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seph Conrad. _Heart of Darkness_ 발제
Critique 2014. 9. 17. 19:17수업에서 발제한 내용. 제목이야 당연히 헤겔에서 따온 건데, 원래의 맥락과는 조금 달리 사용했다. 기본적으로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를 깔고 있는 글이라 <계몽의 변증법>에 익숙치 않은 독자에게는 많은 것이 낯설게 읽힐지도 모르겠다. 시간이 없어 밤새 쓴 글이라 보강을 못한 탓도 있다(그래서 뒤로 갈수록 문장이 마음에 안 든다). 나름대로 원래 생각하는 요지는 표현을 했지만 만족스럽지는 않다. 본문의 이념idea, 대의cause는 모두 작은따옴표('') 안에 넣어 읽는 게 맞다. 대충 "말로우가 생각하는 서구 근대 계몽의 이념/대의" 정도의 느낌으로 이해하면 되겠다. 내가 콘라드/모더니즘을 거의 다루지 않았기 때문에 이 텍스트로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게 얼마나 설득력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참고문헌 목록이 없다. 특히 비평은 수업에서 나누어준 텍스트를 읽었는데, 그 텍스트들 중 서지사항을 바로 알기 어려운 것들이 있어 아예 생략했다. 아체베의 비평이야 워낙 유명한 글이고, 나머지 비평은 내가 그다지 활용하지 않기 때문에 읽기에 크게 무리는 없겠다.
‘모든 소가 검게 보이는 밤’(the night in which all cows are black):
<어둠의 심장>(Heart of Darkness) 발제
1. “there was nothing else to do”(107)1)
치누아 아체베(Chinua Achebe)는 <어둠의 심장>의 인종주의에 대한 고전적인 비평을 다음과 같은 전제 위에서 출발한다. “<어둠의 심장>은 문명을 대변하는 유럽의 반명제로서 아프리카를 ‘다른 세계’로 그려내는 이미지를 투사한다....소설은 평온하고, 휴식을 취하면서, 평화롭게 ‘제방 위에 서식하는 인종에 대해 수많은 세월동안 훌륭히 봉사를 마친 후의 하루가 저물어가는’ 템스 강에서 시작한다”(“Heart of Darkness projects the image of Africa as ‘the other world,’ the antithesis of Europe and therefore of civilization [....] The book opens on the River Thames, tranquil, resting, peacefully ‘at the decline of day after ages of good service done to the race that peopled its banks’ 252). 즉 아체베는 조지프 콘래드(Joseph Conrad)가 유럽 대 아프리카라는 인식구도 위에서 전자를 인간적, 주체적이며 좋은 것, 후자를 비인간적, 대상화되어 있으며 나쁜 것으로 본다고 믿는다.2) 그러나, 설령 아체베가 콘래드의 아프리카 묘사에 이의를 제기한 대목을 전적으로 수용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반드시 전자가 설정한 구도를 충실히 따라야 함을 뜻하는가? 다시 말해 <어둠의 심장>에서 콩고 강에 대비되는 템스 강과 유럽문명은 이미 완성되어 공고한, 손상되지 않는 질서로 그려진다고 볼 수 있을까? 실제로 소설의 서두를 살펴보면 조금 다른 인상을 받게 될 것이다.
