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정치와 이성의 문제: 강용석, 예능정치, 덕성, 그리고 비평

Critique 2014. 8. 30. 21:57

먼저 강용석과 예능정치의 출현에 대한 오마이뉴스의 게릴라 칼럼을 보자.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028331




강용석이 제시하고 구축하고자 하는 '모델'은 그것이 위험하기 때문에라도 흥미로운 연구대상이다. 순수하게 법적인 논리로 볼 때 상급법원의 판결은 비난하기 어렵다--어쨌든 불투명한 다수로서의 집단에 대한 모욕적 발언을 시행한 거고, 아마 이 사안이 징역형으로까지 이어졌다면 오늘날의 시점에서 '누구에게까지' 법적 재갈물리기가 시행될 수 있을지를 심각하게 고민했어야 할 것이다. 기사의 논점이 좀 상이한 층위들을 오가는 면이 있는데, 핵심은 법원이 말한 "여론의 감옥"은 본래 여론public opinion이 공적인, 도덕적인 판단을 수행한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는 데 있다. 뒤집어 본다면, 요컨대 방송을 자신의 정치적 야심을 위한 직접적인 도구로 활용하는--그리고 저열한 방송들은 그를 시청률을 확보하기 위한 직접적인 도구로 마찬가지로 활용하는데--누군가를 견제할 여론의 능력 자체가 상실된 순간에 우리가 맞닥트릴 문제야말로 심각한 것이다. 다시 말해, 여론이 만약 공적인 판단능력 및 견제능력을 상실한 순간, 혹은 "공공선"을 위해 작동하기를 멈추는 순간--첨언하자면 순수한 형태의 자유주의야말로 이러한 판단들을 무력화시킨다--, 또는 공공선과 무관하게 작동하기 시작할 때, 성희롱이 아니라 더 추악한 범죄를 저지른 이들도 어렵지 않게 공적인 권력을 행사하는 자리에 들어설 가능성은 커진다.



 정치철학사적 맥락을 끌어들인다면, 오늘날 민주주의 체제의 원형은 권력을 독점하는 군주를 이성=판단력을 결여한 '폭군'으로 비판하고, 참된 이성의 소재를 '여론'에 부여하면서 헤게모니를 획득할 수 있었다. 대중민주주의mass democracy의 등장은 여론=이성의 등식을 이성=여론=대중(다수)의 등식으로 점차 끌어갔으며, 그 안에서 이러한 도식은 "이성은 다수에 있다"는 진술을 "다수가 이성이다"는 역명제로 전환되었고, 궁극적으로는 이성 혹은 참된 판단력이라는 항 자체가 사라진다. 요컨대 "팔리니까 만든다"는 시장-소비주의적 사고와 같은 패턴이 "다수가 원하니까 따른다"는 정치=시장에서도 반복되어 등장한다. 이런 흐름에서 보면 J. S. 밀의 <자유론>_On Liberty_은 근본적으로 "다수의 소비자"가 지배하는 정치=시장에 대한 비판을 위해 쓰여진 것이며,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의 <계몽의 변증법>은 한 발자국 나아가 "다수=소비자"가 사회의 이질적인 존재들, 타자를 말살하는 방향의 선택이 어떻게 자유주의적 계기로부터 출현하는가를 변증법적으로 기술description하는 텍스트라는 점에서 유사한 맥락 위에 있다(당연하지만 하버마스의 분석 및 기획도 이러한 맥락과 절대적으로 분리될 수 없다...그의 주저들은 아주 많은 면에서 아도르노 없이는 독해될 수 없다).



