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몽과 영국 정치사상사 연구: 몇 가지 지도 그리기

Reading 2017. 3. 20. 03:39

서구 근대의 "계몽"(Enlightenment)에 대한 근래 영국의 지성사·사상사 연구를 조감하기 좋은 저술 네 가지를 간략하게 정리 및 소개한다. 한국에는 피터 게이(Peter Gay)의 고전 <계몽주의의 기원>(_The Enlightenment: An Interpretation_, 2 Vols., 1967)이 그나마도 1998년 1권 _The Rise of Modern Paganism_만 번역된 이후 유감스럽게도 계몽 관련 연구가 몇몇 문화사·사회사적 저술을 제외하고는 거의 소개되지 않았으며, 특히 오늘날 계몽 연구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는 지성사 계열의 연구는 더욱 그러하다. 스코틀랜드 계몽을 다룬 이영석 선생의 <지식인과 사회>(2014, 이 책에 대한 나의 간략한 감상은 http://begray.tistory.com/62 를 보라)는 사상사라기보다는 사회사에 가까우며, riss에서 "유럽 계몽" 등으로 검색할 경우 나오는 논문들은 대체로 문학연구 계열이거나 혹은 (아마도 동아시아 담론 등의 영향으로 최근 인기있는 주제인) 계몽사상에 대한 동양사상의 영향을 탐색하는 것 정도다.


아마도 특히 영국학계의 정치사상사/지성사 연구를 따라가는 연구자가 드물다는 게 주요한 원인일텐데, 원인이 무엇이든 이런 상황은 (대학원 등에서 관련 전공을 공부하는 사람들을 제외하고) 이 시기에 관해 이후 주요한 논쟁점이나 연구경향을 따라가는 것 자체를 어렵게, 결과적으로는 서구 근대에 대한 역사적 이해 자체를 어렵게 만들고 있다. 연구관심사로 인해 최근 몇 년 간 17-18세기 영국 정치사상사 저술을 따라 읽어가면서 지금까지 한국어로 접할 수 있던 문헌과 오늘날 서구의 계몽 연구에서 "당연하게" 전제되고 있는 것 사이의 심각한 괴리를 느껴오던 차, 마침 전체적인 조망을 그리기에 좋은 문헌들을 몇 편 접한 김에 간단하게 소개한다. 세 편의 논문과 한 권의 소책자 모두 주석 및 참고문헌 등을 통해 중요한 연구성과를 풍성하게 알리고 있으므로 관심있는 연구자들은 직접 참고할 수 있겠다.


이 글에서 소개하는 저술들은 다음과 같다(이것들을 추천해주신 분께 감사드린다):

1. Haakonssen, Knud. "Enlightened Dissent: An Introduction." _Enligthenment and Religion: Rational Dissent in Eighteenth-Century Britain_. Ed. Knud Haakonssen. Cambridge: Cambridge UP, 1996. 1-11.

2. Young, R. W. "Review Articles: Enlightenment Political Thought and the Cambridge School." _The Historical Journal_ 52.1(2009): 235-51.

3. Robertson, John. _The Enlightenment: A Very Short Introduction_. Oxford: Oxford UP, 2015.

4. Piirimäe, Eva, and Alexander Schmidt. "Introduction: Between Morality and Anthropology--Sociability in Enlightenment Thought." _History of European Ideas_ 41.5(2015): 571-588.




1. Haakonssen, Knud. "Enlightened Dissent: An Introduction." _Enligthenment and Religion: Rational Dissent in Eighteenth-Century Britain_. Ed. Knud Haakonssen. Cambridge: Cambridge UP, 1996. 1-11.


: 18세기 자연법 연구를 이끄는 연구자 중 한 명인 크누트 하콘센이 자신이 편집한 <계몽과 종교: 18세기 영국의 합리주의적 비국교도>의 서문으로 붙인 짧은 글이다. 이 글은 먼저 앞서 언급한 피터 게이의 중심 내러티브, 즉 계몽을 "반 기독교, 반 교회적 성격의, 그리고 무종교 및 전(前) 무신론으로 이행해가는"(anti-Christian, anti-Church and at the point of sliding into irreligion and proto-atheism, 1) 과정으로 바라보는 관점이 특히 프랑스 중심적인 시선을 벗어나 "애버딘부터 아테네까지, 상트 페테르부르그부터 필라델피아"(from Aberdeen to Athens, from St. Petersburg to Philadelphia, 1)까지 각국의 상황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면서 많은 도전을 받게 되었음을 밝힌다. 이 책에서, 그리고 하콘센이 강조하는 것은 영국의 맥락으로, 이때 영국 계몽주의에 대한 오늘날의 연구의 출발점으로 지목되는 것은 J. G. A. 포칵(Pocock)의 "잉글랜드의 보수적 계몽"(a conservative Enlightenment in England, 2) 테제다.


아마도 <마키아벨리언 모멘트>(_The Machiavellian Moment_) 3부를 주의깊게 읽은 독자에게는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이야기일텐데, 포칵은 잉글랜드 계몽의 중요한 과제가 복음주의적 개신교(evangelical Protestantism) 및 카톨릭 대항-종교개혁(Counter-Reformation Catholicism)으로 대표되는 종교적 열광주의(religious enthusiasm) 및 미신에 대항하여 "문명 사회"(civilised society, 2)를 지켜내는 것이었다고 주장한다. 종교전쟁 및 이로 인한 내전으로 피폐해진 유럽은 "'회의주의적' 철학, 건전한 신학, 세련되고 사교적인 문예, 과학, 경제의 향상"('sceptical' philosophy, sound theology, polite letters, science, and economic betterment) 등을 통해 "사회보전과 근대화"(Conservation and modernisation, 2)이라는 당시로서는 따로 떼어놓을 수 없는 목표를 달성하고자 했다. 특히 잉글랜드는 프랑스, 독일, 스코틀랜드 등과 다른 경로를 걸었는데, 종교전쟁과 명예혁명을 통해 영국의 헌정체제는 "의회 안의 왕"(the King-in-Parliament)과 영국국교회에 주권을 부여했고, 이는 혁명기에 불거졌던 각종 열광주의적 종파들에 대항하는 선택지로 "계몽된 보수주의"(enlightened conservatism)가 다수에게 매력적인 선택지가 되는 것에 기여했다(3). 교회와 계몽이 결합하면서 전자는 후자의 회의주의적인 성향에도 관용적인 태도를 취했다. "요컨대 잉글랜드의 독특한 점은 국가·교회제도의 보전에 우리가 계몽과 동일시하는 강력한 근대화의 동력이 핵심적이었다는 것이다"(In short, the peculiarity of England was that the strong modernising drive that we identify with the Enlightenment was integral to the preservation of the establishment in state and Church, 3).


교회와 계몽이 결합한 영국, 교회과 구체제 국가가 계몽을 억눌러 결국 혁명으로까지 이어진 프랑스라는 두 개의 경로 사이에 스코틀랜드 계몽이 있다면, 하콘센은 잉글랜드 내에서도 이 "영국적 경로"에 온전히 속하지 않는, 그러나 계몽과 밀접하게 연관된 다양한 "계몽된 비국교도"(enlightened Dissent) 집단이 있었음을 지적한다(그리고 이것이 이 책에 수록된 논문들의 주 연구대상이다). 대략 칼뱅주의의 거부 및 영적 재생(spiritual regeneration)의 필요성을 부인하는 입장이라고 할 수 있는 이들 합리주의적 비국교도(Rational Dissent)들은 지성적 유니테리언주의(intellectual Unitarianism)를 제외하고도 다양한 분파들로 구성되었다. 18세기 영국에서 "합리적 종교"(Rational religion)과 관용이 확산되고 이것이 영국고교회파, 장로교, 회중주의, 복음주의에 이르기까지 영향을 끼치면서 잉글랜드는 다양한 종파가 공존하는 곳이 되었다.


하콘센은 국가와 교회의 성격이라는 두 가지 축을 신성/인간적 성격을 기준으로 네 가지 분류가 가능하다고 말한다. 첫째, 국가와 교회 모두 신성한 하나의 몸이라는 입장(로마 카톨릭 및 영국국교회의 공유지점으로 합리주의적 비국교도의 공격대상). 둘째, 양자 모두의 "인간적" 기원을 강조하고, 국가는 시민사회의 보전을 위한 기구이며 교회도 그 일부라는, 따라서 신과 직접 교통하는 사적 개인의 양심을 강조하는 입장(영국저교회파, 조셉 프리스틀리Joseph Priestley 등의 비국교도). 셋째, 교회는 신성하고 국가는 인간사회의 제도라는 입장(휘그적인 영국광교회파와 계몽된 비국교도가 합의할 수 있는 관점, 호들리 주교Bishop Hoadly 등). 그리고 넷째로 교회는 인간이 만들어낸 제도이며 국가가 신성한 것이라는 일견 불가능해보이는 입장이 있는데, 이는 "인간 본성의 신성한 기질의 핵심이 사회성"(sociability was the essence of the divine dispensation for human nature, 7)--이때 사회성은 시민사회와 국가를 형성하도록 추동하는 원인이 된다--이라는 주장을 통해 등장한다. 프란시스 허치슨(Francis Hutcheson)과 조지 턴불(George Turnbull) 등이 대표한 이러한 입장은 본성적인 사회성을 통해 도덕적 창조(moral creation)을 통한 행복 및 번영을 추구하는 것이 인간이 부여받은 사명이며 이를 가능케하는 수단이 계약을 통해 시민·정치사회를 설립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스코틀랜드식 "온건주의"(moderatism)는 잉글랜드의 계몽된 비국교도의 발전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이들은 한편으로 개개인들의 (사회)계약을 통한 사회형성을(이 대표적인 주자로 조지프 프리스틀리), 다른 한편으로 정치적 참여와 결부된 시민적 덕성(civic virtue)을 중요시하는(이쪽에는 리처드 프라이스Richard Price와 토머스 레이드Thomas Reid) 양가적인 면모--포칵이 <덕, 상업, 역사>_Virtue, Commerce, and History_에서 근대 서양정치사상의 두 근본경향이라고 지적한--를 함께 갖추고 있었다. 이에 못지 않게 흥미로운 또 하나의 양가적인 측면은 합리주의적 비국교도들이 1770년대 말부터 90년대말까지 한편으로는 보수적 계몽의 지배에, 다른 한편으로는 급진적 개혁(radical reform)파의 융성에 영향을 끼쳤다는 것이다. 이는 정통(Orthodox) 비국교도, 계몽, 합리주의적 비국교도 사이의 분할선이 상당히 흐릿했다는 것과도 무관하지 않은데, '합리적 종교'의 영향 하에 있던 많은 계몽 비국교도들은 정통파 비국교도들과는 인간 원죄에 대한 신앙을 공유했고, 다른 한편으로 급진적 합리주의적 비국교도들과는 인간의 힘(the powers of humanity, 10)에 대한 신뢰를 공유했다. 일종의 열린 영역으로서 비국교도는 다양한 방향으로 뻗어나갈 가능성을 지녔다. 어떤 이들은 복음주의의 대두에 기여했고, 어떤 이들은 제도와 권위에 대한 불신으로 철저히 개인의 자유를 추구했으며, 어떤 이들은 진보주의로부터 천년왕국론으로까지 나아갔다. "종교적 심성이 계몽으로 이끌렸듯이, 계몽된 마음은 그 자신을 초월하였고 그 초월은 종교적이었다"(Just as the religious mind was tempted into Enlightenment, so the enlightened mind exceeded itself and the excess was religious, 11).




