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 보편성, 예술. 아도르노의 <미학강의1>

Comment 2014.06.06 15:15

"오늘날 예술적 형식에서 나타나는 어두운 것, 충격적인 것, 낯선 것, 여러 측면에서 반감을 일으키는 것은 재앙이 우리를 항구적으로 위협하는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우리 모두 이러한 위협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예술의 형식을 통해 현존재를 단순히 빛나게 표현하는 예술은, 즉 가장 조화적인 예술은 그러한 위협에 직면하여 처음부터 무력함의 모멘트나 아무것도 아닌 것의 모멘트만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현실을 있는 그대로 정말로 보여주려고 하는 예술은 이러한 모멘트에 저항하면서 가장 격렬하게 분노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92)


"모든 불협화음은 고통이 예술작품에 들어와 있는 것을 보여주는 부분입니다. 이처럼 고통이 들어와 있는 부분에는 자연지배가 들어 있습니다. 자연지배에는 모든 것을 지배하는 사회가 자연을 내맡겨버린 것도 들어 있습니다. 오로지 이러한 고통의 형체에서, 오로지 동경의 형상에서만 고통이 들어와 있는 모습이 보이는 것입니다. 이렇기 때문에, 불협화음에는 부정성, 고통이 표현된 모멘트들뿐만 아니라 동시에 자연에 자연의 목소리를 부여하는 행복, 포착되지 않은 어떤 것을 발견하는 행복, 아직 길들여지지 않고 이제 막 내린 흰 눈처럼 새로운 것이--항상 동일하게 작동되면서 우리 모두를 포로처럼 잡아 놓고 있는--시민사회와는 다른 것이 있을 수 있다는 점을 상기시켜 주는 행복이 붙어 있는 것입니다." (93)


테오도르 W. 아도르노. <미학강의 I>. 문병호 역. 세창출판사, 2014. 4강.


-- 예술과 보편성, 고통의 문제를 사유해보자. 단순히 즐겁고 아름다운 것, 심지어는 약자의 전유물처럼 여겨지는 단순한 부정의 태도조차도 진실로 보편적이지 않다(여기서 나는 예술작품에 보편성을, 적어도 보편을 지향하는 태도를 항구적인 당위로 요구하고 있다...보편의 정의를 아주 꼼꼼하게 규명하지 않더라도 말이다). 가장 끔찍한 상태에, 철저하게 무력하게 고통을 겪을 수밖에 없는 상태에 처해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단순히 즐겁고 아름다운 대상에 몰입할 수 있는 태도나 고통스러운 것을 단순하게 부정할 수 있는 태도가 어떤 면에서 그러한 행위/태도가 가능한 '여유있는' 조건 하에서만 가능하다는 사실을 즉각적으로 깨달을 것이다. 그리고 자기 자신의 삶이, 자기 자신의 영혼에 강제적으로 새겨진 흉터들이 자신을 그러한 '여유있는' 삶에 어떠한 이질감 없이 녹아들고 기꺼이 당당한 주체로서 예술적 경험을 즐기는 삶을 절대로 허락하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고통의 경험이 언제나, 지긋지긋할 정도로 끔찍하게 영원히 자신을 놓아주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절대로 잊어버리지 못할 것이다. 아주 잠깐 그 사실을 망각했다고 믿을 때 그 경험은 곧바로 어둠 속에서 손을 뻗어 고통받은 이의 발목을 잡는다. 자신은 아무 일도 할 수 없는 순간, 오로지 고통받을 수밖에 없는 순간, 너무나 약해서, 두려움에 붙잡혀서 "싫어"라는 말조차 할 수 없는 순간, 고통을 망각하고 정신을 놓아버리는 축복조차 주어지지 않는 순간, 철저한 수동성 속에서 오로지 의식만이 뚜렷하게 그 모든 추악함과 자기경멸과 아픔과 두려움과 분노와 계속되는 고통 앞에서 그 분노조차도 사라졌을 때의 체념과 체념한 자신에 대한 경멸과 단지 이 모든 것이 일찍 끝나기를 바라는 갈망과 그것을 위해서는 상대의 발바닥이라도 기꺼이 핥겠다는 굴종과 결국에는 그러한 굴종과 애원조차도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리라는 깨달음과 이윽고 이어지는 침묵과 단지 멍하게 아파하면서 사태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고 아무 생각없이 오로지 고통과 끔찍함만 남는 때...그리고 그 모든 경험의 총체로서 고통이 자신의 몸과 영혼에 새겨지는 장면을 일일이 목도하고 잊어버릴 수 없는 순간으로--그야말로 원초적인 상처로서--기억할 때, 먼 미래에 그 상처로부터 회복했다고 믿는 때에도 언제나-이미 그 경험에 본인이 붙들려 있을 수밖에 없음을 깨닫고 자신의 삶이 그와 같은 기억과 영원히 투쟁해야 하는 사실을 깨닫는 때, 이것이 고통의 경험이다. 그런 점에서 고통의 경험(이 표현은 불필요한 반복이 아닌가? 고통이 경험이 아닐 수 있는가?)을 절대로 다른 무엇에 환원될 수 없다는 점에서 단독적이며, 동시에 마찬가지로 환원될 수도 이해될 수도 없는 다른 이의 고통에 손을 뻗을 수 있다는 점에서, 그리고 그것으로부터 벗어나고 달아나고 뿌리치고 싶다는 강한 욕망을 느끼게 한다는 점에서 보편적일 수 있는 드문 사례로 불러도 틀리지 않다. 그러한 고통의 경험이 각인된 예술은 단순한 아름다움이, 단순한 부정이 스스로에 보편성의 위치를 참칭하는 순간 곧바로 너는 보편적이지 않다고, 너는 절대로 나를 담을 수 없다고 말할 것이다. 그것들이 한낱 장식품이나 쾌락의 원리로서, 보편성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 세상의 개별적인 존재들로 남아있고자 한다면, 고통의 예술은 너희들이 살고 있는 세상은 나와 같은 존재를 만들어가는 원리를 품고 있으며 그것을 직시하지 못하고 가려버린다는 점에서 너희들은 그 자체로 이데올로기적이라고 말할 것이다. 한결같은 부정성은 고통으로 인한 결과여야만 하지 절대로 그 자체가 하나의 원리일 수 없다. 그렇게 되는 순간 부정성은 교묘하게 위장된 긍정성으로 퇴화해버린다.