 강용석은 한 명의 권력지향형 인간이 이와 같은 사회적 조건 위에서, 요컨대 대중이 이성적 판단을 따르는 대신 (사회적으로 구축된) 자신의 즉각적인 쾌에 따르는 사회에서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는가를 자각하여 실천하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 대중을 특정한 형태의 쾌를 지각하는 주체로 형성하고(물론 이러한 형성은 여러 미디어들간의 경쟁구도 하에 있다) 또 그러한 쾌를 공급하는 미디어media가 '매개'medium로서 작동한다; 우리는 강용석만 의식할 게 아니라 지배적 권력을 위한 역장kraftfeld의 한 주체로서 미디어 또한 함께 주시해야만 한다; 그를 정치 예능 혹은 예능 정치로 끌어들인 이들이 강용석이 겨냥하는 바 및 그가 초래하는 효과를 몰랐을 리가 없다는 점에서, 그들은 자신의 권력에 대한 접근 가능성을 적극적으로 타진하고 있다고 봐야한다. 단적으로 강용석이 자신의 포부처럼 주권자의 위치에 자리하게 되었을 때, 그가 과연 자신을 대통령으로 만들어주는 미디어로부터, 동시에 미디어를 통해 자신을 대통령으로 선출해준 대중의 쾌락으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다. 간단하게 정리하자면, 대중의 쾌락 추구적 성격, 그것에 기대고 또 그것을 활용하는 미디어, 미디어의 도구이자 합법적으로 권력에 접근할 수 있는 장기말로서의 정치인=엔터테이너가 상호작용하는 국면이 한국에도 본격적으로 도래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나는 대중으로부터 오로지 쾌락추구적 성격만 존재한다고 주장할 생각은 없지만, 이것이 최근 매우 강력하게 등장했다는 점을 지적할 수는 있다고는 생각한다.



 최근 곳곳에서 '덕성'virtue 또는 역량virtus에 대한 강조가 등장하는 것은 '대중예능정치'의 탄생과 같은 조건을 공유한다. 앞서 말했듯 요점은 이성 혹은 '옳은 판단'에 대한 요구 자체가 좌절 혹은 포기되었다는 데 있다. 우리가 만약 신자유주의를 그 자체로 위기가 아니라 위기에 대한 (잘못된) 대응으로 해석할 수 있다면, 포스트-신자유주의적 사회는 잘못된 대응책 마저도 상실한 사회라고 볼 수 있다. 세계를 해석하고 또 그 안에서 나아가야 할 길을 알려주는 거대 서사grand narrative가 붕괴한 시점에서 한편으로는 그러한 세계에 적응하고 또 그 안에서 성공하고자 하는 전략(쾌락주의 및 성공지상주의, 곧 강용석이 대변하는 예능정치)이 등장한다면, 다른 한편으로는 이성적 판단을 복원하려는 흐름이 필연적으로 나타난다. 우리는 덕성/역량이 그 자체로 세계에 대한 안정적인 해석이 불가능한 시대에 그러한 해석을 협소하게나마 창출하고 또 그러한 판단-실천을 가능하게 하는 능력으로 제기된다는 사실을 떠올릴 수 있다(포칵의 공화주의적 언설에 대한 논의 및 피터 브룩스의 멜로드라마에 대한 논의를 참조하라). 오늘날 곳곳에서 출현하는 (퇴행적 성격의) 고전 읽기는, 냉소적으로 말한다면 자신이 성공했던 과거에 대한 기억에 붙들려 "그때처럼 하면 성공하겠지"라는 믿음밖에 남지 않은 실패자들의 처연한 몸짓과 같다. 그러한 주장에는 "고전을 읽으면 뭐든간에 힘이 생긴다"는 주술적인 기원이 들어가 있으며, 그 기원이 어떠한 역량의 도래를 바란다는 점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개인적으로 쾌락추구보다는 덕성의 추구가 조금 더 나은 선택지라고 얘기할 수는 있다. 그러나 분명히 말하자면 덕성을 추구한다고 해서, 혹은 조금 더 쳐줘서 덕성을 획득한다고 해도 그 자체가 세계에 대한 해석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덕성이 오늘날 자유주의가 강요한 개인의 협소함을 깨트리지 못하는 이상 그것은 집단과 구조가 만들어나가는 세계의 문제를 제대로 대면하지조차 못할 가능성이 있다. 그러한 덕성은 어떤 면에서 "세계를 이해하고 바꿔나가는 길"이 아닌 "세계의 주어진 논리에 적응하는 길"로서 예능적 정치의 수준으로 타락할 위험을 늘 포함한다. 그런 면에서 나는 세계 자체에 대한 지적인 이해의 시도만이 우리에게 주어진 유일한 길이라고 생각한다--정확히 세계의 진행에 대한 '올바른 판단력'을 재구성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는 점에서 말이다. 그리고 맑스주의야말로 그것을 위한 여러 모델들 중 가장 나은 선택지라고 주장한다; 물질적인 것과 의식적인 것을 연결지어 해명하려는 모델 자체가 드문 오늘날의 상황에서는 특히...내가 지금 정치적인 입장이 아닌 이론적인 입장에서 (물론 양자는 불가분이지만) 말하고 있음에 유의해 달라. 어쨌든 핵심은 좋든 싫든 스스로 보편성을 주장할 수 있는 해석적 틀의 출현 혹은 구축에 있으며, 그런 점에서 우리에게 비판과 반성은 거의 유일하게 주어진 무기라는 것이다. 예능=정치와 덕성에의 갈망이라는 두 가지 거짓된 선택지가 지배적으로 남아있는 세계일수록 비평가의 역할이 갖는 중요성은, 마치 어둠 속에서 더욱 빛나는 보석의 이미지처럼, 다시 제기되어야 한다.



