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이즈먼. <내셔널 갤러리>. 미학화된 전문가들.

Reading 2016. 9. 11. 01:53
프레더릭 와이즈만(Frederick Wiseman) 감독. <내셔널 갤러리>(National Gallery). 2014.

코엑스에서 프레더릭 와이즈만이 감독한 <내셔널 갤러리>를 보았다. 특별히 영상예술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입장에서 3시간 짜리 다큐멘터리 영화를 수면부족 상태로 볼 가능성은 높지 않지만, 방문한지 두 달도 되지 않은 공간, 그것도 내게 가장 깊은 흥미를 불러일으켰던 장소 중 한 군데를 다루는 작품이라 굳이 예외를 만들었다. 눈 아래 깊숙히 박힌 다크서클을 보며 틀림없이 어느 정도는 졸게 마련이리라 생각했으나 의외로 처음부터 끝까지 다 시청했다(가끔 안구가 피로할 때는 잠시 눈꺼풀을 덮고 간만의 영국 악센트에 귀를 기울였다).

비록 초반부터 마지막까지 런던의 내셔널 갤러리가 소장한 작품들의 샷이 수 차례에 걸쳐 나열되고 그 자체로도 무언가 미적인 감흥을 불러일으킴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는 예술작품 자체가 아닌 내셔널 갤러리의 다양한 구성원들의 언행을 기록하고 이를 통해 내셔널 갤러리라는 기관(corporation)에 깃든 정신을 넌지시 비춘다. 이는 다시 말해 사람들의 말과 행위가 어떤 자세, 됨됨이에 따라 움직이는지, 그러한 말과 행위가 어떠한 관습, 제도, 취향의 축적을 통해 하나의 스타일을 마치 자연스러운 것인양 머금게 되었는지를 상상할 수 있는 시청자들이야말로 이 영상물에 가장 적합한 시청자임을 뜻한다. 그런 점에서 이 작품은 명백히 '취향을 가진 사람들'(고전적인 표현을 가져오자면 "man of taste")을 타겟으로 하는 일군의 예술작품들 사이에 놓일 수 있다. 만약 내셔널 갤러리의 웅장한 외관과 수많은 소장품, 그리고 그에 얽힌 재미있는 뒷이야기 등을 기대하고 찾아간 시청자라면--물론 렘브란트의 <말등에 탄 프레데릭 리헬의 초상>(Portrait of Frederick Rihel on Horseback)의 X-ray 촬영도와 같은 것들이 일부 나오긴 하지만--자신이 기대하지 않았던 장면들이 생각 이상으로 높은 비중을 차지한다는 사실에 조금 당혹스러움을 느낄지도 모른다.

실제로 와이즈만의 작품 속에서 내셔널 갤러리 구성원들이 수행하는 여러 직무는 특별한 연속성이 상정되지 않은 채로 나열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로부터 몇 가지 인상깊은 장면들을 꼽아보고 싶다. 작품에 등장하는 첫 대화장면은 갤러리 관장(으로 추정되는 인물)과 그에 못지 않게 발언권을 가진 나이든 여성 간의 분명한 입장 차이를 보여준다. 후자가 내셔널 갤러리가 어떻게 더 많은 공중(the public)·인민(people; 유감스럽게도 한국어 자막 역자는 이 단어들의 사상적인 함의를 고려하지 않고 모두 "대중"이란 말로 옮기면서 두 사람의 갈등을 지나치게 단순하게 만들어버리는데--이는 이 자막이 반말과 존댓말을 인물들의 발언에 임의로 부여함으로써 한국적인 위계관계를 덧씌우는 것만큼이나 아쉬운 일이다--나는 부디 실제 한국의 예술계에서는 이러한 개념들 사이의 차이가 좀 더 명확히 인식되고 있기를 바란다)에게 접근할 수 있을지를 문제의식으로 삼는다면, 관장은 갤러리의 얘술적인 '질'을 끌어올리고자 하는 태도를 견지한다. 이러한 차이는 이후 수많은 이들이 시청하는 마라톤 대회와 협조할 것인지를 논의하는 위원회에서 좀 더 분명히 드러난다(와이즈만은 이러한 광경을 기록할 뿐 어떠한 결정이 이루어졌고 무엇이 변했는지를 직접적으로 보여주지는 않는다). 요컨대 영국 전체에서 가장 중요한 미술관 중 하나인 내셔널 갤러리는 끊임없이 크고 작은 의사결정과정으로 이루어지는데, 각각의 과정은 다시금 다양한 인물들이 가진 서로 다른 "원칙"(principle)들 사이의 (언제나 매끄럽지만은 않은) 대화의 과정이기도 하다.

