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순수사회를 노래하는가?: 주디스 버틀러, 『혐오 발언』 리뷰

Reading 2017.04.27 00:58

이 글은 본래 종합 인문사회비평지 <말과활> 12호(2017년 1월 5일 출간, 링크는 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99985861 참고)에 실리기 위해 작성되었다. 이후 3개월이 지나 13호가 나왔으므로, 사전에 편집위원에게 구한 양해에 따라 블로그에 게재한다--블로그 게재를 허락해준 <말과활> 편집위원께 감사드린다. 지금 올리는 것은 지면으로 출간된 원고와 일부 다른 수정고를 기준으로 각주 세 군데에 각각 추가 참고문헌을 덧붙였으며, 여기에 블로그에서의 가독성을 위해 문단 간 빈 줄을 하나씩 삽입하고 폰트를 수정한 판본이다. 마지막으로 <말과활> 12호를 통틀어 아마도 가장 이질적인 정지적·이론적 견해를 담았을 나의 글을 기꺼이 실어준 <말과활> 측에 다시 한 번 감사드린다.


*여기에 올리는 글은 출간된 판본과 똑같지는 않으므로 간략한 설명을 덧붙인다. 2016년 10월 하순 초고를 받은 <말과활> 편집위원 측은 표기 상의 형식을 포함해 몇몇 대목에 대한 수정을 제안했다. 그 사이에 이 리뷰를 읽는 독자들이 참고할 수 있는 몇몇 문헌을 찾아 읽었던 나는 11월 초 제안된 수정사항 및 추가 각주를 덧붙인 수정원고를 작성해 재발송했고, 나와 편집위원은 그 수정된 판본을 최종출간원고로 삼기로 합의했다. 원래 출간예정일보다 꽤 늦어진 <말과활> 12호를 받아보았을 때 나는 누군가의 알 수 없는 착오로 인하여 내 글의 초고에서 표기 형식만 일부 수정된 원고가, 다시 말해 나의 수정이 전혀 반영되지 않은 원고가 인쇄되었음을 알게 되었다(<말과활> 측의 명예를 위해 덧붙인다면, 편집위원측에서 먼저 내게 이 사실을 확인해보라고 요청하지 않았더라면 나는 이 사실을 매우 뒤늦게서야 알게 되었을 것이다). 다행히 사실상 주석과 일부 인용을 제외하고 초고와 수정고 사이에 근본적인 차이가 없었을 뿐더러, 초고는 이미 그대로 출간되어도 내 명예에 별다른 문제가 되지 않을 상태였다. 따라서 나는 <말과활> 측으로부터 사과를 받고, 대신 여기에 내 생각에 좀 더 완성된 형태의 판본을 올리는 것으로 만족하기로 했다.





누가 순수사회를 노래하는가?:

주디스 버틀러, 『혐오 발언: 너와 나를 격분시키는 말 그리고 수행성의 정치학』1)

이우창(인문학 연구자)


주디스 버틀러의 1997년 저작 『혐오 발언』을 쥐어든 2016년 한국의 독자들은 이 책에서 무엇을 읽을 수 있을까? 버틀러의 이론 혹은 사상에 관심을 갖고 있는, 그러나 분명 쉽게 읽힌다고는 말하기 힘든 그의 영어를 곧바로 접하기엔 부담스러웠을 독자들에게 이 책은 저자가 고유한 정치철학·주체이론을 형성해나가는 궤적을 보다 세심히 따라가 볼 수 있도록 해주는 징검다리처럼 다가올 것이다. 우리는 버틀러의 이론적 궤적을 설명함에 있어 한국에서 통상적으로 퍼져 있는 서사를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즉 비교적 전문적인 여성주의·젠더 이론에서 출발하여 특히 2004년 『불확실한 삶』을 거쳐 “타자의 윤리학”, “새로운 보편적 윤리의 가능성을 모색”하고,2) 나아가 비교적 최근작인 『박탈』에서 잘 드러나듯 이제는 난민 문제를 포함한 국제적인 정치경제적 이슈까지도 이론적 성찰의 대상으로 삼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서사를 받아들인다고 할 때, 『혐오 발언』은 저자가 개진하는 윤리·정치적 논변의 정당성이 고유의 주체 이론에 근거한다는 점에서 버틀러에게 양자가 결코 분리될 수 없음을, 혹은 그의 이론적 궤적이 단순히 주체에서 윤리·정치로의 이행으로 설명될 수 없음을 분명히 보여준다. 이후 2003년 출간된 『윤리적 폭력 비판』에서 보다 상세한 이론적 논의가 전개되는 걸 볼 수 있지만,3) 『혐오 발언』에서 버틀러는 언어 이론과 정신분석의 결합을 통해 견고한 개체성의 장벽 안에 머무는 대신 언제나 타자와의 대면 및 ‘상처받을’ 가능성에 노출되어 있는 “취약한”(vulnerable) 주체 모델을 제시한다. 여기에는 우리가 유동적인 정체성을 가질 뿐만 아니라 타자에게, 자신이 속한 세계에 새로운 보편성을 제시할 수 있는 역량의 주체이기도 하다는 빛나는 자신감 또한 깃들어 있다.


물론 『혐오 발언』은 구체적인 시공간적 맥락에 놓인 언어적 실천이기도 하다. 저자 자신이 직접 “이 책의 주된 관심사는 수사적이고 정치적”이라고 밝히고 있듯(38), 『혐오 발언』은 1990년대 미국의 포르노그라피·인종주의·군대 내 동성애 문제 등을 둘러싸고 벌어진 논쟁에 개입하고자 한다. 논쟁의 전체적인 맥락과 저자의 개입이 어떠한 효과를 산출했는지를 다루는 일은 현재 나의 역량을 초과하는 일이나, 버틀러가 국가의 법적 규제가 공중 혹은 시민사회의 언어적 실천을 검열하고 위축시킬 수 있다는 프레임 하에서 이 상황을 이해하고 있으며 독자들 또한 혐오 발언(hate speech)의 국가규제를 거부하도록 설득하고자 한다는 점은 분명하다. 이론적 난해함이 지나치게 강조되다보니 정작 그가 얼마나 뛰어난 수사를 구사하는 필자인지는 잘 언급되지 않는 편인데, 예컨대 2장의 “국가 발언/혐오 발언”(State Speech/Hate Speech) 절(183-95)은 설령 저자의 입장에 동의하지 않는 독자라 할지라도 기술적인 측면에서는 감탄할 만큼 섬세하고 교활하게 논지를 전개하는 대목으로, 한국어판 번역 또한 이러한 탁월함을 무리 없이 옮겨놓은 것처럼 보인다.