<어둠의 심장>의 첫 문단은 템스 강 위에 정박해 있는 넬리(Nellie) 호의 묘사로 이루어져 있다. 콘래드는 단순히 배가 정박해 있다고 쓰지 않는다. 배에 달려 있는 “돛들은 어떠한 펄럭임도 없으며”(“without a flutter of the sails” 103) “바람은 거의 잦아들었다”(“the wind was nearly calm”). 얼핏 보면 마치 풍경화처럼 특정한 순간을 시간의 흐름으로부터 잘라낸 듯한 이미지를 떠올릴 수 있지만, 분명히 시간 자체는 흐르고 있다—“만조에 달하여 [...] 배는 오로지 정박한 채로 조수의 흐름이 바뀌는 때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The flood had made, ... the only thing for it was to come to and wait for the turn of the tide”). 다시 말해 첫 문단에서부터 우리는 어떤 정지상태의 모티프를 마주친다. 두 번째 문단에서 정지 혹은 정체되어 있음의 이미지는 “가만히 서 있고”(“stand still”) “멈추어 있고”(“rested”) “움직임 없이”(“motionless”)와 같은 표현들이 켜켜이 쌓이면서 더욱 두텁고 깨트리기 힘들게 된다. 심지어 공기마저도 “슬픈 어둠으로 응축되어 있는 듯 보인다”(“The air was [...] seemed condensed into a mounful gloom”). 모든 것이 강제로 멈추어진 순간에 사람들은 무엇을 하고 있는가? “나이든 이들 중 가장 중요한 인물인 변호사는 [...] 유일한 깔개 위에 누워 있다. 회계사는 벌써 도미노 한 박스를 가져와 도미노를 쌓으면서 놀고 있다”(“The Lawyer—the best of old fellows [...] was lying on the only rug. The Accountant had brought out already a box of dominoes, and was toying architecturally with the bones”). 배 위의 사람들은 무언가 말을 교환하지만 침묵만이 남을 뿐이다(“We exchanged a few words lazily. Afterwards there was silence on board the yacht”). 이들은 마침내 도미노 놀이조차 그만두고 그저 바라보는 것밖에 할 일이 없다(“we did not begin that game of dominoes. We felt meditative, and fit for nothing but placid staring” 103-04)—심지어 무엇을 바라보는지도 불명확하다. 이 소설이 여러 비평에서 주장하듯 ‘암흑의 대륙 아프리카’를 탐험하는 백인의 이야기라면, 정작 첫 대목에서 우리는 그와 같은 비평적 통념에 잘 들어맞지 않는 상황을 목도하게 된다. 모든 것들은 정체되어 있고, 그 안에서 인물들은 단순히 무력할 뿐만 아니라 무기력하다. 이러한 풍경을 묘사하기 위해 평온하다(“tranquil”)는 형용사가 사용된다면, 우리는 그 표현에 아체베가 의도하지 않았을 체념과 무기력의 정서를 덧붙여야만 할 터이다.
파도와 배와 사람이 모두 멈추어 있는 순간, 시간의 흐름을 나타내는 또 하나의 이미지가 덧붙여진다. 해가 지고 있다. “태양이 낮게 가라앉았고, 달아오른 흰 빛은, 마치 급작스럽게 꺼지기 직전의 상태처럼, 군중을 나지막이 덮는 어스름의 손길에 닿아 사멸할 것처럼 빛도 열도 잃어버린 흐릿한 적색으로 바뀌어 갔다”(“the sun sank low, and from glowing white changed to a dull red without rays and without heat, as if about to go out suddenly, stricken to death by the touch of that gloom brooding over a crowd of men” 104). 앞뒤로 왕복하듯 움직이는 파도를 보며 서술자는 “과거의 위대한 정신”(“the great spirit of the past”)을 떠올리고, 이는 파도와 함께 했을 수많은 ‘영웅들’의 기억으로 다시 이어진다. 그러나 “그것은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that never returned”). 서술자는 바다를 통해 세계로 뻗어나간 이들을 호명하며 “사람들의 꿈, 나라들의 씨앗, 제국들의 기원”(“The dreams of men, the seed of commonwealths, the germs of empires” 105)을 떠올린다. 그리고 마치 촛불을 탁 불어 끄듯, “해가 졌다”(“The sun set”). 태양이 사라진 뒤의 어둠을 등대와 배에서 나온 조명이 다시 밝히는 것과 함께 말로우(Charlies Marlow)의 이야기가 서술자가 환기한 기억들의 뒤를 잇는다. 흥미롭게도 말로우는 (이제 이야기를 듣는 입장에 놓인) 서술자가 떠올린 기억들, 프랜시스 드레이크 경(Sir Francis Drake)과 같은 이들의 이야기를 순차적으로 잇는 대신 오히려 역으로 거슬러 올라가 고대에 영국에 상륙한 로마인들에 관해 말한다. 즉 모험과 정복, 계몽의 역사는 현재로 이어지는 대신 오로지 과거의 기억으로만 존재한다. 그렇다면 로마인과 해적들의 후예들, 현재의 영국인들은 어떠한가?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그들은 더 이상 자신들의 ‘선조’와 같은 삶을 살 수 없다. “우리는 참을성 있게 기다리면서 [도시와 강 위의 풍경을] 향했다—만조가 끝날 때까지 달리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없었다”(“We looked on, waiting patiently—there was nothing else to do till the end of the flood” 107). 만조와 함께 배는 멈추었고 해는 졌다. <어둠의 심장>의 처음부터 끝까지 배 위의 영국인들에겐 오로지 말로우의 이야기를 듣는 것 외에는 어떠한 역할도 주어지지 않는다.3) 서두를 지배하는 정체의 모티프, 바다 아래로 가라앉아버린 태양, 더 이상 뱃사람으로 살아가지 않는 영국인들. 아체베의 거친 이분법이 포함하지 못하는 경향, 곧 쇠락의 분위기가 여기에 짙게 깔려있다.