 내가 지속적으로 아도르노에게 이끌리는 까닭 중 하나는 그의 예술철학이 고통의 문제를 자신의 안에 진지하게 포함시키려 노력한 매우 드문 사례에 속하기 때문이다(심지어 동료들조차도 나를 예술의 예술됨에 무관심한 인간으로 오인할 때가 있는데, 나는 전혀 그렇지 않다--단지 조금 다른 것들에 기초한 질문들을 통해 예술됨을 구성하려는 것 뿐이다). 몇 가지의 핵심적인 모티프들을 지속적으로 변주하면서, 혹은 변증법적으로 작동시키면서 하나의 불완전해보이지만 동시에 자신의 뚜렷한 색채를 가지는 독특한 체계를 형성해가는 그의 예술이론을 함축시키기는 어렵다. 그러나 나는 가장 근본적인 수준에서 그와 그의 이론을 이해하기 위한 모티프들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중 하나가 바로 고통의 문제다. 그에게 있어 예술은, 혹은 진정한 예술은 세계의 비참함과 고통이 어떤 형태로든 (심지어 형식적인 수준에서도) 각인되어 있다. 그리고 예술의 정신은 단순히 비참함이 드러날 뿐만 아니라 그 비참함으로 인하여, 혹은 비참함을 넘어서고자 더 나은 세계를 갈구한다. 예술의 정신은 고통과 희망을 동시에 품으며 예술작품은 그것들의 관계 자체를 현시한다. 맞닥트린 문제와 문제를 넘어서기 위한 기법과 형식의 수준에서의 노력, 그리고 그 노력조차 다시 맞닥트려야 할--혹은 노력이 결과적으로 초래하는--비참함과 옥죄임, 이것이 정확히 <신음악의 철학>에서 쇤베르크를 이해하는 방식이다. 그가 반복적으로 강조하는 불협화음, 단순히 불쾌할 뿐만 아니라 심층의 수준에서, 그러니까 형식의 수준에서도 조화로울 수 없는 계기들과 불협화음을 초래한 계기들을, 세계의 문제를 끊임업이 넘어서고자 하는 의지의 변증법적인 작동이 예술을 구성한다. 아도르노를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항상 두 가지 양립할 수 없어보이는 모티프들이 뒤얽힐 수 있고 그것을 담아내는 공간으로서의 (그는 절대로 이 단어를 사용하지 않았겠지만) '총체적인' 세계를 지향하는 예술작품을 떠올릴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벤야민이 <역사의 개념에 관하여>의 마지막 항목에서 강조한 것처럼, 세계가 언제나 비참함으로 뒤덮여 있다는 것, 그러한 고통이 항존하고 망각될 수 없다는 사실을 진정한 예술은 외면할 수 없다는 이념을 잊지 말아야 한다. 아도르노는 맑스와 베버, 프로이트의 세계에서 칸트와 헤겔의 언어로 하이데거 및 실증주의자들과 투쟁한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을 몰라도 약간의 예술적인 경험과 조금 천천히 읽는 성실함만으로도 충분히 그를 이해할 수 있다. 단지 망각될 수 없는 고통의 존재만을 잊지 않으면 된다.


