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30-31일
Comment 2014. 6. 1. 05:095월 30일. 스피노자의 <신학정치론/정치학 논고>를 읽고.
하루 종일 책을 읽었더니 머리가 좀 띵 하긴 하다. 근본적으로는 수면패턴이 꼬인 게 제일 문제다. 분명 새벽 5시쯤에 잠들었는데 아침 9시/10시에 눈이 떠지거나 하는 기괴한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여름이 와서 그런가... 어쩔 수 없이 오후와 저녁 때 조금 더 자는데 그럼 또 새벽까지 간다. 내일은 아침에 세미나가 있어서 어쩔 수 없이 일찍 일어나야 하는데;;; 일단 오늘 꾸역꾸역 스피노자(<신학정치론/정치학논고> 국역본)를 읽고 아감벤(<호모 사케르>)을 읽기 시작했다. 처음 읽는 스피노자는 어차피 <신학정치론>은 성경해석 이야기가 절반 이상이라서 쾌적하게 눈으로 훑으며 보았다. 홉스랑 매우 비슷한 결론을 내면서도 미묘하게 뉘앙스를 뒤트는 부분들이 있는데, 특히 종교, 해석, 판단 같은 부분의 (개인의 이성에 의거한) 자유를 말하는 대목들이 중요하다 + '대중'과 이성의 관계도 흥미롭다; 개인적으로는 아주 짧게 '노동분업'을 이야기하는 대목이 특히 기억이 난다(스피노자 이전에 분업을 이야기한 사람이 있으려나?); 홉스나 로크에게 있어 주로 유럽의 바깥이 아메리카라면, 스피노자에겐 일본이 등장한다는 것도. 카를 슈미트가 지적한 것처럼, 홉스의 텍스트에 부분적으로 나타나는 내면의 양심과 외적인 행위의 분할을 스피노자는 확대시키면서 뒤집는다. 곧 홉스가 "네 양심이 뭐라고 하든 외적인 행위는 주권자에 복종할 것"을 강조한다면, 스피노자는 "외적인 행위만 주권자에게 따른다면 개인의 신앙, 교리해석, 이성, 판단 등은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다"는 데 강조점을 둔다(정확히 개인의 이성과 판단은 스피노자에게 있어 애초에 제약불가능한 자연권이기도 하다). 이게 무슨 차이가 있는지 아리송할텐데, 스피노자는 개인의 이성 및 판단의 자유로부터 "사상과 언론의 자유"라는 사실상의 준-공적인 영역의 창출로까지 나아간다는 게 굉장히 중요하다(나는 칸트의 <속설에 관하여>가 당연히 떠올랐다). 홉스에게 있어 폭력을 독점하는 국가이성이 한 손에 법을 틀어쥐고 다른 손에 종교=대중적 이데올로기를 조작하는 형상으로 나타난다면, 스피노자는 그러한 형상을 그대로 수용하면서도 주권자가 침투할 수 없는 "개인의 내면"으로부터 새로운 영역을 이끌어낸다. 이는 사실상 군주정을 지지하는 홉스와 달리 민주정을 "자연상태에 가장 근접한 정부형태"로서 암묵적으로 옹호하는 스피노자에게서 꽤나 큰 차이로 나타난다. "...구성원 다수가 지지하는 제안이 법령의 힘을 갖게 된다는 것에는 동의하지만, 이와 동시에, 더 나은 대안을 알게 되는 경우에는 법을 폐지할 수 있는 권위를 보유한다"(<신학정치론> 20장, 380). 홉스의 체제에서 국가이성은 법을 독점하며 오로지 국가이성의 판단에 따라 법을 조정하는 주체였다면, 스피노자에게서는 개인의 자유로운 이성에 기초한 사상과 여론에 따라 법이라는 공적인 영역이 변모할 가능성이 제시된다. 근본적으로 자유와 이성은 개인의 행복을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공적인 여론 영역의 출현을 이론화하기 위한 도구이기도 하다.
기본적으로 워낙 재미있는 내용이 많은 텍스트라 이렇게 짧게 코멘트할 수는 없다. 성서해석과 자연철학의 방법론을 연결시킨다는 것부터 시작해 홉스와 비교할 때 '이성'이 매우 다른 역할을 하기 시작한다는 것(예컨대 비합리적 욕망과 이성의 대립구도는 이성과 정념이 상충되지 않는 홉스의 체계와 완전히 다르다), 마키아벨리의 그림자가, 특히 덕성virtue의 개념이--이성/지성과 맞물려서--중요하게 등장한다는 것 등등. <정치학 논고>를 보면 자연권을 개개인의 역량, 힘, 능력, 덕성과 같은 요소에 비례하는 것으로 간주한다(그래서 만민이 근본적으로 나약하다는 점에서 평등하다고 서술하는 홉스에 비해 스피노자는 꽤나 단호하게 이성적 판단능력을 갖춘 사람들과 그것을 결여한 대중을 나눈다). 어쨌든 한번 정도 체계적으로 정리해서 나쁠 건 없겠다. 나중에 <윤리학>(에티카)도 보고 스티븐 내들러 정도만 추가로 보면 나름 기본적인 정리는 될 것 같다.
