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틀러>와 <스펙테이터>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Intellectual History 2021. 5. 20. 03:08

한동안 18세기 초 영국의 대표적인 정기간행물 <태틀러>(The Tatler)와 <스펙테이터>(The Spectator)를 처음부터 끝까지 읽었다. 정독도 아니고 큰 분류를 위해 각 호의 주제 정도만 대략 파악·분류하면서 넘기는 시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현대비평판 본문 기준 합계 3,900쪽이 넘는 막대한 분량이라 그런지 두뇌가 잔뜩 부어오른 듯한 기분이다. "이것만 다 읽을 수 있으면 세상에 못 읽을 게 없다"는 각오를 하게 만드는 책들이 드물게나마 있는데, 이번이 올해 그런 독서로는 세 번째다(다른 둘은 올해 1, 2월에 강독세미나로 읽은 Jean-Louis Quantin, The Church of England and Christian Antiquity, 2009 와 Dmitri Levitin, Ancient Wisdom in the Age of the New Science, 2015). 올해 말까지 학위논문 원고를 쓰면서 더는 그런 일이 생기지 않기만을 희망한다.

 

<태틀러>와 <스펙테이터>는 통상적으로 18세기 언론비평지·공론장의 발전과 많이 엮이곤 한다. 물론 그러한 맥락에 나름의 타당성이 있겠지만, 직접 읽어보면 리처드 스틸(Richard Steele)과 조셉 애디슨(Joseph Addison)을 포함한 저자들이 그러한 설명으로는 갈음되지 않는 상당히 다른 작업을 하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기본적으로 두 교양지의 목적은 시민사회의 습속, 특히 여성독자층의 도덕과 교양을 "개혁"(reformation)하는 것이다. 물론 20세기에 이르기까지 다수의 교양·언론지에서 그러한 목표를 내거는 것은 새삼스러울 바 없는 통례이기는 하다. 하지만 실제로 도덕론·수신론의 비중이 상당히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는 점에서 두 간행물은 후대의 자손들에 비해 자신의 명시적인 목적에 상당히 충실한 작업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태틀러>·<스펙테이터>의 도덕·수신론은 단순히 특정한 규범을 설파하는 것을 넘어 한 인간으로서의 삶, 그리고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어떠한 자기수양의 테크닉을 실천해야 하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까지도 적지 않게 포함하고 있었다. 그런 점에서 저자들이 스스로를 "숙녀들의 철학자"(Ladies Philosopher)라고 칭하곤 했던 것은, 철학이라는 개념의 고전적인 의미에서, 특별히 과장된 호칭이 아니었다. 유행하는 의복 같은 당대의 새로운 사회풍속을 (종종 비판적으로) 소개하고, 때로는 10여 회 이상의 연재를 통해 비평론이나 미학론을 전개할 때도 그 기저에는 전체 사회구성원의 자기개혁을 추동하는 철학자로서의 정체성이 존재한다.

 

<태틀러>와 <스펙테이터>는 (여성)시민들에게 억압적인 도덕과 윤리를 강요하는 낡고 반동적인 작업인가? 20세기 후반 이래 현대의 지적 세계에는 무언가를 비판하고 나무랄 때를 제외하면 도덕적 훈육을 의심하고 조소하는 태도가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기 때문에--도덕적 훈육이 많은 경우 사회의 억압적이고 비합리적인 관습을 정당화하는 용도로 쓰여온 만큼 이러한 태도에는 나름의 정당성이 있다--지금의 우리들은 그런 생각을 먼저 하기 쉽지만, 무엇보다 경계해야 할 것이 바로 그러한 도덕적 시대착오다. 우리 기준을 과거에 폭력적으로 들이미는 오류를 교정하기 위해서는 딱 한 가지 질문을 던져보는 것으로 충분하다: '스스로를 통제하고 다스릴 수 있는 도덕적 주체'가 되라는 요구 및 그를 위한 다양하고 정교한 훈련의 기법이 극소수의 지배층 외에게도 설파된 사회가 과연 몇이나 되었을까? 다시 말해, 지배층 바깥에 있는 더 많은 수의 사람에게 단순히 총칼과 말로 겁을 주고 위압하는 것을 넘어 더 나은 인간, 더 교양있는 인간, 더 학식과 품위를 갖춘 인간이 되도록 노력하라고 요구하는 흐름의 출현이야말로 역사적으로 매우 독특한 현상인 것이다. 마치 여성에 관해, 또 여성과 함께 이야기할 때 그를 존중받아야 할 동등한 인격체로 대하는 법을 익히라는 요구가 사회 전반부를 휩쓸었던 2015년 이래의 한국이 매우 독특한 시공간이었던 것처럼 말이다(일본의 예에서 보듯, 이런 현상은 GDP가 늘어난다고 해서 자연스럽게 발생하지 않는다).