시선을 돌려 이 책이 직접적으로 겨냥하고 있는 1997년의 미국이 아닌 그보다 20년 가까운 시간이 흐른 다른 사회, 즉 지금 여기에서 어떻게 읽힐지를 살펴보자. 역자 본인이 해제의 서두에서 직접적으로 언급하듯, 2016년의 한국사회는 “일베, 김치녀, 소라넷, 강남역 살인 사건, 여성 혐오 랩 가사, 퀴어문화축제, 고위 공직자의 ‘개돼지’ 발언, 데이트 폭력, 표현의 자유, 메갈리아” 등을 포함해 혐오표현을 둘러싼 이슈가 흘러넘치는, 좀 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그 범람이 드디어 인식되고 있는 곳이다(305). 한편으로 이제까지 암묵적으로 행해지거나 당연하게 받아들여져 왔던 언어가 혐오의 범주를 통해 새롭게 규정되었으며, 다른 한편으로 기존의 혐오수행자를 직접적으로 겨냥한 ‘혐오 발언’이 폭발적으로 증대했을 뿐만 아니라 “미러링”과 같은 이론적 자기정당화까지 제시하고 있다.4) 이러한 맥락에서 출간된 『혐오 발언』 한국어판이 특히나 반(反)여성혐오적 혐오 발언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메갈리아 커뮤니티와 전적으로 무관하게 남아있을 수 있다면 그쪽이 오히려 더 기이한 일일 것이다. 실제로 이 책을 소개한 주요 언론기사는 (출판사의 보도자료와 비교해야겠지만) 『혐오 발언』을 사실상 메갈리아 측이 주장해온 미러링의 정당성을 뒷받침하는 텍스트로 바라보며, 한국어판 역자 또한 『한겨레』와의 인터뷰 및 보다 앞서 간행된 자신의 논문에서 그와 같은 입장을 분명하게 피력한다.5)


그렇다면 그러한 정당성은 구체적으로 『혐오 발언』의 어떠한 논리에 의해 뒷받침 되는가? 각각 (이 책으로 철학석사학위논문을 취득한) 역자와 한국 여성주의 이론연구의 대표적 인물에 의해 작성된, 따라서 적어도 한동안은 이 책의 한국 수용에 중요한 영향력을 행사할 세 편의 리뷰가 제시하는 버틀러의 입장은 다음의 세 진술로 축약될 수 있을 것 같다.6) ①혐오 발언의 영향력은 제한적이며, 혐오 발언의 주체 또한 전능하지 않다. ②혐오 발언의 청자는 이 발언을 다르게 전유하거나 되받아칠 수 있는 저항의 역량을 보유하고 있다. ③국가의 법적 규제는 청자가 보유한 저항의 역량까지 제약할 수 있으므로 거부되어야만 한다. 『혐오 발언』 한국어판 정면 표지에 새겨진 문구, “국가는 혐오 발언을 생산한다”는 말은 이중 세 번째 주장이 갖는 무게를 강조한다. 임옥희의 『프레시안』 서평 또한 참고하자: “국가는 천연덕스런 얼굴을 하고서 자신의 폭력성을 은폐하고 혐오 발언의 책임을 개별 발화자에게 떠넘긴다. [...] 국가법은 자신의 폭력성을 은폐하고 법을 인용하는 개인에게 자율성을 부여해 주면서 책임을 전가한다. 혐오 발언의 책임을 개인에게만 묻는다면 국가법의 폭력성은 은폐된다. 이렇게 본다면 혐오 발언을 규제하기 위해 법을 제정하자는 호소는 아이러니하게도 혐오 대상을 끊임없이 재생산하는 국가와 공모하게 된다.” 이것이 다소 과도한 감은 있으나 버틀러의 입장, 적어도 『혐오 발언』에 제시된 바와 크게 다르지는 않다. 그러나 특히나 정치적 행위를 위한 전략의 설정이라는 관점에서, 우리는 이러한 주장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 우리는 국가와 사회의 관계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다시 버틀러의 저작을 따라가 보면, 우리는 적어도 『혐오 발언』 이후의 여러 지면에서 그가 국가와 법에 대해 명시적으로 비판적인 견해를 지니고 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이러한 입장이 가장 잘 드러난 대목을 바로 2000년 출간된 『우연성, 헤게모니, 보편성』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여기에서 버틀러는 특히 동성결혼 합법화 운동을 비판적으로 거론하면서 “결혼(혹은 군대) 제도에 참여할 자격을 청원하는 건 바로 그 제도의 권력을 확장시키고, 그 권력의 확장 속에서 국가에 의해 합법화 되는 친밀한 결연의 형태와 그렇지 않은 형태의 구별이 강화될 것”이라고, 다시 말해 이처럼 국가제도에 기입되고자 하는 운동이 “국가 자체의 헤게모니”를 강화시킬 것이라고 말한다.7) 그렇다면 이러한 국가권력에 대항하여 버틀러가 지향하는 지점은 어디인가? 이어지는 대목을 보자: “다양한 종류의 법적 자격을 위한 전제조건이라는 지위를 결혼에서 제거하는 [...] 움직임 속에서 지배적 용어를 해체하고 문화와 시민사회의 수준에서 다양한 형태의 가능성을 증대시키는 비국가 중심의 결연 형태로 돌아가는 길이 능동적으로 모색될 것이다”(247). 요컨대 적어도 이 시기의 버틀러에겐 국가·법이 포괄하지 못하는 새로운 보편성을 탐색하고 그것이 국가의 침투에 의해 억압 혹은 규제되지 않도록 사회적인 영역을 지켜내는 것이 올바른 정치적 지향점으로 주어져있는 듯 보인다.8) 바로 혐오 발언이 국가로부터 규제받지 않고 시민사회 내 발화자들을 위한 발화양식으로 남아 있어야 하는 것처럼 말이다.9)