2. “the cause of progress”(110)
<어둠의 심장>의 실질적인 서술자 말로우는 이러한 쇠락과 정체의 경향으로부터 벗어나 이야기를 이끌어나갈 유일한 희망이기도 하다. 한편으로 “그는 일행들 중 여전히 ‘바다를 뒤따르는’ 유일한 사람”(“He was the only man of us who still ‘followed the sea’” 105), 즉 영국의 선조들과의 동일성을 놓지 않고 있는 유일한 인물이다. 다른 한편으로 또 한 명의 서술자로서 말로우가 수행하는 기능을 보자. (배 위의 무기력한 영국인들 중 한 명인) 바깥 서술자가 어떠한 줄거리도 없이 풍경, 이미지, 기억을 나열하면서 일종의 무시간적 이미지의 퇴적물을 만들어냈다면, 말로우의 목소리가 텍스트의 전면에 등장하면서 비로소 유의미한 서사가 이미지의 퇴적물들을 헤치고 이야기를 이끌어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한편으로 그의 서술이 이야기의 ‘정체된 상태’를 해제하고 움직임의 원동력을 부여할 때, 다른 한편으로 그가 자신의 서사를 로마인에 대한 이야기로부터 시작하면서 어떠한 효과를 만들어내는가도 함께 보아야 한다. 즉 <어둠의 심장>의 가장 바깥에 있는 서사에서 배 위의 영국인들이 선조들의 정력적이고 확장적인 삶을 더 이상 이어가지 못하고 무기력에 빠져 있다면—그들은 여전히 제국주의적 무역에 종사할지 모르지만, 어쨌든 ‘뱃사람’은 아니다—말로우는 고대 로마인의 기억과 자신의 경험을 연결시키면서 과거-현재의 단절을 극복하고 스스로를 과거로부터 이어져 내려오는 진보의 거대한 서사에 다시 융합시키려 시도하는 것처럼 보인다.4) 물론 그가 콩고 강을 따라가며 목도하는 일들은 그를 완전히 다른 결론으로 인도하지만 말이다.
개척, 정복, 혹은 계몽은 실제로 어떠한 성격을 갖는가? 말로우는 꽤나 일찍부터 자신의 서사의 골격을 이루는 요소를 공개한다. “세계를 정복한다는 것은 [...] 너무 가까이서 들여다보면 그렇게 아름다운 일은 아니야. 오직 이념만이 그것[세계 정복에 수반하는 문제]을 상쇄하지. 그것을 지탱하는 것은 하나의 이념, 감상적인 핑계가 아닌 하나의 이념, 그 이념 안의 이기적이지 않은 믿음이야”(“The conquest of the earth [...] is not a pretty thing when you look into it too much. What redeems it is the idea only. An idea at the back of it; not a sentimental pretence but an idea; and an unselfish belief in the idea” 107). 그가 콩고 강을 따라가며 목도하는 일들과 그러한 광경을 보면서도 그의 여정을, 서사를 지탱시켜주는 동력은 정확히 이러한 분할에 기초한다. 즉 한 쪽에는 인간들의 악덕 혹은 부족함으로부터 비롯되는 추한 면모들이 있다. 마치 파리들처럼 죽어나갔을 로마인들의 모습, 그리고 그들이 직면한 “어둠”(“the darkness” 106)과 같은 것들은 가까이 들여다보았을 때 시야에 들어오는 그다지 아름답지 않은 면모에 속한다. 이러한 어둠이 있다면, 로마인들을 “어둠을 직시할 능력을 갖춘 사람들”(“men enough to face the darkness”)로 만들어주었던 힘이 있다. 그것은 때로는 이념(idea), 때로는 대의(cause)와 같은 단어로 지칭된다. 요점은 어떤 순수하고 빛나는 지향점 혹은 원리가 있고 이를 따르는 사람들은 현실에 존재하는 갖가지 부족한 지점들에 좌절하지 않고 끈기 있게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믿음에 있다. 이러한 태도를 조금 냉소적으로 말한다면, 브랜트링어(Patrick Brantlinger)의 표현을 빌어 “이념 숭배”(“idea worship” 76)라고 불러도 아주 과하지는 않으리라.5) 물론 최초에 말로우는 이러한 ‘대의’에 거리감을 두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빛의 사절”(“an emissary of light” 113)로서의 의무를 말하는 숙모의 이야기에 자신이 소속된 회사가 “이윤을 위해 운영”(“run for profit”)된다는 답변은 그러하다. 