<추가> * 내 설명이 충분하지 않았던 관계로 (기본적으로 페북에서 뉴스링크를 퍼오면서 붙인 코멘트라는 걸 감안해주길 바란다) 몇 가지 사안에 대해 비판적인 질문이 제기되었는데, 그 질문 및 나의 답변이 있을 때 내 요지가 좀 더 분명해질 거라고 판단하여 질문자의 허락을 받고 보충한다.



Q1.


 최근에 대중들이 '쾌'를 쫓는다는 건 나는 전혀 동의하지 못하겠어. 현재 권력 친일/군사정권을 기반으로 했던 권력 계층이 점점 갈수록 사악한 '패'를 개발하고 쓰고 있다기 보다 원래 나는 그런 사악한 '패'가 정치에 기본적으로 존재하는 패라고 생각해. 한국의 소위 진보라고 부르는 보수는 그런 패가 더러워서 있다는 것조차 부정해서 매번 선거에 참패하는 너무나도 이상적인 정치만 하려고 하는 송양지인에 빠져있는 게 아닐까 생각해.



A1.


 예능과 정치의 상호침투는 정치적인 이슈가 유머커뮤니티를 통해 / 혹은 그 자체가 하나의 유머코드로 활용된다는 것만으로도 예증될 수 있을 듯(당연하지만 유머는 쾌를 생산하는 가장 직접적인 행동 중 하나고). 네가 반론으로(?) 제시한 설명이 내 주장에 애초에 반대될 수 있는지는 불분명해-애초에 전혀 다른 맥락의 이야기인 것 같은데. 예를 들어 본인이 영화배우 출신인 로널드 레이건 같은 사례가 내 이야기에 좀 더 들어맞겠지.


공적 이성을 (적어도 명분상이나마) 지향하는 판단이 쾌락에 기초한 판단으로 대체되어 가는 과정은 기본적으로 정치=권모술수="사악한 패"와 같은 설명하고는 완전히 다른 층위에 있는 설명임. 대표적으로,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 등의 설명은 어떻게 나치즘이 '완전히 합법적인 권력'으로 등장하는 가와 같은 맥락을 풀기 위함인데, 히틀러의 집권을 '사악한 패'나 협잡, 정치기술(물론 우리는 괴벨스의 존재를 잊을 수는 없겠지만)과 같은 층위에서 제대로 설명할 수 없다는 것만 지적할게. 즉 내가 제시한 설명의 요점은 대중정치문화에서 대중의 정치적 판단을 구성하는 원리들에 있지, 의회정치의 주체들의 전술적 선택은 그 다음 이야기에 있는 거.