2. Young, R. W. "Review Articles: Enlightenment Political Thought and the Cambridge School." _The Historical Journal_ 52.1(2009): 235-51. 

[이 글은 다음 네 권의 책에 대한 종합적인 리뷰논문이다:

 John Marshall, _John Locke, Toleration and Early Enlightenment Culture: Religious Intolerance and Arguments for Religious Toleration and 'Early Enlightenment' Europe_, Cambridge: Cambridge UP, 2006;

 John Robertson, _The Case for the Enlightenment: Scotland and Naples, 1680-1760_, Cambridge: Cambridge UP, 2005;

 Istvan Hont, _Jealousy of Trade: International Competition and Nation-State in Historical Perspective_, Cambridge, MA: Harvard UP, 2006;

 Robert Wokler and Mark Goldie, eds, _The Cambridge History of Eighteenth-Century Political Thought_, Cambridge: Cambridge UP, 2006.]


: 현재 옥스퍼드 크라이스트 처치 칼리지에서 1660년대 이후 18-19세기 영국 지성사 및 종교사를 가르치고 있는 B[rian]. W. 영(Young)은--그가 1993-2003년까지 서섹스 대학 지성사 분과에 재직했으며 최근에도 리처드 왓모어Richard Whatmore와 함께 블랙웰 출판사에서 나온 <지성사로의 안내>_A Companion to Intellectual History_, 2016를 편집했음은 기억할 필요가 있다--이 매우 유익한 리뷰논문에서 두 가지 작업을 수행한다. 가장 주된 것은 17세기 후반부터 18세기 후반까지 "계몽의 정치사상"에 대한 연구사를 두 가지 주제, 즉 17세기 종교전쟁으로부터의 연속선 상에서 유럽적·기독교적 맥락이 계몽에 끼친 영향력(마샬과 로버트슨의 저작들)과 18세기의 계몽사상이 어떻게 정치경제학적 논의로 넘어가는지(혼트의 저작과 <케임브리지 18세기 정치사상사>)에 초점을 맞춰 정리하는 것이다. 상대적으로 부차적이지만 역시나 흥미로운 또 다른 작업은 위의 연구사를 포함한 케임브리지 정치사상사 학파 구성원들의 작업에 대한 지적인 계보를 그리는 것으로, 프랑스의 아날 학파 정도를 제외하면 20세기 후반 서구 인문사회학계에서 비교적 공통된 학적 정체성을 공유한 집단이 이 정도의 지속적인 확장력을 보여준 적이 없다는 점에서 케임브리지 학파 자체는 매우 흥미로운 사례다(이 주제에 관심이 있다면 스키너의 <토대> 25주년 기념 컨퍼런스에 기초한 <근대 정치사상의 토대 재고>_Rethinking the Foundations of Modern Political Thought_, 2006의 논문들, 특히 마크 골디(Mark Goldie)와 포칵 등의 글을 참고하라).


영의 글은 17세기 후반-18세기 영국 정치사상사 연구에서 케임브리지 학파의 계보를 간략하게 제시한다. 통상적으로 케임브리지 학파의 출발점으로 스키너와 던(John Dunn), 특히 그들의 로크 해석에 끼친 피터 라슬렛(Peter Laslett, 1915-2001)의 영향력이 강조되었다면, 영은 특히 로크 이후 시대에 대한 던컨 포브스(Duncan Forbes, 1922-94)의 중요성을 지적한다. 그는 오늘날까지도 중요한 연구서로 꼽히는 <흄의 철학적 정치>_Hume's Philosophical Politics_, 1975를 저술했으며 1960년대 케임브리지 역사학과에서 스코틀랜드 계몽을 다루는데 중요한 기여를 했다(영은 당시 스코틀랜드 계몽에 깊은 관심을 가진 중요한 연구자로 케임브리지의 포브스와 옥스퍼드의 휴 트레버-로퍼Hugh Trevor-Roper를 지목한다)--던과 스키너 모두 학부 3학년 때 이 주제로 페이퍼를 썼다(236). 로크의 영향력에 대한 수정주의적 해석--18세기 대서양 양안의 정치사상에서 "로크적 계기"Lockean Moment 같은 것은 없었다는--의 영향을 받아 18세기 정치사상에 대한 거대한 해석적 프레임을 완성한 것은 포브스와 거의 같은 연배이자 아직까지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는 J. G. A. 포칵(1925-)의 <마키아벨리언 모멘트>(1975)로, 포칵은 여기에서 18세기 정치사상의 '세속화' 과정이라는 거대한 서사를 제시했으며 이어 <덕, 상업, 역사>(1985)에서 18세기 정치사상에 자유주의적 "권리"와 공화주의적 "덕성"의 두 가지 근본적인 경향이 있음을 주장했다(특히 2장 "덕, 권리, 매너: 정치사상의 역사가를 위한 모델"[Virtues, Rights, and Manners: A Model for Historians of Political THought, 37-50] 및 6장 "재산의 이동성과 18세기 사회학의 융성"[The Mobility of Property and the Rise of Eighteenth-Century Sociology, 103-23]을 보라). 이러한 흐름에서 케임브리지 학파는 1983년 스코틀랜드 계몽사상과 18세기 정치경제학을 중심으로 다룬 논문모음집 <부와 덕>_Wealth and Virtue_을 출간했으며, 마이클 이그나티에프(Michael Ignatieff)와 함께 이 책을 편집한 (본래 옥스퍼드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으나 케임브리지로 온) 혼트는 포칵의 내러티브에 기초하여 18세기 정치경제학적 사상의 궤적을 본격적으로 추적했다(본래 맑스까지의 경로를 생각했던 혼트의 연구가 그의 때이른 죽음으로 루소와 스미스에서 멈춘 것은 그의 탁월함에 경탄을 감출 수 없었던 나와 같은 독자에게도 무척 안타까운 일이다).


리뷰 논문의 전반부를 차지하는 (각각 포칵과 트레버-로퍼의 학생이었던) 마샬과 로버트슨의 저작은 공통적으로 종교개혁-관용에 대한 논쟁-초기 계몽의 연결고리를 강조한다. 마샬의 책은 1685년 루이 14세의 낭트 칙령(the Edict of Nantes) 폐지가 17세기 말 유럽사회에 초래한 종교적 관용을 둘러싼 논쟁에 초점을 둔다. 이때 핵심이 되는 것이 바로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유산으로, 이전부터 아우구스티누스의 논리는 이교도 및 종파분리자(schismatics)의 생명과 안전에 국가가 간섭할 권리를 정당화하는 데 사용되었고 칼뱅의 제네바 계승자 테오도어 베자(Theodore Beza, 1519-1605)를 비롯한 정통파 칼뱅주의도 이러한 흐름에 있었다. 이에 대항하여 관용론을 지지하는 (경우에 따라 칼뱅주의자들에게 이단으로 지목된) 신교도들--재세례파(Anabaptists), 아르미니우스파(Arminians), 소치니파(Socinians), 퀘이퍼(Quakers) 등등--은 신학적인 측면에서도 인간의 원죄와 타락상태에 대한 아우구스티누스의 강조에 반대하는 입장을 고수했다. 특히 "관용할 수 없는" 대상에 대한 관용을 둘러싼 두 입장의 갈등은 관용론을 지지하는 피에르 베일(Pierre Bayle)이 카톨릭 및 무신론자에 대한 관용을 부정한 존 밀턴(John Milton)이나 장 르클레르(Jean Le Clerc)를 비판하는 데서도 나타난다(237-38). "마샬의 연구는 초기 계몽의 경험이 지속되는 종교개혁과 얼마나 깊게 상호연관되어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Marshall's study demonstrates how deeply interwined the early experience of Enlightenment was with a continuing Reformation, 238). 관용의 옹호론자들은 자신들을 에라스무스적 전통 위에 놓았으며, 베일과 로크의 위치도 이러한 유럽 내 국제적인 관용논쟁과 무관하지 않다. 불관용과 박해가 일상적인 상식에 더 가까웠던 당시의 사회에서 마샬의 연구는 홀란드로 피신한 위그노 교도들에 의해 국제적인 "문인들의 공화국"(Republic of Letters)가 만들어지기 시작했다고 주장한다(239). 우정의 이상(the ideal of friendship)에 기초하여 "탐구, 시민성, 그리고 종교적 입장에 대한 논쟁을 피하는 것"(enquiry, civility, and the avoidance of religious disputation, 239)과 같이 계몽의 전성기를 특징짓는 요소들은 이 시기의 산물로, 우리는 로크의 유대인 관용론이 한 세기 후 프리스틀리, 프라이스, 제퍼슨 등에게 영향을 끼치는 걸 볼 수 있다.


관용사상가들이 계몽에 남긴 또 다른 유산 중 하나는 바로 그러한 사상가들에게 "동성애"(sodomy)를 포함한 "자유사상가/방탕아의 혐의"(the charges of libertinage, 240)가 씌워졌다는 것이다. 영은 이것이 로버트슨의 연구에서 베일이 "덕 있는 무신론자들로 구성된 번영사회의 가능성을 주창한 도전적인 에피쿠로스주의자"(the challenging Epicurean exponent of the possibility of a thriving society of virtuous atheists, 240)로 등장하는 것과 이어진다고 말한다(실제로 베일은 1697년 "에피쿠로스"에 대한 에세이를 썼다; 영은 로버트슨과 마샬의 공통점으로 관용론자로서 베일의 역할 외에도 '문인들의 공화국'이 계몽의 생성과 촉진을 위해 수행한 역할을 강조하는 점을 든다). 1670년대 포르 루아얄(Port Royal)의 블레즈 파스칼(Blaise Pascal) 및 피에르 니콜(Pierre Nicole)은 인간의 타락을 강조하는 아우구스티누스적 전제로부터 역설적으로 바로 그러한 자애심(amour propre)과 자기 이익추구가 인간을 사회 속에서 성공적으로 생존하게 만든다는 결론을 이끌어냈으며, (다른 관용론자들과 달리 아우구스티누스적 전제를 부인하지 않았던) 베일은 그러한 결론으로부터 다시금 에피쿠로스적 입장을 끌어낼 수 있었다. "이처럼 많은 치환이 가능했고 따라서 반관용론자와 관용론자 모두를 포용할 수 있었던 "아우구스티누스적 모멘트"는 명백히 "마키아벨리적 모멘트"보다 무한히 더 많은 영향을 끼쳤고 또 무한히 더 오래 (고대 후기부터 18세기까지, 몇몇 경우에는 그 이상으로) 지속되었다"(Clearly, the 'Augustinian moment', capable as it was of so many permutations, embracing both antitolerationists and tolerationists, was both infinitely more influential and infinitely more longer-lasting (from late anitquity to the eighteenth century, and well beyond in some particulars) than the 'Machiavellian momnet', 240)--이 문제는 이스트반 혼트의 유작 <상업사회의 정치: 장-자크 루소와 애덤 스미스>_Politics in Commercial Society: Jean-Jacques Rousseau and Adam Smith_, 2015에까지도 깊은 흔적을 남기고 있다.


