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22일. 부동산 임대업 / 어버이연합의 정신구조

Comment 2014. 7. 24. 00:45

1.


PD 수첩 "임대업이 꿈인 나라" 편에 대한 소개 기사 링크.

http://thinkdifferent.tistory.com/7720


아래는 나의 즉흥적인 코멘트.


1) '공간이용' 비용 자체의 (착취에 가까운) 상승 및 이를 가능하게 하는 비균등적인 권력관계. 사실 대체로 임대수익의 상승과 하강은 "자연적"이라기보다는 수요-공급에 대한 암묵적인 판단을 통해 결정된다(나는 여기에서 '자연적'인 가격과 수요-공급을 의도적으로 분리시킨다). "이 동네 전세값이 다 올랐는데" 운운 식의 발언은 건물/토지 유지비 및 보유주의 생계비를 훨씬 초과하는 지점에서 가격이 결정되고 있으며, 건물/토지보유자와 임차인의 권력관계에서 전자가 절대적인 우위를 차지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권력관계를 통해 (애초에 임대희망자 자체가 적은 지역에서 부동산을 운용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그러나 노동력이 집약되는 곳 근처에 이런 곳이 어디 있나?) 부동산 보유자는 공간점유권 자체를 하나의 막강한 '생산'수단으로 활용한다. 그 비용은 고스란히 임차인들에게 전가되며 생존최소비용 평균값의 증대를 초래한다.

2) 토지보유희망자, 혹은 일종의 사업/투기수단으로서 공간점유권을 희망하고자 하는 주체들의 증대. 쉽게 말하면 '임대사업'을 하고자 하는 이들이 늘어날수록 부동산 보유자는 부동산 임대수익 외에도 부동산의 매매를 통해 화폐재산의 증대와 축적이 가능하다. 1번에서 부동산이 일종의 '생산수단'으로 등장한다면, 2번에서는 상품자산으로 등장한다. 물론 본문의 한 사례에서 언급하듯 모든 부동산 상품이 신뢰할만한 상품은 아니다. 그러나 부동산 시장에서 상품의 가치는 수요와 무관할 수 없으며, 더욱 더 많은 주체(개인만이 아니라 기업을 포함한 각종 법인들을 포함하여)가 임대사업을 희망할 수록 부동산 상품가치가 떨어지지 않을 가능성은 높다. 이러한 사실 자체가 다시 또 부동산 가격의 상승을 불러일으킨다.

3) 다른 생산수단 및 소득수단의 열화. 본문의 한 인터뷰에서 알 수 있듯이 임시직과 정규직을 포함해 한국의 개인들이 안정적인 소득원을 확보하기란 더욱 어려워졌다. "맞벌이를 해봐야 실수령액이 연 5천"이라는 진술은 연5천의 적지 않은 현금소득으로도 안정적인 경제생활을 운용하기 힘들다는 사실과 어지간히 노력해도 그 이상의 소득을 확보하기가 어렵다는 것을 함축한다. 여기에 저 맞벌이직장의 '안정성' 자체가 불투명할 뿐만 아니라 워크-라이프 밸런스를 맞출 수 있는 직장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는 사실을 덧붙인다면 개인주체들이 (물론 그들 대부분에게는 그런 기회가 주어지지 않겠지만) 임대업자를 일종의 꿈의 직장으로 간주한다는 것은 전혀 이상하지 않다. 고소득만이 아니라, 생산수단 자체를 자신이 보유한다는 점에서 소득원의 (표면상의) 안정성과 워크-라이프 밸런스를 스스로 설정할 수 있는 '위치'가 중요하다. 푸코가 지적했듯, 신자유주의적 주체가 일종의 1인 기업화를 지향한다면, 대부분의 사회구성원들은 보유한 상품이 노동력 밖에 없다; 반면 부동산을 보유하는 순간 해당 주체는 노동-부동산에 이어 운이 나쁘지 않다면 (부동산 수익에 따른)현금을 한꺼번에 쥐게 된다.
* 워크-라이프 밸런스 개념을 나는 2000년대 후반 일본 민주당이 자민당을 뒤엎었을 때 노동관련 공약집에서 처음 읽었는데, 아직 한국의 대중정치강령으로 제대로 들어오지 않고 있다..."저녁이 있는 삶"과 같은 슬로건은 충분히 대중화되지 못하고 있다.

