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성호, "문빠에 대한 철학적 변론 III"에 대한 비판적 논평

Comment 2017. 12. 14. 00:03
*2017년 11월 28일 작성한 글.


최성호 선생의 "문빠에 대한 철학적 변론" 시리즈가 또 나왔다(http://www.kyosu.net/news/articleView.html?idxno=40287). 거의 유사한 내용을 반복할 뿐 논리적 진전은 좀처럼 이루어지지 않는 시리즈를 수 회에 걸쳐 게재해주고 있는 <교수신문>의 인내와 관용에 놀라움을 금치 않을 수 없다. 필자에겐 유감스러운 일이지만, 그의 새 기고문은 '문빠는 비합리적으로 행동한다 해도 참된 민주시민이기 때문에 정당하다'는 그의 주장을 이번에도 정당화하지 못하고 있으며, 나는 지난 번의 글 이후 추가적 논증을 할 가치를 느끼지 못한다(http://begray.tistory.com/437). 대신 이번에도 내 반응을 체크하고 계실 최선생과 다른 독자들의 공익을 위해 몇 가지만 짧게 지적하도록 하자.

1. 필자는 제이슨 브레넌(Jason Brennan)의 <민주주의를 거스르며>(Against Democracy)의 논지를 오독 혹은 왜곡한다. 브레넌의 책은 ①시민을 합리적인 정치판단이 가능한 벌컨(Vulcan), 정치에 무관심한 호빗(Hobbit), 비합리적으로 행동하는 열광적 훌리건(Hooligan)으로 나눈 뒤 ②숙의민주주의든 참여든 대체로 호빗을 훌리건으로 만들 뿐 벌컨으로 만들어주지는 않으므로 호빗과 훌리건을 정치에서 배제하는 게 최선이며, ③따라서 시민들의 정치적 판단력을 테스트하여 통과자(=벌컨)에게만 투표권을 배부하는 게 맞다고 주장하며 이를 민주주의를 대체할 "지식을 갖춘 이들의 통치"(epistocracy)라 부른다. 쉽게 말해 (브레넌 자신처럼) 자격을 갖춘 합리적인 사람들이 있으며 그들만이 정치에 참여하는 게 맞다는 게 브레넌의 주장이지, 필자가 기술하듯 합리적인 시민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건 전혀 그 책의 주장이 아니다. 사실 브레넌의 주장을 그대로 적용할 경우, 필자가 옹호하는 문빠=훌리건은 애초에 정치에서 배제되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당연히 브레넌은 매우 우파적인 스탠스에 속해 있다).

즉 최성호 선생의 글은 과거의 기고문에서부터 지속적으로 브레넌의 책을 그 본 논지와 매우 상이하게 인용하고 있다. 브레넌의 책이 학술서치고 전혀 어렵지 않게 쓰여졌고 주요 논지를 계속해서 반복한다는 걸 감안하면, 선생이 ① 평이한 수준의 정치학 저술조차도 제대로 소화를 못하거나 ②한국에 번역이 안 되었다는 이유로 책의 내용을 곡해해서 인용해도 괜찮다고 생각하거나 ③매우 파편적으로 훑어본 책을 불성실하게 인용하고 있다는 세 가지 가능성 중 하나를 떠올려도 크게 무리는 아닐 것이다.

2. 완벽히 불편부당한 합리적 개인이 있을 수 없으므로 열광적 정치참여자의 비합리적 행위를 나무랄 수 없다는 큰 논지 자체가 허수아비 논증이다. '비판적 지지자'가 될 것을 요구하는 사람이 순도 100% 합리성을 주장한 것도 아니고, 정치적 열정을 간직하면서도 합리적으로 판단하는 것--적어도 그러려고 노력하는 것--이 불가능한 일도 아니다. "합리적 개인"이 불가능하므로 객관성·합리성이란 척도 자체를 지워버리자는 주장을 할 거면 완벽한 의사소통이란 불가능하니 그냥 어떠한 글도 쓰지 않는 선택까지 하시는 게 일관된 태도이지 않을까.

3. "삼인칭적 관찰자의 관점에서 정치적 사안들로부터 객관성의 거리를 두고 냉정하고 불편부당하게 판단하고 행동하는 이는 민주주의의 주인공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 나는 그 주인공이 벌컨이 아니라 일인칭적, 주관적, 실천가적 관점에서 흔들림 없는 열의, 관심, 애착으로 민주주의적 가치를 돌보고 보살피는 정치참여형 시민들이라고 본다."