스코틀랜드와 나폴리의 맥락을 가져온 로버트슨의 연구는 계몽의 "통합된, 세계시민주의적인, 세속적 정체성"(its unitary, cosmopolitan, and secular identity)을 강조하며, 계몽의 주된 목적이 인간의 삶을 개선시키는 것(human betterment)이었고 그것을 평가하고 촉진하는 수단이 바로 "정치경제학이라는 새로운 학문"(the new science of political economy)이었다고 말한다(241)--이런 점에서 로버트슨은 계몽의 종교적 경험의 가능성에 대한 포칵의 주장에는 동의하지 않지만, 동시에 (스피노자로 대표되는) "급진적 비종교"가 계몽의 핵심이었다는 조너선 이즈리얼(Jonathan Israel)에게도 동의하지 않는다. 이러한 맥락에서 로버트슨은 베일, 버나드 맨더빌(Bernard Mandeville), 윌리엄 워버튼(William Warburton), 잠바티스타 비코(Giambattista Vico) 등과 함께 도덕 이론가로서의 데이비드 흄이 "계몽 바로 직전"(the immediate pre-Enlightenment)에 속했으며 흄이 정치경제학 연구를 통해 스코틀랜드에 계몽을 가져왔을 때 비로소 그가 완전히 계몽에 들어섰다고 본다. "갈리아니및 제노베시에 의해 나폴리에, 그리고 흄에 의해 스코틀랜드에 소개된 정치경제학은 에피쿠로스적 도덕철학에 대한 재작업 및 [장-프랑수아] 멜롱의 저작과의 다툼을 포함하고 있었다. 계몽은 굳건한 전 계몽적 토대들 위에 만들어진 것이었다"(The political economy introduced into Naples by Ferdinando Galiani and [Antonio] Genovesi, and into Scotland by Hume, involved a reworking of Epicurean moral philosophy, as well as an engagement with the work of [Jean-Francois] Melon; the Enlightenment was built on firmly pre-Enlightenment foundations, 244).


로버트슨이 포칵의 테제와 오랜 기간 동안 충돌해왔다면, 마찬가지로 옥스퍼드 대학원에서 트레버-로퍼의 학생이었던 이스테반 혼트는 케임브리지 학파와 보다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고 실제로 던컨 포브스의 강좌직을 물려받으면서 케임브리지 학파의 중심인물이 된다(245). 스키너, 던, 리처드 턱(Richard Tuck), 포칵의 연구만이 아니라 독일어권의 라인하르트 코젤렉(Reinhart Koselleck)까지도 참고했던 혼트에게는 흥미롭게도 "계몽"이 그 자체로 직접적인 중요성을 갖지 않는다고 영은 지적한다. 그러나 혼트 또한 홉스적인 "국가의 질투"(jealousy of state)로부터 흄의 "교역의 질투"(jealousy of trade)로의 이행을 중심에 놓으면서 정치적 경험에 대한 18세기의 사상에 17세기의 영향이 얼마나 중요했는가를 강조한다--18세기 정치경제학에 대한 혼트의 기여를 칭송하면서 영은 혼트를 포함해 던, 에마 로스차일드(Emma Rothschild), 마이클 소넨셔(Michael Sonenscher), 개러스 스테드먼 존스(Gareth Stedman Jones) 등으로 구성된 케임브리지 "킹스 칼리지 학파"(King's College School, 246)라 부를만한 그룹의 공동작업이 근대정치사상사에 대한 새로운 수정주의적 해석을 제시했음을 말한다. 혼트는 또한 케임브리지 학파의 또 다른 중심테제, 즉 공화주의·시민적 인문주의·(신)마키아벨리주의와 자연법(natural jurisprudence) 전통의 관계를 다루었다. 애덤 스미스에게서 시민적 인문주의의 담론은 점차 자연법 전통에 영향을 받은 정치경제학의 담론에 길을 내주게 되고, 이후 두걸드 스튜어트(Dugald Stewart) 및 "에딘버러 평론"(Edinburgh Review)가 대두하는 1800년대 영국에 이르면 상업사회의 시민적 인문주의는 쇠퇴하기에 이른다(247).


영의 글은 마지막으로 <케임브리지 18세기 정치사상사>의 연구범위를 (매우 긍정적으로 평가하면서) 짧게 다루는데, 여기에서 특히 강조되는 것은 <부와 덕> 및 혼트의 작업에 대한 소개로부터 이어지는 자연법 전통과 정치경제학의 연관성이다. "자연법(natural law and jurisprudence)의 언어는 계몽기 정치경제학의 발전과 상보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혼트의 분석과 마찬가지로) [<케임브리지 사상사>에 수록된] 제임스 무어의 분석이 보여주듯 자연법(law)은 정치경제학으로 넘어갔으며, 마찬가지로 프레더릭 로젠이 바라보듯 법(jurisprudence)의 언어는 점차 공리주의의 언어에 길을 내주었다"(the language of natural law and jurisprudence is also seen as complementary to developments in Enlightenment political economy, but just as James Moore's analysis (like Hont's) witnesses natural law ultimately giving way to political economy, so Frederick Rosen sees the language of jurisprudence gradually give way to that of Utilitarianism, 249-50).


*<케임브리지 18세기 정치사상사>에 수록된 개별 논문에 대한 좀 더 상세한 논평 및 전체 저작에 대한 비판적인 평가로는 크리스토퍼 브룩의 글을 참고할 수 있다(*Brooke, Christopher. "Light from the Fens?" _New Left Review_ 44(Mar.-Apr. 2007): 151-60. [Robert Wokler and Mark Goldie, eds, _The Cambridge History of Eighteenth-Century Political Thought_, Cambridge: Cambridge UP, 2006 에 대한 리뷰]).


** 초기 계몽 시기부터 18세기 중반까지의 상업사회와 덕의 문제에 관한 매우 뛰어난 요약으로 <케임브리지 18세기 정치사상사>에 13장으로 수록된 이스테반 혼트의 글 "초기 계몽시기 상업과 사치 논쟁"(The Early Englightenment Debate on Commerce and Luxury, 379-418)을 참고하라.




3. Robertson, John. _The Enlightenment: A Very Short Introduction_. Oxford: Oxford UP, 2015.


: 브라이언 영의 리뷰논문에서 다뤄진 주요 계몽 연구자 중 한 명인 로버트슨의 이 책은 영국에서 훈련받은 뛰어난 저자들이 공통적으로 보여주는 미덕을 훌륭하게 체현한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다량의 전문적인 지식을 평이한 언어를 통해 아주 효율적으로 압축정리하여 입문자와 전문연구자가 동시에 주의깊게 읽을 수 있는 글을 쓰는 능력말이다. 역시나 훌륭하게 요약된 "더 읽을거리"(Further readings)를 제외하면 <계몽: 초간단 입문>은 총 5개의 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1장과 5장이 계몽에 대한 연구사·담론을 통해 보다 일반적인 질문을 던진다면, 종교와의 연관성을 다루는 2장, 계몽사상사들의 도덕철학·역사기술·정치경제학을 정리하는 3장은 지성사의 연구성과에 초점을 맞추고 있으며(따라서 가장 흥미롭고 밀도가 높다), 계몽과 정부의 통치·공중(the Public)과의 관계를 다루는 4장은 보다 사회사·문화사에 가깝다(그러나 여기에서도 로버트슨은 지성사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입장에 있다).



1장 "계몽"(The Enlightenment)은 일반적인 역사 개념으로서의 계몽을 둘러싼 기본적인 논의를 소개한다. 로버트슨은 우선 계몽이 (서구) 18세기를 무대로 등장했음을 짚고(1), 특히 그것이 철학에서 출발했으며 근대(modern), 근대성(modernity)과 깊은 연관을 맺고 있음을 지적한다. 프랑스어로 Lumières, 독일어로 Aufklärung이라 불렸던 (영어권의 Enlightenment는 다소 늦게 프랑스·독일어 용어의 번역을 통해 등장했다) 계몽이 당대에 가진 성격을 잘 보여주는 것은 특히 프랑스에서 타올랐던 "근대인 대 고대인"(moderns VS. ancients) 논쟁으로, 대표적으로 달랑베르는 고전 그리스·로마 문화를 가리키는 후자보다 (특히 과학혁명을 이룩한) 17-18세기의 근대인들이 더 나은 문명적 성취를 달성했다고 주장했다. 과거에 대한 현재의 우위, 특히 인간사회·문명이 더 나은 방향으로 발전하고 있다는 사고는 콩디약(Condillac), 흄, 스피노자, 볼프(Wolff), 칸트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이러한 계몽에 대한 역사적 연구가 본격적으로 진행되기 시작한 시점을 로버트슨은 1930년대의 프랑코 벤투리(Franco Venturi)로 놓는다. 처음에는 독일과 프랑스를 중심에 두었던 계몽에 대한 연구는 (이탈리아인 벤투리의 기여를 포함하여) 이탈리아, 스코틀랜드, 잉글랜드 등 점차 다양한 지역에서의 계몽을 다루는 국제적인 연구분야가 되었으며, 하나의 사회 내에서도 지식인과 통치자의 역할에 대한 강조에서 점차 중하층계급의 다양한 요소를 살피는 사회문화적 연구로 확장되었다. (특히 비교적 최근의 동아시아권의 기여를 강조하는 관점을 포함하여) 이러한 확장은 당연하게도 하나의 공통적 현상으로서의 "계몽"이라는 게 있다고 볼 수 있는지, 그런 것은 존재하지 않거나 복수의 계몽"들"만 말할 수 있는 게 아닌지에 대한 의문으로 이어졌는데, 여기에 대한 로버트슨의 단호한 입장은 짧게라도 음미해볼만 하다.


"이 책에서 다룰 계몽은 유럽적인, 즉 영국에서 트란실바니아까지, 발트 해에서 지중해까지 전체 유럽 대륙을 가로지르는 현상이다. 이 계몽은 동시에 대서양 너머 남북 아메리카의 유럽 식민지까지 뻗어나가, 그리고 대서양으로부터 인도양과 태평양으로까지 나아가 인도 및 중국 문화와 마주한다. 그러나 내가 이해하는 한 계몽은 유럽세계에서 나타난 현상이다. 중국이나 남아시아에 고유한 계몽들을 만들어내는 일, 혹은 이 현상을 유럽 또는 세계사의 매우 다른 시기로 끌어가는 일은, 만약 그런 일이 유비적으로든 번역을 통해서든 가능하다면, 다른 이들이 수행할 과제다. 난 여기서 그러한 시도를 하지 않을 것이다. 좋든 나쁘든, 계몽은 유럽의 창작물이자 유산이다" (The Enlightenment presented in these chapters was a European phenomenon, reaching across the entire Continent of Europe, from Britain to Transylvania, and from the Baltic to the Mediterranean. It was also an Enlightenment which extended across the Atlantic Ocean, to the European colonies in North and South America, and from the Atlantic into the Indian and Pacific Oceans, there to encounter the cultures of India and China. But the Enlightenment as I understand it remains a phenomenon of the European world. If it is possible, by analogy or translation, to construct indigenous Enlightenments in China or South Asia, or to transfer the phenomenon to quite different periods of European or world history, others may undertake the task. I will not be making the attempt here. For better or for worse, the Enlightenment was Europe's creation and legacy. 13-14).