그러나 바로 그 직후에 말로우는 “자신이 사기꾼이라고”(“I was an impostor”) 생각하며, “마치 한 대륙의 중심에 가는 것이 아니라 세계의 중심으로 출발하기 직전에 있는 것처럼 느꼈다”(“I felt as though, instead of going to the centre of a continent, I were about to set off for the centre of the earth”). 다시 말해 그가 때때로 분명히 아이러니한 태도를 보인다고 해도, 적어도 이 시점에서 말로우의 내면에서 어떠한 대의가 판정기준으로 자리하고 있으며 그가 스스로를 대의로부터 완전히 분리시키지 않고 있음은 분명하다.
커츠(Kurtz)가 말로우에게 어떤 존재인지 고찰하기 위해서는 방금 서술한 바와 같이 말로우에게 이념 혹은 대의가 분명히 삶의 의미를 판정하는 중요한 기준으로 자리 잡고 있음을 염두에 두어야만 한다. 애초에 커츠라는 이름은 말로우의 의식에 어떻게 들어오게 되는가? 상아를 쟁취하기 위해 콩고에서 행해지는 갖가지 어리석음, 탐욕, 잔혹함을 보면서 말로우는 일종의 ‘비현실적인’(“unreal” 125) 느낌을 받는다. “유일하게 현실적인 감정은 상아가 귀속될 교역소에 지명되어 이윤의 일부를 획득하고자 하는 욕망뿐이었다”(“The only real feeling was a desire to get appointed to a trading-post where ivory was to be had, so that they could earn percentages” 126) 그러한 와중 그는 “불이 밝혀진 횃불을 나르는”(“carrying a lighted torch” 127) 한 여성을 묘사한 그림을 보게 되고, 이 그림을 그린 커츠에 대해 흥미를 갖게 된다. 그리고 커츠가 그림이 암시하듯 “유럽이 우리에게 부여한 대의를 이끄는”(“for the guidance of the cause intrusted to us by Europe”) 인물임을 듣고 그에게 강한 흥미를 느낀다. 2장의 서두에서 말로우는 커츠가 보낸 상아를 보고 그가 어떤 인물인지를 상상한다. “통나무배, 노 젓는 야만인 넷, 그리고 본부로부터, 휴식으로부터, 고향의 생각으로부터 갑자기 등 돌린 외로운 백인—그의 얼굴은 아마도 야만의 심연을, 텅 비고 황량한 자신의 근무지를 향하고 있으리라”(“the dug-out, four paddling savages, and the lone white man turning his back on the headquarters, on relief, on thoughts of home—perhaps; setting his face towards the depths of the wilderness, towards his empty and desolate station” 135). 이것이 말로우의 상상임은 분명하지만, 동시에 그가 커츠에게 어떤 낭만적인 면모 또는 (콩고에 거주하는 다른 속물들과 달리) 대의를 추구하는 삶이라는 자신의 이상을 투사하고 있다는 것 또한 부인하기 어렵다. 이후 말로우는 여정의 목표를 본격적으로 커츠를 만나는 것—다시 말해 대의에 도달하는 것—에 두게 된다(“I was then rather excited at the prospect of meeting Kurtz very soon” 136; “For me it[steamboat] crawled towards Kurtz—exclusively” 138).6)
물론 “전 유럽이 그를 형성하기 위해 기여한 커츠”(“All Europe contributed to the making of Kurtz” 154)와의 만남은 말로우에게 자신이 기대한 것과 정 반대의 형상을 보여줄 뿐이다. 주지하다시피 커츠는 거의 야만적으로 보일 정도로까지 그곳의 자연과 원주민에 대한 자신의 지배력을 행사하며, 직접 머리에 뿔을 단 “주술사”(“sorcerer” 173)로 등장할 때 우리는 마치 그가 아프리카의 어둠에 홀린 것처럼 판단하기 쉽다. 그러나 커츠가 “자연으로 퇴행한다”(“gone native” Brantlinger 75)는 식의 설명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게 하는 결정적인 단서들이 존재한다. 