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소와 민주주의: 정치사상에서 국가의 문제에 관한 단평

Comment 2021. 9. 21. 17:33

*아래는 김민철, 「루소의 사회계약 이론에 대한 역사적 독해」 (『역사비평』 131호[2020년 여름]: 445-72)의 저자가 쓴 포스팅에 추가로 코멘트한 내용이다. 2021년 9월 6일 페이스북에 먼저 올렸던 포스팅으로, 이어진 토론은 댓글을 참조[https://www.facebook.com/leewcman/posts/2037550956400308].


해당 논문이 나오기 전에 먼저 읽고 코멘트할 기회가 있었던 입장에서 이야기해보자면... 적어도 루소나 정치사상, 18세기에 어느 정도 관심이 있는 분들은 저자의 소개포스팅까지만 읽고 "아 루소가 민주주의를 지지한 게 아니구나!"에서 머무르는 대신 직접 논문을 읽어보기를 강력하게 권하고 싶다(https://www.dbpia.co.kr/journal/articleDetail?nodeId=NODE09349293).

 

1.

 

<루소의 사회계약 이론에 대한 역사적 독해>가 명시적으로 겨냥하는 대상 중 하나는 정치철학, 특히 북미 정치철학연구의 루소 해석경향이다. 20세기 북미에서 루소가 겪은 운명은 그 자체로 연구거리가 될만큼 드라마틱하다. 전후 냉전 자유주의의 파고 아래 루소는 전체주의의 원류로서 지탄받았다(나치와 파시즘을 겪은 사람들이 인민의지의 무오류성 비슷한 것만 봐도 경기를 일으킬 법했다는 점은 이해해주자). 반세기가 지나 '영미식 자유주의 체제 비판'이 대학가의 인기스포츠가 된 시점에 오면 루소는 어느덧 급진민주주의·직접민주주의의 원조처럼 떠받들어지게 된다. 고등학생들이 '사회계약론 3인방=절대주의자 홉스, 애매한 로크, 저항권 루소'라는 심각하게 멍청한 도식을--셋 중 진짜로 무력쿠데타로 정권을 뒤엎겠다는 뜻을 품고 글을 쓴 사람은 로크 뿐이다--주입받아야 하는 한국의 상황도 대략 그런 맥락의 연장선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 모든 해석은 루소가 읽고 썼던 18세기의 언어와 문제의식을 거의 고려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역사적으로 틀렸다. 물론 애초에 고전의 생존가능성은 오독가능성에 비례한다는 점을 고려할 때, 그러한 오독과 단순화가 꼭 나쁘냐는 반문을 제기할 수도 있다. 예컨대 몽테스키외의 <법의 정신>은 <리바이어던>, <통치론>, <사회계약론>보다 훨씬 풍부하고 정교한 저작이지만 멀쩡한 국역본 하나 없지 않은가? 만약 헤겔이 '정반합'으로 *잘못*요약되지 않았다면 그의 인지도는 지금의 1/4 이하였을 것이니, 헤겔 전공자들은 이러한 오류를 발명하고 전파해준 사람을 위해 하루에 세 번씩 절을 올려도 부족하지 않겠는가?

 

문제는 루소와 <사회계약론>을 급진민주주의, 혹은 인민주권과 일반의지, 저항권과 같은 개념으로만 좁혀 읽는 독서가 루소의 독해만이 아니라 정치(체)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지나치게 편협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인민의 주권을 어떻게 올바른 형태로 실현시킬 수 있는가는 물론 중요한 질문이지만, 루소는, 아니 17-18세기의 그 어떤 진지한 정치적 논평자도 단지 인민주권의 실현으로만 정치체의 모든 어려움이 해결될 수 있을 거라고 믿지 않았다. <루소의 사회계약 이론에 대한 역사적 독해>가 교정하는 오해는 바로 이것이다. 루소가 민주정의 옹호자인가 아니냐는 부차적인 문제다. 핵심은 루소가 당시의 유럽에서 자유국가의 안정된 존립이 사실상 불가능하다는--물론 코르시카나 폴란드에 잠시 희망을 품었던 것 같긴 하지만--결론에 도달하게 되는 *과정*에 있다.

 

논문은 루소와 당대인들이 정치체 혹은 정부가 제대로, 무엇보다도 안정적으로 작동하기 위해 검토해야 한다고 믿었던 조건들을 간결명료하게 검토한다(이 논문에 한 가지 위험이 있다면 수많은 연구가 축적된 코멘트를 너무 평이하고 쉽게 써내려갔기 때문에 독자들이 사유의 과정을 매끄럽게 지나쳐 결론에만 눈을 돌리기 쉽다는 점이다). 인민의 풍속은 어떠한가? 영토와 인구의 크기는 어떤 영향을 주는가? 상업과 사치, 그리고 그것이 초래하는 불평등과 부패의 해악은 어떻게 막을 것인가? 이런 바늘귀마냥 좁디 좁은 문을 거쳐 드디어 가난하지만 유덕한 인민들이 사는, 대의제에 오염되지 않은 작은 도시국가가 민주정에 적합하다는 결론에 도달했다고 치자. 그런 작고 약한 나라는 강대한 외국의 침범으로부터 도대체 어떻게 스스로를 지켜낼 수 있단 말인가? 루소의 비관적인 결론은 이러한 물음들을 엄격하게 검토한 끝에 도출되었다. 달리 말하자면, 어떤 국가·정부의 운행을 분석하고 예측하기 위해서는 복잡하게 맞물린 다양한 요소들을 풀어내어 분석하고 다시 결합하는 정밀한 지적인 노력이 필요했다(인민의 주권과 자유를 오차없이 구현하는 제도는 그중 한 가지 요소였다). 논문은 루소가 그 과정을 어떻게 거쳤는지 파악하기 쉽게 풀어주고 있다.