2장 "종교와의 다툼"(Engaging with Religion, pp. 15-48)은 계몽을 관용 및 세속화와 동일시해온 통념 및 이를 비판하며 (가장 강력한 세속화를 주장한) "급진적 계몽"(Radical Enlightenment)과 "종교적 계몽"(religious Enlightenment)까지의 다양성을 강조하는 최근의 연구경향을 소개하며 시작한다. 로버트슨은 종교, 특히 기독교적 맥락과 계몽이 깊이 얽혀있음을 인정하되 기독교·종교에 대한 계몽의 특징적인 면모로 세 가지 입장, "종교의 역사에 대한 비판적인 탐구와 함께 종교적 관용 및 교회가 국가에 종속되어야 한다는 주장"(Critical enquiry into the history of religion, along with arguments for toleration and for the subordination of church to state; 세 번째 요소는 "신성한 것과 시민사회적인 것의 관계"[the relation between the sacred and the civil]에 대한 논의라고도 할 수 있겠다)을 지적한 뒤 이것이 실제로 17세기에서부터 본격적으로 등장했으며, 따라서 17세기 말과 18세기 초를 잇는 "초기 계몽"(early Enlightenment) 범주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종교에 대한 계몽의 큰 흐름이 '내세를 위해 현세를 부인/희생하기를 거부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면, 보다 구체적으로 17세기 초기 계몽기에 중요한 지적 모멘트로 "계시 종교"(revealed religion)로부터 자연법, 인간 이성, 인간의 정념 등과 밀접한 연관을 가진 "자연 종교"(natural religion)가 분리되고 후자에 초점이 놓여진 것을 꼽을 수 있다. 자연 종교의 개념은 한편으로 유럽인들이 다른 지역 및 과거의 종교를 설명할 수 있는--그리고 기독교의 단일한 우월성을 의문시할 수 있는--프레임을 제공했으며, 여기에 더하여 특히 17세기 말 기독교, 그리고 성경에 '역사적', '문헌사적'으로 접근하는 방식이 유행하면서 성경=계시=유일하게 보편적인 신의 말씀이라는 관념 또한 지탱될 수 없게 되었다.


스피노자의 <신학정치론>(_Tractatus theologico-politicus_, 1670)이 성경을 (통치 이데올로기를 위한 수단적 성격이 강한) '역사서'로 읽는 강력한 시도였다면, 피에르 베일(1647-1706)은 정념으로 타락한 본성을 가진 인간도 사회적인 삶이 가능하다는 걸 강조하면서 무신론자가 우상숭배자보다 못하지 않거나 더 나을 수도 있다는 논리를 제공했는데, 이는 서로 다른 종파의 기독교인들이 서로를 우상숭배자라고 공격했음을 고려할 때 기독교인 자신들을 공격하는 논리로 전유될 가능성을 함축한 것이었다. 영국의 존 톨런드(John Toland, 1670-1722)는 <신비롭지 않은 기독교>_Christianity not Mysterious_(1695-96)의 출판을 통해 이성에 기초한 성경 독해를, 뒤이은 저작을 통해 종교가 통치·정책의 수단이었음을 강조했다. 이는 영국의 앤서니 콜린스(Anthony Collins), 매튜 틴달(Matthew Tindal), 존 트렌처드(John Trenchard)에게 영향을 끼쳐 성직자통치(priestcraft)에 대한 비판을 촉발했으며, 인격신이 아닌 원리로서의 신을 믿는 이신론자들(Deists)의 등장으로까지 이어진다. '스피노자의 정신'이라 자칭한 (아마도 네덜란드의 위그노 망명자들로 추정되는) 저자들의 <세 명의 사기꾼>(_Treatise of the Three Impostors_, 1719)은 그리스도를 포함한 주요 종교의 신성한 기원을 부정함으로써 무신론적인 급진적 계몽에 논리를 제공했다. 더불어 유대교만이 아니라 인도, 아시아, 아프리카 등의 종교에 대한 비교종교사적 연구가 성행했는데, 이는 이후 "신의 섭리에 따르는 합리적 시민 종교"(a rational civil theology of divine providence, 28)를 제시한 비코의 역사철학에도 이어졌다. 비코는 "상식/공통 관념"(common sense)에 기초한 '사회적인 것'이 자연 및 은총(grace)으로부터 자율성을 가질 수 있다고 주장했다. 18세기 후반 독일에서는 역사적 비판에 기초한 "계몽 성경"이 등장했으며, 볼테르와 흄은 각각 계몽정신에 입각한 종교사를 다시 쓰고자 했고, 뷔퐁(Comte de Buffon, 1707-88)의 "자연사"(natural history)는 성경에 언급된 자연적 사건을 '과학적'으로 다루면서 성경이 제시하는 인류의 신성한 기원을 탈신성화시키는데 기여했다.


관용론의 핵심은 종교개혁의 열정이 초래한 (내전 및 국제전을 아우르는) 종교전쟁의 참화를 제압하고 시민사회의 평화(civil peace)를 보전하는 것이었다. 이미 스피노자 및 홉스가 주권자에 의한 정치적인 해결책을 제안한 바 있었다면, 1589년의 낭트 칙령을 폐기한 루이 14세의 결정(1685)은 개신교 진영에 다시금 관용론을 불러일으켰는데, 로크는 (로마카톨릭과 무신론을 배제한) 종교적 다원주의를, 베일은 개인의 양심에 기초한 관용론을 제시했다. 18세기에 종교적 관용론으로 두드러지는 것은 볼테르의 논의였는데, 그는 장 칼라스 사건("the Calas case")을 비판하면서 관용을 시민사회, (문명화된) 습속(manners), 철학, 이성 등 계몽의 핵심요소와 연결지었고, 그 반대편에 신학·종교상의 불관용을 "시대착오적"(anachronistic)인 것으로 놓았다. 요컨대 미개한 과거로부터 계몽된 현대까지 이어지는 가치평가적 시간축이 설정되고 그 위에 관용이 (양심을 통한 정당화에 기대지 않고도) 미개한 불관용보다 진보한 '근대문명'의 표지로 자리하게 된다. 잉글랜드의 비국교도들은 카톨릭도 관용의 대상에 포함시켜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1789년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The Declaration of the Rights of Man and Citizen)은 관용 및 종교의 자유가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도록 하는--물론 이후의 역사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지만--길을 트게 된다.


교회와 국가 혹은 신성한 것과 시민사회적(the civil)의 관계를 문제삼는 목소리는 단순히 종교 비판이 아닌 양자 간의 정치적 관계를 재조정하고자 했다. 16-17세기의 종교개혁이 통치자에 대항하여 교회가 시민사회의 힘(the civil powers)에 토대를 둔다는 논리의 강조로 이어졌다면, 통치자들은 다시 교회와 시민정부의 권위(civil authority) 사이의 구별을 강조하는 논리로 교회지도자들을 공격했다. 이러한 논쟁의 맥락에서 16-17세기에 토마스 에라스투스(Thomas Erastus)의 에라스투스주의(Erastianism), 즉 통치자가 종교를 결정한다는 입장이--영국국교회와 프랑스의 "갈리카니즘"(Gallicanism) 등--확산되었고, 17세기 후반에는 관용론의 대두와 함께 한편으로는 통치자·시민정부의 권위는 내전이든 국제전이든 종교전쟁을 피해야하며, "은총" 또는 성직자가 시민사회의 평화(civil peace) 혹은 시민정부의 통치자가 관장하는 사회의 평화를 침범하지 말아야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18세기에 나폴리의 피에트로 잔노네(Pietro Giannone, 1676-1748)와 이로부터 영향을 받은 에드워드 기번 등은 기독교를 역사화·상대화하여 '시민사회의 역사'(civil histories)를 기술하는 문건들을 집필했으며, 이것들은 (역사적) 종교와 시민사회가 공존하는 길을 탐색하고자 했다.



3장 "인간의 조건을 개선하기"(Bettering the Human Condition, pp. 49-81)는 계몽 사상을 통해 인간사회를 이해하는 사유·논리가 어떻게 형성되었는가를 다루며, 그 대표적인 예시로 도덕철학, 역사기술, 정치경제학을 꼽는다. 로버트슨은 인간 본성이 허영심(vanity) 또는 자기애(self-love)와 같은 경향, 즉 자신의 보전과 이익을 우선시하고 "자신의 상황을 타인보다 더 낫게 만들고자 하는"(to improve our condition relative to that of others, 49) 성향에 이끌리는가의 여부가 이 시기에 핵심적인 질문으로 등장했음을 짚으며 논의를 시작한다. 홉스로부터 맨더빌, 나아가 스미스까지도 이어지는 인간본성에 대한 고민은 ①그와 같은 반도덕적·반사회적 기질이 인간의 삶에서 배제될 수 없으며 ②도덕적으로 칭송될 수 없는 이러한 악덕이 다른 한편으로 개인과 사회의 부와 번영을 이끌어내기도 한다는 양가적 성격을 지닌다는 점에서 인간본성과 국가·사회형성의 관계를 탐구한 17-18세기 정치사상 논쟁의 한복판에 존재했다.


도덕철학과 사회성(sociability) 논쟁의 계보를 다루는 첫 번째 절(pp. 50-59)은 이 책에서 가장 압축적이고 까다로운 부분이다(이 주제에 대해 보다 전문적인 안내는 이 게시물 4번에 소개한 Piirimäe&Schmidt의 소개논문을 참고하라). 무리를 무릅쓰고 로버트슨의 정리를 다시 한번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7세기 중반 정치사상의 핵심에 있는 것은 자연법(natural law)의 언어였다. 카톨릭 세계에서는 아퀴나스의 유산을 활용한 후기 스콜라주의 혹은 "두 번째 스콜라주의"(Second Scholastic, 50; https://en.wikipedia.org/wiki/Second_scholasticism 참고)에 입각한 자연법론이 1650년대까지 지속되었다면, 이 시기를 전후하여 개신교 세계의 자연법 논의가 융성하기 시작한다. 최초의 강조점이 "타인들의 선을 구할 [인간의] 의무"(the obligation to seek the good of others, 50-51)였다면, 17세기 초 유럽의 가장 중요한 사상가 그로티우스(Hugo Grotius, 1583-1645)는 사회계약을 통해 인간에게 사회성이 의무로 부과된다는 입장을 제시했으며, 대조적으로 홉스(1588-1679)는 인간에겐 선천적인 반사회성이 있으며 이는 오직 주권자의 통치를 통해서만 제어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들보다 두 세대 쯤 아래의 사무엘 푸펜도르프(Samuel Pufendorf, 1632-94)는 한편으로 인간의 선천적인 반사회성(natural unsociability)이라는 홉스적 전제를 받아들이면서도 인간이 시민사회로 들어서기 전의 중간단계에서 '역사적으로' 사회성을 습득한다는 논변을 제출했으며, 이는 라이프니츠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크리스티안 토마시우스(Christian Thomasius, 1655-1728) 등을 통해 영향을 끼쳤다. 푸펜도르프의 동세대 중 다른 방향을 제시한 이로 로크(1632-1704)를 꼽을 수 있는데, 그는 우선 모든 인간이 신에 대한 직접적인 의무와 두려움으로 인해 도덕성·사회성을 가지며, 이어 역사 속에서 시민사회 및 재산권의 형성을 거쳐 이를 수호하는 정부의 형성을 위한 사회계약을 맺게 된다고 주장했다. 로크의 입장은 글래스고의 게르숌 카마이클(Gershom Carmichael, 1672-1729)에게 이어졌으며, 낭트 칙령 폐기 이후 스위스로 망명한 장 바베락(Jean Barbeyrac, 1674-1744)은 푸펜도르프와 로크에게 영향을 받았으며 18세기 전반에 걸쳐 많이 읽힌 자연법의 역사를 썼다.