: 이건 집회에서 한번쯤 외쳐볼만한 구호일 수는 있어도 철학교수에게 주어진 <교수신문> 칼럼에서 진지하게 읽을 진술은 아니다. 무엇보다 이 글은 두 진술의 정당성을 전혀 논증하지 않는다.

4. "지금까지 많은 정치이론가들이 이런 방관자의 합리성 개념을 은연중에 가정하며 벌컨이라는 헛된 환영을 쫓았다는 사실에 나는 탄식한다. 우리가 진정 필요로 하는 합리성은 일인칭적, 주관적, 실천가적 관점에서 민주주의적 가치를 돌보고 보살피는 이의 합리성이다. 이런 새로운 합리성 개념을 통하여 벌컨을 대체할 새로운 민주적 시민상을 정립하는 것, 그것이 이 시대 정치이론가의 가장 중요한 책무라 나는 믿는다."

"쿤으로 대표되는 역사적 과학철학자들은 기존의 무심하고 불편부당한 벌컨의 과학자상을 대체하는 새로운 과학자상을 정립했고, 그 과정에서 과학적 신념을 일인칭적, 주관적, 실천가적 관점에서 돌보고 보살피는 행위의 합리성 개념을 도입하였다. 적어도 그들의 과학철학에 대한 나의 해석은 그렇다. 과학적 합리성에 대한 과학철학자들의 논의는 민주주의를 연구하는 정치이론가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 최성호 선생의 정치학에 대한 이해수준을 전혀 신뢰할 수 없는 상황에서 이런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 정치학의 각 분과들마다 차이가 있겠지만, 정치사상사는 반세기 전부터 맥락주의가 확장되어왔으며, 정치이론이나 정치과학 분과 또한 무결점의 합리적 개인이라는 개념을 과거 그대로 고수하고 있을 것으로 생각되진 않는다(애초에 심리학·행동경제학을 접목하는 정치학자라면 저런 완벽히 합리적인 인간관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할 리가 없다). 정치연구를 얼마나 어떻게 공부했는지 모르겠지만, 솔직히 정치철학에서 일급의 저자라고 하긴 어려운 이의 책 한 권만 지속적으로, 그것도 매우 왜곡된 방식으로 인용하는 모습을 보여준 과학철학 연구자가 정치이론가·정치연구자들에게 저런 훈수를 둔다는 건 당황스럽다.

나는 정치철학·사상사 분야에서 아마추어적 수준의 독서를 쌓아온 데 불과하지만, 그의 훈수가 정치학 분야의 종사자들에겐 무례한 불쾌감 이상을 주긴 힘들 거라 생각한다. 이미 1990년대 말에 로버트 달의 <민주주의와 그 비판자들> 한국어판이 나왔고, 최근 이언 샤피로의 <정치의 도덕적 기초>(원저는 2003)도 번역되었다. 그리고 달과 샤피로 모두 완벽히 합리적인 개인이라는 인간관에 의지하지 않으면서도 민주주의의 정당성을 논구한다. 최성호 선생은 도대체 어떤 경위로 오늘날의 민주주의 이론가들이 합리적 개인 개념에 의존하고 있다고 생각하게 된 것인가? 과학철학·과학사 분야에서 수십 년 전에 발생한 '근대합리주의' 비판이 정치이론·철학·사상 연구자들에게 아직까지도 도달하지 않았을 거라고 그가 감히 전제하는 근거는 무엇인가?

내가 이야기할 수 있는 건 한 가지 뿐이다. 정치학계를 부당하게 깎아내린다고 해서 설득력 없는 주장이 실제보다 더 뛰어나게 보이리라 믿는 건 착각이다. 정치적으로 타당하고 유용한 주장을 하고 싶다면 그냥 정치에 대한 연구를 따라간 뒤에 조언과 논쟁을 통해 다듬어진 이야기를 조심스럽게 꺼내보는 게 가장 쉽고 빠른 길이다. 왜 정도(正道)를 안 가고 계속 엉뚱한 길을 두드려보는지 안타깝기 그지 없다. 물론 선생의 과학철학자로서의 업적에 높은 기대를 가졌을 여러 독자들만큼 안타까운 이들은 없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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