체주의와 진보적 위치라는 속성을 동시에 갖고 있죠. 기본적으로 어떤 사상적 입장이 보수냐 진보냐는 질문은 항상 그 입장이 무엇과 적대하고 해당 사회에서 어떠한 결과로 이어지느냐라는 질문, 즉 맥락의 문제랑 분리될 수 없지요.

      근대영국의 표준적인 이데올로기사를 들자면, 절대왕정으로부터 유래한 권력 및 정치적 입장(17세기 후반의 예를 들자면 필머 경의 왕=국가의 가부장이라는 주장 등)을 비판하는 '진보적' 입장으로서의 자유주의(엄밀히 말해 우리의 대화에 나오는 개인주의라는 것은 이 자유주의의 한 속성에 가깝습니다...순수한 사상으로서 '개인주의'가 그 자체만으로 유의미한 정치적 입장을 형성했던 때는 제가 알기로 없습니다; 어떠한 사상은 교과서에 기술될 때를 제외하고는 절대로 순수한 추상논리로만 존재할 수 없죠)가 성립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19세기 전반을 거치며 계급갈등이 본격화되고 각각의 개인이 자유롭게 자신의 이윤을 추구할 권리가 있고 이 권리는 방해받아서는 안 된다는 정치경제적 입장이 사실상 이미 개인적 이윤추구를 통해 우월한 입장에 놓이는 사람들의 이익을 위해 복무한다는 사실이 드러나게 되죠. 맑스주의를 포함한 사회주의 및 노동운동과 같이 개인주체가 아닌 집단주체의 형성을 다룬 이론들이 이러한 (신체와 재산, 감각과 이윤추구의 주체로서) 자유주의적 개인을 기초로 하는 입장들에 대한 비판을 가한 게 19세기 중반쯤이라고 생각하면 되겠습니다.


      기본적으로 어떠한 입장이 "이데올로기"라고 불리기 위해서는 다음의 두 가지 요소가 중점적으로 요구됩니다. 1) 해당 이론이 전체적인 사실을 감추거나 왜곡할 때. 2) 해당 이론에 따라 사회를 설명하고 규범을 설정하는 것이 사회의 특정한 집단, 주로 지배적인 위치에 있는 집단의 이해관계에 복무할 때. 이런 기준에서 본다면, 저는 오늘날 신자유주의적 조건 하에서 자유주의 또는 자유주의적 개인과 같은 관념이 1) 국가, 자본과 같은 주체들이 적극적으로 특정한 이해관계를 위해 작동한다는 사실을 볼 수 없게 만들며 2) 결과적으로 한국 사회의 우파 및 비교적 소수의 정치경제적 권력보유층이 하층계급을 착취하고 비인간화하며 하층계급 및 권력의 열세에 놓인 집단이 효과적으로 저항할 수 없도록 한다는 점에서 이데올로기로 기능한다고 봅니다.


      제가 지금 감기약에 취해서 언어 컨트롤이 맘같지 않은지라-_-;; 현준씨가 의도하신 바에 제대로 맞는 답을 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불명확하거나 납득되지 않는 바가 있으시다면 얼마든지 얘기해주세요~

