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병철의 이데올로기: <오늘날 왜 혁명은 불가능한가?> 비판적 논평.

Critique 2014.10.17 01:14

원문주소: 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660120.html (기사 하단 참고)



"신자유주의 지배체제는 전혀 다르게 짜여져 있다. 여기서는 체제를 유지하는 권력이 더이상 억압적이지 않고, 유혹적이다."


나는 한병철의 저술 및 그 주장에 대해 지금까지 어떠한 지적 매력도 느껴본 적이 없다. 이번 글을 통해 내 입장을 수정하지 않아도 됨을 확인하게 되어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그가 현실에 대한 분석이 아닌 관념론적인 스케치에 머물고 있음은 이 기고를 통해 분명히 드러난다. 오늘날 남한사회--다행히도 그는 남한 사회를 자신의 주요한 사례로 들고 있는데--를 살고 있는 이들 중 지배적인 권력이 억압적으로 작동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극단적으로 순진한 이들을 제외하고는 드물 거다. 신자유주의적 권력은 개개인의 자기소진을 유발할 뿐 (그래서 저항적 다중multitude의 발생을 불가능하게 만들 뿐) 직접적으로 억압적인 권력이 작동하지 않는다는 한병철의 분석은 당연히 남한사회의 현실과 정면으로 충돌한다. 그 자신도 이를 아예 무시할 수 없었는지 남한사회를 언급하면서 최초의 신자유주의적 정책 도입기에 억압적 권력이 작동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듯 물러선다--그리고 오늘날 가시화된 지배권력의 억압적 성격을 지적하는 대신 마치 오늘날의 남한사회에는 시민주체들의 가열한 자기소진 및 서로 간의 적대만이 남아있는 것처럼, 한 마디로 억압적이지 않은 권력만이 남아있는 것처럼, 그래서 실질적으로 어떠한 저항도 불가능한 것처럼 이야기한다.



직설적으로 말하자. 왜 한병철이 심지어 보수적인 사람들을 포함해 수많은 이들에게 인기를 끄는 것일까? 나는 그 이유 중 하나로 그가 사회를 분석하는 대신 몇 가지 인상에 기초한 스케치를 그린다는 것, 사회의 실질적인 지배구조를 논하는 대신 도래한 파국을 '미학화'한다는 것을 꼽고 싶다; 한 마디로 그의 분석은 진정으로 지적인 것, 진실을 직시하는 것과 거리가 먼 이데올로기에 불과하다. 그는 위험을 이야기하되 위험을 극복하기 위해서 우리가 감수해야 하는 실질적인 어려움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는다. 권력을 이야기하지만, 어느새 권력은 슬쩍 사라지고 거기에 무력화된 주체만이 남는다. 푸코가 권력을 편재하게 만들어 저항을 무력화시켰다는 오해를 그렇게나 많이 받았지만, 사실 한병철의 논의야말로 진정으로 권력의 전능화와 주체의 무력화에 가깝다; 그리고 그 일관된 입장에서 그는 또 다른 대안적 모델이 (물론 나는 리프킨의 주장이 실제로 유효한 제안인지 검토하지 않았다) 불가능함을 주장하며 그 끝은 전혀 지적이지 않은 수사들로 채워진다. 그는 지배가 무엇인지, 지배체제가 무엇인지 전혀 분석하지 않는다. 요컨대 단지 파국이 왔고, 우리는 이 파국을 (마치 <피로사회>의 후반부에 나오는 기분좋은 피로처럼) 다소 마조히스틱하게 즐기기만 하면 된다. 이처럼 매력적인 '종말론'이 인기를 끄는 게 지금의 한국사회에 특별히 놀랄 일은 전혀 아니다. 사람들이 지적인 분석과 고통스러운 실천보다는 이데올로기가 제공하는 안락함에 파묻히는 건 흔히 있는 일이니까.