한편 17세기 중반 프랑스의 블레즈 파스칼(Blaise Pascal, 1623-62)은 아우구스티누스적 신학의 영향 하에 인간 본성의 이기적 기질을 강조함으로써 자연법의 역량을 비판했을 뿐만 아니라 이기심에 기초한 사회성으로까지 논의를 끌고 가면서 에피쿠로스적 입장이 출현할 수 있게 하는 전기를 마련했다. 개신교 세계에서 이와 비슷한 역할을 수행한 이는 역시 영국에서 활동한 버나드 맨더빌(1670-1733)로, 그는 (특히 여성의) 사치와 유행이 사회 전체의 상업과 경제적 이익을 상승시키는 동력이 된다고 주장했다. 그 반대편에는 도덕과 습속(manner)을 연결시킨 샤프츠베리(3rd Earl of Shaftesbury, 1671-1713), 카마이클의 후임교수로 감성(sentiment)을 통한 도덕성의 추구가 인간의 "본성적 사회성"(natural sociability)으로 존재한다고 주장한 허치슨(1694-1746)이 있었으며, 이후 인간의 공감(sympathy) 능력을 강조한 (그러나 정의justice에 대한 인식은 신의 부여가 아닌 인간의 산물이라고 주장한) 흄(1711-76), 도덕-감정-사회성을 연결시킨 스미스(1723-90)가 이 계보를 뒤따른다. 도덕과 감정을 연결시키고 인간의 본성적 사회성을 주장한 이러한 흐름에 대한 18세기 말의 가장 강력한 비판자는 역시 칸트(1724-1804)로서, 그는 도덕-자연법을 감성이 아닌 이성과 연결시켰으며, 사회형성의 기저에는 인간의 "반사회적 사회성"(unsocial sociability)이 있다고 보았다. 이러한 논변들은 이 시기에 사회성, 도덕성, 이성, 감성 등의 개념이 연결되는 방식이 다양한 형태로 존재했음을 보여준다.


다음으로 3장의 두 번째 절(pp. 60-66)에서 로버트슨은 계몽주의 역사 기술(Enlightenment history writing) 혹은 "철학적 역사기술"(philosophic histories, 66)에 대해 서술한다. 이 시기 역사기술의 핵심은 "사회"라는 틀 내에서 갖가지 사회적 구조와 인간의 습속이 어떤 연관을 맺고 있는지를 해명하는 것이었으며, 우리는 지리, 기후, 경제적 지속 요건과 국민(nation)의 관계를 탐구한 몽테스키외(Montesquieu)의 저작을 하나의 전범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방식과 서로 다른 사회·문명·인종에 대한 비교의 결합은 후대까지 영향을 끼치는 다양한 관념들을 낳았다. 특히나 원시 문명으로 이해된 아메리카에 대한 비교사적 연구는 "진보"(progress)의 관념이 탄생하는데 일조했고, 비교해부학은 백인-유색인-오랑우탄으로 이어지는 인종 간의 구별·위계를 형성했으며, 양자는 다시금 왜 어떤 사회는 진보하고 어디는 더딘지에 대한 물음을 통해 단계론적 역사기술(stadial historiography)과 (반드시 목적론적인 것만은 아니었던) "사회의 진보"(the progress of society) 개념으로 이어졌다. 특히 이질적인 단계에 속한 여러 사회의 (여성의 조건을 포함한) 습속의 차이에 대한 탐구는 습속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언어의 기원에 대한 역사적·문명사적 탐구를 촉발했다. 이러한 역사의식은 서구인들의 현재 상태, 즉 상업사회를 가장 진보한 단계로 규정하는--오늘날까지도 근본적인 인식으로 존속하는--사고를 포함했다. 이 시기의 역사기술에 대한 로버트슨의 총평이라 할만한 대목을 인용하자.


"실제로 [계몽 역사서술에서] 여성에게 부여된 위치는 계몽 역사가들이 마주한 보다 일반적인 문제, 즉 어떻게 지리, 경제적 환경, 인간의 습속을 거대한 스케일의 이야기로 통합시킬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하나의 징후였다. 계몽의 "철학적 역사가"들은 사회의 역사와 습속의 역사를 함께 기술하고자 했으며, 동시에 이를 통치자들의 관계 및 통치와 같은 주제를 다루는 보다 전통적인 역사작품 속에 담고자 진력했다. 그들은 적어도 자신의 이야기에 종교사를 통합시키는 데서는 아마도 가장 성공적이었다. 대조적으로 경제사, 사회의 습속, 문예의 역사 등은 주변적인 것으로 다뤄지거나, 흄의 <영국사>에서 그러했듯, 부록으로 밀려났다. 하지만 철학적 역사가들이 특별히 두드러진 실패사례라고 보기는 어렵다. [역사적] 이야기와 구조적 설명을 결합하는 문제가 19세기와 20세기에 딱히 더 잘 해결되진 않았으며, 이 문제는 근대의 역사학자를 여전히 좌절에 빠트리고 있다. 계몽 역사가들의 성취는 자신들의 작업에서 이 문제를 처음으로 개념화하고 다루고자 했다는 것이다. 설령 그들이 실패했다고 하더라도, 그들은 당시까지 쓰여진 역사서 중 가장 뛰어난 작업의 일부를 남겨놓았다. 에드워드 기번의 <로마제국 쇠망사>는 그 범위, 야심찬 해석, 뛰어난 스타일에서 어느 시대에도 비견될만한 것이 없었다. 계몽 역사가들은 그렇게 역사적 관점, "사회의 진보"에 대한 확신 등을 계몽사상의 심장부에 올려두었다"

(The place to be accorded to women was, in fact, a symptom of a more general problem facing Enlightenment historians: how to integrate geography, economic circumstances, and manners into large-scale narratives. The 'philosophic historians' of the Enlightenment struggled to write histories of society and of manners at the same time and in the same work as more conventional histories of government and of relations between rulers. They were perhaps most successful in integrating the history of religion into their narratives. By contrast, economic history, social manners, and the history of literature tended to be treated as asides, or, as in Hume's _History_, relegated to appendices. But the philosophic historians were hardly unique in this failure; the problem of combining narrative with structural explanation was no better resolved in the 19th and 20th centuries, and continues to frustrate the modern scholarly historian. The achievement of the Enlightenment historians was to be the first to conceptualize the problem and to address it in their compositions. Even if they failed, they left some of the finest histories ever written, and in Gibbon's _Decline and Fall of the Roman Empire_, one unmatched in any age in its sweep, interpretative ambition, and grandeur of style. So doing, they placed a historical perspective, a conviction of the 'progress of society', at the heart of Enlightenment thought. 66).


그러나 상업사회를 정점으로 하는 계몽주의의 진보사관이 어떠한 비판자도 마주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로버트슨은 제네바인 장-자크 루소(1712-78)를 별개의 절로 따로 다루고 있는데(pp. 66-72), 이는 부분적으로 18세기 정치사상사 연구에서 루소의 위치와 영향력을 규정하는데 따르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난점을 보여준다. 루소는 "추론적 역사"(conjectural history)를 통해 사회성의 기원과 현재까지의 궤적을 그린다. 자기보존과 타인에 대한 연민을 동시에 지녔던 원시의 고독한 야만인은 인구의 증가와 함께 점차 경쟁적인 정념을 갖게 되며, 이러한 발전과정에서 본래의 고결한 본능은 언어의 발생, 배타적 재산권 및 이를 뒷받침하는 제도의 탄생, 불평등의 확산을 거쳐 마침내 (사회적 평판에 맞춰 움직이려는) amour-propre에 조종당하는 인성의 타락으로 이어지며(당연히 이는 습속manners에 대한 비판이기도 하다), 이러한 타락의 무대가 되는 상업사회는 도시가 시골을 지배함으로써 겉으로 보이는 발전의 뒷면에 악덕과 부패(corruption)이 항상 남아있는, 일종의 근대적 딜레마에 붙들린 세계로 설명된다. 루소의 근대문명 비판은 (디드로, 스미스, 칸트 등과 함께) 반(反) 제국주의(anti-imperialism)의 논리 또한 품고 있었다.


루소의 상업사회 비판에 대한 주요한 응답자 중 한 명은 스미스로, 그는 (자신의 사회-인간모델에서 문명화된 인간본성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불편부당한 관찰자"(impartial spectator)의 양가적인 성격을 인정하면서도 동시에 왜 그러한 인간, 철저히 덕에 종사하지 않는 인간들이 모인 상업사회가 부를 축적하고 번영할 수 있었는가에 대한 탐구를 수행했다--그 연구의 핵심적인 수단이 바로 3장의 마지막 절인 정치경제학(political economy, pp. 72-81)였다. 로버트슨은 정치경제학의 뿌리가 아메리카로부터 강탈한 대량의 은과 국가재정 문제를 고민해야 했던 17세기 스페인 군주정과 30년 전쟁 이후 국가를 재건해야 했던 독일 영방국의 관방학(cameralism)에 있다고 설명한다. 이후 영국인들에게 핵심적인 주제가 상업과 교역의 문제였다면, 프랑스는 중상주의적 콜베르주의(Colbertism)과 이를 비판하는(중농주의까지 이어지는) 계보가 계몽기 정치경제학 논의의 쟁점이라고 할 수 있다. 페넬롱(François Fénelon, 1651-1715)의 <텔레마쿠스의 모험>(_Les aventures de Télémaque_, 1699)이 사치와 전쟁을 거부하고 덕에 기초한 고전적 통치의 모델을 이상으로 제시했다면, 장-프랑수아 멜롱(Jean-Francois Melon, 1675-1738)은 페넬롱을 비판하며 효용(utility)에 기초한 보다 근대적인 경제 모델을 제시했다. 멜롱의 영향력은 1750년대 (튀르고Turgot를 포함한) 구네 서클(the Gournay circle)로 이어져 프랑스 경제의 농업적 토대 및 이를 보조하여 생산력을 상승시키는 국내 제조업(manufacture)의 역할을 강조하고 해외무역, 특히 사치품에 대한 규제를 주장하는 입장을 대두시켰으며, 이 주요 논지는 케네(François Quesnay, 1694-1774)를 중심으로 하는 중농주의자(the Physiocrats)에게 계승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탈리아를 포함한 유럽에도 영향을 주었다. 비프랑스 지역에서 정치경제학의 행보는 다소 다른 경로를 따랐다. 독일의 경우 관방학이 대학 커리큘럼에 반영되어 18세기 후반 국민경제학(national economy)으로 이어졌다면, 영국은 특히 흄과 스미스를 포함한 스코틀랜드인들이 상업사회의 발전을 확신하여 상업과 교역을 강조하는 입장을 취했다. 이들은 특히 루소적 비판에 대항하여 도시-시골 간 균형(balance)의 추구는 언제나 취약할 수밖에 없으며, 양자간의 불균형을 감수하고 상업을 통해 전체 사회의 성장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가는 것이 옳다고 주장했다.


