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버마스 스캔들>: 오타와 관전지점에 관하여
Comment 2022. 11. 18. 00:231. <하버마스 스캔들> 초판 1쇄 뒷표지 추천사에 나온 "이'수'창"은 제 이름이 잘못 출력된 게 맞습니다^^;; 인쇄 직후에야 오타를 찾았다고 출판사 대표님께 사죄전화(...)를 받았고요, 이후에도 저자(사실 저자 책임이 아니지만...)와 출판사로부터 거듭 사과를 받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이름이 대놓고 잘못 인쇄되어 나간 게 묘하게 희귀한 상황이라 재미있는 이야깃거리 정도로 생각합니다. 유일하게 아쉬운 점이라면 1쇄 부수가 제법 있어서 충분히 희귀한 판본이 될 수 없다는 것 정도입니다 :)
잊을만 하면 관련 문의(?)가 직간접적으로 들어와 아예 공개적으로 밝혀둡니다 ㅎㅎㅎ
2. 여기서부터는 조금 더 진지한 이야기.
<하버마스 스캔들> 관련 개인적인 관전 포인트가 하나 더 있다면, 이 책을 둘러싼 반응이 과거 '김경만 논쟁'을 어떻게 반복하(지 않)느냐에 있다. 사회이론 전공자라면 잘 기억하시겠지만, 7년 전 저자의 지도교수 김경만 선생의 <글로벌 지식장과 상징폭력: 한국 사회과학에 대한 비판적 성찰> (문학동네, 2015)이 한국 사회과학계 원로들의 이론적 작업에 대해 신랄한 비판을 가하면서 사회학 안팎에서 가열찬 논쟁이 벌어진 바 있다.
당시 논쟁을 기대감을 갖고 지켜보았던 스스로의 기억에 기댄다면, 일간지의 비학술적인 지면에까지 소개될만큼 논란거리가 되었던 데 비해, 정작 해당 논쟁에서 공수 쌍방이 보여준 모습은 그다지 생산적이지 못했다. 고작 인신공격에 머무르거나, 각자의 입장을 되풀이하는 데 그치는 상황을 보면서 지적인 실망감을 느낀 이는 나 혼자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돌이켜보면, 김경만이든 그 적들이든 논쟁을 유의미하게 전개하기 위해 필요한 가교를 놓지 못했다는 것이 그 한 가지 이유였던 듯 싶다. 김경만의 책은 냉정히 말해 한국 사회과학자들의 지적인 성취만을 문제삼을 뿐, 사회과학자들이 지적으로 또 제도적으로 어떠한 환경에서 무엇을 의도하고 행위하는지를 경험적으로 분석할 수 있는 시선을 제시하지 못했으며, 이는 그의 "비판적 성찰"에서 유의미한 '성찰'이 누락되는 결과를 낳았다. 반대로 비판자들은 김경만의 접근에서 이론적으로 무엇이 결여되어 있는지, 그리고 대안적인 해석을 제시하기 위해서 어떤 더 나은 접근이 가능한지를 명확하게 제시하지 못했다. 간단히 말해 2015년의 전쟁은 투쟁이 가능한 전장戰場이, 따라서 전투도 없는 가짜 전쟁이었던 것이다.
일견 김경만의 관점을 크게 반복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하버마스 스캔들>은 실제로 읽어보면 그와는 꽤 다르다. 저자가 한국 학계에 갖고 있는 애정과 비판은 훨씬 더 진지한 것이며--저자는 일종의 학문후속세대로서 자신이 한국 학술장의 일부분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는다--무엇보다 '왜 한국 인문사회학술장이 실패했는가'라는 물음은 구체적인 시공간과 인물들의 움직임에 기초하여 명백히 경험적인 설명의 시도로 이어진다. 독자들은 그러한 설명에 동의하지 않거나 누락된 사실관계를 지적할 수는 있지만, 저자의 해석이 아무런 근거도 없는 개인적인 주관의 소산이라 말할 수는 없다. 최초에 김경만이 제시했던 문제의식은 이제 훨씬 세련되고 단단한solid 형태의 시도로 다시금 한국의 인문사회학계에 돌아왔다. <글로벌 지식장과 상징폭력>에서 그려진 한국 인문사회학술장의 상은 '그저 인신공격에 불과하다'는 반론으로 흘려버릴 수 있는 것이었으나, <하버마스 스캔들>이 암시하는 그림은 정말로 우리 학술장의 작동방식을 설명하는 한 가지 모델이 될 수도 있을만한 구체성을 갖추었다.
이전에 말한 바와 같이, 나는 저자의 마음과 문제의식에 동감하면서도 그가 제시한 역사적 설명에는 여러 가지 면에서 반론을 제기하고 싶은 면이 있다. 하지만 <하버마스 스캔들>이 제시하는 논쟁에 정면으로 응답해야 하는 일차적인 책임은 사회이론과 사회철학, 비판이론 연구자들에게 있는 것이 사실이다. 결국 핵심은 이것이다. 한국에서 비판이론연구, 비판이론의 학술장은 어떤 궤적을 그려왔으며, 또 어떤 상황에 놓여있는가? 현재 비판적 사회이론이 처한 무력한 처지라는 사태를 부인할 수 없다면, 그러한 사태의 원인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오늘날 비판적 사회이론의 연구자들은 자기 자신의 운명을 설명하고 또 갱신할 수 있는가? 이러한 물음에 대한 답변이 나오지 않는다면, (누군가는 '제2차 김경만 논쟁'이라 부르고 싶을 수도 있겠지만) '이시윤 논쟁'은 시간이 흐르고 나면 사실상 공격자의 승리로 마무리될 가능성이 높다. 침묵하는 자들은 해석의 대상으로 전락하는 것이 해석투쟁의 운명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설령 <하버마스 스캔들>의 저자가 원하지 않는 전개라 할지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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