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인문학계의 시대착오에 관하여

Comment 2021. 10. 23. 02:39

2021년은 한국의 인문학/문화 관련 전공자에게 매우 복잡한 심경이 드는 한 해가 될 것 같다.

 

1.

 

2020년대 초반이 한국 문화의 역사에서 기념비적인 순간이라는 건 분명하다. 넷플릭스 드라마 <오징어게임>의 예상을 뛰어넘은 성공부터 한국 드라마컨텐츠산업의 폭발적인 성장, K-Pop의 위상, 아직 앞의 둘만큼은 아니지만 웹툰·웹소설 플랫폼의 해외확장을 포함해 (어느 커뮤니티 이용자가 게임 <문명>의 빌어 사용한 표현에 따르면) 한국의 "문화승리"라고 할 만한 현상들을 목도하고 있다. 뉴스와 지인들을 통해 접하는 소식을 보면, 서유럽을 포함한 해외 한국학과의 폭발적인 성장은--오히려 이쪽은 늘어나는 지원자 수를 커버할 수 있는 교원·연구자가 양과 질 모두에서 현저히 부족한 게 문제인 것 같다--가공할 만한 수준이다.

 

 

유감스럽게도 동시기 한국에서 인문학의 영역과 위상은 그 어느 때보다도 심각하게 위협받고 있는 중이다. 코로나로 격화된 취업난이 제일 큰 문제겠으나, 대학 강좌 수강생의 현격한 감소는 그 이상을 말해주고 있는 것 같다. 사회와 담론장에서의 위상도 딱히 더 나을 것은 없다. 여성주의 등에서 배출한 소수의 인사를 제외하면, 한국의 인문학계는 담론장에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공적 지식인'의 재생산에 계속해서 실패하고 있다. 수십 년 전부터 발언권을 행사해온 저명인사들이 딱히 지적으로 성장했다는 평가를 받지 않고 있음을 고려할 때, 비평가가 됐든 연구자가 됐든 새로운 공적 지식인을 배출하는 과정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고 있는 상황은 더욱 치명적이다.

 

한쪽에서는 심지어 국뽕회의론자들조차도 섣불리 반론을 제기하지 못할만큼 '문화승리'의 찬가가 울려퍼지는 반면, 다른 한쪽에서는 전통적으로 문화와 정신을 관장해온 것으로 알려진 학문분과의 위상이 바닥을 뚫고 지하실로 들어가는 중이다. 즉 문화적 소비나 정치적·도덕적 논쟁이 줄어든 게 아니라--한국의 20대는 타인의 도덕성 판단에 그 위의 어느 세대보다도 엄격한 기준을 적용하는 데 익숙하다--그냥 인문학만 망해가고 있는 것이다. 제기랄, 이 빌어먹을 미스매치는 도대체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2.

 

누군가는 창작-생산물 혹은 산업으로서의 문화와, 비평과 연구, 성찰의 대상으로서의 문화가 다르다는 반론을 제기할 수 있다. 기꺼이 동의한다. 하지만 그것이 곧 문화적 생산과정에 인문학의 기여가 중요하지 않음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주지하다시피 현재 한국 문화컨텐츠의 성장과정에서 많은 부분은 1990년대 이후 지속적으로 증가해 온 해외 문화의 수용에 힘입고 있다. 한국 대중음악산업, 특히 아이돌산업이 일본과 미국 대중음악시장을 적극적으로 모방·수용하면서 자신의 힘을 쌓아왔음을 모르는 사람은 없고, 해외 영상물의 필사적인 참고 없이 이른바 '웰메이드' 영화가 저절로 등장할 수 있었다고 주장하기는 매우 힘들다. (인)문학텍스트의 광범위한 번역출간을 포함해, "번역된 근대"는 20세기 초반에 사실이었던 것 이상으로 현대 한국에 해당되는 말이기도 하다.

