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안의 논평들: 대통령의 생일광고, 남북단일팀, 비트코인 논쟁

Comment 2018. 1. 24. 22:48

2018년 1월 중순-하순에 쓴 정치현상에 대한 코멘터리들.



1. 2018년 1월 15일 페이스북


기사를 읽고 곧바로 질문 몇 가지가 들었다(http://news.joins.com/article/22285710).

1) 뉴욕 타임스퀘어에 문재인 대통령의 생일 광고가 전시된다고 가정할 때, 뉴욕시민들 및 이 광고를 접할 다른 사람들은 어떤 인상을 받을까? 그들이 문재인 대통령 생일광고를 시진핑이나 푸틴, 좀 더 극단적으로는 김정은의 생일축하광고와 질적으로 다른 무언가로 받아들이리라는 가능성을 얼마나 높게 예측할 수 있는가? 한국과 한국인들은 무엇을 얻고 잃는가?

2) 모금자 및 지지자들은 한 나라의 국가원수에 대한 사적인 축하를 타국의 한복판에 걸겠다는 자신들의 행위가 국내외의 여론 및 정치적 행위자들에게 (자신들의 의도와 무관하게) 어떻게 "정치적으로" 받아들여질지를 얼마나 사려깊게 예측해보았을까? '자신의 애정이 향하는 대상을 위해 자신의 마음을 원하는 형태로 표현하는 것'이 대체로 용인되는 연예인 팬클럽의 행위와 정치적 합리성 및 공공선과 같은 기준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그리고 종종 행위가 의도치 않은 심각한 결과를 불러오기도 하는) 정치적 행위 사이의 경계선이 쉽게 허물어질 수 없다는 사실이 과연 충분히 고려되고 있는가?

3) 만약 이들 그리고 문재인 대통령의 많은 열성적 지지자들이 연예인/아이돌 팬클럽의 사고/행동양식을 정치적 판단 및 행위에 그대로 적용시키는 데 어떠한 이질감도 느끼지 못하는 게 사실이라면, 우리는 앞으로 시민사회와 정치적 의사결정에서 열광적인 충성심만이 아니라 경쟁집단에 대한 강한 배타성/공격성과 같은 요소들까지 그대로 나타날 가능성을 부인할 수 없다. 이처럼 팬클럽 문화의 여러 양상이 정치적 의사결정에 반영될 경우, 우리가 치러야 할 대가는 무엇인가? 짧게는 집권당의 공천, 길게는 시민사회와 국가 자체의 안녕에 있어서까지, 우리는 어떤 사태까지 예견하고 준비해야 하는가?

4) 여러 식자들은 팬클럽 문화의 정치침투 과정을 "시민참여", "참여민주주의"로의 이행과정이라는 명목으로 이론적으로 정당화해 왔다. "참여"가, 그게 무엇이든 간에, 고양되었다는 것은 분명해보인다(이러한 이론적 정당화는 지금도 곳곳에서 발견가능하다). 그러나 이 현상이 과연 규범적으로 정당화될 수 있는 모델의 시민들을 더 많이 창출했다고 볼 수 있을지 난 회의적이다. 우리는 더 많은 참여적 시민을 보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자신을 참여적 시민이라고 믿는 정치적 팬클럽을 보고 있는 것인가? 양자가 질적으로 동일하다고 주장하는 사유-파산자들은 무시한다고 치더라도, 참여적 시민모델을 내세워온 사람들이 과연 자신들의 시민모델을 충분히 엄격하게 규정해왔는지 비판적으로 성찰할 필요는 있어보인다. 이 상황이 정말 당신들이 기름 부어준 그 상황이 맞는가?

특히 연구자들, 논평자들, (좁은 의미의) 행위자들이 현재의 흐름에 막연한 흥겨움이나 반대로 거부감을 느끼는 것 이상을 하지 못할 때 그들은 특정한 입장을 정당화해주는 이데올로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게 된다. 과거와 미래를 동시에 보려는 노력없이 이 운명을 벗어나기란 불가능하다. 어떤 면에서 우리는 한 터널을 빠져나온 뒤 다른 터널에 들어서고 있다.