  6. 조현준 2014.12.01 20:35 Modify/Delete Reply

    1) 제가 말하는 사회지향적이란 표현은 단순합니다. "학문이 그 자체로 목적이 되지 않고 다른 것을 위한 것이 되어야만 하는가?"입니다. 저는 그것에 대한 답은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물론 철학의 탄생이 종교적인 염원과 같은 맥락하에서 태동한 것은 사실이지만, 종교적 염원(이를테면 불멸에 대한 욕망 달성, 행복추구, 좋은 삶 살기 등등)뿐만이 아니라 앎 그 자체에 대한 욕망이 철학을 철학으로서 기능할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이러한 부분은 과거부터 많은 논쟁이 되어왔다고 생각합니다.
    (부대 도서관에 있어서 우연히 읽고 있는 지그문트 바우만의 "액체근대"에도 방금과 같은 문제의 약간은 다른 맥락으로 제시되고 있습니다. 이 책에서는 플라톤의 동굴에서의 비유에서 진실된 빛을 본 선지자가 동굴 속에 갇힌 인간들에게 그것을 그대로 전달해야만 하는가에 대한 문제에 대한 레오 스트라우스와 알렉상드르 꼬제브의 대립된 입장이 제시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철학이 철학이기 위해서는 철학적인 텍스트가 그 자체로 완전해야하며, 어떠한 맥락으로 해석되어야만 진실될 수 있다면 거짓인 것이기 때문에 철학적으로 의미가 없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또한 인식론과 존재론이 윤리학적인 토대에 (특히 메타 윤리학에서) 중요한 툴이 된 것은 사실이지만, 이후 시대가 지나면서 (특히 근대철학 이후에는) 철학의 '구별가능한 분과들'로 생각될 만큼 다른 분야였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인식론을 연구하는 사람 중에 윤리적인 토대를 놓기 위해 인식론을 공부하는 사람보다는 지식이 무엇인가가 궁금해서 공부하는 사람이 더 많을 것이라고 전 생각합니다. 실제로 칸트 철학의 삼대비판서는 서로 중요한 맥을 함께하지만, 각 비판서가 연결되는 것이지 순수이성비판의 목적이 실천이성으로 가는 길을 제시하기 위한 것은 아니었습니다(순수이성비판의 서문에도 칸트는 선험적 종합명제가 존재한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순수이성비판을 썼다고 말합니다). 저는 제도로서의 학문이 유지되기 위해서는 분명 그 학문이 왜 존재하는지에 대한 어느정도의 해명이 필요하다는 것은 인정하지만, 제도로서의 학문이 있기 전에도 학문은 존재했으며, 그것들의 목표가 스스로를 증명하기 위한 것은 아니었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철학이 제도로서의 학문으로의 자세를 계속 유지된다면, 현재 철학계에 비판이 될 수 있는 문제, 즉 학문의 순수성이나 자유로운 학문으로서의 철학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철학적으로 발견된 앎이(사실 그런 게 있는지는 의문이지만) 사회적으로 위험한 것이라면 그것을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레오 스트라우스와 알렉상드르 꼬제브의 대립에서, 저는 레오 스트라우스의 의견이 더 그럴듯하다고 생각합니다(물론 저걸 요약한 지그문트 바우만은 알렉상드르 꼬제브의 편이더군요) 과연 모두가 철학적 사고를 할 수 있나, 그리고 해야만 하는가의 문제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제가 철학이 그저 고급취미에 불과하다는 견해를 어느정도 선에서 지지한 것은 철학을 모두가 할 수도 없고, 할 필요도 없지 않은가?라는 생각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철학적 문제들에 대해 문제의식을 못 가지는 사람이 있는 것이 저에게는 그렇게 이상해 보이지만은 않아서 그렇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정상적'이라면 철학의 사회적 공론의 장은 열리지 못할 것이고 철학적인 앎이 사회에 굳이 유포될 필요는 없어 보입니다.

    사실 이 문제는 3)이랑 연관이 있는데 2)부터는 다음에 쓰겠습니다. 벌써 청소시간이라... 오늘 파견갔다 왔더니 시간이 없내요. 군대에서 밥 못 얻어 먹기는 오늘이 처음인 거 같아요. 3)부터 본격 궁금한 부분이라 저도 고민을 좀 하고 쓰겠습니다.

    • BeGray 2014.12.02 01:15 신고 Modify/Delete

      군대에서 다른 건 몰라도 밥은 꼬박꼬박 챙겨줘야 하는데... 저도 일하느라 라면으로 떼우거나 할 때가 없지는 않았지만 부디 끼니 거르지 않으셨기를 바랍니다 ㅠㅠ 어차피 리플이야 천천히 달아주셔도 대화는 계속 할 수 있는 거니까요^^


      일단 적어주신 1번 항목에 대해 몇 가지 코멘트를 덧붙입니다.