 

동시에 오늘날 한국의 문화적 산물은 적어도 1980년대부터 내려온 독특한 '한국적' 맥락들이 살아남은 결과물이기도 하다. 포스트-민중주의적 도덕-정치관이나, "집단주의" 및 가족주의적 정서, 신파와 같이 한국인들에게는 너무나 뻔하고 지겨운 클리셰로 경원시되는 요소들이 '서구선진국을 향한 동경'의 열망이 폭발하는 흐름에서도 살아남아 역으로 한국의 (바람직한) 독특함을 규정하는 요소가 되고 있다는 것은 아이러니하지만 사실이다. 한국의 문화적 영향력이 설령 과장된 수준이라 할 지라도 전례없이 확대된 이 모든 과정을 단순히 기술적·경제적·산업적 발전으로 설명할 수 없음은 분명하다(문화가 GDP에 그대로 비례한다고 믿는 사람이 아직 있다면, 매년 꾸준히 나오고 있는 일본만화 원작 실사영화를 수십 편 정도 시청하면 약간의 고통을 대가로 큰 교훈을 얻을 것이다). 타국의 문화적 산물을 접하고, 선별하고, 수입·번역하는 과정에서든, 반대로 단순히 미국, (서/북)유럽, 일본의 마이너카피로 남는 대신 한국의 독특한 문제의식을 유지해온 과정에서든, 한국 인문학 종사자들이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주요한 문화적·지적 자원을 제공해왔다는 것은 부인하기 어렵다.

 

그럼 한국 대학의 인문학은 왜 이런 상황에 처하게 된 걸까? '세상이 각박해져서' '인문학은 늘 배고픈 학문이니까'[*] 같이 딱히 사실도 아니고 생산적이지도 않은 멍청한 본질주의적 설명 대신 좀 더 설득력 있는 답변 하나는 이런 것이다. 오늘날 한국의 인문학은 (어떤 의미에서든) 고도로 발전하고 또 복잡해진 한국의 지적·문화적 상황을 대면하고 그에 개입하는 능력을 상실했고, 또 그러한 능력을 학생들에게 교육하는 데도 실패하고 있다. 오해를 피하기 위해 말하자면 나는 동시대와 대화하는 능력만이 중요하다고 말하는 게 아니다(나 자신부터가 18세기 영국 연구자다). 나는 단지 어떤 학문이 스스로가 동시대인들에게 유의미한 지식·담론을 산출할 수 있음을 입증하지 못할 때, 그리고 동시대인들이 그러한 인정을 거두어들일 때 제도로서의 생존이 위태로워진다는 상식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 뿐이다.

 

[*대부분의 시대에 인문학은 통치엘리트 계층에서 전유되는 지식이었으며, '배고픈 인문학 전공자'의 범람은 대학졸업자의 수가 사회적 수요를 초과했던 근대의 몇몇 순간에 나타나는 역사적으로 특이한 현상이다. 우리는 자신이 속한 시공간의 우연적 상태를 보편적인 것으로 착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대졸자가 특정 세대의 다수를 차지하는 사회란 1990년대 이래의 대한민국을 포함하여 역사적으로 극히 드물게만 존재해왔다.]

 

 

3.

 

몇 가지 예시를 나열해보자. 앞서 강조했듯, 1990년대 이후 한국문화의 역사는, 사실 그 이전도 마찬가지지만, 일국의 문화적 배경만으로는 설명이 불가능하다. "혼종성"은 호미 바바님께서 내려주시는 계시의 말씀이 아니라 그냥 우리의 세계에서 일상적으로 벌어지고 있는 흔하디 흔한 현상을 규정하는 단어일 뿐이다(솔직히 나는 그게 진짜로 유용한 설명도구인지조차도 잘 모르겠다...무엇이 혼종적이라는 진술은 아무 것도 설명하지 않는다). 이는 우리의 문화적 (재)생산과 소비과정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좋든 싫든 여러 분과의 전공자가 협력해야만 한다는 걸 뜻한다. 지금까지 그런 협력을 촉진하는 시도는 여러 차례 있었지만, 우리가 "융복합"이란 말을 냉소적으로 받아들이는 현실을 고려할 때 그 결과가 늘 성공적이었던 듯 싶지는 않다.