2. 2018년 1월 19일 페이스북


솔직히 이 인터뷰(http://m.news1.kr/articles/?3211118)는 안 하느니만 못했다는 생각이 든다. 여론의 악화를 막고자 하는 게 청와대의 뜻이었다면, 그들은 자신들이 "젊은 층"의 반감 및 문제의 본질을 이해하고 있다는 잘못된 자신감을 피력하기보다 차라리 공식적으로는 침묵한 채 내부협상을 통해 아이스하키 선수단이 단일팀 결정을 (적어도 겉으로는) '자연스럽게 또 자발적으로' 받아들이는 모습을 드러내도록 하는 게 훨씬 나았을 것이다. '진짜로 중요한 게 뭔지는 내가 잘 안다' 식의 의사표명이 실제로 사태를 정리하기보다는 오히려 더 그에 더 불을 붙이기 쉽다는 것은 지난 9년 간의 우파정권이 수차례 값비싼 대가를 치르면서 몸소 보여주었다. 유감스럽게도 현재의 청와대는 지난 9년 간 정권들이 어떻게 실패했는가를 검토하지 않은 듯하다.

두 가지를 짚어보자. 먼저 "젊은이들은 과정이 공평하고 정의로운 나라를 원한다. 그래서 (여자 아이스하키 대표팀 선수들이) 열심히 참여했는데 (단일팀 구성이 돼서 일부가 탈락되는) 그런 과정이 공정하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이라는 관계자의 설명은 현재의 반감을 매우 부분적으로만 이해하고 있다. 아마도 현재 청와대를 운영하는 인사들의 세대에서는 잘 와닿지 않을 수 있겠지만, "국민의 정부" 시절부터 20년 가까운 시간이 지나면서 시민사회의 윤리적 감각은 확연하게 변해왔다. 사람들은 단순히 자신이 노력해서 얻은 걸 빼앗긴다고 생각하기 때문에만, 혹은 좀 더 개인주의적이 되었기 때문에만 화를 내는 게 아니다.

사람들이 청와대의 태도에 반감을 갖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이게 당사자들, 즉 아이스하키 선수단의 설득과 동의를 전혀 구하지 않은 채--적어도 그 과정이 전혀 드러나지 않은 채--진행되었기 때문이다. 젊은이들이 좀 더 개인주의적 혹은 (청와대의 설명이 암시하듯) 자신의 몫에 민감하게 되었다는 식의 설명은 충분하지 않은데, 실제로 오늘날에도 여전히 사람들은 자신에게 더 많은 부담이 되는 결정을 수용하고 또 그걸 정당하게 받아들인다: 단지 그들 자신이 자율적으로 동의했다는 전제만 있다면 말이다. 1987년 이후 30년 간의 민주화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변화 중 하나는 다음과 같다.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정권이나 유력자 같은 주요 인사들이 중요한 일을 자의적으로 결정하는 상황을 아무 문제의식 없이 받아들이지 않게 되었다. 적어도 형식적으로나마 실제 이해관계자들의 의견을 듣고 동의를 획득하는 절차가 선행될 때 비로소 그 결정은 정당한 것으로 간주된다. 평창올림픽 아이스하키 남북 단일팀 구성 결정은 바로 그 지점을 생략했고(적어도 그 지점이 언론에 알려지지 않았고), 그것이 많은 사람들이 현재의 상황을 부당하게 받아들이는 이유다.

둘째, "이렇게 하는 게 훨씬 우리에 더 큰 이득 되는 일이다. 남북 평화가 형성되고 위기 없이 우리가 생각하는 경제패러다임 전환을 통한 소득주도 성장을 안정적으로 펼쳐나갈 수 있다면, 청년일자리 창출에 매진하는 할 수 있는 환경 조성에 기여할 수 있다면 장기적으로 보면 이것이 현재의 청년문제[를] 해결하는데도 굉장히 큰 장기적 이득이라는 생각을 우리가 함께 공유했으면 좋겠다" 식의 코멘트는 앞서 말했듯 '진짜로 중요한 게 뭔지는 내가 다 알고 있다'는 식으로 받아들여질 수밖에 없다. 현실감각이 떨어지는 극우파를 제외하면, 남북관계 개선이 매우 중요한 문제라는 데 동의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 사람들이 반감을 갖는 까닭은 그 사실을 모를 정도로 멍청해서가 아니라 그걸 명분으로 '정당한' 의사결정과정을 생략하는 데 동감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관계자의 발언은, 그가 의도하진 않았겠지만, 뭘 모르는 반대자들 대 사태의 진실을 이해하고 있는 청와대라는 구도를 부지불식간에 만들어 버린다.

