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을 만큼 캐디 때리곤, 100만원 던지고 가" 기사에 대한 코멘트.

Comment 2014. 9. 20. 13:44

(기사 원문링크: http://media.daum.net/society/others/newsview?newsid=20140919213103881)


먼저 기사에서 주요하게 읽힌 부분을 인용하겠다.


"한 번은 내기에 져서 큰돈을 잃은 고객이 화풀이로 캐디를 때린 적이 있었다. 그 캐디는 정신을 잃을 만큼 맞아 응급실로 실려 갔고, 고객은 카운터에 100만 원을 던지고 가버렸다. 그나마 멀리서 무전을 한 덕에 직원이 달려와 말렸다. 덕분에 이 정도에서 사건이 종료됐다.


맞은 캐디는 정신과 치료까지 받았지만 회사는 그 캐디에게 아무 것도 해주지 않았다. 오히려 가족들이 고객을 상대로 고소하려는 것을 회사가 막았다. 그 일 이후로 많은 캐디가 회사를 떠났다. 그 때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 아무에게도 보호받지 못하고 죽어갔겠지."


그 골프장은 회원제였다. 캐디에게 폭력을 행사했던 그 팀은 이후로도 뻔뻔하게 골프장을 찾았다. 때린 사람은 사장이었고, 나머지 3명은 부하 직원이었다. 사건 당시 나머지 사람들은 사장을 말리지 않았다고 한다.


캐디들은 항상 공포감을 가지고 일한다. 고객이 휘두른 채에 맞아 뇌진탕으로 죽기도 하고 옆 홀에서 날아온 공에 맞아 뼈가 부러지기도 한다. 나도 머리와 팔에 공을 맞은 적이 있다. 한동안 머리가 울렸지만 CT를 찍을 돈이 없었다. 드문 일이기는 하지만 작정하고 덤벼드는 고객에서 두들겨 맞기도 하고, 성추행 혹은 그 이상의 범죄에 노출되기도 한다.


가장 무서운 것은 주변에 아무도 없다는 점이다. 골프장은 넓고 한 팀당 간격이 길다. 저녁타임이나 팀 수가 적은 날은 9홀을 통틀어 한 두 팀만 있기도 하다. 소리를 질러도 아무도 오지 않는다. 사고 후에도 회사는 캐디의 편이 아니다. 회원제는 상황이 더 나쁘다. 서울, 경기도, 강원도, 제주도 골프장은 연간 회원권이 싸면 1억~2억, 비싸면 몇십 억을 호가한다. 회원권 유지를 위해 회사는 회원이 잘못해도 캐디 잘못으로 돌린다. 회원이 왕이다."





이하는 나의 코멘트.



나는 최근에 (대학원생을 포함해서) 한국 사회의 전반에 이와 같은 '인권' 문제가 제기되고 있음을 주목한다. (여성-노동자라는 점에서 두 배로 페널티를 받는) 캐디는 물론이고, 각종 기업 등에서도 인권 문제, 정확히는 권력구도에서 약자에 놓인 사람들의 '기본적인 권리' 자체가 극심하게 침해되고 있다. 취업을 한 친구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단순히 회사가 다른 정도가 아니라 서로 완전히 다른 분야에 있음에도 불구하고--심지어는 한국사회의 대다수가 '좋은 직업'이라고 생각하는 곳을 포함하여--극단적인 노동착취와 상급자의 전제적인 권력에 노출된다는 점에서 공통된 문제를 겪고 있다. 거칠게 말한다면 한국사회 전반에 (특히 생존권 및 임금으로 연결된 관계에서) 걸쳐 '갑질'이 극단화되고 있다.