영화에서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대목 중 하나는 예술작품의 복원과정이다. 그 과정을 일일이 기술할 수는 없지만--그냥 직접 보세요!--영화가 분명하게 강조하는 지점은 예술작품의 복원 및 관리가 매우 전문화된 다양한 프로세스들의 결합을 통해서 수행되고 있으며, 이를 수행하는 전문가는 단지 여러 도구와 복잡한 절차를 숙지하는 것을 넘어 고유의 미적 판단기준까지 갖춘 한 명의 숙련된 기예가로 제시된다. 카메라가 복원과정을 다루면서 갤러리의 전문가들이 보유한 고도의 숙련도 혹은 전문성에 집중한다는 것을 이해한다면, 이어서 제시되는 조명의 배치--실제로 갤러리에서 일정 크기 이상의 작품을 마주할 때 광원의 개입은 감상자의 지각에 상당한 영향을 준다--혹은 공간의 설계를 논의하는 장면 또한 높은 수준의 미적 전문성이 발휘되는 순간임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내셔널 갤러리>는 이러한 전문성들이 어떤 형태로 결합하여 예술텍스트와 감상자의 마주침을 위한 최상의 시공간을 조성하는지를 보여준다. 예술작품의 복원, 그것을 완결된 형태로 전시하는 액자의 빚어짐, 조명의 배치, 공간 자체의 설계, 복수의 예술작품들로부터 의미의 서사가 구축될 수 있도록 하는 작품의 배열까지가 예술작품이 특정한 시공간에 놓이는 과정을 구성한다면, 감상자의 해석지평을 더욱 풍부하게 만들기 위해 역시나 수많은 연구자들이 연결되어 작품을 둘러싼 사실들을 추적하고(예를 들어 어떤 그림 속의 악보를 통해 작가의 음악에 대한 이해도를 어떻게 평가할 수 있느냐의 문제 같은), 가이드들은 이러한 탐색을 통해 형성된 해석의 자원을 기초로 갤러리를 찾아온 감상자들의 미적 경험을 최대치까지 끌어올리고자 한다. 요컨대 내셔널 갤러리에서 작품과 감상자의 만남, 그로부터 피어오르는 감상자의 미적 체험은 세심한 지점까지 손을 뻗지 않는 데가 없는 다양한 구성원들의 분업과 협업을 통해 가능해진다. 갤러리에 가서 작품을 만나 느끼고 생각한다는 매우 간단하고 일상적인 행위를 가능하게 하는 환경은 이처럼 고도의 전문성과 취향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우리는 와이즈먼의 작품을 보면서 미적 체험을 가능하게 하는 작업을 관찰하는 것 자체가 매우 정교한 시계처럼 그 자체로 하나의 미적 체험이 될 수 있음을 깨닫는다.

영국의 지적 산물에 어느 정도 익숙한 시청자라면 이 영화에서 내셔널 갤러리가 어떤 영국적인 정신을 현실에서 구현하는 대상으로 묘사되고 있음을 알아차릴 수 있다. 높은 수준의 숙련도, 매우 섬세하게 가다듬어진 미적인 취향을 갖춘 자율적인 엘리트들의 연합이 공공선의 실현을 위해 개인적 역량을 최고도로 발휘하는 장소가 바로 내셔널 갤러리다. 이러한 숙련이 카메라가 직접 보여주듯 그 자체가 오랜 세월 동안 축적되어온 경험과 관습의 결정체라면, 이는 동시에 내셔널 갤러리라는 미적 공간을 구성하는 실천이라는 점에서 그 자체로 미적인 성격을 띤다. 요컨대 <내셔널 갤러리>는 유구한 관습에 기초한 엘리트들의 탁월함이라는 영국적 전통이 공공의 예술적 체험의 가능성을 확장하는 작업에 복무하는 광경을 담은 한 편의 그림이다. 우리는 이것이 명백히 영국적인 이상 혹은 이데올로기를 미적인 것으로 만들어내는 작업임을 알아차릴 수 있다.