      1) 앎 자체에 대한 욕망 및 그와 결부된 '진리의 추구'가 철학의 필요조건이라는 것에는 동의합니다(물론 진리와 선의 관계는 그 자체로 논의가 가능한 주제입니다). 저 또한 당연히 그러한 욕망이 있고, 그게 없다면 굳이 이 길을 택하지 않았겠죠^^.
      2) 그러나 제도로서의 철학 혹은 학문의 생존은 1)에서 다룬 요소들로만은 성립이 안 됩니다. 다시 말해 사적인 진리탐구가 아니라--물론 사적인 진리탐구가 우연하게 사회적 목표에 결부되는 경우는 있습니다만--사회적 자본의 투입을 요구하는 학문이라면 필연적으로 그와 같은 자본투입을 요구하는 논리를 제시해야 합니다(애초에 제 원문이 대학교육에서의 교양교육과 인문학의 역할에 관한 것이었음을 다시 강조하겠습니다). 그런 점에서 제시하신 "실제 인문학자들 및 철학자들이 지금껏 어떻게 해왔다"는 근거들은 제 주장에 대한 반론이 되지 못합니다. 그게 아니다라는 얘기가 아니라 그것만으로는 안 된다는 이야기니까요.
      3) 이건 2번 항목과 조금 다른 이야기입니다만, <순수이성비판>을 포함해서 적어도 근대 이후의 철학 텍스트들은 당연히 그것이 속한 맥락이 있습니다. 직접적으로 칸트에게 (<순수이성비판>에 직접 이름이 언급되는) 로크 이래의 영국 경험론에 답해야겠다는 생각이 있었다는 사실과 또 왜 그러한 질문에 그와 같이 답을 해야했었는가를 떠올려 보면 이미 철학이 맥락이 없는 논증만으로 구성될 수 있는 사례로서 <순수이성비판>이 기능하지 못한다는 것은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더불어 로크 자신에게도 그랬듯 칸트의 이론적 성립에도 뉴턴 이래의 자연과학/철학과 인간 인식의 문제를 연결시키는 맥락이 있었음을 지적한다면, 현준 씨가 주장하는 하나의 요소 이외에 철학텍스트 또한 복수의 맥락들이 뒤얽혀 있음을 이야기하는 게 그리 어렵진 않겠죠.
      4) (바우만의 텍스트는 읽지 않아서 저 둘의 대립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모르겠습니다) "철학이 고급취미라는 것"을 부분적으로 긍정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제가 비판할 일이 아닙니다만, 곰곰히 생각해보니 저의 글과 지금의 대화에서 현준 씨의 그 주장이 어떤 맥락에 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제도로서의 학문이 아닌 (일부 사람들만이 향유하는) 지적 호기심의 충족으로서의 철학관을 이야기하고 싶은 것인가요? 이 주제 자체를 따로 떼어내어 논의하자는 건 반대하지 않습니다(얻을 게 당장 많지는 않겠지만 이것저것 살을 붙여가며 재밌게 얘기하기 좋은 주제죠 ㅎ). 다만 제가 지금 리플의 1-2에서 정리한 원문의 맥락에 설령 비판의 형태로라도 아귀가 잘 맞는 이야기인지는 모르겠네요.

  7. 조현준 2014.12.02 19:30 Modify/Delete Reply

    어제 급하게 나가느라 감기 빨리 나으라는 말도 못 적었더라구요.
    블로그 글들을 보니까 타지에서 올라와 서울에서 유학하시는 거 같으시던데... 타지생활하면서 아프면 참 서글프죠
    얼릉 나으시길 바랍니다.

    저도 어제 근무 서면서 제가 주장한 바를 어떻게 좀 더 실질적인 논의가 나올 수 있는 방향으로 이끌어 갈 수 있을까를 고민해봤는데... 워낙 이론적인 격차가 큰 거 같습니다...ㅋㅋㅋㅋㅋㅋ
    주말에 좀 더 고민해보면서 어떤 식으로 제시해야 제가 하는 바가 명료해질 수 있는지 고민해보겠습니다.
    여러가지 살을 붙여보았는데, 어차피 결국 철학의 순수성에 대한 얘기라 사례사냥에 불과한 느낌이라서요. 조금 더 생각해봐야할 것 같습니다.
    다만 제가 첫번째 답변에서 좀 더 설명을 듣고 싶은 부분이 있긴합니다.(답변에서 어떤 차원인지 구체적으로 제시해달라고 하셔서 좀 더 물어보려고 합니다)
    저는 칸트의 업적이 선험적인 것을 통해 보편성을 이끌어 낸 부분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칸트가 굉장히 주관주의적이면서도 유아적이지 않다는 그것이 바로 칸트의 특별함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공동체주의(혹은 사회지향적이라고 표현해도 되겠죠)를 비판하는 부분은 그것이 설명력이 떨어진다는 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 실제로 인간의 사회적 경험, 인식 및 행위를 설명함에 있어서 타인의 존재 및 사회적 맥락은 필연적이라는 것입니다"라고 말씀하셨는데, 사회적 맥락이 설명에는 필연적일 수는 있지만, 그 자체로 치환될 수는 없다는 말입니다.
    또한 그러한 것들은 가치기준에 있어 모호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제 의견입니다.
    제가 원래 이것에 대한 예를 들려고 한 부분은 안셀무스의 신-존재 증명 논변이었습니다.
    신-존재 증명이 사실 현대적으로는 매우 쉽게 논파되는 것처럼 보이는데,
    조금만 매락으로 들어가보면 생각할 거리가 많을 뿐만 아니라 현대적인 관점의 논파는 부당한 요구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에 대한 참-거짓 여부는 맥락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맥락에 의해 밝혀진 '새로운 문제'의 해답에 의해 결정되는 것입니다.
    문제를 요약하자면, 사회적 맥락을 중요시하고 사회참여를 중요시하는 것에 대한 토대가 조금더 확고했으면 좋겠다는 것입니다.
    칸트 이후로 훗설이 이 부분에 노력했다고 제가 좋아하는 동기는 말하는데, 그 친구 말을 들어보면 그렇게 성공적으로 보이지는 않는다는 게 제 입장입니다.
    사회를 기사실화시키지 않고 정당화시키기를 어떻게 하냐가 문제냐는 겁니다.
    또한 공동체주의로 조금만 더 기울면 독재 등이 나오기가 쉽죠. 집단지성을 강조하지만 집단지성은 독립적으로 사고할 때 발휘되고 단체로 좀만 넘어가면 특정 주도세력이 담론의 헤게모니를 잡는 경우가 허다합니다.(이에 대한 심리학의 실험들은 인상적이었습니다)