신자유주의적 지배체제를 가장 명확하게 드러내는 남한에 대한 구체적인 분석을 조금만 시도해보면 한병철의 논리를 완전히 뒤엎는 건 전혀 어려운 게 아니다(나는 남한 "사회"라고 한정짓지 않는데, 왜냐하면 저 단어는 한병철이 사용하고 있는 것처럼 "국가"/"정부"라는 주체를 사실상 지워버리기 때문이다!). 분명 그가 지적하듯 남한의 시민주체들이 경쟁구도에 놓여 '소진'될 때까지 노동을 착취당하는--물론 그는 이 노동의 결과물이 실제로 누구의 이익이 되는지는 이야기하지 않는다--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신자유주의적 자기경영주체"의 탄생과 함께 이러한 조건을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현재의 조건을 유지하기 위해 작동하는 지배권력의 작동을, 즉 국가와 대자본의 결탁을 봐야만 한다.


 오늘날 한국의 정치경제적 구조에 조금이라도 익숙한 사람은 잘 알고 있듯이 기본적으로 우리는 대기업 위주의 수출주도형 체제에 속해 있다. 쉽게 말해 시민주체들의 노동력을 착취해 대자본에 부와 자원을 집중하고, 대신 이렇게 얻은 이윤을 (낙수효과 등에 따라)  시민주체에 재분배한다. 98년부터 지금까지 일어나고 있는 일들의 요점은 자본의 국제적인 경쟁압력의 심화에 따라 부가 대자본으로 집중되는 경향은 가속화되는 반면 집중된 부/이윤의 재분배는 심각하게 줄어들었다는 것이다. 비유컨대 오늘날 한국의 정치경제적 구조는 낙수효과가 아니라 뿌리로부터 물과 영양분을 한껏 빨아들여 맨 윗가지의 꽃을 피우는데만 집중하는 나무에 조금 더 가깝다. 이때 노동착취를 가속화시키기 위해 (한병철이 말한) 신자유주의적 경쟁구도의 심화가 제공된다. 즉 실업자들, 산업예비군들의 폭증에 의해 자본가들은 더 적은 비용을 지불하고 더 많은 것을 착취한다. 당연히 반작용으로 저항이 발생하는데, 이를 무력화시키기 위해 (시민주체들의 원자화를 촉진시키는 이데올로기와 함께) 자본과 결탁한 국가가 전면에 등장한다. 오늘날의 정부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국가/정부는 직접적으로 시위를 진압할 뿐만 아니라 정치적 저항세력들을 감시 및 억압한다. 전교조 및 노조를 포함한 전통적인 '중간세력'은 합법적이거나 법을 우회하는 갖가지 수단을 통해 공격받는다. 이를 억압적인 권력이라 부를 수 없다면 우리는 사전에서 억압이라는 단어 자체를 지워야 할 것이다.


 한병철이 말하는 '소진된 주체'는 적어도 남한의 맥락에서는 저항을 분쇄시키는 원인만이 아니라 분쇄된 저항의 결과물이기도 하다. 몇 차례의 대규모 반정부시위는 국가권력의 대처로 인해 무위로 돌아갔으며, 선거를 통해 정권을 교체하려는 시도는 실패했고(물론 이 선거에 국가정보기관과 군대의 직접적인 개입이 있었음을 기억하자; 여기에서도 권력은 충분히 가시적으로 움직이고 있다!) '합법적인' 권력을 틀어쥔 우파들은 자본의 시민사회에 대한 착취를 보다 강화하기 위해 직접적으로 활약한다; 휴일수당을 삭감하고 연장노동시간을 늘리는 것, 한 마디로 더 많이 일하고 더 적게 받으라는 의지가 선명히 드러난 법의 추진은 바로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단순히 무한경쟁구도만이 아니라 이러한 패배감과 무력감이 사람들을 소진burn-out시키는 것이다. 오늘날의 정치경제적 구조가 가속화된 착취와 생활수준하락을 통해 행복은 물론 생존 자체를 위협받는 이들을 양산한다면, 지배권력의 역할은 시민주체들을 정치적 저항의 주체가 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신자유주의적 지배체제에서 (가라타니 고진의 표현을 빌리면) 자본=국가=네이션은 이데올로기와 가시화된 권력의 층위 모두에서 능동적으로 시민사회의 주체화를 억압한다.