 

돌이켜보면 2000년대 말은 확실히 여러 가지 의미에서 분기점이었다. 한미FTA논쟁 이후로 한국 사회의 정치경제담론, 사회논쟁은 심지어 대중적인 수준에서조차도 훨씬 복잡한 주제들과 맞닿게 되었고 담론의 주도권은 사회과학적 경험분석으로 넘어갔다--물론 선악논쟁으로 만사를 풀어내려는 시선은 사라지지 않았으나, 이건 어디든 거의 보편적인 조건이다. 2010년대 후반의 주택대란, 2020년 이후 주식투자열풍은 이전까지 상대적으로 적은 수의 사람들에게만 관심대상이 되었던 시장의 작동방식과 산업구조, 국가정책과 국제경쟁에 관한 각종 분석자료를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의 시야에 들어오도록 만들었다(90-00년대 학번 세대의 고학력은 이들이 주식투자에 필요한 각종 자료를 읽고 이해하고 생산하는 주체로 거듭나기 위해 넘어야 하는 진입장벽을 크게 낮춘 것 같다; 끝을 가늠하기 힘든 거대한 개미굴 같은 네이버 투자블로그 생태계를 볼 때, 한국사회의 '금융이해도'는 2010년대 후-2020년대 초를 분기점으로 가파르게 높아지고 있는 듯 보인다).

 

스마트폰의 혁신과 함께 이제 과학기술의 발전이 인간의 생활양식, 심지어 의사소통양식과 인식조건을 급격하게 뒤바꿀 수 있음은 분명해졌다. 광우병 논쟁부터 원자력발전과 신재생에너지, 미세먼지, 코로나방역을 둘러싼 이슈들의 연속은 과학기술이 정치적 논쟁에서 단지 주변적인 요소 이상의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음을 명백히 보여준다. 스마트폰의 보급이 초래한 중요한 변화는 또 있다. 2000년대 '네티즌 여론'은 찻잔 속의 태풍 정도로 조롱받았지만(트위터에서 녹색당의 대약진을 예상했던 순진한 힙스터들은 투표결과에서 '실재의 충격'을 맛보았다), 2010년대를 거치며 한국은 매체만 좀 다를 뿐 청소년부터 노년까지 아주 많은 사람들이 각자의 온라인커뮤니티·대형플랫폼·메신저에 수시로 접속하고 정보를 주고받는 사회가 되었다. 사람들은 특정 언론이나 지식인에 의존하는 대신 각자의 담론장 속에서 (종종 오류와 왜곡이 뒤섞인) 고유한 정치적 의제와 논쟁의 언어를 매우 손쉽게 또 풍부하게 접하고 만들어냈다.

 

2008년 광우병 논쟁에서 2016년 탄핵정국까지 근 10년 가까운 기간 동안 사람들은 '팩트'에 민감해졌다. 자신과 다른 견해를 가진 전문가 및 언론이 조금이라도 사실관계에 어긋나는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보일 때 의심과 비난을 던지는 게 일상화되었다. 논쟁적인 이슈는 수많은 "사이버렉카"들을 통해 급속도로 다양한 커뮤니티에 전파되지만, 이제 적지 않은 사람들은 명확한 근거가 제시되기 전까지는 "중립기어"를 박아놓는다. 물론 그러한 비판의식이 편향적으로 작동하는 것도 사실이다. 실시간 방송플랫폼의 대성장이 정치적 공론장에 끼치는 파급력을 보라. 사람들은 자신들이 무슨 문제를 겪고 무엇을 원하는지 알고 있는 유튜버가 커뮤니티와 플랫폼 한번 제대로 들여다본 적도 없는 사회비평가보다 훨씬 신뢰할 만하다고 생각한다. "언론 믿지마 일베를 믿어"는 일베 내에서조차 조롱거리가 되는 구호였지만, 이제 "우파코인" "PC코인"등을 겨냥한 "시사·정치 유튜버"는 설령 잘못된 분석과 왜곡된 자료를 늘어놓을지라도 높은 지지도와 모금액을 획득하며 주요한 스피커로 활약한다. 파편화된 공론장과 유사-팬클럽 비즈니스의 결합은 "언론 믿지마 BJ를 믿어"가 결코 농담이 아닌 세계를 만들어가고 있다.

 

 

4.

 

요약하자. 지난 10여년 간 한국의 담론장은 사회분석의 차원에서는 사회과학 및 법·금융분야를 중심으로 급속하게 전문화되었다. 과학기술은 일상의 변화부터 상대적으로 거대한 정치적 의사결정까지 거의 모든 층위에서 자신의 존재감을 높였다. 스마트폰과 플랫폼·메신저·커뮤니티 서비스를 기반으로 한, 정보가 매우 빠른 속도로 회전하는 복수 담론장의 출현은 언론-지식인의 위상을 급격히 변화시켰다. 이제 사람들은 자신들을 설득할 수 있을만큼의 논리와 근거가 갖춰지지 않는 한 전문가·비평가의 분석을 신뢰하지 않는다. 사람들의 발화기회가 폭증하면서, 그리고 누군가의 주장을 검토하고 비판하는 게 일상화되면서, 지식인·평론가들이 사람들이 무엇을 말하고 생각하는지 고려하지 않고 대충 자신의 견해를 유명한 저자의 말과 섞어 이야기하는 것만으로도 존경받던 좋았던 옛날은 끝났다. 사회에 말을 걸기 위해서는 사회가 무슨 말을 하는지 먼저 들어야 하는 시대가 된 것이다.