여기에 "남북 단일팀을 구성하는 문제가 아니었다면 그 누구도 아이스하키팀을 주목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발언이나 "메달권도 아닌데"라는 이낙연 총리의 부적절한 발언*까지 더해지면, 청와대가 아이스하키 선수단 및 단일팀 결성의 반대자들을 깔보고 있다는 그림이 만들어지기 매우 쉽다. 당연하지만 아이스하키 선수단의 실제 실력과 인지도가 얼마나 되는지에 상관없이 그들이 이런 식의 은근한 경멸을 받아야 할 이유따윈 없다. 그것도 그들 자신이 선출한 대표들에게 말이다. 이런 식으로 '뭘 모르는 사람들이 진짜 중요한 게 뭔지 모른다'는 인상을 전파하는 실수는 지난 두 차례 정권에서 여러 차례 반복되었으며, 그것이 사람들의 마음을 점차 얼어붙게 만든 요인 중 하나라는 사실은 의사결정자들에게는 절대로 잊혀져서는 안 된다. 슬프게도 현재의 전개는 점점 더 많은 사람들에게 문재인 정권 또한 마찬가지가 아니냐는 의심을 갖도록 하는 것처럼 보인다.

지금까지 한국사회는 소위 "산업화 세대"와 "민주화 세대"의 갈등에 많은 관심을 기울여 왔고, 그 과정에서 양자와 "민주화 세대" 이후의 사람들 사이에 존재하는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차이는 제대로 조명받지 못했다. 이는 부분적으로 "민주화 세대"들로 구성된 한국 여론·인문사회학계의 주요 발화자들이 자신들의 가치관으로 설명되지 않는 젊은 세대들을 다소 경멸어린 시선으로 단정해왔다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다(가령 저 악명높은 "20대 개새*론"이나 "속물", "생존주의" 같은 키워드를 상기해보라). 그러나 현재의 20-30대들의 가치관은 단순히 윤리나 정치적 의식의 결여라는 설명으로 갈음될 수 없으며, 그들은 분명 그들 고유의 윤리적·도덕적·정치적 정당성에 대한 감각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좋든 싫든 한국 시민사회 전체의 '상식'의 기준이 보다 젊은 세대의 감각에 따라 재조정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여기에 대한 솔직한 인정과 분석이 없다면 정권만 아니라 그 누구라도 그들이 의도하지 않은 결과와 대면하게 될 것이다. 앞으로 청와대가 현재의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를 바란다. 이런 실수는 이미 충분히 구시대적인 것이 되었다.

*[http://news.joins.com/article/22291603 참고. 그는 곧 자신의 부적절한 발언에 사과했다: http://news.donga.com/Top/3/05/20180119/88242652/1]



3&4. 2018년 1월 24일 페이스북.

3.

결국 뉴욕 타임스스퀘어에 문재인 대통령 생일축하 광고가 실렸다(http://v.kakao.com/v/20180124014000143). 이 사안에 대한 나의 감상은 앞서 밝힌 바에서 더할 생각은 없다(본 게시물 1번 글 참조). 합리적 시민의 이상을 포기하지 않은 분들 중 "my president Moon Jae-in [//] We vow to protect you [/] Have confidence in us!" 라는 문구가 정치가 아이돌-팬클럽의 형태로 사적으로 전유되는 광경을 매우 분명하게 보여주며 그 광경이 결코 순전히 긍정적이지 않음을 부인할 분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이 사안 자체에 집중하는 대신 보다 더 근본적인 물음을 생각해보고 싶다. 현대적인 대표민주주의에서 정치적 대표자와 시민(들)은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하는가?

