뇌과학과 실험철학적 질문들에 대한 단상

Comment 2014. 7. 26. 14:00


김대식 카이스트 뇌과학 교수의 파워인터뷰(문화일보)

http://www.munhwa.com/news/view.html?no=2014072501032927015005




요즘 갑자기 이 인터뷰를 링크하고 찬사섞인 반응을 덧붙인 게시물들이 곳곳에 보인다. 김대식 교수가 뇌과학에서 이룩한 성취 및 그가 제시하는 관련 연구내용들을 부정할 생각은 없지만, 나는 개인적으로 이 인터뷰에서 나오는 내용들은 대체로 이미 상식적인 앎에 포함된 것들이 많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러한 반응이 조금 의외였다(물론 한국사회에서 '상식적인 앎'의 스펙트럼이 매우 넓다는 사실은 인정해야겠지만).


두 가지만 덧붙이자.


1) 자유의지와 책임의 문제에서 김대식 교수가 언급하는 논지의 큰 틀은 철학사로 놓고 보면 사실 이미 17세기부터 나오던 이야기다. 지금의 뇌과학적 생리학의 수준이 아니라고 해도 인간이 감각자료로부터 '수동적'으로 영향을 받는다는 기초적인 생리학적 지식은 17세기 후반쯤 되면 나름 널리 알려져 있었고, 존 로크의 텍스트를 통해 일종의 철학적 상식이 된다. 대충 로크부터 시작해서 이른바 영국경험론자들의 논의를 거쳐 칸트까지 가는 과정을 훑어보면 사실 인터뷰에서 소개된 '실험철학'의 큰 틀은 과거의 논의구도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자아가 동일성=정체성identity를 유지하기 위해 만들어진 일종의 초월론적 가상이라는 설명도 그렇고. 심지어 '자유-비의지'("free-unwill")는 내게는 칸트가 자신의 윤리학(<윤리형이상학의 정초> <실천이성비판>)에서 제시한 인간 경향성의 제어만이 인간을 자유롭고 윤리적이고 이성에 부합한 존재로 만든다는 주장과 거의 같아 보인다. 그래서 김대식 교수가 "자유의지와 책임은 계몽주의의 산물이다" 식으로 이야기할 때, 계몽주의에 대해 약간의 지성사적 관심을 갖고 있는 사람으로서 이 진술이 충분히 역사적 맥락을 감안하고 행해진 것인지 불분명하게 읽힌다. 그런 식으로 말한다면, 애초에 칸트를 포함한 계몽주의적 기획 자체가 인터뷰에서 이야기하는 자유의지와 결정론을 둘러싼 논쟁 위에서 시작한 거라서, 지금 뇌과학의 연구성과라고 이야기하는 내용 정도로는 그다지 영향을 받지 않는다(형이상학이라고 비판받는 헤겔과 같은 철학은 사실 이러한 논의를 기초로 깔고 시작하는 것이다). 약간 거칠게 말하자면 여기서 김대식 교수가 새로운 것처럼 이야기하는 철학적 입장은 영미식 경험론자들의 통상적인 입장에 약간의 칸트적인 개념을 섞은 것과 크게 달라보이지 않는다. "세계는 우리가 지각하는 대로 만들어져 있지 않으며, 우리는 우리가 인식하는 대로 행동하지 않는다"와 같은 주장은 이미 18세기 말부터도 존재했고, 비교적 가까운 세기로 가보면 프로이트가 이 주장을 가장 센세이셔널하게 꺼낸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간단히 말해서, 이 인터뷰에 한정한다면 논의의 구도에서 딱히 새로운 것은 없다.


2) 언어와 소통의 문제도 마찬가지다. 근대사상사에 조금 익숙한 사람이라면, 이미 언어의 기능에 대한 회의가 17세기부터 곳곳에서 터져나온다는 걸 이미 알 것이다(가장 유명한 사람은 18세기의 루소일 것이고, 한 세기 앞으로 올라가면 홉스나 데카르트의 때부터도 언어의 모호함에 대한 비판은 흔하다). 인간존재들이 완전히 동일한 경험 / 인식체계를 공유할 수 없는 상황에서 어쩔 수 없이 그나마 나은 도구로 언어를 쓰고 있는 셈인데--그러니까 그나마 오해가 없는 수학적 언어를 만들고자 하는 시도가 빗발친 거다...일상언어를 대체한 데 성공한 케이스는 아직 없지만--, 언어의 한계를 인식하고 살아가는 것에 대한 나름의 합의가 있는 상태에서 언어를 통한 소통불가능성을 이야기해 봐야 (조금 더 따지자면, 이러한 주장에는 '소통'에 대한 굉장히 협소한 정의가 전제되어 있다) 전혀 새롭지 않다. 차라리 후기 비트겐슈타인 같은 태도가 훨씬 생산적이다. 영미분석계열 철학자들은 학을 띠겠지만, 이른바 포스트-철학을 하는 사람들은 이미 근본적으로 동일한 의미를 전달하는 소통이 안 되는 조건 하에서 어떻게 사는 것이 옳은가를 수십 년 전부터 고민해 왔다. 단지 영미분석계열 철학자들이 그들의 언어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물론 나는 뇌과학적 실험을 통해 우리가 모호하게 알아왔던 영역들을 보다 구체적으로 검증하고 우리 자신의 한계를 알아가는 작업의 가치를 폄하할 생각은 조금도 없다. 그리고 이 인터뷰가 일종의 대중적 인터뷰임을 감안한다면, 여기서 언급되지 않은 중요한 그러나 꽤나 복잡한 질문과 연구성과들이 적지 않게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아직까지 그러한 실험에서 촉발된 철학적 질문들이 '근대세계'의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해온 사상적 체계들을 근본적으로 뒤흔들 것 같지는 않다(인공지능과 기계의 문제는 조금 흥미롭긴 한데, 기술발전과 노동수요에 대한 논의가 사회학에서 없었던 것도 아니고...). 직설적으로 말하자면, 그러한 실험들에 기초해서 던져지는 질문들이 이미 너무 진부한 것들이고, 이러한 질문들에 쉽게 매혹되는 지금 상황이 우리에게 사상사적 지식이 얼마나 부재한가를 보여주기에 아쉬움이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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