 한병철은 여기에서 자본과 국가의 실질적인 작동을, 다시 말해 억압을 지워버린다. 남는 것은 주체가 되지 못하는, 곧 착취대상으로만 존재하는 시민들 뿐이다. 억압 및 억압의 주체가 지워진 한병철의 이데올로기적 세계관에서 유일하게 남은 항은 (주체가 되지 못한) 시민-덩어리들일 뿐이며, 단 하나의 항만 존재하는 세계에 어떤 실질적인 저항이나 사회의 변혁을 이야기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 사태의 변증법적 전개는 모순을 설명하기 위한 최소 두 개 이상의 항을 요구하는데, 한병철에게는 오로지 시민-덩어리들만이 남아있으니 이 세계의 종말을 제외하고는 그가 무엇을 이야기할 수 있을까; 그의 '분석'에서 대안의 존재는 논리적으로 또 구조적으로 불가능하다. 이러한 체제를 만들어낸 권력과 제도, 자본의 작동에 대한 논의도 있을 수가 없다. 그가 신자유주의는 맑스주의로 분석될 수 없다고 말하는 건 당연하다; 애초에 정치경제적인 영역, 물질적인 것을 다루지 않는데 맑스주의적 분석이 어떻게 존재할 수 있겠는가? 자연스레 한병철의 충실한 독자들은 실질적으로 사회에 개입하는 지배권력의 작동을 망각하며 이미 도래한 파국에 슬퍼하거나 즐겁게 살아가거나 할 수 있을 뿐이다(그가 <피로사회>에서 피로가 원자화된 주체들을 갈라놓는 간극을 무력화시킬 수 있다는 독특한 대안을 이야기할 때 그는 '묶음'이라는 단어에서 기원한 파시즘에 한걸음 더 다가간다). 이게 이데올로기가 아니면 무엇이란 말인가?




 결론은 무엇인가? 쉽지 않고 고통스러운 일이지만, 한병철이 반-유물론적으로 떠드는 것과 달리 우리에겐 사태를 이해하고 변화시킬 가능성이 실제적으로 존재한다. 이데올로기와 물질의 층위 양자에서 우리를 탈-주체화로 이끄는 지배권력의 작동을 직시하고, 그러한 권력을 가능하게 하는 장치와 실천을 무력화시키면 된다(굳이 신자유주의에 대해 이론적인 파악을 도와주는 사상가가 필요하다면, 2014년의 한병철보다 1978년의 미셸 푸코의 강의록들이 훨씬 도움이 된다--<안전, 영토, 인구> 및 <생명관리정치의 탄생>; 훨씬 짧은 분량이고 도식적이지만 사토 요시유키의 <신자유주의와 권력>도 좋은 정리다). 적은 분명하다. 맑스가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교훈은, 그게 신자유주의건 고전적 자유주의건 간에 자본주의는 필연적으로 사회 내 지배자와 피지배자 사이의 분할선을 그린다는 것, 그래서 그렇게 구조적으로 만들어지는 사회적 적대와 모순을 직시하고 그로부터 계급투쟁의 계기를 이끌어낼 수 있어야한다는 것이다. 나는 모두가 굳이 맑스주의자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할 생각은 없으며, 동시에 지금 당장 내 글을 읽는 사람들에게 자본주의를 포기할 준비가 되었냐고 물을 생각도 없다. 요점은 지금 우리는 사람이 살만한 세상에 살고 있지 않으며 세상을 이렇게 만드는 구조가 존재하고 그 구조는 바뀔 수 있고 바뀌어야 한다는 것이다(나는 적어도 단기적으로 피케티주의자들--그런 게 있다면--하고도 얼마든지 협력할 수 있다). 



