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물의 범람과 덕성의 부활

Comment 2014. 6. 30. 22:02

먼저 엄기호가 르몽드 디플로마티크에 쓴 글, <20대는 왜 투표하지 않게 되었나>를 보자.

http://www.ilemonde.com/news/articleView.html?idxno=711


벌써 4년 전 글이고, 지난 대선과 직전의 지방선거에서 딱히 20대가 정치적 무관심을 보였다는 평이 나오지 않았기에--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극우파들이 헤게모니를 장악하고 있기에--시의 적절하지도 않다. 엄기호라고 해서 모든 글이 다 좋지만은 않다는 걸 보여준다는 사실을 빼고는 별로 흥미로울 게 없는 글이다.


그러나 (누가 운영하는지 모르겠으나)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페이스북 계정이 올려놓은 이 글은 뜻밖의 지점에서 관심을 끈다. 그것은 바로 엄기호가 해법으로 제시한 '탁월함'이란 단어다. 엄기호의 답변은 일상어의 관점에서 보면 단순히 "좀 잘해야 하지 않겠냐" 정도이기에 별 의미가 없다. 그러나 만약 정치사상사의 맥락을 끌고 올 수 있다면, 탁월함은 곧 공화주의의 핵심개념 중 하나인 덕성virtue과 연결되어 있다. 곧 덕성/미덕은 탁월함을 가리킨다. 엄기호의 주장을 조금 고전적인 언어로 (다소의 비틀기를 무릅쓰고) 옮겨본다면, 좌파들이 이론적으로든 실천적으로든 덕성을 회복하고 보여줄 때에만 비로소 정치에 대해 너무 잘 알기에 역으로 행동하지 않는, 곧 잘 알기 때문에 어리석은 "20대"들의 냉소적인 정신을 치유하고 후자를 올바른, 덕성을 가진 시민들로 다시 형성할 수 있다는 이야기가 될 것이다.


시간을 조금 당겨서, 그보다 조금 앞에 출간된 김홍중의 <마음의 사회학>을 떠올려보자. 이 텍스트의 핵심개념은 '진정성'authencity이다. 김홍중의 주장을 아주 거칠게 요약한다면 1997년을 기점으로 한국 사회에서 진정성이 사라지고 속물만이 남았다 정도가 되겠다. 중요한 것은 이 때의 진정성이 단순히 특정한 태도 혹은 '마음'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며, 여기에는 암묵적으로 어떤 가치평가, 곧 미덕의 면모가 들어가 있다는 사실이다. 나는 조금 더 강하게 말해서 김홍중이 말하는 진정성이 덕성이라는 조금 더 큰 개념에 포함될 수 있는 게 아닌가 추측하고 싶다(그 대립항이 속물, 천박함이라는 데서 나의 추측은 조금 더 정당성을 획득하지 않을까?). 예컨대 루소가 만들어낸 고백의 서사들은 근본적으로 투명성=진정성=덕성의 결합체를 드러내기 위함이 아니었던가(브룩스가 낭만주의 시기의 멜로드라마를 분석한 내용 또한 참고할 수 있겠다)?


여기에서 엄기호와 김홍중이 자신들의 대립항으로 놓는 가치체계/태도는 사실 근본적으로 연결된다. 속물, 냉소, 천박함...이러한 선명해보이지만 아직 개념화되지 않은 수사들을 우리에게 조금 더 익숙한 (그래서 때로 너무 다양한 의미로 쓰이는) 용어인 '호모 에코노미쿠스', 곧 '경제적 인간'으로 정립해보자. 나는 이러한 인간형으로부터 세 가지 특성만을 강조하고 싶다. 하나, 경제적 인간은 자기 자신=개인의 이익을 항상 가장 중요한 목표로 간주한다. 둘, 경제적 인간은 따라서 특정한 조건에 처해질 때 그 조건에 가장 잘 적응하는 방법을 찾는다. 셋, 그러므로 경제적 인간에게 자신이 처한 조건 자체를 재구축한다는 발상은 나타나지 않는다. 곧 지금의 조건에서-독립된 존재로서의 나에게 가능한 최적의 전술을 찾는 경제적 인간이 엄청난 리스크를 걸고 사회적 조건을 재구축한다는 선택지를 고를 일은 없다. 불확실할 뿐더러, 자신이 독립된 개인인만큼 타인들도 독립된 개인이라고 가정하는 순간 "모두가 힘을 합쳐야 가능한" 변혁은 현실적이지 않기 때문이다("죄수의 딜레마"는 이런 '경제적 인간'이 어떻게 행동하는지를 설명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지, 모든 인간을 설명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죄수의 딜레마"는 그 자체로 이데올로기 비판을 위한 도구로 활용될 수 있다). 비관적인 전망으로 엄기호를 경악시킨 한 20대는 결코 "너무 많이 알아서 냉소적이 된" 것이 아니다. 국가라는 조건과 고립되어 여론조작에 취약한 경제적 '개인'이란 관점에서 사고할 때 당연한 귀결을 말했을 뿐이다.


