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르솜 숄렘. <한 우정의 역사> / 피터 게이. <부르주아전>. / 찰스 테일러. <불안한 현대 사회> [121216]

Reading 2014. 3. 18. 14:27

*2012년 12월 16일 페이스북.


게르솜 숄렘. <한 우정의 역사: 발터 벤야민의 추억하며> ; 아도르노의 <프리즘>에 실린 벤야민 초상과 함께 국내에서 접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벤야민을 직접 접한 인물의) 벤야민 관련 문헌이다. 아도르노가 변증법적 사유와 유토피아적 믿음과 같은 커다란 궤를 공유하는, 그러면서도 분명한 거리를 두는 경쟁자/동료였다면--오해를 피하기 위해 말하자면 양자가 서로를 경쟁자로 인식했다는 뜻은 아니다--숄렘은 유대학의 대가로서 벤야민 사유의 분명한 한 축을 이루지만 사실상 국내에서 거의 접할 수 없는 유대적인 형이상학 측을 대변한다고 할 수 있겠다. 쉽게 말해 '비판이론'을 구성하는 여러 갈래의 사유들 중 유대적 형이상학(나는 의도적으로 '카발라적 신비주의'와 같은 선정적인 표현을 피하고자 한다)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 그리고 그것이 벤야민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를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 거의 유일한 문건이다. 물론 이런 점에서 숄렘이 벤야민 사유의 두 축 중 다른 한 축을 지나치게 폄하하거나 양자의 공존 또는 변증법적 융합에 대해 회의적이라는 비판을 감안하고 읽을 수는 있겠지만. 어쨌든 그 자체로 섬세하고 부드러운 글쓰기의 미덕을 지니는 이 책은 쉽게 융합되기 힘든 구도들의 융합으로서 벤야민을 이해하는 기본적인 시점을 제시한다는 사실 만으로도 벤야민 읽기를 시작하는 사람들에게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더불어 벤야민 개인이 어떠한 경제적 조건 위에서 끊임없는 악전고투를 할 수밖에 없었는지도. 후자는 오로지 사상에 관심을 두는 이들에게는 쉽게 지나쳐질지 모르지만, 사상의 핵심적인 내용은 그 사상을 담아낸 인간의 삶을 이해하려는 노력을 거치지 않고서는 이해될 수 없다는 것만큼은 분명하다.

피터 게이. <부르주아전> ; 아르투르 슈니츨러(나는 _Eyes Wide Shut_을 통한 간접적인 접촉 말고는 슈니츨러를 읽은 적이 아직 없다, 부끄럽게도-)의 이름이 전면에 나오지만 게이의 다른 저술들처럼 인물의 전기biography를 기대해서는 곤란하다. 그 점에서는 번역제가 참으로 적절한데, 차라리 슈니츨러를 빼고 부르주아 계급 자체의 정신사/문화사로서 이 책에 접근하는 게 보다 합리적이다. 슈니츨러의 삶과 그의 기록은 힌트, 혹은 중요한 단서로서 나타나고, 오히려 핵심은 그러한 힌트를 통해(혹은 그와 무관하게) 도달하는 부르주아 계급--유의해야 할 점은 게이는 고전적인 의미에서의 경제적 계급을 그다지 강조하지 않는다, 그는 차라리 정신적, 문화적인 집단으로서의 계급관을 내세우며, 이는 톰슨의 계급보다도 한층 더 '상부구조'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을 설명하려는 시도에 있다. 여튼 부르주아계급, 보다 정확히 "빅토리아인들"에 대한 게이의 분석은 여러가지 통설들을 비판하고 대상의 다원적인 측면을 강조하는 데 맞춰져 있다. 게이의 주장이 탄탄한 근거들과 거장다운 세심함으로 무장하고 있음은 물론이고(베른슈타인 전기를 제외하고는 게이의 저작은 국내에서 대체로 좋은 번역자들을 만난 것 같다). 앞서 경제적인 계급과 게이가 계급을 정의하는 보다 복잡한 방식이 차이가 있다고 말했는데, 그렇다고 저자가 경제적인 혹은 물질적인 측면을 도외시하지는 않는다. 정확히 말해 그런 단서들까지도 총합하여 문화, 혹은 생활leben 자체를 재구성하는, 자칫하면 박약해지기 쉽기에 오로지 장인다운 경험의 축적과 솜씨만이 실수를 막을 수 있는 방법론을 가능케한다--분명히 말하지만 게이는 부르주아 계급을 정의불가능한 대상으로 포기하지 않는다. 총 9개의 주제로 되어 있는 이 책은 당시 70대에 이르렀던 대가의 원숙함이 돋보이며, 가끔은 지나치게 다원적 측면만을 강조하는 듯한 느낌을 허용하지만 대체로 책이 직접적으로 말하고 있는 지점을 넘어서는 거대한 건축물이 그 아래 깔려 있음을 짐작케한다. 그 건축물을 정신적으로 재구성하기 위해서는 그의 다른 주저들을 함께 읽거나, 적어도 이 텍스트를 무척이나 꼼꼼하게 읽을 필요가 있을 것이다. 나중에 최소한 한번은 더 읽어야 할 책. 만약 논문을 쓸 때 이 책을 읽었다면 적어도 부르주아 가정에 대한 레퍼런스 및 논지는 훨씬 더 괜찮은 수준으로 업데이트가 가능했을 것 같다--대신 후반부 논의를 거의 연구하지 못하고 넘어갔겠지만. 19세기 유럽의 가정, 사생활, 섹슈얼리티와 같은 (지금은 학계의 중요한 주제로 인정받았으나 한때는 사소한 것으로 치부되었던) 주제에 관심있는 이들은 한번 정도 읽어볼 것. 아직 국내에 번역되지 않은 게이의 대저 <부르주아의 경험>(전5권)을 읽지 않고서 19세기 전공자라는 말을 함부로 못 꺼낼 것 같은 부담감을 안겨준다.