덧. 한병철의 주장이 소개될 때 이제 좀 비판적인 논평이 붙어서 들어왔으면 좋겠다. 우리는 우리의 지성이 모욕받지 않도록 요구할 권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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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박은하 2014.10.17 01:44 Modify/Delete Reply

    오 흥미진진 재밌네요. 특히 마지막 줄 ㅋㅋ 아오 진짜 우리는 해외석학 앞에 한국사회의 문제를 신탁받기 좋아하고 그 다음은 해외에서 인정받는 한국인 학자. 그런 이유로 세월호 해오학자 선언....이런 거 안 좋아하고 기사쓰고 싶지도 않음 ㅠ.ㅠ

    인용한 문장을 뒤집는 자본-시민 사이에서 국가의 역할, 그것도 아주 적극적인 역할이 있다는 대목이 폐부를 팍 찌르네요. 특히 한국은 더 그렇고. 근데 난 한병철이 제레미 리프긴 비판한 맥락은 동의해요. '혁명은 없다'는 수사가 왜 들어가야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저런 공유경제 등등이 일종의 혁명처럼 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는데 동의합니다. 그 단적인 것이 내가 쓴 시민청....-_ㅠ

    국가는 계속 노동을 소수로 몰아넣고 국가와 직접 대면하는 노동/철거민 등등의 역할을 일반 시민들로부터 끊임없이 분리해내고, 자기경영자가 돼 버린 시민들은 딱히 남구경 하듯 이를 보는 현상은 분명 있기 때문에. 특히 한국에서 경찰국가로서의 면모는 신자유주의보다 전통적인 북한이슈에 대응하는 측면이 강하다고 생각하고요.

    • BeGray 2014.10.17 01:51 신고 Modify/Delete

      리프킨을 까든 말든 상관은 없는데 까는 논리가 치명적인 문제가 있는 거니까요 ㅎㅎㅎ 다만 저는 새로운 사회모델을 생각할 때 확실히 경제적 삶을 위한 새로운 모델에 대한 고안이 필요하다고는 봅니다.

      경찰국가와 북한을 이야기할 때, 사실 저는 북한 때문에 경찰을 강화한다기보다는 (푸코가 권력과 장치의 관계를 지적한 것처럼) 북한이라는 이유로 권력 자체를 강화시키는 방향으로 흘러간 측면이 있다고 봐요. 그 결과가 우리가 마주하는 감시와 시위차단 시스템인거죠.

  2. 박은하 2014.10.17 01:57 Modify/Delete Reply

    앗 이 글의 주제에서 좀 벗어나는 거 같지만, 한국의 보수세력은 북한 때문에 경찰을 이용한다고 생각했는데 최근에 보니 그들은 진짜 두려워한다는 쪽으로 결론을 내려가고 있습니다. 촛불 때 엠비정부의 두려움처럼. 요즘은 진짜 두려워한다 가설로 가는 중이지요. 그 만큼 자신없고 한심 한 정부라는 반증...그 두려움의 결과가 성찰이 아니라 손쉽게 "저 놈들 종북세력 때문에 그래"로 손쉽게 해석해버리는 그 끔찍한 단순함. 노조를 대하는 기업의 태도도 마찬가지구요. 물론 이익계산이 없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차가운 계산만으로 할 수 없는 그 원형의 또라이성이 있음.....ㄱ-ㄱ-ㄱ-

    • BeGray 2014.10.17 02:03 신고 Modify/Delete

      아, 푸코가 말하는 건 이런 거예요. 얘들이 무슨 의도를 갖고 움직이든(자신의 목적을 진지하게 믿든, 믿지 않든), 그게 실제로 권력을 강화시킨다는 '효과'가 중요하다는 거죠. 그리고 당연히 권력/지배분석은 어떤 '의도'에 따라 장치들이 나왔나가 아니라 일단 배치된 장치들이 어떤 '효과'를 내는지를 봐야 한다는 거고. 저는 그게 어설픈 맑시스트 뺨치는 푸코의 '유물론적' 태도라고 생각합니다 ㅋ

  3. 행인 2014.12.15 01:10 Modify/Delete Reply

    한병철에 대한 '비판'도 아니고 '논평'도 아닌 글인듯 보입니다만... 에두른 푸코 찬양은 좀 자제해 주시길 바랍니다.