여기서 진정성이든, 탁월함이든 간에 이것들을 함축하는 미덕/역량virtus의 인간이 그 근본개념에서부터 경제적 인간과 상충할 수밖에 없다는 점을 지적해두자. 경제적 인간에게는 엄밀히 말해서 근본적인 성장과 같은 개념이 존재하지 않는다--그와 같은 이론틀 안에서 성장의 개념을 도입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데, 적어도 사회적으로 통용되는 이 개념에서 계산주체의 판단 기준이 바뀌고 이 주체가 무언가 다른 것으로 변화한다는 요소는 좀처럼 도입되지 않는 듯하다. 벤담을 가져온다면, 경제적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형태라고 할 수 있는 공리주의(효용주의)적 인간은 모두가 평등하다...오로지 평면적인 인간, 쾌와 고통, 이윤과 손실만 존재하는 인간이 있을 뿐이다. 덕성을 갖춘 인간과 갖추지 못한 인간, 곧 보다 탁월한 인간과 그렇지 않은 인간의 차이를 함축하는 덕성의 체계와 공리주의적 체계는 대립한다. 한 가지 예외가 존재한다면, 베버가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에서 묘사한 신교도=자본가들이 그들이다; 이들에게는 화폐의 추구와 축적이 곧 종교적 덕성의 추구와 축적이었다. 베버 이후 자본가와 덕성을 결합시킨 사례로는 슘페터 정도나 떠오른다...그러나 베버와 슘페터가 묘사한 인간형은 그 자체로는 냉소 혹은 속물과 거리가 멀다는 사실 또한 지적해두자.


여튼 간에 핵심은 엄기호와 김홍중이 내세운 대안이, 나는 여기서 좀 더 나아가 우리의 시대에 다시금 제기되고 있는 대안이라고까지 말하고 싶은데, 다름 아닌 '인간형'의 차원에서 경제적 인간을 구축하기 위한 덕성의 언어와 근본적으로 이어져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이와 같이 '덕성으로의 회귀'는 사실 한 편으로 가속화되어가는 신자유주의적 인간형, 그러니까 경제적 인간의 증식과 함께 그 반작용으로 꾸준히 존재해오지 않았는가? 다시 브룩스의 정의를 따르자면, 멜로드라마가 도덕이 상실된 시대에 윤리적 가치를 소생시키기 위한 예술, 곧 질서가 부재하는 시대에 덕성을 표현하는 것이 관건인 예술형식이라면, 우리가 정치-경제를 이해하는 방식, 그리고 가장 강한 영향력을 갖고 있는 대중예술 중 하나인 TV드라마는 모두 그 자체가 멜로드라마적 서사에 기대고 있지 않은가? 우리가 정말로 완벽한 냉소주의의 지배 하에 들어갔다고 한다면, 왜 여전히 도덕적 부패가 스캔들이 되며 '덕성'을 체현한다고 여겨지는 인물에게(예컨대 안철수-) 정치적 역할이 주어지는가? 왜 그토록 냉소적인 우파들조차도 영웅/슈퍼히어로 서사에 매력을 느끼는가? 우리의 대중정치에서 철저히 속류화된 공화주의 모델, 덕성의 정치, 멜로드라마의 서사를 제외한다면 무엇이 남을 것인가? 심지어 굳건히 '제도의 정치'를 주장하고 있는 최장집 휘하의 이론가들조차도 "정상 정치"를 통해 정치인들과 시민의 덕성이 갖춰질 거라 믿는다는 점에서 본질적으로 유사한 전제를 공유하지 않는가?(최장집주의자들과 진태원이, 양자는 명백히 서로 다른 맥락에 속해 있음에도 불구하고, 덕성의 언어의 대표자라 할 수 있는 마키아벨리를 비슷한 시기에 읽고 연구한다는 것은 매우 흥미롭다)


나는 지금 당장 어떠한 주장이나 전망으로 나아가고는 싶지 않다. 한 발짝 물러서서 이야기한다면 위에서 제시한 스케치는 전혀 엄밀하게 검토되지 않은 순간적인, 아니 순간보다는 조금 더 길지만 여하튼 짧은 시간에 만들어진 구상이다. 다만 급속도로 진행된 '시민의 속물화'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시민들이 정치적 지도자들에게 특정한 덕목을 요구하고 있을 뿐더러 그들이 정치적 영역을 일종의 멜로드라마적 형식에 입각하여 이해하는 경향을 보여준다는 것 정도는 강하게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핵심은 덕성의 언어가 부활하는 것이 반드시 그 자체로 좋은 일이지만은 않다는 데 있다. 궁극적으로 멜로드라마의 최대 약점은 윤리적 가치를 특정한 인물(개인) 혹은 인물의 행위라는 매우 좁은 시각 안에 한정시키며, 덕성이 다시 요구되는 문제적 상황 자체를 초래하는 구조적 질서를 보지 못한다는 데 있다. 엄밀히 말해 엄기호의 탁월함이든, 김홍중의 진정성이든, 또 다른 덕성의 요구든, 이것들은 인간의 심성에 관련되어 있을 뿐 구조적 문제를 관통하지 못한다. 역으로 말하자면, 오늘날 덕성의 언어가 재등장한다는 사실 자체가 좌파들의 이론적 무능 혹은 그들의 이론이 설득력을 얻지 못하고 있는 상황으로부터 기인한 것이다. 포이어바하의 테제를 뒤틀어 말한다면, 세계를 바꾸고자 하는 학문은 세계의 설명과 분리될 수 없다. 그러나 오늘날 학문은 세계를 설명하지 못하기에 변혁을 수행해야 할 힘의 빈 자리를 어떤 무질서, 부패, 혼란에도 굳건할 유일한 가치관인 윤리 혹은 개인의 덕성이 메꾸고 있는 셈이다. 세계/사회를 설명할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탁월한 인간이 되어야 한다. 스토아 학파의 시절부터 내려오는 이러한 구도가 오늘날의 상황에 아주 들어맞지 않는 것은 아닌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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