 

한국사회가 겪은 '사회적 삶'에서의 거대한 변화는 청년실업의 악화와 취업경쟁의 심화 같은 말로 요약될 수 없다. 우리가 정치적·문화적·규범적 영역에서 지식과 언어를 습득하고, 비판하고, 재생산하는 조건 자체가 현재 대학의 연구와 교육을 담당하는 1980-90년대 학번들이 성장한 세계와 너무나 달라진 것이다(2015년 이래의 페미니즘과 젠더전쟁은 분명 엄청난 충격을 주었지만 동시에 이러한 변화의 일부분이기도 하다). 나는 여기서 멈추어 묻고 싶다. 우리 인문학 연구자들 중 이러한 변화의 의미를 이해하고 연구대상과 교육적 소통에, 사회의 비판적 분석에 이를 반영하는 이는 몇이나 될까? 각자의 전문영역이 있는 연구는 그렇다치더라도, 이러한 바뀐 조건을 이해하면서 동시대에 말을 걸고, 동시대에 필요한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연구자·지식인은 몇이나 될까? 이것이 중요한 과제임을 인식하고, 변화한 사회를 분석하고 그와 대화할 수 있을 만큼의 전문성을 가진 연구자를 재생산할 수 있는 환경을 준비하고 있는 학과·분야는 얼마나 있는가?

 

답변이 무엇인지는 모두가 이미 알고 있다. 인문학 분야에서 '비판적' 의식을 지닌 연구자들 중 사회과학자들과 유의미하게 교류하고 사회문제를 다루기 위해 어떤 준비가 필요한지 이해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과학기술의 발전에 과도한 경계심을 갖거나, 아니면 반대로 얼리어답터로서 이것저것 상품을 소비해보는 사람은 제법 있지만 STS나 과학사는 여전히 많은 '주류' 인문학자들에게 낯선 땅으로 남아있다. 한국문화의 생산-소비과정에 깃든 다양한 국제적인 경로를 짐작하고 추적해볼 수 있는 학제간 연구팀의 필요성은 지나가는 대화주제로도 잘 언급되지 않는 것 같다. 커뮤니티와 플랫폼의 논쟁을 주기적으로 업데이트하고 분석대상으로 삼는 연구는 사회학·미디어 전공자들의 텃밭이 된지 오래다(문화와 논쟁이라는 전통적인 인문학적 주제조차도 사회과학자들의 손에 내맡겨둔 상황을 기분좋게 받아들일 수 있는 인문학 연구자라면 굳이 내 글을 읽을 필요는 없을 것 같다).

 

간단히 말해 오늘날 인문학 연구자들은 극소수를 제외하고 한국사회와 대화하고 거기에서 벌어지는 쟁점들을 소화할 능력을 갖고 있지 않다. 다시 말하지만 나는 모든 인문학 연구자들이 이러한 능력을 갖춰야 한다거나 이를 중심으로 학계가 재편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게 아니다. 내 말의 뜻은 인문학 연구자들 중 누군가는 이러한 능력을 갖춰야 하며, 이러한 능력을 익히는 단계가 다른 누구보다도 학생들의 교육을 위해서 인문학 전공의 커리큘럼에 포함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이는 인문학 전공자들이 전통적으로 자신들의 역할이라고 자부해오던 행위, 사회에 유의미한 논쟁을 제기하는 과제를 제대로 할 수 있기 위해서라도 필요하다. 인문학 전공자들이 새로운 역할을 하지 못하는 게 아니라, 과거 그들의 사회적 역할이라고 인정되었던 영역조차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는 게 위기인 것이다.