부연하자면, 강용석과 같이 미디어를 매우 직접적으로 활용하는 대중정치인의 출현은 대중매체의 출현과 분리될 수 없는 근대적 현상이야(애초에 언론의 출현 자체가 그렇지만). 정치 일반에 '기술공학적인' 측면이 있다고 해서 그러한 기술적인 면이 발현되는 역사적 양상을 보지 않는 건 지나치게 현실을 추상화 하는 거라고 생각해.



Q2.


 일단, 정치는 이익관계가 사회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중의 하나로서 나는 그 자체로는 가치 중립적으로 생각해. 정치 모두를 "사악한 패"라고 생각하는 게 아니라 정치의 일부에 당연히 "사악한 요소"가 이미 내재되어 있다는 거지. 너가 말하는 "예능"과 "정치"의 상호 침투에서 "예능"이라는 것을 정말 TV라는 방송 매체, 즉 전파화된 엔터테인먼트라는 의미에서의 접합과 이것을 악용하는 게 현대에 나타났다라고 한다면 당연히 그건 TV 자체가 현대에 발생된 산물이니깐 당연한 거라고 생각해. 다만, 정치인들이 대중적인 오락의 기술을 이용해서 사회적인 관심을 유도하고 대중을 호도하는 측면, 즉 사회 조작의 측면에서의 정치, 혹은 정치의 사악한 부분은 로마 시대에도 그 이전에도 충분히 존재했던 것이라고 생각해. 내가 신문 기사의 덧글로 최근에 사람들이 쾌락추구의 방향으로 나아간다고 말했지만, 나는 이미 예전부터 사람들은 이미 그러했다고 생각하고 딱히 현재라고 해서 특별히 과거에 비해 공적 이성을 판단하는 흐름이 쾌락의 원리로 대체되었다고 보지 않아. 이미 과거부터 쾌락의 원리가 작동하고 있었고, 많은 정치가들이 그걸 사용하고 있었으며 현대에 들어서 새로운 매체에 그게 나타났을 뿐 현상 기저는 동일한 정치의 속성을 보여준다고 생각해.



A2.


 "대중적인 오락의 기술을~로마시대에도 그 이전에도 충분히 존재했던 것"이라는 진술이 정확히 내가 동의하지 않는 류의 진술이야. 한국에 아직 폴 벤느의 <빵과 원형경기장>과 같은 텍스트들이 번역되지 않아서 아쉽지만, 그때는 지금과 같은 대중정치가 존재하지도 않았고 기술적으로 존재할 수도 없었어--일단 정치가 지금과 같은 대중적 '향유'의 대상이지도 않았고. 네가 제시한 해석 같은 경우는, 물론 그러한 해석이 한 때 유행했고 나 또한 그러한 이해를 가졌던 적이 있지만, 현재의 시각을 과거에 투사한다는 점에서 맞지 않아.


부분적으로는 본문에서 내 표현이 충분히 명료하지 못했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는데, 일단 대중이 정치를 통해 쾌=이윤을 추구하는 게 역사적으로 특유한 현상이거나 대중이 타락했다거나 하는 건 내 의견의 요지와는 꽤 달라. 예능정치라는 걸 통해서 내가 일차적으로 겨냥한 것은 "권력의 정치적인 작동의 목표"가 (누군가의) 이윤창출이라는 게 아니라(물론 그러한 지점도 내 글에서 의식하고 있지만), 정치적 판단과정 자체가 하나의 유희대상이 되기 시작한다는 거야. 물론 정치와 gossip은 꽤 오래 전부터 겹쳐있긴 하지만 오늘날 한국에서 특유하게 드러나는 형태와 동일시되기는 힘들어. 예컨대 전두환이 매스컴을 이용해 펼친 3S 정책과 강용석이 미디어와 맺는 관계는 상당한 유사점이 있다고 하더라도 절대로 동일시될 수 없다는 것.