로버트슨은 계몽시기 정치경제학의 핵심으로 (내세가 아닌) 현세에서 인간 삶을 개선시키고자 하는 전망을 가진 것, 그리고 그것을 사회의 진보라는 역사적 관점에서 바라본 것을 꼽는다. 물론 계몽의 역사가와 정치경제학자 모두 사회의 성장에 한계가 없다고 생각하지 않았으며, 이후 맑스적인 유토피아를 약속하지도 않았다. 근시안적인 정부와 같은 방해물이 상업의 융성을 언제나 위협했지만, 결국 각각의 개인들의 활동은 정부의 통제를 뛰어넘어 더욱 큰 번영을 산출해낼 것이라는 낙관적 기대가 있었다. 이에 입각하여 스미스는 <국부론>에서 정부가 시민사회 및 '공론'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정치적 영향력이 이제 공론을 통해서 행사되어야 한다는 확신은 계몽의 정치에 뚜렷한 특징이었으며, 이는 그것에 새로운 힘을 부여했고, 결국에는 치명적인 약점이 되었다"(the conviction that political influence must now be exerted through public opinion distinguished the Enlightenment approach to politics, constituting its novel strength and, in the end, fatal weakness, 81).



4장 "공중을 계몽하기"(Enlightening the Public)는 대혁명과 계몽의 관계를 포함하여 계몽의 정치적 영향력을 다룬다. 최초에 정치사적 성격이 강했던 이 주제에 대한 연구는 점차 (특히 프랑스와 미국 역사학계의 경향을 따라) 사회사와 문화사로 옮겨갔는데, 이러한 흐름이 암묵적으로 또는 공공연하게 '더 많은 주체들의 활약'을 강조하는 신좌파적 민주주의의 이념을 준수했다면 영국의 지성사가 로버트슨은 이와 달리 자신의 초점이 "철학자와 문인들이 '공중'과의 관계에서 어떤 능동적 역할을 수행했는지"(the agency of philosophers and men of letters in relation to their 'public', 83)에 있음을 분명히 한다(나는 이 점에서 찰스 테일러Charles Taylor가 <세속화 시대>_A Secular Age_에서 종교개혁을 설명하는 방식이 떠올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4장에서 소개하는 내용이 일차적으로 사회문화사적인 연구에 빚지고 있음은 부인할 수 없다. 우선 로버트슨은 하버마스가 정립한 "공론장"(the public sphere) 개념 및 그것을 가능하게 한 "사회성의 제도들"(institutions of sociability)을 설명한다. 계몽의 공론형성을 가능하게 한 대표적인 제도들로는 사회화, 사교적 예의범절(politeness), 새로운 저널리즘의 유통망이었던 커피하우스, 프리메이슨 비밀조합(freemasonry), 그리고 여성의 지적 역할이 상대적으로 강조될 수 있었던 공간인 살롱이 있었다. 로버트슨은 살롱을 이야기하면서 계몽기 여성의 지적 생활에 대해 덧붙이는데, 공론장에서 여성의 지적 역할에 대한 관심이 좀 더 높았던 것은 17세기로, 18세기, 특히 파리의 살롱은 귀족 또는 남성문인들이 과거보다도 더 큰 비중을 차지했다. 동시대 영국, 특히 런던은 여성의 역할에 보다 우호적이었으며 영국비국교도들은 여성교육을 강조하기도 했고, 이런 배경 하에서 엘리자베스 몬태규(Elizabeth Montagu)를 중심으로 해나 모어(Hannah More), 프랜시스 버니(Frances Burney) 등이 참여했던 "블루스타킹 협회"(Blue Stockings Society)가 활동할 수 있었다(로버트슨은 여성의 지적인 역할이 더 중요해지는 것은 혁명 이후라고 덧붙인다).


이러한 제도들보다 더 중요한 것은 출판문화(Print Culture)로, 이 시기에 출판시장은 크게 확장했고 다양한 장르가 쏟아져 나왔으며 (주로 도시의) 식자율의 상승은 단지 읽고 받아들이기만 하는 것이 아닌 능동적인 독자층의 형성에도 영향을 주었다. 출판문화의 번영과 함께 계몽 시대 저자의 역할·위상(authorship)이 상승했다는 것도 중요하다. 저자들은 과거와 비교할 때 독립성과 권위를 획득했으며, 17세기 후반부터 나타난 리뷰 저널 등을 통해 더 많은 독자들에게 자신의 견해를 전할 수 있었다. 공식적인 학술원(아카데미)과 곳곳에 생겨난 사적인 독서토론 모임 또한 계몽주의의 확산에 기여했다. 계몽의 정치적 기여를 가능하게 했던 제도와 문화의 인식이 사회문화적 연구 및 서책사(Book History) 연구성과에 기대고 있다면, 로버트슨은 "계몽, 정부, 공중"(Enlightenment, Government, and the Public)을 다루는 절에서 계몽 문인들이 특히 통치자와 관료들에게 어떻게 영향을 주었는지를 소개한다(pp. 108-15). 독일의 괴팅엔이나 스코틀랜드의 대학들, 각종 저널과 논고들은 계몽사상을 사회지도층 및 관료들에게 보급하고 교육시키는 역할을 수행했으며, 스페인과 포르투갈에선 관료들이 정치경제학 교육을 받았다.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계몽지식인들이 "공중"을 대변하는 역할을 맡아 새로운 상업사회의 발전을 위해 기존의 봉건적 제도, 국가이성(reason of the state)에 기반한 정부운영 등을 비판하고 정부의 역할을 재구축하고자 했던 사실이다.


계몽과 프랑스 대혁명 사이의 복잡한 관계에 대해선 로버트슨의 다음 서술을 인용하는 걸로 갈음하자: "[계몽과 혁명 사이의] 관념 수준에서의 연속성은 혁명가들이 몽테스키외와 루소의 저작을 지속적으로 소환했다는 것으로 잘 나타난다. 혁명기 정치사상에서 가장 중요한 저작인 아베 시에예스의 <제3신분이란 무엇인가?>는 두 저작과의 대화를 통해 쓰여졌다. 이러한 영감의 원천에 더해 혁명가들은 보다 뒷 시기의 계몽으로부터 새로운 요소들을 끌어들였는데,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남성과 여성의 권리에 대한 개념이다. 정치경제학 또한 혁명가들이 계몽 사상가들만큼이나 매달렸던 주제였고, 이후의 혁명 정부들은 군주정을 무너트렸던 국채 문제를 관리하고자 분투했다.


그러나 연속성이 있다고 해서 혁명이 계몽의 결과물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 않다는 주장 또한 가능하다. 이 책에서 제시된 계몽의 정치에 대한 설명을 따른다면, 혁명은 계몽의 반명제였다. 계몽 철학자들이 교육받은 공공 여론에 의지하여 정부를 간접적으로 규제하는 방식으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고자 했다면, 혁명가들은 구체제를 직접적인 정치적 행동을 통해 전복하는데 헌신했다. 혁명은, 달리 말하자면, 계몽이 제시한 "사회의 진보" 개념에 따라 그려진 비인격적이고 점진적인 변화과정에 대한 정치적 주체성의 복수나 다름없었다. 혁명을 이렇게 이해하는 것이 서적들이 혁명의 원인 중 하나였다는 추정과 양립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궁정의 성적·도덕적 타락을 폭로하고자 집필된 포르노그라피적인 소설들이 철학자들의 논문 못지않게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Continuities at the level of ideas were exemplified by the revolutionaries' constant invocation of the work of Montesquieu and Rousseau: the single most important work of revolutionary political thought, the Abbe Sieyes' Qu'est-ce que le tiers etat? (What is the Third Estate?) (1789), was written in dialogue with both. To these sources of inspiration revolutionaries added new ones from the later Enlightenment, most famously the concepts of the rights of man and woman. Political economy too was a revolutionary as much as an Enlightenment preoccupation, as successive revolutionary regimes struggled to manage the national debt whose failure had brought down the monarchy.


Continuities, however, do not make the Revolution the outcome of the Enlightenment. The contrary is just as arguable. On the account of the Enlightenment's politics offered in this book, the Revolution was the antithesis of Enlightenment. Where Enlightenment philosophers looked to an informed public opinion to exert an indirect, restraining influence on government, the revolutionaries were committed to the overthrow of the ancien regime by direct action. Revolution, in other words, was the revenge of political agency upon the impersonal, gradual process of change envisaged by the Enlightenment concept of the 'progress of society'. Thinking of revolution in this way is by no means incompatible with supposing that books were among its causes. But the books which mattered are just as likely to have been the semi-pornographic novels which purported to expose the sexual and moral corruption of the court as the treatises of philosophers. 116).



마지막 5장 "철학과 역사학에서의 계몽"(The Enlightenment in philosophy and history)은 19세기부터 20세기 후반까지 철학과 역사학에서 계몽에 대한 인식과 태도가 어떤 식으로 변해왔는지를 일별한다--계몽은 최근까지도 "근대성"(modernity)과 뗄 수 없는 관계에 놓여 있으며, 이는 달리 말하자면 계몽에 대한 인식은 (적어도 '근대화된' 세계에 거주하는) 우리 자신에 대한 인식과 나뉘어질 수 없음을 의미한다. 계몽에 대한 주요한 철학적 논변으로는 칸트, 헤겔,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 코젤렉, 아이자이어 벌린, 포스트모더니스트, 푸코, 알래스데어 매킨타이어, 리처드 로티, 에른스트 카시러와 하이데거가 언급되며, (상대적으로 빈약한) 역사가들의 논변으로는 베버, 맑스, 포스트모던, 하버마스의 영향과 함께 2000년대 이후 조너선 이즈리얼과 앤서니 팩든(Anthony Pagden)의 저작이 소개된다. 뒤이어 "역사적 관점에서의 계몽"(The Enlightenment in historical perspective)에서 로버트슨의 성찰을 한번쯤 읽을만한데, 일부분만을 번역 인용한다: 


"이러한 [과거와의] 거리를 고려하면 우리가 계몽이 여전히 중요하다고 우리 자신을 애써 안심시켜야만 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우리는 상상을 통해 계몽 사상가들의 개념적 언어를 재구성해보고, 그들이 직면했던 문제를 인식하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그들이 제시했던 답변의 독창성을 음미하는 일을 통해 우리 자신의 사유 및 인간사를 이해하는 다양한 방식에 대한 이해도를 더욱 풍성하게 만들 수 있다. 지성사가들이 추구하는 것은 과거의 일이 현재와 어떤 관련성을 맺고 있는지가 아닌 문제가 어떻게 표현되고, 다뤄지고, 개념화되는지를 현재의 우리가 사용하는 것과 다른 언어를 통해 이해해보려는 도전이다" (At this distance, therefore, we should not be trying to reassure ourselves that the Enlightenment still matters. But we can enrich our own thinking, our awareness of the variety of ways of understanding human affairs, by imaginatively reconstructing the conceptual languages of Enlightenment thinkers, recognizing the problems they encountered, and appreciating the originality of their responses to them. It is not the relevance of the past which the intellectual historian seeks, but the challenge of understanding how problems were formulated, addressed, and conceptualized in terms different from those we use now. 129).