5월 31일. 아감벤, <호모 사케르> <예외상태> 읽고
<예외상태>까지는 흥미롭게 읽었다. 아마 제일 중요하고 흥미로운 내용은 벤야민과 슈미트의 논쟁을 재구성하는 것인데, 의아하게도 슈미트가 벤야민에 대한 자신의 응답이라고 설명한 <토마스 홉스의 <리바이어던>에서의 국가이론>에 대한 소개 자체는 없다(인디에서 영어판으로 읽었고 한번 내용정리를 해야한다고 생각하는 텍스트인데, 슈미트가 자신의 입장을 아주 명확하게 드러내지는 않지만 암암리에 생각해볼 것이 매우 많은 텍스트다...). 독자가 알아서 재구성하라는 건가? 수년 전 슈미트를 들쭉날쭉한 국역본으로 몰아 읽어서 사실 개별 텍스트에서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는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대략의 큰 이야기만 기억하고 있다. 여튼 <호모 사케르>가 생명관리정치랑 아렌트의 국민국가/난민에 대한 이야기를 엮으면서 나아갔다면, <예외상태>는 거의 슈미트에 대한 독해이자 주석서라고 봐도 좋을 정도다. 다만 나는 여기에 푸코의 통치성 연구와 '경제적인 것'에 대한 참조가 빠져있는 점을 조금 의식하며 읽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아감벤은 그래도 국역된 책들을 (소책자 포함해서) 4권 정도 읽었는데 군데군데 흥미로운 이야기들은 많았지만 푸코나 아도르노처럼 분명히 정리가 되지는 않는다. (유쌤도 지적하셨듯) 문학텍스트를 자의적으로 해석하는 거야 뭐 철학자가 자기 끌리는 대로 쓴다는 데 특별히 문제삼고 싶지는 않고, 대신 논리의 전개가 순간적으로 점프하는 것같은 느낌이 때때로 든다. 그리스까지 거슬러 올라가서 고전을 활용하는 거라든가 새로운 방법에 대한 자의식(특히 <사물의 표시>는 짧은 분량과 낮은 지명도에 비해 매우 주의하며 읽어야 할 책이다)을 보면 분명 대가에 가까운 사람이라는 인상은 드는데, 아직 자신의 체계가 완성되었다는 느낌은 없다. 체계를 쓴다기보다는 에세이를 축적하면서 나아가는 기분(글쓰기 방법으로서 에세이를 재발굴하려 했던 아도르노조차도 후기로 가면 꽤나 다른 형태로, 적어도 사유에 있어서는 체계적이 된다는 느낌이 있다)? 어쨌든 <호모 사케르>의 시의적절함은 실로 충격적일 정도라서, 논리를 따라가지 않고 내용을 보고 싶어하는 사람들에게도 흥미로울 것이다. <예외상태>는 논의를 국한시켜 좀 더 깊게 밀고나가려고 하는데, 물론 이런 저런 생각을 많이 하게 해주지만, 나는 적어도 이 저술까지 아감벤이 더 파고든다기보다는 자신의 논의를 변주하고만 있는 것 같은, 그러니까 같은 층위에서 맴돌고 있는 게 아닌가하는 의심으 조금 든다(그리고 그가 해답이나 출구처럼 제시하는 것은 20년쯤 전이었다면 신선했겠지만 지금으로서는 그다지 신선해보이지 않는 형이상학이다...이는 우리 동시대의 이론가들에게 대체로 공통적인 면모인지도 모른다). <세속화 예찬>을 읽으면 조금 답이 보이려나?
고승덕 딸의 글을 봤다. 애초에 고승덕이 장인 돈이랑 권세 보고 결혼했다 그 장인이랑 틀어져서 이혼했다는 식의 설명이야 흔하니까...(그의 글에서 언급되는 "외할아버지"가 바로 포스코의 박태준이다. 이 사람도 해먹은 게 만만치 않을텐데--실제로 유죄판결도 받았고--, 법조인의 길을 걷는 외손녀가 자신의 외조부를 어떻게 평가할지 조금 궁금하긴 하다...자신의 인생에서 화가 어머니의 노력 뿐만아니라 외조부의 재력이 절대로 빠질 수 없을텐데, 언젠가 '객관적으로' 코멘트할 수 있을까?) 고승덕이야 원래 교육문제에 딱히 진지하게 관심있는 사람도 아니었는데 이혼할/한 가족에 특별히 관심이 있으면 오히려 놀랍지 않았을까. 인생의 정점이 대학입학이거나 고시합격인 경우는 한국사회에서 의외로 제법 흔할 거고, 고승덕이 어쩌면 그 대표사례라고 할 수 있는데 부디 내가 아는 사람들은 그보다는 나은 삶을 살 수 있었으면 좋겠다.