 엄청나게 비싸고 책은 흉하게 나왔지만 어쨌거나 드디어 한국어로 아도르노의 미학을 제대로 접할 수 있는 책이 나왔다. 예전에 나왔던 <미학 이론> 번역들은 솔직히 너무 질이 낮다...그걸로도 대략은 이해할 수 있지만 부분을 음미하는 세심한 이해는 기대하기 힘들다. 아도르노가 파편들에 부과한 엄청난 중요성을 떠올린다면 이는 안타까운 일이다. 지금 불과 책 전체의 1/6 정도를 읽었을 뿐이지만 이 책이 매우 중요한 인식의 전환을 가져올 수 있으리라고 확신한다. 대략 반 세기 전에 나온 강의지만, 전혀 현재성을 잃지 않았으며 아직 우리의 시대는 그의 시대를 통과하지 못했음을, 아도르노를 넘어서기 위해서 우리는 보다 "계몽되어야" 한다는 사실만을 말해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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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얼음꽃금붕어 2014.06.07 01:21 신고 Modify/Delete Reply

    정말 부지런히 읽고 쓰는군요. 덕분에 많이 배워요! ㅎㅎ

    • BeGray 2014.06.09 23:58 신고 Modify/Delete

      더 많이 읽고 생각하고 써야 하는데 능력이 모자라서... 뭔가 조금이라도 드리는 게 있으면 제가 더 감사할 일입니다 ^^

  2. 성경 2018.07.01 22:09 Modify/Delete Reply

    4년 전에 선물해 주신 (기억하실런지요?!) 미니마 모랄리아를 묵혀두다가 학기 중에 짬나는대로 1/5정도 읽었습니다. 여기 쓰신 고통의 모티프에 대한 내용도 와닿고, 또 궁벽하면서도 번지르르한 세계를 마주한다는 비극적 마인드를 가지고도 쉽게 부조리의 긍정으로 빠지지 않은 꼬장꼬장함과 조우하는 게 제게는 나름대로 치유의 경험이 되었습니다. ㅋㅋ 그리고 오늘은 기말이 끝난 후 테라피로 저번에 사두었던 미학강의를 드디어 펼쳐 2강까지 읽었습니다. 형이 아도르노에게서 받으신다는 감동이 어떠한 성격의 것인지 조금은 알게 된 것 같아요.

    희망하건대 계속 읽겠지만, 국역본에 대해 한 마디 하자면 전체적으로는 무리 없이 읽히지만 군데군데 영문판의 도움 없이는 전혀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있는 게 아쉬웠어요. 예를 들자면, "나는 그러나 사람들이 '섬세한 감정'이라고 표시하는 영역, 미적 향유자의 영역, 이른바 '감정이입적인' 영역, 중국의 침들을 모아 소름끼칠 정도로 기꺼이 실내악을, 그 실내악이 진지하지 않다는 것에서 끝나지 않음에도, 만드는 사람이 갖고 있는 영역에 대해서는 가장 강력하게 경고를 보내고자 합니다" (39-40) 라는 문장은 ('중국의 침들을 모은다'는 프레이징이 의도치 않게 주는 초현실적인 느낌은 둘째 치더라도) 아예 비문으로 보입니다. 독문판이 제게 없어 대조는 못해보겠지만, 영문판의 번역은 훨씬 더 잘 읽히는 것 같습니다: "“But I would warn you with the utmost urgency of what can be termed the sphere of ‘refinement’, the sphere of the aesthetic aficionado, the sphere of the so-called sensitive man who collects Chinese engravings and is terribly fond of chamber music as long as it is not too serious.”

    그나저나 제가 방금 인용한 부분과 같은 신랄함이 2강까지 읽는 중에도 이미 많이 보였는데, 이것도 아도르노의 특징 중 하나인지 궁금하네요. ㅋㅋ 의도한 바인지는 모르겠지만 저는 덕분에 더 재밌게 읽게된 것 같습니다.

    • BeGray 2018.07.05 02:37 신고 Modify/Delete

      댓글을 지금 읽었네요. 아도르노에 대해서는 그를 마지막으로 읽은지 제법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여전히 종종 떠올리곤 합니다. 오늘날 벤야민 애독자들에 비해 너무 쪼그라든 아도르노 애독자들의 진영에--물론 둘 다 선택할 수도 있습니다만--성경 씨를 합류시킬 수 있다면 물론 기쁜 일이겠지요. 모쪼록 끝까지 읽고 다른 저작들에도 관심을 가지면 좋겠습니다.

      말씀하신 부분은 <미학 강의> 번역이지요? 네, 저도 영역본이 더 잘 읽힐 거라고 생각 합니다(...) 한국어판은 다른 텍스트의 경우에도 종종 편집이 아쉬운 부분이 적잖이 있더군요.

      아도르노는 평생 공격대상에게 신랄했던 것 같습니다 ㅋ 교수 되자마자 나치 때문에 쫓겨나서 영국 갔더니 학위 인정 안해주고 대학원생으로 받아주겠다고 하고, 겨우겨우 미국에 갔더니 또 좌파라고 FBI한테 감시당하다가 간신히 취직한 곳이 경험적-양적 연구하는 사회과학 연구실이라 또 고통받고(거기에 영어도 좋아하지 않았고), 그 다음 이를 악물고 전후 독일로 돌아와 하이데거와 슈미트의 제자들을 몰아내고자 한 인생인데 신랄하지 않으면 이상합니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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