돌이켜보면 실제로 정치적 대표자와 시민들의 관계는 늘 문제적일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전근대로부터 '박씨 왕조'와 그 지지자들까지 이어졌던 "하늘이 내린 왕과 그 신민들"이라는 유형을 이제야 막 벗어났으며, 그 폐해를 충분히 맛보았고 다시는 그러한 관계를 반복할 일이 없기를 희망한다(물론 조선왕조에서 '임금님 리더십'을 찾아내는 연구자들과 또 여기에 펀딩을 퍼붓는 사람들은 이러한 관계유형에 대한 희구가 결코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동시에 한때 근대성의 진정한 지표처럼 여겨졌던 또 다른 유형, 즉 정치적 대표자는 단지 그를 지지하는 개별 시민들의 이해관계 대리자에 불과하다는 식의 '시장주의적' 모델이 갖는 신화 또한 우리에게 더 이상 신비로운 색채를 지니지 못함도 사실이다. 국제정치경제적 조건을 고려할 때, 한국인들의 정치경제적 감각에서 "국익"이 완전히 사라지는 시점은 한국 자체가 소멸하기 전에는 오지 않을 것이다. 좀 더 본질적으로, 개별 의원이나 지자체장이 아닌 전체 국민주권의 대표자가 갖는 정치적 정당성은 현실적으로 일부 시민들의 사적 이익의 집합만으로 지탱될 수 없다. 끊임없이 재구성되는 사적 권익들의 역장(力場)은 좋든 싫든 정치적 대표자가 개별 권익에 종속되지 않기를 요구한다. 도덕성이든 국익이든 무언가 총체적인 것을 지향하는 이데올로기가 반드시 재소환될 수밖에 없는 것은 그런 점에서 필연이다. "직접민주주의"나 "참여민주주의"와 같은 해답지들은 국지적인 거버넌스의 재조정에서만큼이나 국가와 주권, 대표의 문제에서 효력을 지닌 것 같지는 않다.

(*특히 다른 논평자들을 위해 덧붙일 코멘트가 있다면, 우리는 정치적 대표자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서 출발하는 대신 그게 무엇이든 정치적 대표자가 존재한다면 다른 사람들이 그것과 어떤 관계를 형성해야만 하는가에서 출발해야 한다. 단순히 논리적인 측면에서만 사고한다면 전자의 길이 쉬워보이지만, 실제로는 그것이야말로 우리를 가장 나쁜 의미에서의 "형이상학"으로 잡아끄는 함정이다. 이 경우는 관계가 그 포장지로서의 논리에 선행하며, 그 관계 자체를 규정하는 보다 미시적인 요소들에 집중하는 쪽이 낫다)

왕-신민, 판매자-구매자라는 관계유형이 더 이상 지배적일 수 없다고 할 때, 도대체 정치적 대표자와 시민 사이의 관계는 어떤 식이어야 한다는 말인가? 많은 노무현-문재인 지지자들이 결코 짧지 않은 기간 동안 형성해온 아이돌-팬클럽이라는, 그 자체로 강력한 대중동원을 가능하게 하는 관계유형에 무시할 수 없는 부작용이 있다는 것은 쉽게 알 수 있지만, 그러면 어떤 유형이 그 대안이 되어야 한다는 말인가? 우리는 여기에서 오늘날 이 물음에 확실한 답을 갖고 있는 곳은 아직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발견한다(비록 우리의 학문은 여전히 많은 부분에서 그저 서구 학계의 성취를 뒤따라가기에 급급하지만, 우리 사회가 맞이하는 문제는 그 자체로 근대적 분석틀의 한계지점에 있으며 그게 좌파든 우파든 다른 곳의 틀을 그대로 분석하는 걸로 해결될 수는 없다). 경쟁하는 복수의 모델들이 있으나 그 모델들 중 완벽한 헤게모니 혹은 '대안적 성격'을 보전하고 있는 것은 없다. 마치 세속주의적 근대성의 신봉자들이 완벽히 추방할 수 있다고 믿었던 종교가 실제로는 여전히 공적·사적 영역 전반에 걸쳐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듯, 정치적 대표자와 시민들의 관계는 여전히 완벽히 세속화되지 않은 신비로운(mysterious) 영역으로 남아있으며 이것이 단기간에 해결되리란 전망도 없다.

우리는 문제가 무엇인지도, 기존의 선택지들에 어떤 단점이 있는지도 안다. 단지 답을 모를 뿐이다. 연구자들에게 주어진 영역이 하나 있다면, 지금 우리가 갖고 있는 선택지들이 무엇이고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거기에 어떤 문제가 있는지를 파고들어가는 일일 것이다.



4. 비트코인에 대한 논쟁을 아주 멀찍이 바라보면서 떠올리는 몇 가지 쟁점들.