    사실 비그레이님 글 중에 루소 전공자와의 대담에서도 상대방 분이 루소가 이 부분을 고민했다고 말씀하시는 부분이 있는데, 이게 제가 원래 갖고있던 생각(이때까지 들어온 루소에 대한 얘기)과 많이 달라서 급 관심이 생기기도 했습니다. 블로그에 좋은 글이 참 많은 거 같습니다. 어제 근무스면서 "후기자본주의, 대중민주주의, 복지국가, 민족적 정체성 [130211]"를 뽑아봤는데 정말 재밌더군요. 전역하고 복학하기 전까지 어떤 부분을 공부할까 고민하고 있었는데, 비그레이님의 도움을 받으면 참 좋을 거 같습니다. 관심분야가 다르면서도 비슷한 부분이 많아 참 신기합니다.

    12월이 됐다고 12월이 티내는지 갑자기 날씨도 추워지고, 눈도 내리는 게 몸 조심해야할 것 같습니다.
    그럼 건강하시길 바랍니다^^

    • BeGray 2014.12.04 11:16 신고 Modify/Delete

      감기랑 위장염이 겹쳐서 어제 하루 종일 쉬느라 답을 못했네요(결국 이 모든 근본원인은 대학원생의 삶의 전제조건인 과로입니다^^;;;).

      음...먼저 사회적 맥락/사회참여의 필연성을 어떤 방향에서 설명을 요구하시는지 조금만 더 세분화해주시면 좋겠네요. 그러니까 인식론 혹은 사실/정의definition의 차원에서인지, 아니면 당위적 입장으로인지 등등요. (혹은 공동체주의에는 칸트가 말한 인간 실천이성에서 나오는 정언적 명령과 같이 불확실한 규칙이 없지 않느냐는 비판인가요? 아니면 사회적 맥락만으로 인간주체가 전적으로 설명되지는 않는다는 것?) 지금 현준씨께서 제기하신 '공동체주의'에 대한 의문이 어느 지점을 향하는건지 제게 곧바로 이해되지가 않아서, 그 지점이 조금 더 분명해지면 맞는 답을 드릴 수 있을 듯 합니다^^


