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15일, 16일.
Comment 2014. 6. 17. 05:466월 15일.
http://seethrough.tistory.com/34
얼마 전에 진보교육감의 단일화가 우연의 산물이라고 분석해서 제법 히트를 친 글의 후속타. 개인적으로는 교육감 선거의 정당공천제를 둘러싸고 왜 진보교육/교육운동계 인사들이 새민련을 신뢰할 수 없는지를 설명하는 부분을 주의깊게 읽었다.
얼마 전 나온 박상훈 박사의 글(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001871)을 포함해서 노동당/녹색당/정의당 등에게 정당정치=기존의 민주당계에 합류하라는 (주로 최장집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권고들이 다시 나오고 있는데, 나는 바로 이 글에서 교육문제를 둘러싸고 이야기하는 맥락과 같은 이유에서 솔직히 그 주장에 전혀 동감하지 않는다(역설적이게도 글쓴이는 그러한 선택을 지지하는 듯 싶지만). 진보정당의 주체성 운운 이야기하기 전에, 간단하게 새민련 들어가서 어떤 형태로든 정치적 주체가 된다는 보장이 없다는 것을 지적하는 정도로 충분하다. 박상훈 박사는 새민련이 시장 장터처럼 아무나 와서 좌판을 깔면 되는 곳인 것처럼 이야기하는데, 아래 링크에서 나온 김형태 전 의원의 케이스처럼 일정 이상의 계파를 형성하지 못한 세력에게 과연 그런 기회가 주어질지 난 잘 모르겠다. 한국의 정당정치가 선거를 통해 스스로를 실현한다면, 그 정당정치는 다시 공천으로부터 뻗어나온다. 박상훈 박사의 인터뷰에서 나는 진보정치 자체의 발전보다는 민주당계 정당의 기능강화를 더 희망하는 심산을 보게 된다.
물론 지금 상태에서 진보정당들이 지리멸렬한 것 맞고 (어쨌든 통진당을 해결하지 않고는 별로 희망이 없다고 생각한다) 딱히 현황을 헤쳐나가는 답이 없는 건 사실인데, 새민련에 들어간다고 무작정 희망이 생기나? 거기 들어가서 세력규합을 해서 독립된 계파를 만들면 되지 않는가, 식의 주장이라면 나는 도대체 왜 지금까지 새민련에서 그게 안 되고 있는지를 먼저 해명하고 그걸 어떻게 넘을 수 있는가를 먼저 보여줘야 한다고 생각한다--정당정치를 다루고 분석하는 사람의 의무가 이런 작업이 아닌가? 실제로 이번 선거에서 새민련이 보여준 모습은 안철수로 대표되는 불안정하고 (별로 정세판단이 안 되는, 그러니까 직설적으로 말해 멍청한) 중앙집권의 권력욕과 기타 계파들의 어중간한 포지션이 아닌가? 초빙된 안철수를 중심으로 한 중앙(?)권력과 각종 계파들의 대립구도에서 진보계열이 들어가 독립된 세력을 형성하는 게 말처럼 쉬울까? 결국 기존 계파들의 말단으로, 그러니까 민주당의 말단이 아니라 기존 계파들의 말단으로 들어가서 공천을 받기 전까지 박박 기는 것 이외에 다른 현실적인 선택지가 있나? 개별적인 정치인으로 살아남는 거야 개인 역량 나름이지만, 정치적 집단으로서 문제의식을 유지하면서 나아가는 건 전혀 별개의 문제다.
내가 민주당 내부의 권력투쟁과 선거전략, 지배구조가 어떻게 되는지를 모르기 때문에 결론을 내리기는 힘들다. 하지만 상식적인 수준의 추론에 기대어 두 가지는 이야기할 수 있다. 1) 진보정당계가 민주당계에 합류하고자 한다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생존가능하고 자기들의 고민을 의제에 넣을 수 있는지를 먼저 따져봐야 한다. 2) 최장집주의자(?)를 포함한 병합/흡수 주장자들은 민주당 내 지배구조를 먼저 분석하고 진보정당계가 민주당계에 들어가서 어떻게 유의미한 정치적 집단으로 기능할 수 있는지 그 가능성을 먼저 입증해야 된다. 이 정도 공은 들여야 설득이 되든 말든 하는 거 아니겠나. 박상훈 박사의 인터뷰만 참조하면 그냥 문턱이 낮다, 노력이 필요하다 수준인데...글쎄, 내 머리에 먼저 떠오르는 건 병든 사자굴 앞에 기웃거리는 여우를 그린 이솝 우화의 한 풍경이다. 최장집주의자들은 진보정당계에게 왜 굴 속에 들어오지 않느냐고 온화하게 묻겠지만, 영리한 진보정당계라면 "들어간 발자국은 있는데 나온 발자국은 없네요"라고 답할 것이다.
6월 16일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003972
우리는 지금까지 우파들이 보통 갈등을 은폐하고 대립하는 이질적인 주체들을 국가나 민족이라는 이름 하에 단일한 주체로 호명한다고 생각해왔다. 그러나 여기에서 볼 수 있듯이 이제 새로운 우파들은 분명히 적과 아군의 경계선을 그으면서 사회를 전쟁터의 이미지로 그려낸다(전쟁 및 전략의 모델로 사유할 것을 촉구했던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 및 <앎의 의지>의 푸코가 떠오른다). 박근혜를 비롯한 지난 대선의 유력 후보들은 입을 모아 "갈등과 분열의 치유"를 외쳤으나 실제로 통치기구는 이면에서 적과 아군의 구별을 심화시키면서 어떻게 이 전쟁에서 승리할 것인지, 적을 무력화시키고 제거하며 아군을 늘리고 더 많은 영향력을 부여할 것인지를 고민해왔음이 원세훈의 지시에서 선명히 드러난다. 나는 그런 면에서 더 이상 '양극화'라는 개념은 효용을 유지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설령 생산수단의 보유와 같은 고전적인 기준에 의거하지 않더라도, 오늘날 "정치-경제적" 계급갈등 혹은 계급 간의 전쟁과 같은 단어는 현실을 보다 솔직히 묘사하는 개념으로서 재활용될 필요가 있다. 부와 권력이 집적된, 그리고 스스로의 헤게모니를 더욱 강하게 유지하기 위해서 적대세력에 대한 전방위적인 공격을 준비하는 지배계급이 있고, 근본적인 분할선을 사이에 두고 통치집단에 참여할 기회를 박탈당했을 뿐만 아니라 앞으로도 더욱 가혹하게 착취당할 것이며 저항과 저항적 주체로서의 주체화 기회조차도 빼앗길 위기에 처한 피지배계급이 있다. 나의 관점이 충분히 정교하지 않거나 포착하지 못하는 지점이 있을지도 모른다. 다만 한 가지만큼은 분명하다고 생각하는데, 맑스가, 프란츠 파농이, 푸코가 수행한 분석처럼 진정으로 사회비판적인 이론은 사회의 구성원들을 쪼개어놓는 분할선을 드러내고 그것을 철폐하지 않고는 진정한 화해란 불가능함을 다시 한 번 드러내어 왔다는 것이다. 오늘날 통치기구가 보편성과 공적인 성격 자체를 겉껍데기로나마 유지하기를 포기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은 다시금 우리가 단일한 주체로 호명될 수 없음을, 이 사회가 이제 깊숙한 지점에서부터 전쟁 상태로 돌입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한 마디로 나는 이제부터 실천적인 이론가들은 그들이 어디로 나아가길 원하든 모순과 적대의 현실로부터 출발해야 한다고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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