 물론 지난 20년 간 지속적으로 노동공급이 수요를 초과했다는 점이 가장 중요한 요인이겠지만, 그것만으로 설명할 수 있는 지점을 넘어선 것 같다. 모 후배의 표현을 빌리면, 취직경쟁에서 떨어지면 지옥, 취직 경쟁에서 승리해도 (한 사람이 감당할 수 있는 양 이상의 업무량이 주어지기 때문에) 지옥인 사회가 되었다. 내 생각에 이 상황은 단순히 경제구조에서 비롯된 것만이 아니라 문화/제도적인 차원에서 한국사회 전반에 피지배자 혹은 권력의 취약계층에 놓인 사람들을 보호하는 합의 자체가 사라지고 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닐 것 같다. 예컨대 대표적인 약자보호기구라고 할 수 있는 (전교조를 포함한) 각종 노조들에 대한 제도적인 공격이 공공연하게 진행되고 있으며, 인권위도 헌병철 위원장의 취임 이후 사실상 제도적인 인권침해를 방조하는 기구로 전락했다는 인상을 주고 있다(앞으로의 3년 반을 포함해서 극우파 정부 10년간 한국사회의 약자에 대한 권리침탈을 방지하는 시스템이 얼마나 취약해졌는가를 분석해보는 것 자체가 중요한 과제일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공식적인' 차원에서의 기본권보호장치의 후퇴가 비제도적인 차원 혹은 사적인 조직 내에서도 그대로 혹은 더 심하게 반영되고 있음을 본다. 한 마디로 한국사회에서는 지금 갑을 견제하고 을을 보호하는 기제 자체가 완전히 무너지고 있다.


 이를 조금 더 확장시켜 말한다면, 한국사회의 지배적 위치에 놓인 구성원들은 더 이상 약자들을 자기와 같은 시민으로 간주하지 않는다. 아래에 언급한 사례, 곧 자신의 분풀이로 캐디를 두들겨 팬 개자식은 정말로 캐디라는 직업을 가졌을 뿐인 시민/인간을 샌드백과 같은 도구로 간주한 것이며, "고객유치"를 위해 노력한 기업은 자신의 이윤창출을 위해 그러한 '인적 자원의 도구화'(물론 우리는 '인적 자원'이라는 표현부터가 근본적으로 인간을 소모품으로 보는 사고방식을 반영함을 지적해야 한다)에 적극적으로 협력한다...정확히 말해 아래의 사례는 기업이 캐디를 보호하지 못했기 때문에 문제가 아니라 기업이 피고용인을 조직구성원이 아닌 소모품으로 간주하는, 그렇기 때문에 저 개자식을 고소했을 때의 손실이 캐디를 방치했을 때의 손실보다 크다고 '계산'하기 때문에 문제가 된다. 물론 이러한 사고는 자본가들에게 특유한 것이지만, 인간을 소모품으로 간주하면서도 적어도 최소한의 생명/건강을 보호한다는 합의 자체가 부재하다는 것이--굳이 말하면 90년대 중반부터 아주 잠깐 동안 그런 합의가 생겼다가 노무현 정부를 거치면서 사라졌다고 할 수 있을 것인데--, 나아가 그러한 합의를 요구하는 목소리 자체를 억압한다는 것이 현재 한국사회의 주요한 특징이라고 할 수 있겠다.


 나는 오늘날 다시 되돌아오는 윤리/도덕적 요구를 우리가 흘려버리지 말고 붙잡을 수 있다면, 그리하여 단순히 특정한 사고에 대한 소극적인 항의가 아니라 적극적인 정치적 요구로 전화시킬 수 있다면, 다음과 같은 질문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동료시민/인간에 대해 어디까지 의무를 갖는가? 시민/인간의 도구화 혹은 권리침해는 어디까지 가능한가? 누군가를 동료시민/인간으로 간주하는 범위는 어디까지인가? 오늘날 한국인들은 집권지배세력은 이런 점에서 단호한 입장을 보여준다: 이들이 간주하는 한국인의 범주는 일정 수준 이상의 자본/권력축적을 한 사람들에 제한되며 (그런 점에서 진실로 이들은 영국의 19세기로 후퇴한다) 그러한 사람들이 그렇지 못한 사람들에게 소득/성차/지역/인종/민족 등을 이유로 착취 및 권리침해를 하는 것은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것이다. 물론 나는 도덕적 프레임을 설정하는 것만이 문제 해결에 충분한 의미를 갖는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오늘날 정말로 '최소한의 기준'으로서 인권과 윤리, 도덕의 문제가 언급되는 시점에서 이러한 요구사항을 정치화, 곧 권력과 자본의 분배문제로 끌고가지 않는 것이야말로 어리석다고 생각한다...무엇보다 승부의 문제에서도 말이다.