4) 3번과 연관되는 문제로, 한국에서 대부분의 현금보유를 하고 있는 기업/법인 집단의 소득은 다른 사회구성원들에게로 전이되지 않는다. 통상적인 언어로 말한다면, 기업은 사업투자 대신 토지보유를 선택한다. 이는 2번의 부동산비용 상승만이 아니라 동시에 3번의 "좋은 직장의 상대적 감소"를 동시에 초래한다. 특히나 신자유주의적 경제정책과 함께 한국의 경제운용 및 이윤배분에서 대기업(소수의 거대한 주체)이 차지하는 비중이 늘어날 때, 다시 말해 정부가 대기업의 이윤을 적극적으로 확보해주고자 백방으로 노력하면서 소득이 집중된 주체의 임대업 투자는 훨씬 더 강한 파급력을 가질 수밖에 없다.

5) 아마도 리카도였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지주계급이 사실상 사회 전체의 부를 잠식하면서 사회의 경제적 삶이 얼어붙게 되는 상황에 대한 묘사는 19세기 초중반의 영국에서도 있었다. 다만 현 시점과 결정적으로 다른 요소가 있다면, 리카도가 지주계급VS.자본가계급의 대립구도를 설정하고 후자의 승리를 위한 정책들을 주장했다면, 오늘날 한국은 화폐보유자들이 토지구매에 적극적으로 나섬으로써 지주=자본가계급이 성립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사회구성원들 간의 갈등과 대립이 이데올로기적 차원에서 매우 급속도로 커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그와 같은 갈등은 권력관계에서는 좀처럼 드러나지 않고 있다; 애초에 화폐/권력보유자들의 연대와 단합이 너무 강력해서 반대쪽 저울추에 아무리 많은 사람이 달라붙어도 좀처럼 저울이 움직이지 않는다. 현재 반대편에게 주어진 수단은 이데올로기 투쟁과 쪽수를 이용한 투표권 밖에 없는데, 양자 모두 (특히나 지역투표와 같은 이데올로기적 프레임 때문에) 아직 지배계급의 우위는 공고해 보인다. 어쩌면 두 지배계급이 갈등상황에 놓여 있던 19세기 전반의 영국이 독특한 사례일지도 모른다.

6) 그러나 이와 같은 상황이 영원할 것 같지는 않다. 예를 들어 감평사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사실 한국의 부동산비용은 지난 수십 여년간 엄청나게 증폭했고, 현재는 그와 같은 증가폭을 더 이상 보여주지 않는다. 아래에서 나온 가로수길은 소비의 중심지라는 점에서 예외적이며, 전세값의 폭등은 사실 주택부동산 구매수요의 대대적인 하락이라는 더 큰 요인의 결과라고 봐야 한다. 정부가 거의 미련해보일 정도로 각종 안전규제 철폐에 나서고 있지만, 이미 그런 정도로 수요가 다시 늘어나기에는 (냉소적으로 말해) '시장의 평형'이 너무나 안정되어 보인다; 차라리 "아무 것도 안 했다"는 소리를 듣지 않기 위한 정치적 제스처에 가까울텐데, 그렇게 규제를 철폐한 대가를 누가 지불할지는 가 보면 알 일이다. 주택부동산과 상가부동산은 별개겠지만, 적어도 전자에 국한해서 본다면 버블붕괴론은 단순히 예전부터 있어왔을 뿐만 아니라 점차 명백한 지표로 현실화되고 있다; 하우스푸어의 증대와 주택구매가의 하락, 올해 구조조정 대상기업명단에서 건설사가 차지하는 높은 비중이 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단지 이게 어느 시점에 어떤 방식으로 '해결'될지를 아무도 모르는 것 뿐이다. 지금은 어떻게 보면 일종의 버티기 대결 같은 상황이다. 그러나 한 편에서는 버티기 싫어도 다른 방법이 없기 때문에 (돈이 없는데 집을 어떻게 사란 말인가?!) 어쨌든 죽는 한이 있어도 '패배하지는' 않을 것 같다. 물론 이명박 때처럼 건설사들이 정부를 장악하고 세금으로 높은 가격을 지불해서 부동산을 사주는 일이 불가능하진 않겠지만 (말도 안 되는 정책이라고 생각할지 모르겠는데, 한국의 행정부는 4대강도 파헤쳤고 대통령 선거개입도 별 탈없이 해치웠다; 한 발자국만 떨어져서 바라보면 한국의 공공체계가 작동하는 모습은 이미 매우 우려스런 수준이다) 정부부채도 상당한 수준이라... 단지 그렇게 되도 고통의 끝은 아니라는 것, 오히려 버블이 붕괴되는 순간에 누가 현금을 보유하고 있느냐가 이후의 향방을 가를 것이다. 정부가 최소비용만 지불해서 대량을 주거지를 구매한 뒤 무상임대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 같지만, 여기서부터는 공상의 영역이다.