 

이는 어느 한두 학과가 아닌 우리 인문학계 차원의 해결의 시도를 요구한다. 인문학 분야의 자원배분 및 규칙제정에 참여할 수 있는 사람들은 그때그때 뉴스에서 언급하는 이공계 트렌드를 복붙해서 인문사회분야 과제공고로 내는 일 못지않게--결과물의 좋고 나쁨을 떠나 현실적인 필요성을 부인할 생각은 없다--학계의 환경을 어떻게 유의미한 지적 실천이 가능한 형태로 바꾸어나갈 것인지를 질문해야 한다. 예컨대 융복합은 펀딩을 타먹기 위한 광고 키워드로 소비되는 대신 실제로 중요한 문제에 대처하기 위해 필요한 학제간 연구팀을 지속적으로 지원할 수 있는 촉진제가 될 필요가 있다. 인문학이 다시금 진지하고 엄밀한 사회·문화분석의 도구가 될 때, 학생들은 인문학적 교육이 사회적인 삶을 살아가는 데 유의미한 기예임을 느낄 수 있다. 근본적으로 우리가 맞닥트린 질문은 이런 것이다--사회에 필요한 지식이란 무엇이고, 우리가 생산할 수 있는 지식은 무엇인가? 인문학 연구자들이 전통적인 주제를 다루는지, 아니면 일단 AI와 코딩을 붙이고 보는지 등은 여기에 답변할 수 있느냐의 여부에 비하면 사소한 것일 뿐이다.

 

 

P. S.

 

마지막으로 인문학계에 만연한 후진적인 의사소통문화에 관해 덧붙이자. 나를 비롯해 젊은 인문학 연구자들은 원로나 중진급 연구자들이 진지한 고민이 있고 인문학 분야의 정책적 개선을 위해 시간을 쪼개어가며 노력하고 있다는 사실을 분명 알고 있고 또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 문제는 그 과정이 공식적이고 광범위한 소통채널을 통해 이루어지는 게 아니라 알음알음 좁은 인맥을 통해 마치 종이컵 전화기로 듣는 것처럼 머얼리서 일방향적으로 중계된다는 것이다. 민주화나 민주주의란 단어는 지겹게 들리는데 정작 커다란 정책을 준비하고 결정할 때 세대, 성별, 학교, 지역, 학과의 격벽을 넘어 다양한 연구자의 의견을 수렴하는 과정 따위는 없다. 당황스러울 수 있지만 사실이다.

 

솔직히 말해 인문학계의 의사소통 문화는 오늘날 사기업이나 공무원조직의 기준에서 생각해봐도 폐급이란 말을 면하기 어렵다. 학과교육이야 교수들이 정한다고 쳐도, 학계 운영이 학부생들 단과대 학생회 수준만도 못한 건 좀 너무한 거 아닌가? 중진들의 조직문화가 몇 년대에 멈춰있는지는 모르겠으나, 벌써 40대를 바라보는 2000년대 학번들 때부터도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 구성원의 의사를 수렴하고 정책진행상황을 홍보하는 절차는 설령 요식이라 할지라도 당연한 이야기였다. 설마 몇몇 나이먹은 중진급끼리 모여서 정할 거 다 정하고 눈치보면서 "네, 네, 알겠습니다"란 답변만 하는 젊은 박사급·원생들을 연구원으로 붙이면 충분히 신선한 개혁안이 나온다고 믿고 있는 걸까? 학문후속세대의 미래가 걱정된다는 이야기는 매번 나오는데, 정작 그 학문후속세대들에 설문조사를 돌리고 다양한 성격의 구성원을 샘플링해서 인터뷰하고 정책자문단을 만드는 식의 아주 간단하고 기초적인 절차는 왜 드물까? 설문조사는 양방 사회과학자들이나 하는 잡기술이라 (물론 절대 그렇지 않다!) 평생 인문학자로만 살아온 사람들에겐 너무 낯설고 어려운 일인가? 커뮤니티 유머란을 조금만 검색하면 대학원을 "좋소기업"에 비유하는 자조적인 조롱글이 넘치는 걸 찾아볼 수 있는데, 왜 그런 비유가 유행하는지 5분만 함께 생각해보면 안 될까?

 

이른바 학계 원로·중진들이 살고 있는 시대와 내가 살고 있는 2021년의 거리가 너무 멀지 않기를 빈다. 20년의 격차만 해도 충-분히 힘든데, 그 간극이 크면 클수록 인문학의 개혁을 위해 주어진 시간도 급속하게 짧아질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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