서구근대정치사상에 어느 정도 익숙한 독자라면 버틀러의 전제가 국가·법·정부 대 자율적인 시민사회라는 오래된 구도의 연장선상에 있음을 쉽게 알아차릴 것이다. J. G. A. 포칵의 탁월한 저술이 그려내듯 18세기 초 잉글랜드 의회에서 이러한 대립구도는 전제적인 지배를 획책하는 타락한 왕당파들의 궁정(court)·중앙정부와 이에 굴하지 않고 독립적인 토지보유에 근거해 자율적인 역량을, 그리하여 미덕(virtue)을 보존하는 지방파(Country members)라는 형태로 먼저 등장한다.10) 19세기부터 오늘날의 급진좌파들에게까지 이어지는 국가의 억압 대 시민사회의 저항이라는―오늘날 한국인들에겐 국가폭력 대 민중이라는 구도로 좀 더 친숙할―고전적인 형태로 계승되어 온 이러한 이항대립에서, 시민사회는 인민해방의 유토피아적 기획을 실현시키거나 자율성을 보존할 수 있는 동력의 원천으로 제시되며 이때 국가의 통치가 초래할 굴종과 타락으로부터 시민사회의 영역을 지켜내는 것이 중요한 정치적 과제가 된다.11) 물론 현실의 시민사회가 그러한 희망에 부합하리라는 보장은 경험적으로든 선험적으로든 주어져 있지 않으며, 그런 점에서 ‘순수한 시민사회’를 추구하는 입장은 이론이라기보다는 일종의 신학적 믿음에 가깝다.12) 슬라보예 지젝은 버틀러의 입장이 맞이할 난점을 정확하게 지적한다: “버틀러는 해방적 투쟁을 일차적으로 국가의 규제 메커니즘에 맞서 시민사회 내에서 발생하는 이런 주변적 행위자들의 저항 속에 위치시킨다. [...] 오늘날에는 심지어 국가와 시민사회의 바로 그 대립조차 전적으로 양가적이다. 놀랄 것도 없이 도덕적 다수파는 스스로를 자유주의 국가의 ‘진보적’ 규제 개입에 맞선 국지적인 시민사회의 저항으로 제시한다(그리고 사실상 그런 것으로서 조직된다)”(『우연성, 헤게모니, 보편성』 423).


버틀러의 입장이 당시의 맥락에서 어떤 의미를 지녔는지, 그리고 오늘날 혐오발언에 대한 규제가 어떻게 이루어져야 하는지를 여기서 물을 생각은 없다.13) 그러나 버틀러의 ‘사회신학’ 혹은 국가혐오를 2016년의 한국사회에서 그대로 되풀이하는 일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따져볼 필요는 있다. 세 가지를 지적하고 싶다. ①특히나 오늘날 한국에서 순수한 시민사회, 국가의 통치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영역은 존재하지 않는다. 애초에 우리가 맞닥트린 혐오발언의 범람 자체가 국가의 폭력독점으로 인해 사회구성원들이 행사할 수 있는 폭력의 범위가 지극히 제한된, 엘리아스(Norbert Elias)의 표현을 빌리자면 “문명화”된 상황의 산물이다. ②다른 누구보다도 푸코가 잘 보여주었듯, 국가의 통치기술이 단순한 억압과 금지, 처벌 이상의 것을 수행하게 된지 이미 오래다. 비록 현재 우리의 정부가 매우 놀라운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고 해서 그것이 국가의 통치기술이 특정한 환경을 조성하고 행위자들에게 역량을 부여하고 있음을 부인하도록 하지는 않는다.14) ③무엇보다도 ‘순수한 시민사회’와 국가를 나누고 후자를 거부하는 태도는 여성주의자들을 포함한 우리들로 하여금 국가·정부가 보유한 광범위한 자원과 영향력에 대한 접근 자체를 하지 못하도록 가로막는다. 다시 말해 국가에 대한 거부는 우리를 더 자유롭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행위영역을 제약한다. 익숙한 표현대로 한국사회는 정말로 “기울어진 운동장”이며, 지금도 혐오세력들은 공적 영역에서의 발언권을 획득하기 위해 정치세력화하고 있다.15) 이러한 상황에서 공적 영역을 활용하지 않는 것은 단지 어리석을 뿐만 아니라 자멸적이기까지 한 선택이다. 국가 규제에 대한 거부는 하나의 통치방식으로서 전술적으로 선택될 수는 있어도 그 자체가 원칙이자 신념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런 점에서 버틀러의 빼어난 작품은 적어도 한국 현실정치의 관점에서는 비판적으로 읽혀야 한다.


1) 주디스 버틀러, 『혐오발언: 너와 나를 격분시키는 말 그리고 수행성의 정치학』, 유민석 역, 알렙, 2016. 원서 서지사항은 Butler, Judith. Excitable Speech: A Politics of the Performative. NY: Routledge, 1997. 이후 본문 인용 시 한국어판 쪽수만 표기.

2) 인용은 각각 임옥희, 『주디스 버틀러 읽기: 젠더의 조롱과 우울의 철학』, 여이연, 2006, 26쪽 및 주디스 버틀러, 『불확실한 삶: 애도와 폭력의 권력들』, 양효실 역, 경성대학교 출판부, 2008, 208쪽의 역자후기에서 참조.