4. Piirimäe, Eva, and Alexander Schmidt. "Introduction: Between Morality and Anthropology--Sociability in Enlightenment Thought." _History of European Ideas_ 41.5(2015): 571-588.


: 총 18쪽에 69개의 각주가 달린 이 글은 본래 학술지 <유럽사상사>(History of European Ideas) 중 "계몽 사상의 사회성 개념"(Sociability in Enlightenment Thought)을 주제로 삼은 2015년 41권 5호의 권두논문으로, 해당 호에 수록된 논문들을 포함하여 서구 근대 사상사 분야에서 사회성 연구가 구축한 전체적인 지형을 종합하여 소개한다. 저자들은 사회성 연구의 본격적인 출발점으로 이스테반 혼트와 독일의 지성사가 한스 에리히 뵈데커(Hans Erich Bödeker)가 공저한 1989년 논문을 꼽는데(572쪽 각주3 참고), 여기에서 혼트는 그로티우스에서 칸트에 이르는 자연법 담론의 변화과정의 핵심에 사회성 개념이 있으며 이에 대한 회의주의의 도전이 담론의 변화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거대한 연구 프로그램을 제시했다. 인간에게 본성적 사회성(natural sociability)이 존재하는지의 여부는 그에 따라 개개 인간의 의무에 대한 담론은 물론 사회·정치적 질서의 이론까지도 바뀔 수 있기에 "국제 관계, 국내 정치, 도덕 이론이 별개의 영역일 수 없고 그래서도 안 되는"(international relations, domestic politics and moral theory cannot and should not be viewed as distinct domains, 572) 주제였으며, 17세기 개신교 자연법 담론에서 출발하여 19세기 초의 칸트와 독일 낭만주의자들, 어쩌면 그보다 후대의 사상가들에게도 중요한 논쟁점으로 지속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저자들은 특히 이 주제를 "도덕적 회의주의, 그리고 인간 사회 형성 이론으로서의 세계시민주의와 애국주의와의 관계"(its relationship to moral scepticism, as well as to cosmopolitanism and patriotism as theories of human association, 573)에 초점을 맞추어 소개하며, 그런 점에서 앞서 이 게시물에서 다룬 저술들보다 (물론 19세기까지 매우 다양한 성격의 연구를 포괄하는 학문이었던) "도덕철학"적 논의를 더욱 깊게 파고든다.


논의의 본격적인 출발점은 그로티우스다. 16세기부터 17세기 초반까지 카톨릭, 개신교, 스콜라주의, 인문주의 법학에서 매한가지로 통용되던 아리스토텔레스적 인간관, 즉 정치체를 이루어 살아가는 동물(zoon politikon)로서의 인간관은 점차 고대 그리스 회의주의 도덕철학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도덕적 회의주의의 도전을 받게 되었다. 리처드 턱의 주장을 따른다면, 그로티우스가 인간의 보편적인 사회성을 핵심으로 하는 자연법론 및 이에 따른 국가형성의 원리를 제시한 것은 회의주의의 도전에 대한 응답이기도 했다(턱의 논의에 대한 서지사항은 573쪽 각주 7 참고). 그로티우스가 도입한 사회성의 개념은 한편으로 여전히 신 아리스토텔레스주의적 영향 하에서 스토아적·키케로적 oikeiosis 개념의 연장선에 있으면서, 동시에 자연법적 권리와 의무(obligation)로부터 정의(justice)를 찾는--여기서 도덕적 의무는 권위적인authoritative 성격을 갖는다--로마법적 전통의 영향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전자와 구별된다. 초기 저작에서는 인간의 상호교환에 필수적인 키케로적 "신의"(fides)에 의지하던 그로티우스는 점차 이 엘리트주의적 개념으로부터 선회하여 각자의 자기이익추구(self-interest)에 기초한다는 점에서 보편·평등주의적 성격을 갖는 "사회적 충동"(appetitus societatis) 혹은 모두가 사회 속에서 평화롭게 살고자 하는 욕망을 갖는다는 개념에 기초한 사회·국가 형성 이론을 만들게 된다(574).


자연상태에서 인간에게 "실체적인 도덕적·법적 의무"(substantive moral and legal obligation, 575)가 주어진다는 것을 부인한 대표적인 논자는 토마스 홉스다. 홉스는 자연상태에 도덕적 의무란 없으며 인간은 무엇보다도 자신의 이익에 따라 움직인다는 인간관을 설정하고 따라서 평화와 안정은 본성적 사회성이 아닌 강력한 주권적 권력의 통치 하에서만 가능해진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홉스의 주장에 맞서 다시 사회성·자연법·도덕성의 개념 등을 방어하고 동시에 홉스와 다른 경로로 정부(political government)의 기원을 설명하려는 일련의 시도가 등장하게 된다. 대표적인 사례가 사무엘 폰 푸펜도르프로, 그는 "자연법의 토대와 내용을 구체화하면서 스토아주의의 도덕적 인식론과 홉스와 유사한 인간의 계산적 이기심을 결합하고자 했다"(to combine Stoic moral epistemology and a quasi-Hobbesian calculation of self-interest in his attempt to specify the foundation and content of natural law, 575). 그는 인간에게 "효용주의적"(utilitarian) 사회성이 있으며 이를 통해 사회적 통합이 가능하다고 주장했다--인간은 다른 사람의 입장을 상상할 수 있었으며 이에 기초하여 협동, 서로의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었다(이 주장은 약 한 세기 뒤 아담 스미스에게 이어진다). 18세기 푸펜도르프의 영향을 받은 이들은 이를 국가 간의 분쟁 상황에도 적용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17세기 말-18세기 초의 초기 계몽시기는 루터·칼뱅주의적 도덕 신학, 개신교의 자연법, 카톨릭의 신 아우구스티누스주의의 여러 조류를 포함한 다양한 사상적 입장이 마주하는 시기였다(577). 여기서 인간의 사회성 혹은 반사회성을 둘러싼 논의는 인간의 본성만이 아니라 맨더빌의 도전에서 볼 수 있듯 근대사회의 성격을 규명하는 것이기도 했다. 상업사회에서는 개개인의 악덕·이익 추구적 본성이 전체 사회의 번영과 미덕을 가져온다는 맨더빌의 주장에 대항하여 근대성의 성격 및 사회·도덕의 토대에 대한 논쟁을 촉발한 대표적인 논자는 프란시스 허치슨이다. 허치슨은 스스로를 "스토아주의적" 입장으로, 맨더빌을 포함해 인간의 선한 사회성을 부인하는 자신의 비판대상을 "에피쿠로스주의적" 입장으로 설정하였으며--이 18세기 "스토아주의" 대 "에피쿠로스주의"의 대립구도는 동세기 후반의 스미스에게까지도 영향을 끼칠 것이었다--이에 따라 사회, 도덕의 원천을 이기심이 아닌 박애(benevolence)를 추구하는 인간 본성의 사회성에 놓고자 했다. 사회성, 박애, 도덕성, 신성성을 연결시키고자 하는 이러한 시도는 샤프츠베리부터 라이프니츠, 볼프에 이르기까지 여러 저자들을 통해 수행되었으며, 이들은 쾌(pleasure), 미(the beautiful), 선(the good)을 결합하여 18세기 후반부의 미학적 논의를 위한 토대를 제공하기도 했다.


사회성에 대한 18세기 중후반부의 논의를 다루면서 장-자크 루소의 영향을 제외할 수는 없다. 루소는 이전 세대 홉스의 비판자들을 반비판하면서 사회성이 본성적으로 주어지는 게 아닌, 역사적·사회적으로 형성된 것일 뿐만 아니라 바로 그 사회성이 인간을 자립성을 상실하고 타인의 여론에 의존하게, 즉 타락에 빠트린다고 주장했다. 무척 광범위한 루소의 영향 중에서 저자들은 다음의 몇 가지를 강조한다. 첫째, 루소는 회의주의적, 즉 홉스적인 반사회적 사회성 개념을 받아들이되--따라서 <인간불평등기원론>을 읽은 스미스는 루소를 "에피쿠로스적" 사상가로 이해한다--이 해법으로 홉스식의 "대의적/재현적 주권 국가"(the representative sovereign state, 579)가 아닌 사회 내의 이질성이 해소되는 일반의지에 기초한 주권 국가를 제시했다. 둘째, 특히나 후기의 저작에서, 루소는 급진적인 교육과 정치제도 개혁을 통하여 인간들 간의 상호 인정 및 비(非) 의존(non-dependency)에 기초한 도덕적·정치적 사회성을 만들어낼 수 있다고 보았다. 일부 연구자들은 바로 이러한 반사회적 사회성 논의에 기초해서만 칸트의 사상, 특히 문명·정부의 발전과 영구평화의 가능성에 대한 주장 및 이성의 자율성을 통해 반사회적 사회성을 극복할 수 있다는 윤리학적 주장을 올바르게 이해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580). 동시대에 루소가 끼친 또 다른 영향은 인간의 사회성과 정의(justice)의 원천을 추적하는 "추론적 역사" 모델로, 이는 카톨릭 신학자들의 성경에 기초한 "신성한 역사"(the sacred history) 모델과 논쟁적인 관계에 있었다. 독일 개신교 계몽주의자 토마스 압트(Thomas Abbt, 1738-66)는 이 두 가지 모델을 비판적으로 종합하고자 했는데, 그는 모제스 멘델스존(Moses Mendelssohn)과의 논쟁에서 이기적 인간 대 박애적 인간의 논쟁구도가 이기적 인간 대 타인에 대한 (본성적) 공감이 가능한 인간의 구도로 바뀌어야 하며 인간이 본성적 공감을 토대로 충분한 교육을 받을 때 박애심에 따라 움직일 수 있게 된다고 주장했다(580-81).