① 엔지니어들의 정치적 유토피아 전통. 서구에 국한해서 볼 때, 우리는 적어도 18-19세기부터 "국가없는 사회"(stateless society)를 꿈꾸는 유토피아적 정치·사회담론이 계속해서 존재해왔음을 알 수 있다. 맑스주의 전통이라는 거대한 항성이 만들어내는 중력의 왜곡을 잠시 걷어낸다면, "국가없는 사회"의 추종자들에게 고도의 기술적 발전은 핵심적인 영역이었으며, 역으로 이 기술적 발전이라는 항을 통해 장인·발명가·기술자본가·기술과학전문가·엔지니어들은 그들 나름의 정치적 상상력을 만들어왔다. 체계 안팎에 대규모의 엔지니어 그룹이 존재했으며 더불어 반체제·반중앙정부 전통이 공화주의와 자유의 언어를 통해 깊게 뿌리박힌 미국은 당연 이러한 담론이 번성하기에 매우 좋은 조건이었으며, 특히 한국 90년대 또한 IT·컴퓨터 영역의 확산과 함께 미국에서 이러한 담론들이 본격적으로 수입되어 자리잡는 시기이기도 했다(컴퓨터에 관심을 가졌지만 GW-Basic 이상의 프로그래밍 언어를 습득하기에는 너무나 고립된 환경에 살았던 어린 시절의 나도 도서관에서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중앙정부와 대자본을 농락하는 미국 해커들의 낭만화된 일대기를 번역소개한 책을 읽었던 기억이 난다).

STS나 과학사 전공자들이 더욱 잘 알겠지만, 90-2000년대 과학고와 카이스트는 어떤 곳이었고, 미래의 과학기술인·엔지이어들이 어떤 정치적 상상력을 어떤 경로를 통해 습득·공유했을까? 90년대 중후반 PC통신을 통해 연결되어 자신들이 제작한 당시로서는 생각보다 높은 수준의 게임을 "반드시 모두에게 무료로" 공유해야 한다는 걸 신념으로 삼았던 (후에 일부는 전업 프로그래머 혹은 게임 제작자가 되는) 아마추어 프로그래머들은 어떤 사람들이었을까? 이들은 정치·사회에 대해 어떤 구상과 신념을 어떤 언어로 가지고 있었을까? 그 세계를 멀리서 얼핏 엿보기만 한 나로서는 구체적으로 파헤칠 수 없겠지만, 확신을 갖고 말할 수 있는 사실은 엔지니어들의 고유한 정치언어 전통이 있으며, 그것이 높은 수준의 과학기술에 기초하여 중앙집권적 권력으로부터 자유로운 사회, 극좌 아나키스트와 극우파 시장주의자가 기꺼이 한 목소리를 내어 긍정할 수 있는 사회에 대한 꿈을 포함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비트코인의 제작자들 및 일부 지지자들은 분명 이러한 유토피아적 전통을 의식적으로 계승하고 있다. 이것이 이 문제를 단순히 "정치와 경제에 대해서 아무 것도 모르는 해로운 이공계"로 치부할 수 없게 하는 지점이다. 이들의 정치언어가 현실에 대한 잘못된 해석을 초래할 순 있겠지만, 이 언어 자체는 단순한 무지의 소산이라기보다는 오랜 기간에 걸쳐 만들어져온 산물이다.

(*일부 좌파·진보는 비트코인 지지자들의 탈중심주의적 정치언어를 단순히 "신자유주의"에 종속된 아무것도 모르는 바보들의 말이라고 비난하는데, 실제로 정치담론의 역사를 들여다본다면 아무 것도 모르는 건 오히려 그쪽이다. 맑스주의의 지대한 영향력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언제나 여러 급진적·진보적 정치언어들 중 하나였을 뿐 유일하게 신성한 위치를 점한 적은 없었다)

② 첨단기술과 국익을 연결시켜온 한국의 전통. 가끔씩 현대 한국 학문의 역사를 매만질 때가 있을 때마다 생각하는 거지만, 한국의 국가학문을 하나 꼽으라면 말할 필요도 없이 그 답은 공학이다. 한국은 60년대 이래 공학에 지속적으로 엄청난 투자를 해왔고 과학인들은 어떤 형태로든 기술과학투자 거버넌스에 영향력을 끼쳐왔다(많은 젊은 이공계인들은 국가와 행정이 자신들의 운명을 비틀어놓고 있다고 원망하지만, 그들이 정말로 국가와 행정이 별다른 관심을 주지 않았던 인문사회계를 들여다본다면 생각이 조금 달라질 것이다). "4차 산업혁명"과 "국민의 먹거리"를 연결시키는 레토릭은 전혀 새로운 게 아니며, 동시에 과학의 국익종속적 성격을 규정한 헌법조문을 수정한다고 해서 바뀔 것도 아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첨단기술"은 정치적으로 양가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다. 한편으로 앞서 설명한 것처럼 급진적인 아나키즘·시장자유주의적 유토피아의 토대가 되면서도, 동시에 한국이 국제무역경쟁에서 생존하기 위한 핵심적인 요소로서 매우 국가친화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다. 정부는 기술발전·기술자들에게 완전한 자유를 부여할 수 없는데 이는 결코 그들을 포기할 수 없기 때문이다. 비트코인 문제에 대한 정부의 태도가 결코 단순하지 않은 것은 실제로 한국에서 국가와 기술의 관계가 결코 단순하지 않기 때문이다.