애초에 커츠의 “나는 위대한 것들의 경계선 위에 있다”(“I was on the threshold of great things” 173)는 식의 진술은 기본적으로 소박한 의미에서의 ‘자연’과 등치될 수 없을 뿐더러, 말로우의 진술을 믿는다면 “그[커츠]의 지성은 완벽하게 명징했다”(“his intelligence was perfectly clear” 174). 오히려 커츠는 자신이 추구해온 ‘이념’과 끝까지 분리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의 이념을 추진하기 위해 글을 쓰며, 그것을 자신의 의무라고까지 말한다(“for the furthering of my ideas. It’s a duty” 177). 무엇보다도 “마치 청명한 하늘에 번쩍이는 벼락처럼 빛나면서도 무시무시한 ‘모든 야만인을 말살하라!’는 구호”(“luminous and terrifying, like a flash of lightning in a serene sky: ‘Exterminate all the brutes!’” 155)를 담은 글이 그가 광기에 도달하기 전에 집필되었다는 사실을 고려한다면, 커츠의 파멸이 아프리카의 어둠에 침투되었기 때문이라기보다는 그와 무관하게 그 자신에게 내재되어 있던 성향 혹은 그가 복무한 이념, 즉 “위대한 것을 성취하고자 하는”(“to accomplish great things” 176) 이념 자체가 ‘제약 없이’ 나아간 결과라고 보는 편이 좀 더 타당하다—자연지배와 계몽의 모티프가 자기 파괴적으로 치닫는 과정 대한 호르크하이머(Max Horkheimer)와 아도르노(Thedor W. Adorno)의 성찰을 참고할 수 있을 것이다.7) 요컨대 커츠는 이념으로부터의 후퇴가 아닌 이념에 따른 전진을 통해 야만적인 상태로 진입하게 된 것이다. 경찰 혹은 이웃의 경고가 부재했다는(154), 또는 커츠 본인에게 자제력이 결여되었다는(164) 말로우의 논평은 엄밀히 말해 커츠의 파멸에 중층적으로 작용한 결핍들에 대한 설명은 될 수 있을지언정 그를 추동한 근본적인 이념의 작동에 대한 직시로 보기는 어렵다.
비록 말로우가 끝까지 커츠에게 충실했다고(“loyalty” 178) 해서, 혹은 커츠가 최후에 자신의 삶을 직시할 수 있었다고 해서 이와 같은 결론의 어두움이 감소되지는 않는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말로우에게 현실적인 삶의 어두움을 버텨낼 수 있게 해주는 동력이 이념이었으며 커츠가 바로 그러한 이념의 체현 자체였다면, 커츠가 죽음과 함께 내린 결론은 말로우에게 사실상 어떠한 탈출구도 허용해주지 않는다. 속물적인 욕망에 추동되는 삶도, 그것을 넘어설 수 있게 해주는 듯 보였던 이념도 따를 만한 것이 못 된다면 말로우에겐 어떠한 선택지가 남아있는가? 분명 ‘자제력’(restraint)이 필수적인 제어장치로 제시되지만, 엄밀히 말해 그와 같은 덕목은 하나의 독자적인 원칙으로 성립할 수 없는 무척이나 미약한 제약에 불과하다. 예컨대 칸트 윤리학의 도덕론이 근본적으로 어떠한 합리성으로부터도 도출될 수 없음을 지적하는 호르크하이머의 비판(<계몽의 변증법> 보론2, 국역 136-37)은 말로우의 ‘자제력’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될 수 있다. 자제력은 최초의 이념에 비해 명백히 축소된 덕목을 표현하며 그런 점에서 커츠의 파멸과 죽음을 지켜본 말로우가 실질적으로 성취감을 느끼지 못함은 당연하다. 말로우는 오로지 “자신의 주저하는 발걸음을 뒤로 물리는 것을 허락받았을 뿐”(“had been permitted to draw back my hesitating foot” 179)이며, 어떻게 앞으로 더 나아갈 수 있는가에 대한 답변은 서사가 끝나는 순간에 이르기까지 주어지지 않는다. 이런 점에서 “<어둠의 심장>이 [...] 종언을, 서구 문명 혹은 서구 제국주의의 종언을, 이상주의가 야만으로 전도됨을 알린다”(“Heart of Darkness is [...] announcing th end, the end of Western civiliation, or of Western imperialism, the reversal of idealism into savagery” 221)는 J. 힐리스 밀러(J. Hillis Miller)의 진술은 타당하다.