3) 주디스 버틀러, 『윤리적 폭력 비판: 자기 자신을 설명하기』, 양효실 역, 인간사랑, 2013.

4) 일부 옹호자들의 주장과 달리, 여성혐오자들을 겨냥한 “미러링”의 언어가 그 자체로 강력한 혐오감을 표출하는 사례는 손쉽게 찾아볼 수 있다. 물론 이것이 여성혐오의 등가물이 될 만한 “남성혐오”가 존재함을 뜻하지는 않는다.

5) 관련 언론 기사로는 김계연, 「메갈리안을 위한 변론…주디스 버틀러 '혐오 발언'」, 『연합뉴스』, 2016년 8월 9일(http://www.yonhapnews.co.kr/bulletin/2016/08/08/0200000000AKR20160808156900005.HTML); 이유진, 「혐오 발언, 규제할 것인가 되받아칠 것인가」, 『한겨레』, 2016년 8월 11일(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756300.html); 김남중, 「혐오 발언에 맞서라, 되받아쳐라」, 『국민일보』, 2016년 8월 10일(http://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923602021&code=13150000): 김지원, 「‘미러링’의 되받아치기서 ‘의미 전복’의 역설적 희망」, 『경향신문』, 2016년 8월 12일(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608121921005) 참조(최종접속일자는 모두 2016년 10월 24일). 역자의 글은 유민석, 「혐오발언에 기생하기: 메갈리아의 반란적인 발화」, 『여/성이론』 33(2015년 12월): 126-152를 보라.

6) 임옥희. 「“그래, 내가 '잡년'이다 어쩔래?”: [프레시안 books] <혐오 발언>」, 『프레시안』, 2016년 9월 30일(http://www.pressian.com/news/article.html?no=142073): 유민석, 「혐오의 시대에 혐오에 저항하는 법: 혐오 발언에 말대꾸하기」, 『동국대학원신문』, 2016년 9월 26일(http://www.dgugspress.com/news/articleView.html?idxno=1589): 유민석, 「“국가는 혐오 발언에 대한 어떤 규제도 제정하지 말아야”: 『책을 말하다_ 『혐오 발언』 주디스 버틀러 지음|유민석 옮김|알렙|367쪽|18,000원」, 『교수신문』, 2016년 8월 30일(http://www.kyosu.net/news/articleView.html?idxno=32889). 최종접속일은 모두 2016년 10월 24일. 임옥희의 입장은 『주디스 버틀러 읽기』 6장과 7장에도 개진되어 있다.

7) 주디스 버틀러, 에르네스토 라클라우, 슬라보예 지젝, 『우연성, 헤게모니, 보편성: 좌파에 대한 현재적 대화들』, 박대진, 박미선 역, 도서출판b, 2009, 244. [이러한 입장이 놓인 맥락을 이해하기 위해 20세기 미국 정치사상·정치이론의 역사를 개괄하는 Terence Ball 의 짧고도 명료한 글 "Discordant Voices: American Histories of Political Thought"(The History of Political Thought in National Context, Dario Castiglione & Iain Hampsher-Monk eds., Cambridge: Cambridge UP, 2001, 107-33), 특히 여성주의 정치학·다문화주의를 다룬 121-25쪽의 대목 또한 참고할만하다. - 2017년 4월 26일의 덧붙임]

8) 이 시기 버틀러의 다른 저작, 가령 『안티고네의 주장: 삶과 죽음, 그 사이에 있는 친족관계』, 조현순 역, 동문선, 2005, 특히 72를 보라. 내 생각에 적어도 『불확실한 삶』과 가야트리 스피박과의 대담집 『누가 민족국가를 노래하는가』(2007, 한국어판은 주혜연 역. 산책자, 2008)까지 이러한 입장은 유지되는 것 같다. 다만 2013년 출간된 아테나 아타나시오우와의 대담에서 그는 좀 더 조심스러운 태도를 취한다: 『박탈: 정치적인 것에 있어서의 수행성에 관한 대화』, 김응산 역, 자음과모음, 2016, 140-43.

9) 여성주의 이론에서 국가의 문제에 대한 개괄로는 The Oxford Handbook of Feminist Theory, Lisa Disch&Mary Hawkesworth eds., NY: Oxford UP, 2016 에 수록된 Johanna Kantola의 글 "State/Nation"(915-33)을 보라; 이중 버틀러의 국가 이해 및 그에 대한 비판의 소개로는 920쪽을 참고. 같은 선집에 수록된 신기영(Ki-young Shin)의 "Governance"(304-25) 및 Emanuela Lombardo&Petra Meier의 "Policy"(610-31)도 함께 보라.

10) J. G. A. 포칵, 『마키아벨리언 모멘트: 피렌체 정치사상과 대서양의 공화주의 전통』, 곽차섭 역, 전2권, 나남, 2011, 특히 12장 “궁정·지방·상비군”을 참조. 이러한 ‘궁정 대 지방’ 모델이 오늘날의 미국에까지 지속되고 있다는 지적으로는 같은 저자의 "From The Ancient Constitution to Barbarism and Religion: The Machiavellian Moment, the History of Political Thought and the History of Historiography," History of European Ideas 2016, DOI: 10.1080/01916599.2016.1198517 를 보라.

11) 이 주제에 대해 한국어로 읽을 수 있는 정치사상사적 저술은 유감스럽게도 많지 않은데, 조금 오래되었긴 하지만 여전히 흥미로운 글로 셸던 월린, 『정치와 비전: 서구 정치사상에서의 지속과 혁신』, 제2권, 강정인·이지윤 역, 후마니타스, 2009의 9장과 10장을 보라(원문 초판은 1960년에 출간되었다).

12) 시민사회 자체가 서구 18세기에 대두한 개념으로서 “통치테크놀로지의 상관물”이라는 푸코의 지적을 참고하라: 『생명관리정치의 탄생: 콜레주드프랑스 강의 1978~79년』, 오트르망 역, 난장, 2012, 12강.