      질문과 별개로 몇 가지 포인트는 따로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아요 ㅎ

      1) 앞서도 말씀드렸듯 '개인주의 대 공동체주의'라는 구도 자체가 (영미쪽 철학의 윤리학 계열에서 이런 용어를 쓰나요?) 제게는 불충분하게 보입니다. 딱 미국식 자유주의를 기저에 깔고 만들어진 구도 같달까요^^;; 실제 근대의 각종 (대중)정치적 이데올로기들 중에 저 구별만으로 유의미하게 설명될 수 있는 건 자유주의를 제외하고는 없지 않나 싶습니다(자유주의-(벤담 식)공리주의의 핵심은 그것이 근본적으로 인격과 신체의 동일성을 상정한 개인을 자유의 단위로 놓는다는 것이니까요). 예컨대 교회의 지배 하에서의 삶, 개개인이 덕성을 매개로 공동체와 연결되는 공화주의적 전통, 필머 경 등이 주장한 가부장적 왕권, 절대군주 혹은 주권자에 모든 신민이 복속되는 절대주권론, 노동조합/협동조합운동, (고전적) 맑스주의, 천년왕국운동 등등 (이름은 다소 제가 자의적으로 붙였습니다) 종교개혁 이후에도 근대 세계에서 발견되는 다양한 정치 이데올로기 중에 그 기준만으로 유의미하게 설명될 수 있는 입장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더불어 오늘날 당위로 등장하는 다양한 정치/사회적 입장에도 맞지 않고요. 아마 극단의 자유지상주의자들이나 파시스트/교권론자들을 제외하고는 개인과 공동체가 함께 중요하지 않다고 이야기하는 입장은 없을 겁니다. 중요한 건 그것들을 어떤 논리적 구조 위에서 배치하는가에 있겠죠 ㅎㅎㅎ 그래서 "공동체주의로 조금만 더 기울면~허다합니다"에서 말씀하신 내용은 실제로 사상과 이데올로기를 공부하는 사람들에겐 받아들여지지 않을 내용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겠네요.

      지금 당장 정리가 안 되더라도 이후에 입장을 정의하실 때 한번쯤 고민해보시면 좋겠습니다.


      2) 주관주의와 보편성을 결합시키려는 시도 자체는 비교적 일찍부터 있어왔습니다. 데카르트...가 조금 애매하다면, 칸트적인 작업, 즉 인간 인지구조의 보편성을 근본적인 차원에서 먼저 설명하려고 한 텍스트로 우선 로크의 <인간오성론>_An Essay concerning Human Understanding_을 꼽을 수 있으니까요. 거의 대부분이 반론을 상정하고 답변하는 것을 반복하는 형식이다보니 중언부언하는 부분도 많고 논리가 그렇게 깔끔하지는 않은, 조금 간단하게 글쓰기가 지*맞은 텍스트입니다만, 어쨌거나 인간 각각이 구체적으로 생각하는 내용은 다 다른데 그 구조는 무언가 동일한 게 있지 않겠냐, 그러면 그 구조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와 같은 질문이 <인간오성론>의 가장 깊은 곳에 깔려있음은 의심할 수 없습니다. 더불어 언어에 대한 설명 등에서 이미 인간이 사회적인 맥락 위에서 활동할 수밖에 없음을 초보적인 형태로나마 이미 언급하기 시작하죠.

      조금 크게 말하면 17세기 후반~19세기 전반까지 인간 의식을 설명하는 철학적 입장들은 대체로 개인의 주관적인 심리/인지구조와 전체 공동체적인 삶을 어떻게 조화시킬 것인지의 문제를 다룹니다. 스미스의 <도덕감정론>이 대표적이고 루소도 마찬가지죠. 심지어 종종 잊혀지곤 하지만 칸트도 <판단력비판>에서 미의 판단기준으로 공동체라는 요소를 끌어들이고 (스미스를 다소 기계적으로 인용하는) <윤리형이상학>에서 윤리와 사회(법이론)의 문제를 다룹니다. 단지 그 내용이 그렇게 충실하지 않은지라--예를 들어 아담 스미스의 독자라는 측면에서만 판단하면 칸트보다 헤겔이 훨씬 뛰어난 독자입니다--지금은 마치 주관주의적 인식/윤리만 설정한 것처럼 읽힐 뿐이죠. 그의 시도가 성공적이었던 아니던 어쨌든 그런 시도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는 건 부정할 수 없습니다.

      3) "후기자본주의~"는 군대에서 검열의 의식하며 꽤 압축적인 메모형태로 써서 저 자신이 그 글에서 표현한 내용에 부여하는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흥미있게 읽어주는 분이 없었는데, 현준 씨가 재밌게 읽어주셨다니 기쁘네요^^. 대략적으로 말하자면 비판이론의 문제의식을 거슬러 올라가서 보편선거의 도입으로 인한 대중정치 및 대량생산/소비를 위한 노동자=소비대중의 등장을 (그리고 그러한 노동계급을 묶어 통제하는 기능을 수행하는 기제로서 대중문화, 민족적 정체성과 복지국가적인 정책이) 함께 생각할 때만 근대와 후기 근대의 문화(사회)/정치/경제를 연결시키는 비판이 가능하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때는 읽지 않았지만 후기 푸코의 작업들을 접한 지금에도 저 입장이 제게 여전히 유효하다고 말할 수 있겠군요 :) 어쨌거나 서로 다른 영역에서 공부한 것들을 연결시키는 게 저의 주된 공부방향이기도 합니다--바로 그 방법론을 위해 변증법 전통을 공부하기 시작했습니다. 여튼 읽으시면서 흥미롭게 여겨지는 지점들이 있다면 언제든 말씀해주세요^^