피터 게이. <모차르트>. ; 거장의 소품. 뒤집어 말하면 읽을 가치가 있는 소품. 개인적으로 게이의 지적 원숙함 및 그 장악범위는 최근에 죽은 홉스봄이나 아직 살아있는 프레드릭 제임슨과 같은 이들을 떠올리게 한다. 이런 학자들을 계속해서 배출해내고 있는 영미/유럽의 학문적 풍토...수명연장이 부럽기도, 두렵기도 하고.

찰스 테일러. <불안한 현대 사회>_The Malaise of Modernity_ ; 물론 헤겔을 읽으려는 사람으로서 테일러의 이름이야 당연히 들어봤지만, 직접 그가 자신의 논지를 펼치는--그는 샌델이나 매킨타이어, 롤즈와 같은 일급의 사회철학자이기도 하다--글은 처음 읽었다. 짧은 내용에 이렇게 많은 지적 축적을 명료하게 담아내는 능력은 정말 부럽다. 이것 또한 건축술적인 능력이라면, 아직 나는 그런 능력을 전혀 갖추지 못했다. 쉽게 말해 근대의 개인주의가 현대사회의 정치/사회/정신적 위기를 초래한 원인이라고 할 때, 해당 경향의 어떤 측면이 그러한 위기를 초래했는지, 그리고 그것을 어떻게 성급하게 거부하지 않으면서 건져낼 것을 건져내야 하는지를 주장하는 책. 곳곳에 프랑크푸르트학파적인--물론 이는 베버로부터 영향을 받은 이들 모두에게 나타나겠지만--현실인식이 있으면서도, iron cage를 어떻게 주어진 현실 안에서 극복할 수 있는지에 대한 가능성을 직접적으로 논증하려 한다는 점만으로도 가치가 있는 저술. 아도르노와 비교한다면, 솔직히 극단까지 밀어붙이는 사유에서는 아도르노의 날이 훨씬 더 날카롭지만, 절망과 희망의 경계를 아슬아슬하게 오가는 아도르노에 비해 테일러는 보다 휴머니스틱한 믿음을 갖추었고 그에 따른 에너지가 있다. 적어도 아도르노가 예술론을 통해 구석에까지 몰렸을 때의 절박감은 테일러의 굳센 태도와는 분명히 다르다. 물론 그것이 테일러의 사유전개에서 군데군데 충분히 날카롭지 않은 부분이 있는 듯한 인상을 주긴 하지만(나는 테일러가 나이브하다는 말은 차마 할 수가 없다). 다만 현재의 정치경제적 시스템을 최종적 승자로 간주한다는 점만큼은 검토의 여지가 있다. 흥미로운 점이 한 두개가 아닌 텍스트인데 (매 챕터마다 몇 시간짜리 세미나가 가능한 주제들이 널려있다! 이런 내용을 라디오방송 강연으로 할 수 있는 분위기가 부럽다), 현재의 내게 단연 재미있게 읽힌 부분은 이른바 경제적 행위의 양식들을 시장경제 및 국가주도정책을 포함해 다섯 가지로 나누고 다섯 모두의 공존을 요구한다는 점. 91년도에 출간된 이 책이 2000년대 가라타니 고진에 의해 '교환양식' 및 어소시에이션으로 명명된 시도와 닮아있다.

근대의 정신적인 이해에 관해서라면, 특히나 개인주의와 공리주의적인 특성에 관해서라면, 테일러의 결론에 동의하지 않더라도 그가 내놓는 짧지만 명확한 분석들은 숙고할만하다. 시간 상 그리고 환경상 이 책을 챕터별로 정리할 기회는 없겠지만 그러한 지적 노력만으로도 유익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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