5월 31일 2
얼마 전 지인과 한국사회의 "중립병"을 이야기하다가 이게 다 최인훈의 <광장> 탓이다라는 이야기가 나왔는데, 오늘 문득 생각해보니 <광장>의 교훈은 중립을 선택하면 죽는다는 거다...역시 이야기는 결말까지 읽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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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저런 일로 최인훈의 중단편 <총독의 소리>를 읽고 있다. 기본적으로 서술자의 이야기가 너무 짜증난다. 아시아의 태양이 어쩌구 하는 멍청한 시에 달린 한문들을 뒤지면서 읽어야 하는 것부터 무척이나 성가신 일이었지만, 귀축미영의 문학이니 정신이니 하는 대목에서는 공부도 하다만 되먹잖은 이야기가 줄줄 나와서-_-;; 설마 최인훈이 여기서 '총독부 방송'의 목소리를 빌어 글로 옮기는 내용을 진지하게 동의하면서 썼으리라고는 생각지 않는다만, 조금만 윗세대로 가면 되다 만 먹물 중에 서양의 정신이 어떻고 사상이 어떻고 이런 소리를 태연하게 늘어놓는 인간들을 종종 보게 된다. 바로 그 정신과 사상의 역사를 공부하는 입장에서는 지적 게으름의 소산으로밖에 보이지 않는, 그 시절에나 먹히던 이야기들이 버젓이 통용되는 게 싫어서 직접 고전들을 읽기 시작한 것도 조금은 사실인데 바로 그따위 이야기들을 억지로 읽고 있자니 갑자기 짜증이 푹푹 치밀어올랐다-_-;;; (현실에서는 그냥 그런 이야기하는 아저씨/아주머니들은 한 귀로 듣고 흘린다... 진지하게 학적인 예를 갖춰 대접한다면 틀린 이야기--해석이 "다른" 게 아니라 기초적인 사실이 "틀린" 거다--는 고쳐주는 게 맞고 이상한 편견은 정중하게 질의하는 게 맞겠지만 얘기해서 제대로 들을 사람이라고 생각되는 경우는 드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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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쌤도 종종 쓰시고 영문과 수업에서 드문드문 사용되는 표현 중 하나가 "(독서) 실감"이다(다른 문학 전공자들에겐 어떤지 모르겠다). 대략의 뜻은 본인이 실제로 읽었을 때의 느낌/인상/판단 정도로 풀 수 있다. 이 개념은 보통 큰 해석틀이나 유명한 연구, 통념을 비판하기 위해 전술적으로 활용된다. 통념은 A라고는 하지만 나는 실제로 읽어보니 B더라...식으로 사용자를 약간 '큰 개념으로 덮어버릴 수 없는 미약한 진실의 일면에 호소하는 사람'으로 위치시키기 때문에 문학수업 특유의 약자를 옹호하는 감성(?)과 맞물려 때로 유용하게(?!) 쓰이곤 한다. 나는 솔직히 이 '장치'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근대의 인간학을 조금이라도 공부해본 사람이라면, 이러한 도구가 명확히 공리주의-실증주의적 관점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기본적으로 주관적일 수밖에 없는 자신의 감상이 별도의 반성과정 없이 근거가 될 수 있다는 논리 자체가 경험주의적 전통 하에서도 주관적 감각 자체를 무반성적으로 승인하는 벤담 이후의 사유를 그대로 투영한 것에 불과하지 않은가? 이는 오늘날에 극단적으로 드러나는 (최근에 극우파들의 활용에서 문제가 두드러지는) "취향입니다 존중해주시죠"라든가, 시장에서 무조건 선택=소비되는 것이 그 자체로 선이라는 비판적 시선의 형해화와 무관하지 않다. 정말로 비판적인 입장을 고수하는 사람이라면 자신의 감각와 판정을 있는 그대로 긍정하는 대신 그것 자체에 비판을 가함으로써 끌어낼 수 있는 결론이 무엇인지를 고민하는 게 맞지 않을까? 실제로 "실감"이라는 개념을 진지하게 수용할 때 발생하는 최대 난점은, 누군가 텍스트를 읽고 전혀 맥락에 맞지 않는 독해를 억지로 끌어낸 뒤 자신의 "독서실감"이라고 주장하는 순간 그러한 독해에 어떠한 이의제기를 할 수 없게 되어버린다는 데서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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