      눈...이라, 작년 이맘때 열심히 눈을 쓸고 있었는데, 부디 현준씨에겐 그러한 노동이 적게 부과되기를 바랍니다 ㅠㅠ

  8. 개선비 2015.08.02 23:56 신고 Modify/Delete Reply

    생각나서 다시 읽었는데 역시 명글이네요. 지금이라면 다른 맥락에서 비판했을 것입니다. 사실상 대부분은 이제 공감이 가거든요.

    • BeGray 2015.08.03 02:44 신고 Modify/Delete

      공감이 가는 입장이 되었다는 게 다행인지 불행인지 알 수가 없군요...ㅎㅎㅎ

    • 개선비 2015.08.03 03:40 신고 Modify/Delete

      ㅋㅋ 그만큼 설득력이 있다는 겁니다. 전 설득력이 있는 것만 지지합니다. 분명 직업과 취미의 이분법은 근대적 맥락에서 보아야합니다.

  9. ㅇ? 2017.05.03 08:42 Modify/Delete Reply

    여기서 말하는 삶에 대한 앎을 추구하는 "인문학 한국 서적"은 별로 본 적이 없어서 그다지 와닿지 안네요.
    작가 자신의 개똥철학이나 힐링 사기치는 인문학 말고 진짜 내 삶을 되돌아보게 만드는 책은 외국서적(성공하는 삶이 왜 진리냐고 묻는 책이라든지)에서나 조금 보았지, 한국 서적들 중에서는 (최소한 대형 서점에서) 본 적이 없네요. 그나마 자본주의적이고 효율성만 외치는 삶을 비판하는 한국 책은 사회학 관련 서적에서나 조금 보았지 인문학 서적은 좀 빈약한 것이 아닌지 의문이 듭니다.

    • BeGray 2017.05.09 23:12 신고 Modify/Delete

      한동안 블로그를 제대로 들어와보지 못해서 답변 늦은 점 죄송합니다^^;; "삶에 대한 앎"을 무엇으로 정의하느냐에 따르겠지만, 우리가 어떤 종류의 사고체계를 갖고 어떤 언어를 사용해왔는지, 어떤 감성과 문화에 따른 실천을 해왔는지를 다루는 작업들은 결코 적지 않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자본주의적이고 효율성만 외치는 삶을 비판"은 오히려 저는 그 자체로서는 학술로서의 인문학 혹은인간과학이 반드시 다뤄야 하는 목표는 아닐테고요. 쉽게 말해 지금까지 사회과학이든 인문학이든 학적으로 쌓아온 축적은 세계를 "진짜로 삶을 돌아보게 만드는" 또는 "자본주의적이고 효율성만 외치는 삶을 비판"하는 것 대 "힐링 사기" 혹은 성공한 사람이 되라는 식의 구도로 나누는 것보다 훨씬 복잡하게 바라보는 경향을 추구해왔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말씀하신 종류의 장르는 이제 학술이라기보다는 각자의 삶을 성찰하고 좋은 삶을 고민하게 만드는 별도의 글쓰기로 나아갔고, 몇몇 문학, 철학 수업을 빼면 학적으로 다루지 않죠. 그래서 어느 부전공을 택하시든 원하시는 바를 해당 전공에서 얻는다는 보장이 없지 않을까 합니다^^;

  10. ㅇ? 2017.05.03 08:46 Modify/Delete Reply

    여기서 말하는 삶을 성찰하는 인문학은 사회학에 상당부분 흡수된 것이 아닌가요. 사회학과 인문학의 차이라고 할 만한 부분이 있을까요

  11. ㅇ? 2017.05.03 10:29 Modify/Delete Reply

    요즘 인문학이나 사회학 부전공할까 생각하고 있는 입장에서 정말 궁금한데, 시간나면 답변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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