 

영국, 혹은 잉글랜드의 역사에서 그러한 흐름이 본격적으로 등장한 시기는 17세기 후반부터다. 내전, 국왕처형 및 공화국 수립, 왕정복고, 다시 또 두 번째 혁명으로 이어지는 반세기 간의 정치적 대변동은 사회의 도덕적 문화에도 급격한 충격을 주었으니, 잉글랜드국교회의 위기가 바로 그것이다. 16세기 수장령과 함께 급작스럽게 발족한 국교회는 주지하다시피 카톨릭과 강성 칼뱅주의의 대립 한 가운데에서 무척 모호한 위치에 놓여있었다. 이는 국교회 내에 다양하고 이질적인 파벌들이 공존하게 만드는, 심지어 국교회 바깥으로 탈주하는 이들이 등장하도록 할 정도의 종교적 불안정성을 초래했다. 특히나 급진적인 개혁교도·장로파에 의해 (국교회의 실질적인 지도자라 할 수 있는) 켄터베리 대주교 윌리엄 로드를 포함한 엘리트 사제들이 일제히 숙청당한 내전-혁명정부 시기는 그 위기의 절정이었다.

 

1660년 왕정복고와 함께 돌아온 국교회의 지도자들이 원한 것은 단순히 기존 도덕적·종교적 지배체제의 재건이 아니었다. 그들은 카톨릭이든 "청교도"든 국교회의 안정적인 영도를 위협할 수 있는 세력이 대두할 수 있는 환경 자체를 허용하지 말아야 한다고 믿을만큼의 정치적 감각과 편집증적인 태도를 함께 갖고 있었다("청교도"는, 이미 어느 정도는 그러했지만, 이후에도 멸칭에 가까운 뉘앙스로 사용되었다; 제임스 2세가 카톨릭을 위한 관용령을 추진했을 때, 스튜어트 왕가를 지지하던 파벌을 포함해 국교회의 지도층 다수는 제임스 2세를 거부하는 방향으로 선회했으며, 지지층이 붕괴된 제임스 2세는 네덜란드 상륙군과의 투쟁을 포기하고 국외로 탈출했다). 그들은 평신도들의 영혼이, 그들의 가정이 더는 이단적인 종파들의 요설에 취약한 영역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확신했다. 1688/89년의 혁명을 통해 새로이 지배자가 된 윌리엄 3세 정부는 사회의 도덕과 교양습속(morals and manners)을 개혁해야 한다는 국교회의 열망에 적극적으로 부응했다. 외국인 정복자보다는 썩어빠진 사회를 혁신하는 도덕개혁군주로서의 이미지가 훨씬 매력적이었음은 분명하다. 국왕의 후원 하에 평신도들 또한 도덕개혁운동에 뛰어들었다. 1691년 풍속개혁협회(Society for the Reformation of Manners), 1698년 기독교지식증진협회(Society for Promoting Christian Knowledge)가 발족했으며, 1701년 북아메리카 식민지 선교를 위해 해외복음선교협회(Society for the Propagation of the Gospel in Foreign Parts)가 출범했다. 국왕과 국교회, 평신도가 협력하는 전사회적 개혁운동이 시작된 것이다.