2.

2009년 시사인의 어버이 연합 잠입취재 기사

‘6070 용팔이’ 어르신의 하루
http://www.sisainlive.com/news/articleView.html?idxno=6107

막말 난무하는 어버이연합 안보강연
http://www.sisainlive.com/news/articleView.html?idxno=6101

“우리는 행동하는 보수파이다”
http://www.sisainlive.com/news/articleView.html?idxno=6093



아래는 나의 간략한 코멘트.


링크에 실린 어버이연합에 관한 자료는 한번 챙겨볼 필요가 있다. 인터뷰한 노인이나 어버이연합 '사무총장' (80대 노인들이 있는 단체에 사무총장 혼자 50대 초반이라는 것은 흥미로운 사실이다) 의 진술을 이루는 논리의 골격은 오늘날까지 새로운 극우파(물론 그 주 구성원들은 5,60대 이상이지만)의 논리에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 이러한 멘탈리티와 아주 유사한 것이 바로 지하철에서 "예수천국 불신지옥" 피켓 들고 돌아다니는 노인들의 정신구조다. 이들은, 자신들의 행동이 '객관적'으로 어떻게 보이든 간에, 자신들이 하는 행동을 통해 삶의 의미를 되찾을 수 있다는 아주 강력한 믿음을 갖고 있다(이들은 포스트모던을 비판하지만, 사실 이런 종류의 파편화된, 분열증적인 주관적 신념체계야말로 포스트모던의 사생아에 지나지 않는다). 뒤집어 말한다면 이들의 삶을 이루는 조건에는 '삶의 의미'를 주는 계기가 존재하지 않는다. 자신들이 사회적으로 (바우만의 표현을 빌면) "쓰레기가 된 삶"이라는 것, 자신이 속하고 부분적으로 자신의 노동을 바치며 "자신들이 키운" 사회의 정상적인 신진대사 안쪽에서 자신들이 오로지 배설물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이들은 인정하지 못한다; 그런 구조를 직시하기에는 지적으로 빈곤하다. 결과적으로 버려진 노인들의 억압된 리비도는 극우파의 국가주의적 논리와 만나며, 이를 위해서 이들은 얼마든지 폭력도 불사하곤 한다. 폭력을 휘두를 때 이 노인들은 자기 자신을 상상적인 층위에서나마 가부장의 위치에 올려놓으며 동시에 (역시나 상상적인 층위에서) 국가-공동체와 합일하는 공적인 존재가 된다. 곧 국가-가부장의 위치, 공적인 정당성과 우월한 위치를 동시에 확보하면서 이들은 "마누라와 자식새끼가 엇나가면 후드려 패서라도 버릇을 고쳐놓아야 하는" 아버지-남편으로 기꺼이 초법적-폭력의 일부가 된다. 이와 같은 불행한 정신상태와 이를 활용하고자 하는 극우파의 논리체계, 그리고 이들을 위한 자본과 공적인 편의를 제공하는 우파 행정부의 얄팍한 술책이 어버이연합이라는 국가-가부장의 망령을 움직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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