13) 후자의 물음에 관해 한국어로 읽을 수 있는 문헌 중 가장 뛰어난 것들 중 하나로는 다음을 보라: 홍성수, 「혐오표현의 규제: 표현의 자유와 소수자 보호를 위한 규제대안의 모색」, 『법과사회』 50(2015년 12월): 287-336. [이 논문과 함께 국가인권위원회가 2016년 12월에 발간한 보고서 『혐오표현 실태조사 및 규제방안 연구』를 보라. 더불어 이제 우리는 이 문제에 관한 제러미 월드론(Jeremy Waldron)의 매우 중요한 저작을 깔끔한 한국어로 읽을 수 있게 되었다; 제러미 월드론, 『혐오표현, 자유는 어떻게 해악이 되는가?』, 홍성수·이소영 역, 이후, 2017 참조. - 2017년 4월 26일의 덧붙임]

14) 예를 들어 홍성수, 「규제학―개념, 역사, 전망」, 『안암법학』 26(2008): 379-406을 참고하라. [마크 비버(Mark Bevir)의 Governance: A Very Short Introduction(Oxford: Oxford UP, 2012)은 20세기 후반부터 지금까지 통치의 문제가 얼마나 더 복잡한 것이 되었는지를 잘 안내해준다. - 2017년 4월 26일의 덧붙임]

15) 나라, 「누군가의 삶에 반대한다?: 성소수자 운동이 마주한 혐오의 정치세력화」, 『여성혐오가 어쨌다구?』, 윤보라, 임옥희, 정희진, 시우, 루인, 나라 공저, 현실문화, 2015, 227-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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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지나가다 2017.04.27 10:42 신고 Modify/Delete Reply

    음.. 지나가다 우연히 보게 된 리뷰인데, 버틀러의 논의 기반을 국가와 사회의 이분법에 기반한 사회신학으로 해석하는 건 무리가 있어 보여 실례지만 한 마디 보탭니다. 책을 읽은지 시간이 많이 지나서 세부적인 기억은 부정확할 수 있으나, 버틀러가 이 책에서 혐오발화를 되받아칠 수 있는 호명의 한 형태로 해석하면서 기대고 있는 주요 자원은,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론"입니다. 문제의 논의는 이러한 이데올로기적 국가영역에서 벌어지고 있는 투쟁을 억압적 국가장치의 한 형태인 법의 형태로 기입할 것인가의 문제이구요 (법 같은 경우는, 억압적 국가장치와 이데올로기 국가장치에 겹쳐있는 형태이기에 국가장치론을 둘러싼 논의에서 항상 논쟁적 위치를 차지하지요.)

    버틀러의 주장 중 어떤 부분을 문제삼는지는 이해가 되지만, 제가 알기론 그람시-알튀세르-푸코-풀란차스 이후에 어떤 포스트-맑스주의 혹은 포스트-구조주의 이론가도 국가 대 사회라는 단순한 자유주의적 이분법에 기반해 논의를 전개하지는 않습니다. 문제는 국가 장치들 간의 층위를 어떻게 구분하고 그 안에서 이 장치들을 "어떻게" 변형시킬 것인가라는 질문일테구요. 물론 지적하신대로 버틀러는 꽤나 자주 자유주의의 함정에 빠져 오락가락하는 이론가이긴 합니다만, 아마 마지막에 지적하신 세 가지 사항 모두에 (순수한 시민사회는 없다, 통치는 금지 이상이다, 페미니스트는 공적 영역에 개입해야 한다) 기꺼이 동의할 겁니다.

    오히려 버틀러의 질문은 우리가 공적인 영역에 개입하는 방식과 그에 대한 상상이, "법"이라는 또 다른 국가장치를 통한 것으로 제한될 때 발생할 수 있는 문제에 대한 것일테고, 그런 면에서 버틀러의 논의를 현재 한국 상황에 적용해본다면, 아마도 "차별금지법" 제정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정도가 적절한 예가 되겠네요. 이 법은 분명 우파 입장에서만이 아니라 좌파 입장에서도 충분히 반대 혹은 유보의 목소리가 나올 수 있는 사항이고, 이러한 문제제기가 단순히 한국이 "기울어진 운동장"이어서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주목할 것은 버틀러가 국가 장치에의 개입 방향을 어떻게 설정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제기하는 방식인 것이고, 그런 점에서는 버틀러의 논의를 철지난 국가-사회 이분법에 기반한 국가혐오로 정리하는 건 그 함의를 제약하는 방식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보통 리뷰의 의의 중 하나는 책이 가진 함의를 확장시켜주는 것에 있을 텐데, 본인의 틀을 짜느라 그 반대방향으로 나아가신 것 같아 적어봅니다.

    • BeGray 2017.04.27 11:35 신고 Modify/Delete

      좋은 댓글 감사합니다. 요점부터 말씀드리자면 저는 지적해주신 내용에 전반적으로 동의하지 않습니다.