    • BeGray 2014.12.15 14:41 신고 Modify/Delete

      비판이 왜 비판이 아니고 논평이 왜 논평이 아닌지에 대한 최소한의 설명이 없으면 행인 님께서 기초적인 독해력을 갖추셨는지--그리고 "비판"과 "논평"에 대한 나름의 정의를 갖고는 있으신지--여부를 제가 확인할 길이 없지요. 저는 지금으로서는 그에 대해 회의적입니다만^^; 어쨌든 지적 대화를 수행하는 사람에게 필요한 최소한의 예의가 결여되셨다는 사실은 잘 알겠습니다.

      +

      푸코든 다른 누구든, 유효한 지점이 있는 설명을 내놓았다면 그에 맞는 대우를 하는 게 당연한 법입니다. "찬양"이라는 그닥 유효하지조차 않은 무성의한 멘트는 사상의 앞에서 그에 합당한 대우를 하기 위한 훈련조차 되어 있지 않은 미숙함의 근거라는 촌평에 자유롭지 않을 듯 보입니다. 자제해 달라니, 그 무례함은 도대체 어디서 배워오신 건가요?

    • 행인 2015.03.18 02:07 Modify/Delete

      여기에는 기묘한 ‘전문가’가 있다. 그는 언제 어느 때라도 모든 문제에 대해 즉각 ‘해설’을 곁들인 ‘의견’을 발표한다. 마치 하느님과 같은 존재다. 어쩌면 하느님 이상 가는 존재라고 해야 할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아무리 이쪽에서 요구해도 때로는 대답을 ‘보류’하여 발표하지 않는 경우가 더러 있기 때문이다. 바로 그 때문에 신학자가 생겨나서 어떤 경우에는 하느님이 응답을 해주었고 어떤 경우에는 응답을 주지 않았다든지, 응답하지 않는 것은 어떤 의도와 배려에 의한 것이었는지와 같은 문제를 내놓고 이리저리 추리하여 해석하게 되었음에 틀림없다. 아무튼 상대방이 절대적인 ‘완전자’이기 때문에 깜빡 잊어버려서 대답하지 않았다든가 하는 일은 절대로 없다. 모든 행위에 의미가 있기에 엄밀히 추리하면 어느정도까지는 그 의도하는 바를 알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물론 절대자이기 때문에 인간의 지혜로 이를 다 헤아릴 수는 없다. 그래서 신학자는 어디까지는 알 수 있고 어디까지는 알 수 없는가라는 지식의 한계 문제를 풀어보려 하기도 한다. 그리고 그것의 발전 결과, 예를 들어 파울 틸리히(Paul Tillich)처럼 신과 인간 사이의 ‘변증법적 대화’의 논리까지도 설명하기에 이르렀다. 이처럼 하느님은 신학자를 낳고 신학자는 형식적 정합성을 추구하는 논리학을 낳고 논리학은 법규범과 그것의 해석학을 낳고 더 나아가 그런 종류의 논리적 사고의 한계에 대한 사고를 낳았으며, 이어서 ‘대화’의 논리는 ‘역사적 상황’ 문제까지도 생각하게 되었다. 하느님이 가져다준 것은 순전히 지적 영역에만 한정하더라도 이 정도다(실제로는 아직 더 많이 있겠지만 생략한다). 엄격히 말하면 물론 이것들은 다 ‘신’과의 대결을 통해서 인간이 만들어낸 것이다.
      그런데 우리의 기묘한 ‘전문가’는 과연 어떠한가? 그는 어떤 문제든지 수요(요구)에 따라 즉각 대답할 뿐 ‘대답하지 못하는 경우’란 거의 없어서 숫제 하느님 이상의 존재가 되어버렸다. 따라서 이 같은 존재에 아무리 대결해봐야 논리적 연역력이든 해석학이든 변증법이든 그 무엇도 생겨날 리가 없다. 산 몸뚱이 그대로 높이 승천하여 하느님이 계시는 천국까지도 넘어서서 ‘새로운 경지’를 ‘개척’한 분들이다.
