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리 젠킨스 감독, <문라이트>. 남성성과 낭만적인 것.

Reading 2017. 3. 1. 17:21

배리 젠킨스(Barry Jenkins) 감독. <문라이트>(Moonlight). A24 Plan B Entertainment 제작, 2016(한국개봉은 20172).

 

아카데미 작품상 수상 전날 밤 이 아름답고, 부드럽고, 섬세한 영화를 보았다. 플롯만 볼 때 <문라이트>, <브로크백 마운틴>이 그렇듯, 기본적으로는 단편 소설 하나 정도에 해당한다. 각각 주인공의 서로 다른 호칭을 따온 "리틀"(Little), "샤이론"(Chiron), "블랙"(Black)의 세 장의 줄거리는 각각 한 문장 정도로 요약될 수 있다. 대신 영화는 인물의 감정 및 이들이 속한 장소의 본질을 표현하는 데 힘을 기울이는데, 이중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것은 역시 적절하게 인용되는 여러 갈래의 흑인음악으로, 이것들은 한편으로 특정한 '전통/공동체 내의 정체성'을 종합적으로 구축하면서 동시에 감상자의 정념을 끌어낸다. 이때 플롯의 간소함은 결여로 인식되는 대신 정체성의 묘사 및 감정의 표출을 위한 공간을 충분히 제공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영화에 대한 관객의 인상은 그러한 풍성함을 얼마나 음미할 수 있는가에 따라 갈릴 것이다.

 

줄거리가 시간적 순서를 따라 전개되며 성장, 상처, 회복과 같은 모티프들이 전면에 제시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는 <문라이트>를 일종의 교양·성장소설(bildungsroman)적 이야기로 받아들이기 쉽다. 그러나 몇 가지 질문을 던져보면 이 문제가 그처럼 간단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성장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구체적으로 어떠한 궤도를 따라 진행되는가? 작고 움츠러든 리틀이 거친 흑인 남성성을 연기하는 근육질의 마약상 블랙이 되는 과정을 우리는 (긍정적인 의미에서) “성장이라고 부를 수 있는가? 10여 년 만에 재회한 케빈 앞에서 다시 튀어나온 10대 시절의 수줍고, 상처받았으며, 섬세한 샤이론의 정체성과 블랙의 정체성은 별 탈 없이 공존할 수 있는가? 1장 끝에서 후안(Juan)이 극복할 수 없었던 자기모순, 즉 한편으로 어린 리틀을 아버지처럼 따뜻하게 돌봐주면서 다른 한편으로 그 어머니에게 마약을 팔아야 하는 딜레마는 과연 해결될 수 있는가? 영화는 이러한 물음에 대한 어떠한 답변도 제시하지 않는다. 그리고 여기에 대한 답변 없이 성장을 말할 수는 없다.

 

내 생각에 오히려 이 영화는 흑인 남성성 및 남성-남성 관계를 중심소재로 삼고 있는 낭만주의적해결불가능한 문제와 미적 가상이 공존한다는 점에서텍스트에 가깝다. 이 영화의 중심에는 특히 힙합 음악과 함께 제시되는 거칠고 남자다운흑인 남성성이 있다. 마약과 범죄, 섹스와 폭력으로 얼룩질 수밖에 없는 배제된 하층민의 암울한 삶에서 흑인 남성들에게 더 바람직한 삶이란 더욱 거칠고 폭력적이며 더욱 남자다운삶이다. 이러한 삶에서 폭력과 공격성의 방향은 더 약하고 남자답지 못한이들에게 향한다. 샤이론이 소년 시절부터 겪는 또래문화는 바로 이러한 기준에 바탕한 남성간 위계질서에 입각하고 있다. 그가 또래 남성들로부터 따돌림 당하고, (언어적으로나마) 지속적인 강간위협에 시달리며, 구타와 폭력에 노출되는 것한 마디로 위계질서의 밑바닥에 위치한 까닭은 이러한 남자다움에 부합하지 않는 숫기 없고 여린 동성애자이기 때문이며, 역으로 케빈이 테렐의 요구에 따라 (이미 애정을 느꼈던) 샤이론을 폭행할 수밖에 없는 것은 그 요구가 남자다움, 따라서 이 또래집단 내에서의 생존자격을 입증하라는 요구이기 때문이다. 결국 자신에 대한 폭력을 사주한 테렐을 다시 폭행하고 감옥에 가서 거친 흑인 마약상의 삶을 살게 될 때, 샤이론은 주어진 흑인 남성성을 받아들이고 이를 연기하는 것이다. <문라이트>는 분명 오늘날의 흑인 하층집단이 요구하는 폭력적 남성성의 문제를 중점적으로 그려내고 있으며, 그런 점에서 <브로크백 마운틴>과 맞닿아 있다.