둘째, 물론 사람들이 정치적 판단을 통해서 자신들의 이윤을 추구해온 면이 있음은 사실이지만, 적어도 이데올로기의 차원에서나마 (심지어 대중정치에서조차) 어떤 보편성 혹은 보편적인 요구의 차원이 존재한 건 사실이야. 예컨대 동시대의 세월호에 대한 적지 않은 요구들은 단순히 개개인의 쾌락추구로 환원될 수 없는 건 우리가 모두 동의할 수 있겠지. 그러나, (그런 점에서 나는 우리의 동시대에 보편적인 요구가 미약해졌을지언정 완전히 말소되었다고 말하지는 않는데) 그와 같은 보편적인 요구가 갖는 힘이 점차 쇠퇴해가고 있다는 것, 그리고 겉포장으로도 그와 같은 요구를 자신의 이익추구로 대체하는 사람들이 점차 눈에 띄게 증가하고 있다는 것은 주목해야 하는 일이라고 생각해.


첨언하자면, 명목적인 차원에서나마 보편적인 요구를 내거는 것과 그렇지조차 않은 것 사이의 차이는 꽤 큰데, 전자는 어떤 형태로든 다른 계층을 (설령 기만하더라도) 설득하는 작업을 거쳐야 한다면 후자는 완전히 노골적인 권력투쟁으로 진입할 가능성을 좀 더 크게 갖는다는 거. 나는 이전에 (단적으로 맹아적으로나마 대중정치적 행위가 나타났던 17세기 중반의 영국부터 시작해서) 여러 사회에서 제기되었던 보편적인 요구들이 완전히 솔직했다고 주장할 생각은 없지만, 오늘날에 이제 그러한 요구 자체가 무색해진 정치적 집단/공간/대중이 출현하기 시작했다는 것--예컨대 일베--은 관심을 기울이고 설명해야 할 차이를 갖는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Q3.


일단 여전히 그래도 동의할 수 없는 부분이 있는데, 우선 조금 너의 글에서 이해가 안되는게, 지금 강용석의 현상을 굉장히 오늘날 한국사회의 특수한 현상으로 국한해서 조사하고 있으면서도, 이렇게 말해도 좋을는지 모르겠지만 과거에서의 변화, 과거의 단절로 말하고 있는 거 같은데, 그 과거가 정말 단절된 것인지, 아니 너가 말하는 명목적인 차원에서 보편적인 요구를 하는 과거라는 것이 실제로 존재하는 과거인지 조금 묻고 싶어. 혹시 너가 이상적인 과거의 정치현상과 오늘날의 극단적인 사례를 비교하면서 이렇게 변화했다고 말하는 게 아닌가 싶은데


18세기 영국의 정치환경이나, 19세기 초 유럽에서의 정치상황 모두 명목적인 차원에서 보편적인 요구를 드러냈다고 하기는 힘들다는 게 내 개인적인 견해고, 20세기 중반 미국만 하더라도 명목적인 보편적인 요구가 '매카시즘'....이었던 상황인데, 그런 측면에서 과연 명목적인 차원에서 보편적인 요구를 드러냈던 정치환경이라는 게 사실 이상 속에서 존재했던 과거가 아닐까 하고 질문하고 싶어


물론 과거 18세기, 19세기 그리고 20세기 중반에서도 모두 인간의 이성을 쫓아 바른 공공의 선을 추구하기 위한 노력이 없었던 건 아닌데, (참정권 요구라든지, 기본권 요구, 그리고 차별 철폐등등) 그런 노력만 존재했던 과거는 아니었고, 한국 역시도 20세기 중반에 결코 ideal한 정치적 환경은 아니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어떤 측면에서 쇠퇴했다는 것인지 동의할 수가 없어.


그리고 다른 관점에서 너가 보니깐 "명목적인 차원에서 보편적인 요구"를 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게 아닐까? 새누리당 입장, 혹은 극우파를 투영해서 살펴보면, 새누리당은 나름 "명목적인 관점에서 보편적인 요구"를 하고 있어. 급변하는 국제 환경 속에서 북한의 위협과 빨갱이에 맞서서 남한을 지킨다.