      첫째, 버틀러의 이 책이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와 이데올로기적 국가 장치"를 중요하게 인용하는 것은 맞습니다만, 애초에 알튀세르의 그 글이 어떠한 통치를 수행할 것인가의 문제를 전면적으로 다루는 글이 아닐 뿐더러(예를 들어 그 글을 놓고 푸코식의 통치성 논의나 오늘날의 거버넌스 논의에 가까운 함의를 이끌어내기란 무척 어려운 이론적 작업일 것입니다; 알튀세르의 기여를 인정하고 활용하는 것과 그의 텍스트에서 그가 말하지 않은 걸 부여하는 것은 매우 다른 일이죠), 버틀러의 알튀세르 인용 또한 대부분 호명(interpellation) 혹은 이데올로기적 주체화 방식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알튀세르의 작업을 참조했다는 것만으로 버틀러가 이 문제에서 제가 지적한 바와 다른 입장을 취한다고 주장하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둘째, 애초에 국가 대 사회가 순전히 자유주의의 것만이라고 이야기하기 자체가 어렵습니다만(다른 누구보다도 맑스의 작업이 이러한 프레임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는가에 대해 저는 회의적이며, 그것이 실제로 철지난 것인지, 많은 좌파 정치이론들이 그로부터 자유로운지, 무엇보다도 한국의 좌파 이론 연구자들이 이 프레임으로부터 자유롭다고 말할 수에 있는지에 대해선 더욱 그렇습니다), 버틀러가 비록 유럽/신좌파 전통을 주의깊게 참고하는 저자임에도 불구하고, 이 주제에 대해서 저는 그가 "미국" 저자라는 사실을 망각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서평 본문에서 지적했듯 이러한 구도가 암암리에 들어가 있는 언급들은 이후에도 계속되고요(각주 8번을 참고하실 수 있습니다). <우연성, 헤게모니, 보편성>에서 지젝과 라클라우에게 비판받는 이유 중 하나도 그러한 입장 때문인데, 버틀러가 단순히 특정한 사조 이후에 있는 사람이라고 해서 우리가 그의 실제 발화를 무리한 맥락을 부여해가면서 읽어줄 이유는 없다고 생각합니다--적어도 사실관계를 따지는 차원에서는 말입니다. 아마도 버틀러는 제가 제시한 세 가지 지점에 의식적으로는 동의할 수 있겠으나, 그의 논리가 조직화된 방식에서 그의 저술이 그것들을 비켜나간다고 말하기는 어렵지 않을까 합니다.

      셋째, 버틀러의 논의를 한국의 현황에 적용하는 방식에 대해 덧붙인다면, 먼저 제가 본문에서 직접적으로 언급하고 있듯 바로 제가 비판하는 형태의 국가-사회를 대질시키는 논의로 버틀러를 소환하는 흐름이 유효하게 존재하고 있다는 점을 망각할 수 없으며, 둘째로 "국가 장치에의 개입 방향을 어떻게 설정할 것인가"에 관해 <혐오발언>을 포함해 한국어로 번역된 대부분의 저작에서 버틀러가 특별히 말해주는 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의 이론적·정치적 기여를 무시할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만, 그가 국가와 통치를 이해하는 방식에 코멘트하고자 했는지 자체가 저는 의심스럽습니다. 그렇기엔 그는 너무나 강력하게 '사회' 또는 '인민'이라고 불릴만한 무언가--물론 그것 내부의 동학을 그가 전적으로 무시하는 건 아니겠지만--에 집중하고 있죠.

      우리가 성인의 경전을 읽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텍스트를 읽는 것일진대, 그가 말하지 않은 혹은 말하려고 하지 않은 내용을 굳이 그의 저술에 덧붙일 필요가 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심지어 그의 저술에서 끌어낼 수 있는지조차 의심스러운 내용이라면 더더욱이요). 물론 어떤 저자의 글이 그의 의도와 무관하게 아이디어를 주는 경우들이 왕왕 있긴 합니다만, 국가와 통치의 문제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면 저는 버틀러를 그렇게 활용하기에는 우리가 수행해야 하는 이론적 곡예가 지나치게 난해하며, 그냥 그 주제에 적합한 다른 전통의 텍스트를 직접 보는 게 훨씬 생산적인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걸 이야기하는 것도 서평자가 할 수 있는 일일 거고요.

    • 지나가다 2017.04.27 12:56 신고 Modify/Delete

      답변 감사합니다. 딱히 버틀러의 글을 경전읽듯이 읽자고 말씀드린 게 아닙니다. 댓글에서도 말했지만, 저 역시도 버틀러가 말씀하신 오류를 자주 범한다는 걸 잘 알고 있구요. 다만 이 텍스트로 좁혀보자면, 글쓴분께서 마지막에 지적하신 사항을 전제로 한 상태에서 "공적영역에 개입해야 한다->그러면 어떻게?"라는 질문을 던지고 논의에 개입하기 위해 쓰여진 글에 대해, 국가/사회 이분법에 기반한 국가혐오로 정리하고 공적영역 개입의 필요성(그리고 맥락상 혐오발화에 대한 국가 규제의 필요성)을 지적하는 것은, 허수아비 비판대상을 만드는 그리 생산적이지 않은 리뷰인 듯 해 말씀드린 것 뿐입니다. (오히려 버틀러가 문제삼는 건, 공적영역=국가=법이라는 암묵적 등식일텐데요...) 말씀하신 한국에서 국가-사회를 대질시키는 논의로 버틀러를 소환하는 흐름에 대해서는 제가 잘 모르는 부분이라, 그 부분까지 염두에 두다 보니 논의의 초점이 국가-사회에 맞춰진건가란 생각은 드네요.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 BeGray 2017.04.27 13:31 신고 Modify/Delete

      이 대화가 저와 지나가다 님의 우애를 상하게 하지 않는다는 전제 하에서^^, 새로 달아주신 댓글에서 제가 동의하지 않는 지점을 짧게 말씀드리자면, 저는 "버틀러가 문제삼는 건, 공적영역=국가=법이라는 암묵적 등식"인 것은 맞으나 그것은 공적 영역을 보다 복잡해진 통치방식의 문제로 이끌고 가기 위해서가 아니라 '진정한' 공적 영역으로 다시금 순수사회라는 이상을 데려오기 위해서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책 전체를 통틀어서 분명한 논조로 혐오표현의 법적 규제에 대해 반대하며, 혐오표현은 시민사회 내의 '되받아치기'로 극복가능하다는 기본구도를 명확히 설정할 이유가 없죠.