 

국교회 사제들로부터 발원한 개혁운동의 중요한 대상 중 하나는 여성이었다(적어도 17세기 초부터 카톨릭과 신교도들은 상대편의 고위층 여성을 타깃으로 개종전쟁을 펼쳐온 바였다). 왕정복고기 옥스포드의 흠정신학교수 및 이튼 칼리지 학장으로 임명된 리처드 얼스트리(Richard Allestree)로 추정되는 저자는 17-18세기 영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지침서 <의무론>(The Whole Duty of Man, 1658)을 포함한 일련의 도덕지침서를 썼다. 여기에는 제법 체계적이면서도 상세한 도덕적 가르침을 담은 <숙녀의 소명>(The Ladies Calling, 1673)도 포함되었다. <숙녀의 소명> 저자는 영혼에는 성차가 없으며, 따라서 지성(understanding)의 차원에서 여성은 남성보다 열등하지 않을 뿐더러, 종교와 도덕에 있어서만큼은 여성이 남성보다 더 뛰어난 모습을 보여줄 수 있다고 주장했다. 여성들이 스스로를 윤리적 주체로 확립하도록 하는데 별다른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던 고전기 그리스·로마와 달리, 기독교는 그 역사의 초기에서부터 지도층 여성의 영성훈련을 위한 자리를 어느 정도 만들어놓고 있었다. 17세기 후반 국교회 사제들, 그리고 그들과 연결되어 있던 (여성 지식인들을 포함한) 저자들은 상류층 여성에게 필요한 지적이고 영적인 교육·훈련의 영역을 본격적으로 구축하고 이를 전파하기 시작했으며, 그 과정에서 저자마다 다소의 차이는 있지만 여성의 도덕적 위상 또한 재조정되었다.

 

전사회적 도덕개혁운동의 대두와 함께 여성은 기독교사회의 건강한 덕성을 지탱 위해 꼭 필요한 전략적 거점이 되었다. 따라서 그 도덕적 역량을 증진시키고 유지하기 위해 여성의 삶을 구성하는 여러 영역을 상세하게 훑고 유형화하는 언어가 필요했다. <태틀러>와 <스펙테이터>가 주창하는 "가정적인 삶"(domestick life)에서의 "개혁"은 바로 이런 맥락에서 읽혀야 한다. 두 간행물은 프란시스 베이컨이 보여준 수신론적인 에세이, 세네카·에픽테투스·키케로와 같은 스토아주의적 고전철학 전통(물론 이교도 "스토아주의" 자체는 기독교보다 열등한 것으로 비판받았다), 피에르 벨의 <역사비판사전>에서 발췌해온 내용만이 아니라 클럽과 커피하우스, "독자" 제보에서 끌어온 동시대의 풍속과 인물형에 대한 묘사가 한데 모여있는 장르적 혼합체였다. 그러나 저자들, 특히 본인이 국교회 사제의 아들이었던 애디슨은 명확하게 호교론적인 입장을 일관되게 표출했다. 미신과 광신적 열광 모두 타파의 대상이었지만, 무엇보다도 철저하게 박멸되어야 하는 존재는 무신론자(atheist)들이었다. 기독교의 신은 도덕과 자기수양이 존립하기 위한 근본적인 토대로서, 이를 인정하지 않는 무신론자들은 도덕적인 삶이 불가능한 위험분자였다. 고전 시대의 이교도 철학자들은 중요한 참고점이었으나 기독교 신앙을 넘어설 수는 없는 존재였다. 신실한 기독교인으로서의 삶은 도덕수신론 및 철학 전통이 지향해야 하는 궁극적 목표로 주어져 있었다(고전 철학의 부흥에 의해 기독교의 지배가 무너졌다는 낡은 '계몽주의' 해석은 지극히 선택적인 독서를 통해서만 유지될 수 있다).

 

우리는 이 간행물들과 국교회 사회도덕개혁운동 사이의 연관성을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무신론 비판 및 호교론적 논지를 제시한 호들 외에도, <스펙테이터> 제8호는 명시적으로 스스로를 "풍속개혁협회 지도부의 일원"(one of the Directors of the Society for the Reformation of Manners)이라고 밝힌 기고자의 편지를 싣고 있다(그는 음주와 도박, 외설의 척결 외에도 여성과 가정을 심야 가장무도회Midnight Masque와 같은 악덕으로부터 지켜내야 한다는 과제를 강력하게 제시한다). 명예혁명 이후 정치적 입지에서든 대중설교에서든 가장 영향력 있는 국교회 성직자 중 한 명이었던 존 틸롯슨(John Tillotson)의 이름은 수차례 존경을 담아 인용되며, 국교회의 박식한 성직자들이 자신들만의 고상한 삶에 머무르지 않고 평신도 청중이 이해할 수 있도록 쉽고 재밌는 설교를 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요청도 등장한다(이는 개혁적이고 지적인 광교파 사제들의 성향이기도 했다). 애디슨은 사후 보일, 로크와 함께 이성과 계시를 함께 아우르려 했던 위대한 국교회 지식인으로 칭송되었으며 그의 종교적 저작은 한데 묶여 따로 출간되었다.