압트가 일종의 신스토아주의적 입장에 섰다고 할 수 있다면, 독일어권에서 신에피쿠로스주의적 사상은 괴팅엔의 하노버 대학을 중심으로 인간 본성에 대한 자연주의적 탐구를 촉발했다. 인간의 공감적 본성을 비판한 이들의 대표적 저자로는 미하엘 히스만(Michael Hissman, 1752-84)을 꼽을 수 있는데, 그는 루소적 주장과 (직접적인 거론 없이) 맨더빌적인 반사회적 인간본성론을 결합하여 인간은 오직 자신의 쾌를 추구하며, 사회·정의와 같은 것은 보편적인 것도, 사회계약의 산물도 아니며 오랜 세월에 걸쳐 형성된 인위적 관습 및 정치적 입법의 결과물이라는 (다소 흄을 연상케하는) 주장을 전개했다. 이러한 일종의 법실증주의에 기초하여 히스만은 통치자와 피치자가 점진적으로 자신들의 진정한 효용 및 "입법을 평가하고 개혁하는 공익의 평가기준"(the criterion of public interst for evalutating and reforming legislation, 581)을 알고 활용할 수 있게 되리라 생각했다. 논문의 공저자 중 한 명인 알렉산더 슈미트는 18세기 후반부에 "자연법의 위기"(crisis of natural law, 582)라 부를만한 것이 있었으며, 이것이 통념과 달리 19세기 벤담의 효용주의/공리주의 및 독일 역사학파에 따라 초래된 것이 아니라 본성적 사회성에 대한 18세기 신에피쿠로스주의적 비판으로부터 촉발되었으며 여기에 내포된 인간의 반사회적 본성에 대한 전제가 효용주의 및 법실증주의를 뒷받침했다고 주장한다. 신에피쿠로스주의적 비판은 라인홀트(Karl Leonhard Reinhoild)와 피히테(Johann Gottlieb Fichite)와 같은 칸트주의자들에게도 수용되었으며, 이들은 신에피쿠로스주의식 해법은 거부하고 대신 인간이 본성적인 이기적 경향을 극복하여 인간·인류의 발전을 이끌어낼 수 있으며 또 그러한 도덕적 의무를 가진다고 주장했다--본성적인 반사회성과 사회의 발전에 대한 고민은 이후 헤겔에서도 마찬가지로 중요하게 등장할 것이었다.


5절부터의 논문 후반부에서 저자들은 사회성을 둘러싼 "인간의 도덕적 심리학 및 정의의 기원에 대한 논의"(debates about human moral psychology and the origins of justice)가 당대의 정치이론과도 밀접한 관련을 가졌다고 설명한다. 쉽게 말해 본성적 사회성에 대한 믿음이 약해질수록 이를 제어하기 위한 강한 주권을 필요로 하게 되는 경향이 있었고, 이는 계몽된 절대군주에 대한 요청으로 이어졌다. 역으로 선한 사회성에 대한 신뢰가 강해질수록 주권권력의 필요성은 낮아졌으며, 자연스럽게 공화주의·공동체주의적 국가론이 선호될 수 있었다. 특히나 후자의 대표적인 사례가 17세기 말-18세기 초에 흥했던 애국주의(patriotism)적 정치론으로, 샤프츠베리나 허치슨 등의 논자는 인간의 공통된 정념 혹은 도덕적 덕성에 기초한 공동체를 형성하는 박애의 정치(benevolent politics)를 주장했으며--물론 이는 때로 인간에게 매우 높은 수준의 용기 및 자기통치 능력을 요구하는 것이었다--비록 맨더빌로부터 "교활한 이기주의"(shrewd egoism, 583)에 불과하다는 비판을 받긴 했으나 이는 유럽 공화주의의 부흥(물론 인간 이기심에 기초한 네덜란드의 상업적 공화주의에서 볼 수 있듯 모든 공화주의가 박애에 기초한 것은 아니었다) 및 인류애 담론의 형성에 기여했다.


몽테스키외는 1748년 <법의 정신>에서 (이기적 욕망의 추구를 제도화한) "명예의 추구"(honour-seeking, 583)에 따라 사람들이 움직이는 "근대 군주정"(modern monarchy)에서는 이처럼 애국심에 의존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면서 앞서의 논의를 비판했다. 루소는 다시 몽테스키외의 근대사회분석을 수용하면서도 순수한 상업사회는 반사회적 amour-propre에 대한 제약없이는 지속될 수 없다고 주장함으로써 근대사회에서 애국심의 필요성·가능성에 대한 전 유럽적인 논의에 불을 붙였다. 한 예로 루소를 경애한 헤르더의 초기 저작은 루소의 근대 문화 비판과 압트의 "군주정 하의 (사회적) 애국심"(monarchical (sociable) patriotism) 이론을 결합하여 인간에게 애국의 감정(patriotic feelings)이 본성적으로 존재하며, 이러한 "가족적 정신"(familgy spirit)에 의해 정치 사회가 점진적으로 출현한다고 보았다(584). 그는 (적어도 초기 저작에서) 근대 군주정 치하 상업과 교역이 종교적 관용을 낳고 인간의 본성적 경향을 발전시킨다고 믿었다. 사회성 논쟁은 당대의 국제관계이론에도 영향을 끼쳤는데, 몽테스키외에게서 큰 영향을 받은 아담 퍼거슨(Adam Ferguson)과 케임스 경(Lord Kames)은 인간이 본성적으로 사회성과 애국심을 갖고 있으나 이것이 적용되는 범위에 한계가 있기 때문에 다른 국가·사회와의 적대가 발생할 수 있다고 보았다. 이들은 인간의 경쟁심이 사회 전체에 긍정적인 동력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마키아벨리를 떠올리게 하는--관점을 지녔으며, 이에 따라 국제관계에서도 국가들 간의 단순한 안정·평화 추구보다는 경제적·군사적으로 독립적인 국가들 사이의 힘의 균형이 전 유럽의 건강함과 인류의 자유를 위해 더 낫다고 주장했다.


저자들은 마지막으로 18세기 말-19세기 초에 루소의 유산, 즉 본성적 사회성의 부인, 일반의지로 대표되는 공화주의적 정치이론, 추론적 역사 모델과 함께 인간의 완성가능성(perfectibility) 개념이 끼친 영향을 짧게 살핀다. 특히 완성가능성 개념은 인간성이 교육·문화적 조건에 따라 "가변적"(mutable)이라는 전제를 포함하고 있었고, 이는 상이한 경로의 두 가지 논의방향을 낳았다. 콩도르세를 포함한 프랑스의 이데올로그들은 <사회계약론> 등의 영향을 받아 정부가 적절한 책임·역량을 부여받고 올바른 재정정책을 펼 때 만인의 평등이 달성될 수 있다는 "일원론"(monism)적 논리로 나아갔고, <보몽에게 보내는 편지>나 <쥘리 또는 신엘로이즈>에게 보다 큰 영향을 받은 슐레겔 및 독일낭만주의자들은 이를 비판하며 문화·경험에 따라 인간은 상이한, 각자에게 고유한 개성을 발전시킬 수 있다는 "이원론"(dualism)적 논리를 발전시켰다. 미적·감성적(aesthetic) 체험이 인간을 형성하고 발전시킨다는 후자의 인간학에 전제된 인간의 완성가능성은 동시에 불평등·부패의 가능성 또한 포함한 것으로서, 저자들은 이러한 사고의 등장이 부분적으로 17세기 중반 자연법을 공격했던 회의주의적 입장이 다시금 대두한 것처럼 생각하게 하는 면이 있다고 지적한다. 그리고 피히테, 헤겔, 칼 벨커(Carl Welcker)의 예에서 볼 수 있듯 사회성 논쟁의 기본적인 구도는 여전히 근본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 2017년 3월 28일의 추기: 프랑스문학 전공자 최요환 선배님께서 역시나 또 하나의 중요한 연구서인 Jonathan Israel, _Radical Enlightenment: Philosophy and the Making of Modernity 1650-1750_, Oxford: Oxford UP, 2001 에 대한 귀중한 코멘트를 이 글의 페이스북 게시물에 댓글로 덧붙여주셨다. 선배님의 허락을 받아 코멘트를 옮겨둔다.


"제목에서 어느정도 추측할 수 있는 것처럼 저자는 ‘온건 계몽주의’와 ‘급진 계몽주의’라는 두 개념을 날카롭게 대별시키면서 논의를 전개합니다. 사실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온건 계몽주의는 계몽주의 시대의 실제 모습과는 크게 관련이 없는 사후의 구성물과도 같은 것으로 받아들여지는데, 프랑스 계몽주의의 대표적인 인물들인 볼테르, 몽테스키외, 달랑베르와 같은 다소 보수적인 사상가, 작가들은 그의 관심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지 못합니다. 그가 보기에 정치적으로나(볼테르는 계몽전제군주 despote éclairé가 중심이된 왕정을 지지했고, 몽테스키외는 군주와 민중 사이의 매개적 권력으로서의 귀족의 적극적인 역할을 옹호했습니다. 이 둘을 구별해서 thèse royale, thèse nobilaire라고 합니다), 사상적으로나(볼테르는 전통적인 계시 종교를 부정하기는 하나 이신론에 기반한 자연 종교로 나아가면서 세계 외부의 존재를 고집스럽게 인정하려고 합니다. 유물론적인 세계 인식의 직전에서 포기해버리는 것이죠) 그에 따르면 프랑스 중심의 ‘온건 계몽주의’는 이 시기를 대표할 수 없습니다(계몽주의의 역사에서 그에게 중요한 것은 정치적으로는 공화정의 이론적 토대를 제공하는 것, 사상적으로는 유물론의 근거를 제시하는 것이었습니다). 대신 전통적인 계몽주의사 서술 내에서 주요한 행위자였던 이들의 자리를 이스라엘의 연구에서는 스피노자가 대체하고 있습니다.


이 책이 흥미로운 점은 두 가지 정도가 있는데, 전통적인 계몽주의 사상사 서술과 구별되는 대목들이 있어서 그런 것 같습니다. 우선은 계몽주의의 시대구분에 관련한 문제인데, 조나단 이스라엘은 계몽주의의 terminus a quo를 설정하기 위해서 17세기 중반까지 소급해갑니다. 그리고 terminus ad quem을 1750년으로 설정하고 있지요. 학부 때부터 계몽주의를 1715(루이 14세의 사망)부터 1789(대혁명) 사이의 지적운동으로 이해하는 방식만을 배웠던 저에게는 대단히 이질적인 주장이었어요. 이러한 시기구분은 프랑스사의 핵심적인 정치 사건이라는 틀 속-절대왕정의 사망에서 혁명으로 이어지는 다소 목적론적이고 단선적인 역사관-에서만 가능한 것이지요. 어쨌거나 이러한 시도는 이스라엘보다 앞선 세대인 폴 아자르가 ‘유럽의식의 위기’에서 계몽주의의 지적 근원을 1680년 경으로 제시하고 있는 것보다 더욱 대담한 해석입니다. 이스라엘은 뒤이어 프랑스 중심의 계몽주의의 실현 공간을 전유럽의 차원으로 확대시킵니다. 그리고 계몽주의라는 지적운동이 개별 국가에서 실현됨에 있어서 보여주는 다소간의 시차에도 불구하고 종국에는 단일한 성격의 운동이며, 이 단일성은 제도적 차원에서는 신문, 잡지, 살롱과 카페를, 사상적 차원에서는 그가 명명한 ’급진 계몽주의’의 대표인 네덜란드의 사상가들(스피노자, 피에르 벨)이 제공하는 이론적 토대를 통해 보장되고 있다는 점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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