 

 

2.

 

<사회계약론>을 비롯한 루소의 정치적인 저술 다수가 초기 근대 유럽의 공화주의적 전통에 속해 있다는 사실은 정치사상사에 약간의 관심이 있는 분들에게는 아주 낯설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 '공화주의' 전통이 정확히 어떤 대상을 지칭하는지 분명하게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다. 연구자들이 초기 근대의 공화주의 전통이라 부르는 개념은 단순히 공화정 혹은 공화제적 요소를 갖춘 혼합정부가 바람직하다고 주장하는 정치적 담론만을 뜻하지 않는다. 마키아벨리의 <로마사 논고>에서 몽테스키외와 스미스 등에 이르는 흐름에서, 공화주의의 지적 전통은 하나의 정치체가 작동하기 위해서 어떤 요소들을 고려해야 하는지, 그러한 요소들이 어떤 원리에 의해 상호작용하는지, 최종적으로 주어진 조건에서 정치체가 어떠한 운명에 도달하게 되는지를 분석하고 예측하는 지적인 도구로 발전해갔다(오늘날 법학, 경제학, 정치학, 사회학, 역사학 등이 이 전통에서 자신의 선조를 발굴해낼 수 있는 까닭은 이 때문이다).

 

초기 근대의 공화주의적 전통을 이해하고자 할 때 현대의 우리가 가장 간과하기 쉬운 요소는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국가의 멸망가능성이다. 특히 (다수의 학자들이 거주하는) 정치적 안정과 경제적 번영을 이룩한 사회일수록 국가가 한 순간에 몰락과 붕괴의 길에 들어설 수 있다는 위험을 진지하게 여기지 않는 경향이 있다(예컨대 한국인들, 또 많은 서구인들은 아프가니스탄 정부의 붕괴를 어처구니없는 해프닝처럼 조소하지만, 지속가능한 정치체를 만드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과제인지 한번이라도 생각해봤다면 말을 아꼈을 것이다). 초기 근대의 많은 저자들이 바라보는 세계는 정 반대인 곳이었다. 고대 그리스에서 자신들의 시대에 이르기까지 유럽인들이 인식하는 역사세계는 무너진 국가들로 가득찬 거대한 공동묘지와 같은 곳이었다. 서구 역사관의 기원이라 할 수 있는 로마사는 강건한 공화국이 한 순간에 내전을 거쳐 독재정부로 변모할 수 있으며, 거대한 제국이 식민전쟁과 불평등의 심화에 썩은 나무토막처럼 산산이 부서져 내릴 수 있다는 교훈의 산 증인과 같았다. 자신의 로마사에 <쇠망사>The History of Decline and Fall라는 제목을 붙인 에드워드 기번의 선택은 특별히 비상식적인 것이 아니었다.

 

국가를 언제 어디서 어떤 이유로든 돌연사할 수 있는 개복치마냥 취약한 것이라 여겼던 시대, 정치체를 탐구하는 지식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정치체의 건강과 쇠락을 구성하는 요소들을 찾아내고 분석하는 것이었다. 국가는 어떤 순간에, 어떤 요소로 인해, 어떤 선택으로 인해 약화되고 또 죽음에 이르게 되는가? 망한 이유는 도대체 무엇인가? 오래 지속되었다면--스파르타와 베네치아가 공화국의 모범으로 칭송받은 가장 중요한 이유는 그것들이 오랜 기간 멸망하지 않고 존속했다는 믿음 자체에 있었다--그 비결은 무엇일까(다른 누구보다도 기업을 분석하는 투자자들이 이런 류의 고전을 여전히 '동시대적으로' 읽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로마사 논고>는 이러한 분석 혹은 사고의 양태를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저작이었으며, 마키아벨리 사후 약 200년이 지난 뒤의 시기를 살았던 루소 또한 분석의 틀은 더욱 복잡해졌을지언정 기본적인 전제 자체는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런 점에서 왜 자유국가가 존립하기가 그토록 어려우며, 설령 일시적으로 존립할 수 있다 해도 부패하거나 멸망할 수밖에 없다고 이야기한 <사회계약론>은 공화주의적 전통의 특정한 면모를 매우 충실하게, 18세기인들의 입장에서는 어쩌면 과할만큼 충실하게 계승한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루소의 사회계약 이론에 대한 역사적 독해>의 저자가 보여주는 것은 바로 그러한 지점이다.

 

 

3.

 

루소의 <사회계약론>으로부터 오늘날의 시대에 필요한 정치적 효용성을 얻고자 하는 독자들이 있다면, 다음과 같은 질문을 생각해보면서 읽으면 좋을 것이다. 오늘날 우리 시대에 국가와 정부는 언제, 어떤 경로로 쇠망할 수 있는가? 국가의 흥망성쇠에 작용하는 요소들은 무엇이며, 그것들은 서로 어떻게 연관관계를 맺고 있는가? 이러한 질문은 우리가 국가와 정치를 사유할 때 민주주의인지 아닌지, 혹은 무엇이 얼마나 충분한 민주주의인지를 유일한 논의기준으로 삼는 단순화의 실수를 예방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루소의 사회계약 이론에 대한 역사적 독해>는 그러한 사고를 정교화하는 데 좋은 디딤돌이 될 것이다. 루소가 민주주의를 옹호하거나 말거나가 도대체 뭐가 중요하단 말인가--저자가 자신의 포스팅에서 논문의 결론을 아무렇지 않게 '스포일링'하는 이유도 아마 그것 때문일 것이라고, 나는 멋대로 생각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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