물론 이게 "명목적인 차원에서 보편적인 요구"냐는 사실 여부를 떠나서 일단 그런 걸 내세워서 강용석이 한 게 사소한 일, 큰 나무, 큰 그림을 보라고 저 사건 당시에는 엄청 떠들어 댔었지. 오늘날 극우파 가운데서 너가 말하는 그런 스킨헤드 급의 논리를 거부하는 무리들도 있지만 자기들이 나름 생각하는 보편적인 요구(?)라는 걸 믿고 따르는 사람들도 상당히 있다고 생각돼



A3.


1) 강조한다면 나는 과거로부터의 극단적인 단절이 존재해왔다기보다는, 그러한 경향성이 존재했고 오늘날의 특수한 조건에서 (예컨대 리오타르를 빌어 말한다면 "거대서사의 붕괴" 같은 건 확실히 20세기 후반부의 특수한 조건이지; 나는 근본적으로 1960년대 후반부터의 국제적 정치경제적 조건--물론 한국과는 시차가 있지만--을 염두에 두고 있음) 조금 더 강력하게 드러난다고 봐.


2) "명목적인 차원에서 보편적인 요구"라는 건, 적어도 그들 자신들이 이것이 실제로 보편적인 요구라고 이해했다는 이야기임. 영국 청교도혁명이든, 프랑스 혁명이든, 오늘날 그것이 갖는 제한적인 함의에도 불구하고 적어도 그것이 부르주아계급+여러 계층에게 '보편적'인 요구로 (주관적으로나마) 받아들여졌다는 건 역사적 사실이지. 반면 강용석의 약진(?)을 포함하여 오늘날의 극우파들 및 극우파를 지지하는 대중들 사이에서는 그러한 명목상의 요구조차도 존재하지 않는 경우가 등장할 뿐만 아니라 실제로 정치적 영향력을 획득한다는 거고(비교대상으로 나는 차라리 장 마리-르펜을 포함한 유럽의 극우들과 스킨헤드들을 꼽고 싶네).


/ 매카시즘의 광풍 같은 경우도, 꽤 많은 사람들이 그걸 매우 진지하게 믿었긴 한데...다만 이 경우는 조금 다른 종류의 설명이 필요하다고 봐.


3) 물론 나는 앞서 말했듯 지금의 한국이 "공적 이성의 쇠퇴"를 아주 극단적으로 드러난다고 주장하지는 않아. 실제로 이것들은 모순관계라기보다는 스펙트럼에서의 이동 정도로 보는 편이 맞을테고. 다만 극우파들만이 아니라 중도나 진보의 스탠스, 혹은 '자유주의자'들 사이에서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식의 태도나 정치를 '즐기는' 경향이 (한국에 국한해서 말한다면) 적어도 우리가 체감하는 1990년대와 비교할 때도 보다 가시적이 되었다고 주장할 수는 있을 듯. 분명히 말할 수 있다면 어쨌든 강용석과 일베, 그리고 (좌파에서조차) '덕성'을 강조하는 계기와 같은 것은 한국의 대중정치에서 적어도 지난 20여년 정도를 비교할 때 새롭게 혹은 이전과 변별력 있게 나타나는 흐름이라는 것.


4) 내가 어버이부대와 일베(물론 여기도 조금 복잡한 구성원들이 있지만)를 다르게 보는 이유이기도 한데, 일베 유저들 중에서 꽤나 뚜렷하게 정치 자체로부터 보편적인 요구를 소거하거나 '당위'를 자기보존이라는 매우 협소한 차원에서 전개하는 이들이 있다면--이는 사실 중도적 자유주의자들의 일부에서도 나타나지만--, 어버이부대는 명확하게 이런 것에 대항해서 나타나는 흐름이지. 그리고 새누리를 포함한 한국의 우파들은 이런 스탠스들이 뒤섞여 있고. 다만 이 주제는 이번 글에서는 다루지 않았어. 몇몇 다른 곳에서 지나가듯 전개한 적은 있지만, 어쨌든 조금 더 깊게 다룰 주제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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