      이러한 기묘한 ‘전문가’인 ‘유식자’는 어떤 경우에는 ‘대학교수’의 이름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어떤 경우에는 ‘평론가’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하며 또 어떤 경우에는 ‘문학자’의 명함을 가지고 사람들 앞에 등장하기도 한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일정한 방법으로 일정한 대상을 연구하는 전문연구자인 건 아니다. 때로는 ‘평론가’로 불리지만 제대로 된 저널리스트도, 평론가나 비평가도 아니다. 물론 제대로 된 문학자도 아니다. 그는 스스로 조사하고 살펴보고 걷고 읽고 정리한 바를 토대로 가능한 한 객관적으로 보고하려고 노력하는 자가 결코 아니다. 그런가 하면 자신의 입장을 확실히 정하고 그 각도에서 사회적 현상에 대해 수미일관된 설명을 하려고 노력하는 것도 아니다. 따라서 당연히 비판도 아니고 논평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그는 그저 사물에 대해 말하고 문자를 쓰는 일에 있어서 용감하게도,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윤전기와의 경쟁을 결의하고 그 일에 대단한 인내를 갖고 매일매일 매달리고 있는 사람이겠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그게 아니다. 그저 뭔가 말하는 일 그자체에 인내를 갖고 매달리는 이들은 오히려 프롤레타리아인 신문팔이, 연극표 판매원, 상점의 광고선전원, 그리고 아나운서 들이다. 그저 문자를 쓰면서 부지런히 일하는 이들은 필경사, 교정원, 간판쟁이, 필기 담당 등의 노동자들이다. 이런 사람들은 소박해서 진지하게 자기 노동의 개선 방법을 궁리한다. 판매원들은 이미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주목을 끌었던 바와 같이 어떤 리듬으로 소리를 지르면 길가는 사람들의 관심을 끌 수 있을까를 궁리하고 있으며, 필경사들은 가로쓰기와 세로쓰기에 따라 글자 형태를 어떻게 바꾸면 읽기 쉬운지에 대해 명확하고도 상세한 지식을 스스로 획득하고 있다. 그런 다음에 그저 일편단심 궁리의 결과를 실천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기묘한 ‘전문가’는 그렇지 않다. 단지 연구나 보고도 아니고 비평이나 예술도 아닌, 그 어떤 종류의 ‘리뷰’를 되풀이함으로써 이 세상의 표층에 떠오르고 또 그 떠 있는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그 ‘리뷰’를 계속할 따름이다. 그러므로 이 같은 ‘리뷰’에서는 절대로 자진해서 발을 빼는 일이 없다.
      이러한 기묘한 ‘전문가’는 지금 남한사회의 좁은 표층에 넘쳐흐르는데, 기묘한 ‘리뷰’를 보여주면서 역사와 인민에 의해 쓰레기통에 버려질 때까지 어떻게 해서든지 버티려 하는 듯 보인다. 그는 ‘논단’이라는 가공의 단을 마치 실재하는 것인 양 좇고, 현실에 대해서는 하등의 긴장감도 없는 말만 산더미처럼 모으고, 서로 손을 맞잡으며, 얼마 안 되는 수의 세력이라도 나타나면 진심을 다하는 태도를 취하며 그 앞에 머리를 조아린다. 그런 주제에 사회주의 국가의 관료주의나 개인숭배라면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장광설을 늘어놓는다. 또 남한 민주주의자들의 저항에 대해서는 코웃음을 친다. ‘수’만 갖추면 머리를 숙이는 그들에게 어찌 그런 자격이 있겠는가? 사실에 대한 긴장을 결여한 ‘낱말의 집합’에 대해, 어떤 사람은 ‘그러니까 그건 없는 거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현실에 대해 아무런 적극적인 (방법적) 기능조차 가지지 않으므로 그것은 비(非)존재인 것이다. 하지만 이 ‘유식자’는 그의 언론이 비존재라고 하는 그 점 때문에 우리가 살고 있는 이 현실 위에 떠 있을 수가 있는 것이다.