      그런 점에서 저는 버틀러의 이 책이 ""공적영역에 개입해야 한다->그러면 어떻게?"라는 질문을 던지고 논의에 개입하기 위해 쓰여진 글"이라는 말씀에는 동의하기 힘듭니다. 법적 규제(저는 물론 버틀러가 법을 지나치게 단순하게 규정하고 있다고 생각하며, 이에 대해서는 홍성수 선생님의 규제학 논문이 좋은 비교대상이 된다고 봅니다)에 대한 대안으로 다른 종류의 (공식적인 의미에서) 공적 정치행위를 제안하는 게 아니라 다양한 시민주체들의 연대와 되받아칠 역량을 꺼내는 글이, 혹은 그런 것들이야말로 진정한 공적인 것이라고 주장하는 글이--이는 <안티고네의 주장>에서도 암묵적으로 제시되죠--우리가 의미하는 바에 따른 공적 영역의 통치행위를 논하는 주장이라고 동일시하기에는 양자 사이의 명백한 차이를 무시할 수 없습니다. 쉽게 말해 저는 <혐오발언>만 놓고 봤을 때 버틀러의 입장은 이 문제를 공식적인 정치기구의 관할에서 제외하자는 주장이라는 점에서 반정치적인 정치적 언설이라는 비판을 들을 수 있다고 봅니다(공적 영역이 개입하지 않도록 공적 영역에 개입해야 한다는 주장이니까요). 이는 버틀러가 주체와 언어, 취약함의 문제에서 출발하여 주체의 역량과 법적 규제의 억압성을 지적하는 논변으로 논지를 전개한다는 점에서 명확하죠(이 시기 버틀러가 동성혼 추진에 대해 국가/법에 포섭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도 참고할 수 있고요).

      오히려 텍스트만 놓고 봤을 때 버틀러의 입장은 매우 명확하고--바로 그런 주장을 하기 위해 집필된 책이니까요--우리가 불필요한 ad-hoc을 달 이유가 없습니다.

    • 지나가다 2017.04.27 15:09 신고 Modify/Delete

      지나가다 생긴 일인데 우애가 상할게 있나요^^ 새로운 댓글을 보니 그렇다면 "공적 정치행위"와 "정치기구"에 대한 이해가 달라서 논의를 더 진행하기는 어렵겠네요. 다만 그러하다면 더더욱 결론 부분에서 공적영역의 개입 필요성을 제기하고 곧바로 국가규제의 문제로 넘어가는 건 신중할 필요가 있다고 보여집니다. 첫 댓글에서 버틀러에게서 혐오발화 자체가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 안에서 벌어지고 있다고 굳이 (잘 알려진 사실을) 언급한 것은 버틀러의 논의 속에서 국가, 법, 공적영역의 구분짓기가 시도되고 있다는 걸 지적하려 했었던 것인데, 글쓴분의 결론에서 이 구분은 다시 공적영역=국가=법의 등식으로 회수되는 걸로 읽히거든요. (오독이라면 죄송합니다.) 게다가 그 근거라 할 것이 (글 자체에 제시되기로는) 단지 한국사회가 "기울어진 운동장"이기 때문이라는 것인데, 그렇다면 더욱 주의해야할 주장이라고 보구요.

      여하튼 흥미로운 글 잘 읽었습니다. 답변 감사드리구요.

    • BeGray 2017.04.27 16:26 신고 Modify/Delete

      애초에 국가가 법을 통해서만 통치하는 것도 아니거니와, 법의 작동방식이 버틀러가 주장하는 것처럼 억압적인 형태만 있는 게 아니니까요. 제가 특정한 공적 영역은 국가 혹은 그에 준하는 행위자들이 맞습니다만(국가를 제외하고 "공적인" 영역이라 명확하게 부를 수 있는 건 공론장 정도를 제외하면 쉽게 말하기 힘들 겁니다), 버틀러 또는 버틀러를 따르는 한국 독자들에게 제가 비판적인 것은 그들이 현대적인 국가기구 및 법의 작동양태를 지나치게 단순하게 상정하기 때문입니다--마크 비버 같은 저술을 인용하는 것도, 푸코를 대당시키는 것도 그 때문이고요. 제 논의의 핵심은 한국의 정치적 행위를 이야기할 때 그러한 국가적 의사결정과정의 중요성을 절대로 무시할 수 없으며, 그런 점에서 국가로부터 자유로운 '공적' 영역 혹은 저의 표현대로라면 순수사회를 자율적인 영역으로 만들 수 있다는 버틀러의 입장이 비현실적이라는 데 있지, 한국이 기울어진 운동장이기 때문에만 그렇다는 것이 아닙니다. 제 글에 분명하게 읽히기 힘든 지점이 있었다면 이것으로 어느 정도 갈음이 되었으면 좋겠네요. :)

  2. ㅇㅇ 2017.04.27 10:53 신고 Modify/Delete Reply

    공유해가도 될까요.?.

  3. 소년의 노래 2017.05.01 00:49 신고 Modify/Delete Reply

    국가의 통치는 자유를 억압하기도 하지만 그렇게 억압된 자유를 통해 (주로 경제적)평등의 가치를 실현한다고도 보는 입장이라 버틀러의 저러한 반국가주의적(?)인 이념에는 다소 동의가 안되네요. 물론 최근의 세계적 흐름에서 볼 때 국가는 후자보다는 전자의 역할에 더 치우쳐 있다는 느낌은 받습니다. 아무튼 최근 트위터에서 버틀러의 인기가 아주 높은데 마침 균형을 잡을 수 있는 좋은 글이었네요. 언제나처럼 감사합니다.