③ 투자/투기의 기회에 대해 특히 상대적으로 젊은 사람들이 지닌 열망. 부동산 투기가 금수저를 빼고는 사실상 불가능해진 시점에서 단기간에 적은 액수를 투자해 엄청난 수익을 낼 수 있을 것처럼 보이는 비트코인이 무척 매력적으로 다가왔음은 분명하다. 이번 사태에서 독특한 점은 평소에 딱히 주식투자를 하지도, 로또복권을 사지도 않던 평범한 지인들까지도 비트코인에 관심을 갖고 조금씩 투자를 해보았다는--그리고 자신들이 못해도 용돈벌이 정도는 할 거라고 믿는다는--사실이다. 그건 상속을 제외하면 다른 방식으로 부와 경제적 안정을 성취하는 길이 거의 불가능하다는 인식이 확산되어 있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 비트코인이 다수의 계급상승을 보장하는 확실한 기회라는 주장은 물론 픽션이다. 그러나 그것이 픽션으로 받아들여지기 위해서는 경제적 안정성을 보장하는 다른 보다 유력한 선택지가 있어야만 한다. 우리는 지금 그런 선택지 따위는 없음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이 픽션을 몰아낼 수 없다.

④ 초기 개입 시점에서 문재인 정부의 그다지 섬세하다고 보기는 어려웠던 모습들. 최초 비트코인 관련 규제 언급 시에 강한 문재인 지지성향을 띤 경제학/금융 관련 업무 종사자들까지도 (정권 자체에 대해서는 아닐지라도) 우려와 반감을 나타냈음은 쉽게 관찰할 수 있는 사실이다. 현 정권이 "경제나 기술 관련 분야에 대해서는 아마추어"가 아닐까라는 의문은 사실 여부를 떠나서 (나는 고등교육부분에 관해서는 이 정권 또한 아마추어라고 확신하지만) 점차 커졌으며, 이번 사태도 그런 의혹을 부풀리는 데 일부 기여했다.

⑤ 평창 올림픽 여성 아이스하키 국가대표팀 단일팀 형성과 함께한 비판자들의 프레이밍. 비트코인 규제 및 그에 대한 거부감은 우연히도 (특히 2030 세대에서 반발심이 컸던) 단일팀 논란과 비슷한 시기에 벌어졌고, 그 내막이 어찌되었든 "2030세대의 불신을 받는 문재인 정권"이라는 인상을 주기 쉬운 상황이 되었다. 그리고 우리는 조선일보나 중앙일보를 포함해 우파적 비판자들이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이 프레임을 보다 확실한 걸로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관찰할 수 있었다. 비트코인 사태에 대한 담론분석을 할 때 이처럼 언론들이 어떤 프레임을 채택했고 또 확산시키고자 했는가 하는 문제가 간과되어서는 안 된다.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이번 일을 통해 과연 전통적인 보수언론이 과연 6070의 대변자에서 2030 내 중도/보수층의 새로운 대변자가 되려는 선택까지 도달할지의 여부에 있다.

꾸역꾸역 시험공부를 하느라 이 문제들을 제대로 파고들 시간을 낼 수 없는 게 아쉬운 데, 어쨌든 결론은 다음과 같다. 합리적인 논평자들이라면 2018년 초 한국의 비트코인 논쟁을 관찰하면서 ①이게 다 탐욕 때문이다 ②경제도 모르는 해로운 공돌이들이 또 ③문재인 지지율 하락은 기레기들과 자한당 놈들이 만들어낸 프로파간다의 결과물이다 ④정치가들은 과학기술 모르면 초치지 말아라 (...) 등등의 뻔한 얘기 반복하지 말자. 현재의 가열된 논쟁은 위에 열거한 다섯 가지 측면에 대한 고려 없이 결코 전체적으로 파악할 수 없다.

...그러니까 제대로 된 정치사상사/정치담론 연구가 할 일이 매우 많은데 한국엔 학과도 전공도 연구소도 직장도 없고 사람들이 이게 왜 필요한지도 모르니 나는 다시 시험이나 공부하러 갑니다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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