    • BeGray 2015.03.18 10:15 신고 Modify/Delete

      행인 님 //

      제가 서 있는 전통은 17-18세기 서유럽에서 나타나는 비평criticism적 글쓰기로부터 기초하고 있고, 제가 직접적으로 참고하고 영향을 받은 가장 중요한 저자들은 프랑크푸르트 학파 1세대 저자들입니다(아도르노가 직접적으로 몽테뉴와 베이컨의 에세이 전통을 재활용하려 했다는 걸 덧붙이겠습니다). 결정적으로 한국에 현존하는 논단과 무관합니다^^;; 그랬으면 이 글이 블로그가 아니라 어느 지면에 실려있지 않겠어요? 본인이 모르면 다 논단,이라고 생각하는 건 식견의 좁음을 의미한 뿐이죠.

      요점은 간단합니다. 제 글 또한 경험과 논증의 (그리고 경우에 따라서 약간의 냉소적 코멘트가 들어간) 결합물입니다. 동의할 수 없으면 동의할 수 없다고 밝히고 논리와 경험의 차원에서 무엇이 문제고 본인의 의견이 무엇인지 적어주시면 됩니다; 저는 그런 대화에 기꺼이 응할 수 있고요. 본인이 제대로 이해할수도, 어떻게 해 볼 수도 없으면 글이 나쁘고, 글이 불투명하고, 저자가 논리를 초월한 거고...등등의 비난--행인 님 댓글에 논증이 도대체 어디 있습니까?--은 오늘날 어디에서든 볼 수 있는 클리셰에 불과합니다; 그리고 저는 그런 어리광에 타협하고 싶지 않군요. 제 글의 논리적 구조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그냥 행인 님의 독서능력과 이해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남한사회의 좁은 표층에 넘쳐흐르는" 필자들의 전형이라서가 아니라요(행인 님의 글을 보면 그런 필자들을 오히려 옹호해주고 싶을 정도입니다!).

      + "프롤레타리아"와 "노동자들"의 "소박해서 진지하게 자기 노동의 개선 방법을 궁리"하는 태도를 말씀하셨는데, 제가 단언할 수 있는 건 저는 행인 님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많은 '노동'을 합니다. 저는 자신이 이해하지 못하는 대상이 노동, 숙련, 훈련을 결여하고 있다고 보는 저 자신감이 어디에서 나오는지 무척이나 궁금합니다만, 어쨌거나 저는 그런 지적인 유치증은 사절입니다. 그런 노동과 숙련이 어떻게 행해지는지 최소한의 이해조차도 하지못하면서 노동자가 어떻고라니,그건 노동에 대한 모독이죠.

      한 마디로 정리하자면, 이해를 못 하면 그냥 지나가시고, 그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저자를 탓하는 대신 본인이 공부를 더 하세요--배움의 시작은 본인의 무지를 인정하는 데서부터 출발합니다. 남들은 그 시간에 책 한권 더 읽고 바짝 공부하는데 댓글로 장광설이나 적는 건 누구에게도 어떠한 도움이 되지 않는 법입니다. 본인이 독해능력이 떨어지는데 저자들이 문제라고 주장하다니, 얼마나 꼴사납습니까?

  4. 소년의 노래 2015.03.19 15:30 Modify/Delete Reply

    begray님//스킵할 댓글은 그냥 스킵하시는 게...ㅋㅋㅋ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이와 관련한 저작 중 서동진씨의 '자유의 의지, 자기계발의 의지'라는 책도 꽤나 흥미로웠습니다. 묘하게도 저자는 피로사회를 '사회 없는 피로사회'라고 평하더군요.

    http://www.dbpia.co.kr/Journal/ArticleDetail/3334594

    • BeGray 2015.03.21 13:01 신고 Modify/Delete

      좋은 글 추천 감사합니다^^. 서동진 선생의 책들은 읽어봐야지 생각만하고 정작 아직 손을 못 대고 있네요. 소개해주신 글을 쭉 읽어봤는데, 저는 저의 기본적인 입장이 글에 표명된 입장과 매우 가까이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5. 소년의 노래 2015.03.22 01:23 Modify/Delete Reply

    아쉬운 대로 서동진님의 블로그 링크하겠습니다. 심심하실 때 음악 들으면서 글 감상하세요. ㅎㅎㅎ

    http://www.homopop.org/log/index.ph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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