    • BeGray 2017.05.09 23:04 신고 Modify/Delete

      음 저는 국가의 통치작용이 억압만 존재한다는 전제 자체가 지난 몇 세기에 걸쳐 국가의 통치 테크닉이 얼마나 변화해왔는가를 충분히 반영하지 못한다는 입장입니다. 이걸 깨트린 게 (비록 많은 독자들의 오해를 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푸코의 작업이 갖는 의의 중 하나라고 생각하고요 ㅎㅎ

  4. dd 2017.05.30 00:54 신고 Modify/Delete Reply

    버틀러가 국가가 억압적인 형태로만 존재한다고 볼 것 같지는 않습니다. 국가의 통치 테크닉이 배치한 장치들에 의해 주체가 형성된다는 것을 모를리가 있겠습니까. PLP에서 하는 모든 작업이 그런 전제아래에서 어떻게 저항이 가능한가를 탐구하는 것인데요.
    단지 버틀러는 일반적으로 국가를 통한 저항을 생각할 때 단순히 법의 차원으로 환원해 버리는 경향을 비판하다보니 국가에 '적대적'으로 보이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ㅎㅎ 버틀러에게 '순수'라니요 ㅋㅋㅋㅋㅋ 버틀러와 지젝이 충돌하는 부분이 "특수한 내용이 비어있는 보편적 개념을 헤게모니화하는 헤게모니 투쟁과 보편자를 비어있게 하는, 따라서 헤게모니 투쟁의 영역이 되게 하는 보다 근본적인 불가능성"을 구별할 수 있는가 없는가 일텐. 버틀러는 그럴수 없다고 하지요. 특정한 층위(자본. 성차..)를 초월론적 근거로 삼는 것을 극도로 경계하기 때문이죠. 이런 맥락에서 버틀러의 논의를 살펴봐야지 버틀러의 텍스트들이 좀 더 풍부해지는 것 같습니다. 버틀러를 국가vs사회라는 프레임 속으로 데려가 비판하는 것은....
    국가의 통치 테크닉이 다양화되고 복잡화되면서 그것의 장치들은 당연히 사회 전영역으로 퍼져나가겠죠. 그렇다면 그러한 장치들 또한 역전, 재배치할 수 있겠죠.

    ㅋㅋ 지나가다 끄적여보네요 ㅎㅎ

    • BeGray 2017.05.30 09:00 신고 Modify/Delete

      댓글 감사합니다^^. 말씀하신 내용에 크게 두 가지 지점에서 동의하지 않는데요,

      1. "국가의 통치 테크닉이 배치한 장치들에 의해 주체가 형성된다"는 걸 아마도 알고 있다는 것과, 실제로 그것을 본인의 논의에 어떻게 적용하는지는 좀 다른 문제일 것 같습니다. 그리고 저는 이 케이스에서 버틀러가 저 너무나도 상식적인 내용을 실제로 "알고 있다"고 한다면
      국가=법=억압적인 것이라는 식의 도식을 설정하지 않았으리라고 생각이 드네요. 유감스럽게도 제가 다룬 책에서 버틀러는 바로 후자의 도식 하에서 논의를 진전시키고요.

      2. 특정한 층위를 초월론적 근거로 삼는 것을 극도로 경계하는 것과, 바로 이 텍스트에서 말하는 바처럼 올바른 정치적 행위를 국가가 아닌 시민사회 내에서만 가능한 것으로 보는 건 좀 다른 이야기인 듯 합니다. 제 생각에 dd 님께서는 (적어도 버틀러에게) 양립가능한 진술을 양립불가능한 것으로 설정하시는 듯 합니다. 버틀러가 유일한 근본적인 적대를 인정하느냐 문제와 국가VS사회라는 프레임 위에서 사고하느냐의 문제는 다른 이야기입니다.

      이후에도 대화가 이어질 수 있을테니 미리 덧붙이자면, 저는 누군가의 저작으로부터 유효한 교훈을 끌어내는 것과 그 저작을 그대로 이해하는 것은 조금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이 서평에서 하고자 했던 후자의 작업의 경우, 요점은 실제로 저자가 이 저작에서 무엇을 하고 있느냐를 보는 데 있지 "이런 사람이 마땅히 ~할 리가 없다"라고 만족스러운 그림을 그려주는 데 있지 않죠. 간단히 말하자면 저는 신좌파 계보에 속하는 다양한 논의를 끌어와서 버틀러가 당연히 이쯤은 알고 있을 거라고 전제하는 대신 ES에서 직접 버틀러가 어떻게 말하는지를 검토하는 쪽이 좀 더 생산적이지 않을까 하네요 :)

  5. Dd 2017.06.02 01:54 신고 Modify/Delete Reply

    1. 버틀러가 그렇게 단순하게 생각하지 않는 건, 다른 책이긴 하지만, 불확실한 삶 3장에 나와잇습니다. 푸코의 통치성 개념을 통해 국가. 주권성. 법을 비교하고 그를 바탕으로 관타나모 수용소를 분석하고 있습니다.

    2. 그런 것 같네요. 하지만 통치성 개념을 통해 국가를 바라볼때 국가vs사회라는 프레임 자체도 문제시 되지않을까요?

    • BeGray 2017.06.04 17:22 신고 Modify/Delete

      1. <불확실한 삶>과 <혐오발언> 사이의 시간적 차이가 있음을 먼저 고려해야겠고(즉 전자의 발언을 근거로 후자의 사고를 규정하려면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합니다), 둘째로 푸코의 통치성 개념을 인용했다는 것과 그것을 유의미하게 활용했다는 건 명백히 다른 진술이죠. 지금 텍스트가 옆에 없어서 바로 확인이 불가능한데, 제 기억으로 버틀러가 그 대목에서 푸코를 정말로 충분히 복잡하게 활용했는지에 대해선 심각한 의문이 있습니다. 수고스러우시겠지만 논의를 이어나가기 위해 직접 중요하다고 생각하시는 대목을 인용해주시면 더 감사하겠습니다.

      2. 네, 저는 푸코의 저작이 그러한 프레임을 상당히 무너트리는 방향으로 갔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푸코의 통찰을 활용한다고 주장하는 여러 저자들이 실제로 그런 함의를 실천하는지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고요, 당연하지만 "통치성"을 인용하는 것과 그걸 유의미하게 활용한다는 건 별개인데, 저는 버틀러가 후자의 모습을 보여준 적은 적어도 한국에서 출간된 책에 한해서는 별로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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