 

물론 이 영화가 오직 그것만을 제시하는 것은 아니다. 폭력적인 흑인 남성성의 반대편에는 부드럽고 섬세하며 배려심 깊은 삶의 모델이 있다(이것을 단순히 여성적인것이라 부를 수는 없으며, 내 생각엔 이 영화가 차라리 다른 종류의 흑인 남성성을 제시하고 있다고 보는 게 맞을 것 같다). 쫓기고 고립된 리틀을 보살피는 후안, 해변에 앉아있는 샤이론을 부드럽게 감싸며 애무하는 케빈, 그리고 10년 뒤 케빈의 집에서 서로의 마음을 재확인하는 두 사람의 모습은 남성성이 그리고 남성-남성 관계가 폭력적 남성성의 위계질서를 뒤따르는 대신 또 다른 ”, 또 다른 우리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제공할 수도 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삶의 가능성은 한편으로 흑인 거주구역의 슬럼과 대비되는 자연, 즉 마이애미의 해변풍경과 동일시되며, 다른 한편으로 힙합이 아닌 다른 갈래의 흑인음악의 인용을 통해 그것이 공동체/전통의 부정이 아닌 또 다른 전통의 참조임이 제시된다. 주크박스에서 흘러나오는 바버라 루이스(Barbara Lewis)“Hello Stranger”50여년의 시간을 뛰어넘어 흑인음악 전통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는 나와 같은 관객에게도 무척이나 로맨틱하게 들릴 수 있는 것은 부분적으로 이 곡이 그러한 미적인 컨텍스트 위에 놓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또 다른 남성성은 (다소간 낭만화된) 자연 및 흑인 음악전통과 결합하여 샤이론과 케빈에게, 혹은 주어진 남성적 규범에 따를 수 없는 존재들에게 일시적으로나마 자기 자신으로 존재할 수 있는삶의 영역을 열어준다. 케빈과 재회한 샤이론은 점차 그동안 구축해온 블랙으로서의 역할로부터 벗어나 10대의 수줍고 여린 소년의 모습으로 돌아가며, 결국에는 남자다운흑인 남성에게는 용납될 수 없는 자신의 진심을 고백할 수 있게 된다. 마지막에 함께하는 두 사람의 모습은 자신의 존재를 부정하고 억압하는 기존 남성성의 강요로부터 벗어나 어떠한 폭력과 고통 없이 온전히 나 자신으로 있을 수 있는, 그리하여 너와 함께 할 수 있는순간을 보여준다. 물론 그것은 냉정히 말해 오로지 찰나의 순간에만 빛나는 미적 가상, 오직 낭만화된 자연, 따스한 예술적 전통, 그리고 연인과의 로맨스 안에서만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이 로맨스가 땅에 발을 내딛고 일상의 수레바퀴가 굴러가기 시작할 때, 샤이론이 마이애미의 해변을 벗어나 애틀랜타의 슬럼으로 들어가는 때 이 완전한 순간의 고양은 다시금 스러질 것이다(그것이 후안이 이야기에서 말없이 탈락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러나 우리는 모든 예술에게 산문이 될 의무를 요구할 수 없으며, 어떤 이야기는, 특히 낭만주의자들의 작업이 그러했듯, 시적인 소품으로 남을 때 더욱 힘 있다. <문라이트>도 그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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