3. “back in the sepulchral city”(179); the night in which all cows are black
말로우의 서사가 콩고 강을 따라가면서, 또 커츠와의 대면을 목표로 삼으면서 전진/성립하는 것이 가능했다면, 커츠 및 그가 체현한 이념의 몰락 이후 서사와 서사를 가능하게 하는 시간이 사라지는 것 또한 놀랄 일이 아니다. 커츠의 죽음 이후 말로우는 다시 “묘지와 같은 도시”(“the sepulchral citu” 179)로 돌아오는데, 이때 귀환의 과정은 생략될 뿐만 아니라 말로우에게 “흐릿하게만 기억되는 기간”(“a period of time which I remember mistily”)으로 남는다. 그리고 그 여정은 “그 안에 희망도 욕망도 없는 이해할 수 없는 세계”(“some inconceivable world that had no hope in it and no desire”)를 거치는 것과 같았다. 돌아온 도시의 삶에 말로우는 어떠한 의미부여도 할 수 없다. 이와 같은 의미의 상실은 커츠와 관련된 세 사람을 차례대로 만나면서—물론 서사가 정지한 순간에 만남의 순서는 이제 어떠한 변별력도 갖고 있지 못하다—더욱 확고해진다. (말로우가 콩고로 떠나기 전 ‘대의’의 또 다른 사례였던) “지식”(“knowledge” 180)과 “과학의 이름”(“the name of science”)으로 커츠의 문서를 요구하는 이는 어떠한 소득도 얻지 못하고 떠나며, 죽은 이의 사촌이자 숭배자가 말하는 커츠의 정치적인 재능 또한 어떠한 토대에도 기초해 있지 않다. 마지막으로 커츠의 약혼녀와의 만남에서 시간은 문자 그대로 사라진다. 그녀는 “그가 죽은 지 1년이 넘었음에도”(“It was more than a year since his death” 183)—물론 커츠의 죽음 이후로 갑작스럽게 1년이 지났다는 진술조차도 시간에 대한 감각이 흐트러짐을 보여주지만—“그녀에게는 그는 고작 하루 전에 죽었을 뿐이었다”(“For her he had died only yesterday”). 그녀는 “시간의 장난감이 아닌 생명체 중 하나”(“one of those creatures that are not the plaything of Time”)로서, 그녀 앞에서 시간의 선후관계가 사라지고 말로우는 커츠의 죽음과 약혼녀의 애도를 동시에 목격한다(“I saw her and him in the same instant of time—his death and her sorrow—I saw her sorrow in the very moment of his death”). “나는 그들을 함께 보았고, 나는 그들의 목소리를 함께 들었다”(“I saw them together—I heard them together”)는 말로우의 진술은 (서사와 인과를 형성하는) 시간적 선후관계만이 아니라 콩고와 영국, 아프리카와 유럽이라는 공간적인 구분마저도 흐려졌음을 보여준다. 다시 말해 커츠 혹은 그가 체현한 이념이 커츠의 약혼녀를 통해 다시 한 번 체현된다고 할 때, 양자를 나누는 시공간적인 구별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앞서 드러난 바와 같이 커츠가 체현하는 이념은 스스로를 극단적으로 전진시키는 와중에 스스로를 바로 자신이 말살하고자 했던 야만 상태와 구별할 수 없게 만들었다. 커츠의 삶 혹은 이념으로부터 분리되기를 거부하는 약혼녀와의 만남에서 말로우가 둘의 모습이 겹쳐 있는 것처럼 느끼는 상황은 그런 점에서 이전의 분할된 범주들 혹은 ‘사물의 질서’가 무너짐을 보여준다—곧 여기에 “모든 소가 검게 보이는 밤”이 내려왔다. 커츠의 마지막 외침을 묻는 그녀의 질문에 “당신의 이름”(“your name” 186)이라 답하는 말로우의 선택은 결코 단순한 거짓말이 아닌데, 그는 그녀로부터 아직 사라지지 않고 세계를 점유하고 있는 어떠한 이념—<어둠의 심장>에서 여성 인물들이 모두 이 이념을 적극적으로 지지하는 존재라는 사실은 이들의 세계가 표면적으로 남성들이 실현하는 것처럼 보이는 이념의 세계와 결코 분리될 수 없음을 강하게 보여준다—을 보는 것이다.8) 말로우의 이야기가 “너무 어둡다”(“too dark”)의 반복으로 끝난 뒤, 지금까지 영국 문명의 성립을 가능하게 해주었던 바닷길이 “광대한 어둠의 심장”(“the heart of the immense darkness” 187)으로 일행을 이끄는 듯한 광경으로 소설은 끝난다.