 

지금까지의 이야기로 분명해진 것이 있다. 오늘날 <태틀러>와 <스펙테이터>를 읽거나 적어도 그것의 역사적·지성사적 맥락을 명확하게 이해하려는 독자는 17세기 후반-18세기 초반의 잉글랜드가 기독교, 도덕개혁, 자기수양 전통, 여성계몽과 같이 오늘날에 쉬이 한데 묶이지 않는 요소들이 완전한 합일은 아닐지라도 긴밀하게 상호의존적인 관계로 연결되어 있던 시기였음을 이해해야만 한다. 이 시기 여성계몽은 단순히 글자와 지식을 전파하는 것을 넘어 여성을 도덕적 자기훈련이 가능한 주체로 세우는 일이었으며, 그것을 가능하고 또 추동하는 동력은 기독교의 사회개혁운동으로부터 나왔다(나혜석의 1918년 단편 <경희>는 이런 서사모델이 이 시기 영국에만 국한된 것이 아님을 보여주는 좋은 예다). 결혼과 "여성을 증오하는 자"(woman-hater)들은 종종 도덕과 신앙을 무시하는 자들로 그려졌으며, 특히 기독교를 불신하고 거부하는 방종한 이들(Libertines)은 여성을 꼬드겨 인생을 망칠 수 있는 사악한 남성들로서 경계의 대상으로 지목되었다. <태틀러>와 <스펙테이터>는 정확히 스스로를 그러한 맥락에 위치시켰고, 이를 통해 자신이 시장에 쏟아져 나오는 다른 소식지·정기간행물 필자보다 더 우월하고 중요한 지위에 있음을 어필했다.

 

물론 이들의 여성개혁운동은 오늘날의 기준은 물론 당대 여성개혁론 내에서 특별히 급진적인 진영에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이들은 전통적인 성별 역할과 성차를 추호도 의심하지 않았으며, 부유한 도시여성의 사치와 방종을 노골적으로 조롱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시기 전후 여성 지식인들 중에서 이런 도덕을 비판하고 거부한 예는 거의 없다는 사실도 알아야 한다. 여성의 지위와 가능성을 높이고 여성을 윤리적 주체로 만드는 개혁은 전통적인 언어의 포기와 상실이 아닌, 그것을 더욱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그 잠재성을 밀어붙이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이후 수백 년 동안의 과정에서 그 잠재성이 극도로 소진되었을 때, 그리고 이러한 개혁이 마련해놓은 사다리를 한 칸씩 딛고 올라간 여성들이 이제 자신들을 위한 새로운 무기고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확신을 갖고 주장할 수 있게 되었을 때, 그때 과거의 개혁운동을 구성한 장치와 요소들은 본래의 맥락을 잃어버리고 역사의 그림자 속으로 조용히 가라앉아 가게 될 것이었다. 그것을 망각 속에서 끄집어내어 원래의 빛깔과 용도가 무엇이었는지, 또 오늘날 우리에게 자연스럽게 주어진 것처럼 보이는 언어와 믿음이 얼마나 길고 복잡한 사상사적 맥락 내에서 삐뚤빼뚤한 경로를 따라 만들어진 것인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사려 깊은 태도가 필요하다. 나아가 지금 여기의 규범 역시 언젠가 순식간에 망각과 오해의 대상으로 전락할 수 있음을 이해하면서 조금 더 긴 궤적 속에서 사고하고 행위하려는 노력은 조금 더 낫게 살아가고자 하는 현대인에게 주어진 몫이다.

Trackbacks 0 : Comments 0

Write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