물론 이상은 현실에서 언제나 아름답게 작동하지는 않는다. 이는 사실상 charter를 보유한 사람들 사이의 네트워크에 의한 통치모델로 번역될 수 있는데(나는 3주 정도의 짧은 영국체류기간 동안에도 그것을 어느 정도는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각자의 역량과 선의에 부여되는 자율권은 종종 악용되거나 비효율적인 결과를 초래하기도 하며, 무엇보다도 charter를 갖지 못한 사람(혹은 그러한 사람과 깊은 인간적 관계를 맺지 않은 사람)들은 애초에 의사결정의 장으로 진입할 수 없다. 아마도 <내셔널 갤러리>에서 흥미로운 지점 중 하나는 갤러리를 보러 온 관객들이 철저히 피사체--그림을 보고 경탄하거나, 추운 날 이른 시간부터 전시장 입구에 줄을 서고 있거나, 그린피스의 운동구호가 적힌 현수막을 갤러리 기둥에 걸거나 등등--로 대우받으며, 그러한 대화가 반드시 필요한 드로잉 교육 정도를 제외하고는 '내셔널 갤러리 사람들'과 관객들 사이에 어떠한 유의미한 가교도 그려지지 않는다는 점이다(나의 지적이 의아하다면, 예를 들어 조금 더 '미국적인' 시각에 입각한 텍스트라면 거의 일부러라고 봐도 될 정도로 '민주적 참여'가 수행되는 장면을 삽입했을 것이라는 점을 떠올려보라). 대체로 '구성원'들의 삶에 초점을 맞추는 <내셔널 갤러리>에서 엘리트 구성원들과 관객들 사이의 관계가 어떻게 그려지는지는 한번쯤 의문을 던져볼 만한 주제다.

이 모든 코멘트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를 보며 감탄하던 중 고개를 돌려 자국의 현실을 직면하는 한국인 시청자들은 씁쓸함을 감출 수 없을 것이다. "이미 중요한 책들이 다 번역이 되지 않았느냐"는 반문과 함께 기획재정부의 관료가 고전 번역지원사업의 예산을 잘라내는 광경(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680702.html), 경희대 혜정박물관의 참담한 유물보관실태(http://www.smaeil.com/news/articleView.html?idxno=207054), 남는 자리가 없다고 고서를 폐기처분하는 '명문대' 도서관, 단지 '책으로 가득한 공간 안에서 공부에 몰두하는 학생들'의 그림을 만들기 위해 수천 권의 책을 연구자들조차도 대출할 수 없도록 진열대의 전시품 꼴로 만들어놓는 어떤 도서관과 같은 사례가 한국에서는 여전히 일상적인 풍경으로 남아있다. 지적인 것과 미적인 것을 어떻게 합당하게 다루어야 하는지에 대해 깊은 이해를 갖추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그러한 교양과 역량을 갖추었다고 믿는 이들이 의사결정권을 독점하고 있다는 인식은 전문가로 훈련받은 이들에게 낯설지 않다(이는 기업도 별다르지 않는데, 엔지니어들이 전문성과 자율성을 축적할 수 있는 환경과 아주 멀리 떨어진 사례를 특징적으로 묘사하는 글로 다음 링크를 보라: http://neuromancer.kr/t/topic/306). 이제 전문성을 조금씩 축적할 수 있는 토양이 만들어졌음에도 그것을 어떻게 배치하고 육성할지에 대한 결정이 여전히 전문성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에 의해 수행됨을 아는 한국인이라면--그런 점에서 2010년대까지의 한국은 사실상 근대적 이상에 값하는 엘리트집단이 존재하지 않았던 곳이다--<내셔널 갤러리>의 아름다움과 우리의 현실 사이의 거리를 가늠하면서 아득함을 느끼게 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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