1) 이하 쪽수표기는 Oxford World’s Classics 2002년 개정판(revised edition)으로 나온 Heart of Darkness and Other Tales 를 따른다.
2) 아체베는 이 명제를 긍정한 후 곧바로 “그렇지만 그게 요점은 아니다”(“but that is not the real point”)라고 덧붙이지만, 이러한 구도 자체가 존재할 때에만 아체베의 비판은 성립할 수 있다.
3) 역사적인 맥락을 살펴본다면, 19세기의 마지막 사반세기는 영국의 경제적 헤게모니가 이미 정점을 지나 비가역적으로 쇠퇴하는 기간이기도 했다. 조이스(James Joyce)의 <율리시스>(Ulysses)를 정치경제사적 맥락에서 읽는 프랑코 모레티(Franco Moretti)의 글 「기나긴 이별」(“The Long Goodbye”, <공포의 변증법>Signs taken for Wonders, rev. ed., 182-208) 특히 2절의 186-87을 참고.
4) 뒤이어 이야기할 수 있겠지만, 이는 서구 근대의 가장 현재적인 경향을 가장 고전적인 이야기, 즉 오디세우스의 모험에서 찾아낸 모티프와 연결하는 <계몽의 변증법>(Dialektik der Aufklärung)을 다소간 상기시킨다.
5) 물론 브랜트링어는 ‘이념’ 숭배의 성격을 제대로 고찰하지 않은 채 물신숭배(fetishism) 전반과 이념 숭배를 혼동하기에 그의 비판은 밋밋해진다.
6) 커츠가 ‘목소리’(“a voice” 152)로 체현되는 인물임도 의미심장한데, 우리는 원리 혹은 이성을 뜻하는 logos가 동시에 목소리를 뜻하기도 한다는 사실을 상기할 수 있을 것이다.
7) <계몽의 변증법>, 특히 “계몽의 개념”(the Concept of Enlightenment) 및 “보론2: 줄리엣 또는 계몽과 도덕”(Excursus II: Juliette or Enlightenment and Morality)을 참고. 말로우는 커츠에게서 노골적인 지배욕의 발현을 본다(“to devour all the earth with all its mankind” ; “the heart of a conquering darkness” 182).
8) 말로우가 커츠의 약혼녀를 모욕하고 벌한다는 조애너 M. 스미스(Johanna M. Smith)의 해석은(193) 서사 내에서 명백하게 해체되는 (남성들의 세계와 여성들의 세계 간의) 표면적인 분할을 의심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본인이 비판하는 이데올로기에 역으로 붙들려 있다.
'Critique'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신자유주의적 통치의 전제정치화, 대안으로서의 새로운 공동체 (0) | 2014.10.06 |
---|---|
김학준. <일베에서 나타나는 혐오와 열광의 감정동학> 읽고 코멘트. (11) | 2014.10.02 |
대중정치와 이성의 문제: 강용석, 예능정치, 덕성, 그리고 비평 (0) | 2014.08.30 |
'국궁 취미 논란'의 이데올로기와 반지성적 팩트 페티쉬 (0) | 2014.08.25 |
<주권적 통치의 변증법: 홉스, 슈미트, 아감벤, 푸코> (3) | 2014.08.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