 극우파 지배세력은 단순히 공동체의 문제를 해결하고 사고하는데 무능할 뿐만 아니라(그들은 단지 자신의 경쟁자들보다 효율적인 조직구성원리를 지녔고 기본적으로 지배자들의 결합체라고 보는 편이 맞다...이들은 미시적 차원에서의 권력행사를 견제할 수 있는 장치들을 무력화시키는 것이 자신들의 이윤을 증진시킬 수 있다고 믿는다) 사실상 그들의 발상에 그들 자신을 제외하고는 동료라는 개념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마땅히 타도해야 할 대상이기도 하다. 나는 이러한 프레임을 만들 때 극우파들의 대북 논리, 곧 북한정권 및 군부와 북한 주민들을 구별하자는 논리를 차용하면 꽤나 효과적일 거라고 생각한다; 극우파 지배세력이 있고, 이들에게 설득당하는 극우파 지지세력이 있으며, 전자를 타도하고 후자를 구출하는 게 목표라는 식의 프레임 말이다. 전자는 당신을, 나를, 우리를 착취하고 억압할 대상, "자신들과는 애초에 다른 존재=도구"로 간주한다는 점에서--그들이 피착취자들을 유일하게 존중하는 면이 있다면, 어쨌든 이데올로기적 기만이 아직 필요하다고 믿는 점에서 그렇다--"도덕적으로 악하다."


 나는 이러한 프레임이 민주주의적 공동체의 형성에 필요한 보편주의적 요구를 포기한다는 비판을--그러니까 어쨌든 상대방도 선의를 갖고 있고 설득할 수 있어야 한다는 주장에서 비롯된--기꺼이 인정할 수 있다. 나는 그러한 비판에 다음과 같은 반론을 돌려주고 싶다; 적과 아군, 악당과 평범한 사람(나는 선한 사람이라는 표현까지는 채택하지 않겠다)을 나누는 기준은 내가 자의적으로 세운 것이 아니라 지배세력의 결합체가 세운 것이며 (그들이 자기들을 결합체로 인식하는지 여부와 무관하게) 지금 한국사회는 마치 그러한 결합체가 작동하는 것처럼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이 글의 처음에서 언급한 문제, 곧 한국사회 전반의 각종 거시/미시적인 권력구도에서 가속화되는 착취현상/기본권박탈을 견제할 수 있는 공적 권력의 작동 자체를 우파 지배세력이 무너트리고자 한다는 데서 미시권력의 관찰자들은 다시금 거시권력과 지배구조의 문제로 나와야 한다고 주장한다. 우리는 98년 이후 단순히 자본의 고삐가 풀렸다는 의미에서 '신자유주의화'를 외칠 것만이 아니라, 그것이 실제로 권력과 지배의 집중화를 가져왔다는 것, 곧 우파적인 국가-자본의 카르텔이 계속해서 공고히 실현되고 있으며 이러한 흐름 하에서 그 어떤 권력관계에서든 을에 대한 갑의 무제약적 지배 가능성을, 곧 인간에 대한 인간의 착취정도의 증대를 늘리고 있음을 보아야 한다. 곧 오늘날 각종 직장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단순히 여러 곳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벌어지고 있을 뿐만이 아니라 권력을 획득한 우파들이 권력관계의 형식 자체를 재편하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는 점에서 공적이고, 정치적인 본질을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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