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순수사회를 노래하는가?: 주디스 버틀러, 『혐오 발언』 리뷰

Reading 2017. 4. 27. 00:58

이 글은 본래 종합 인문사회비평지 <말과활> 12호(2017년 1월 5일 출간, 링크는 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99985861 참고)에 실리기 위해 작성되었다. 이후 3개월이 지나 13호가 나왔으므로, 사전에 편집위원에게 구한 양해에 따라 블로그에 게재한다--블로그 게재를 허락해준 <말과활> 편집위원께 감사드린다. 지금 올리는 것은 지면으로 출간된 원고와 일부 다른 수정고를 기준으로 각주 세 군데에 각각 추가 참고문헌을 덧붙였으며, 여기에 블로그에서의 가독성을 위해 문단 간 빈 줄을 하나씩 삽입하고 폰트를 수정한 판본이다. 마지막으로 <말과활> 12호를 통틀어 아마도 가장 이질적인 정지적·이론적 견해를 담았을 나의 글을 기꺼이 실어준 <말과활> 측에 다시 한 번 감사드린다.


*여기에 올리는 글은 출간된 판본과 똑같지는 않으므로 간략한 설명을 덧붙인다. 2016년 10월 하순 초고를 받은 <말과활> 편집위원 측은 표기 상의 형식을 포함해 몇몇 대목에 대한 수정을 제안했다. 그 사이에 이 리뷰를 읽는 독자들이 참고할 수 있는 몇몇 문헌을 찾아 읽었던 나는 11월 초 제안된 수정사항 및 추가 각주를 덧붙인 수정원고를 작성해 재발송했고, 나와 편집위원은 그 수정된 판본을 최종출간원고로 삼기로 합의했다. 원래 출간예정일보다 꽤 늦어진 <말과활> 12호를 받아보았을 때 나는 누군가의 알 수 없는 착오로 인하여 내 글의 초고에서 표기 형식만 일부 수정된 원고가, 다시 말해 나의 수정이 전혀 반영되지 않은 원고가 인쇄되었음을 알게 되었다(<말과활> 측의 명예를 위해 덧붙인다면, 편집위원측에서 먼저 내게 이 사실을 확인해보라고 요청하지 않았더라면 나는 이 사실을 매우 뒤늦게서야 알게 되었을 것이다). 다행히 사실상 주석과 일부 인용을 제외하고 초고와 수정고 사이에 근본적인 차이가 없었을 뿐더러, 초고는 이미 그대로 출간되어도 내 명예에 별다른 문제가 되지 않을 상태였다. 따라서 나는 <말과활> 측으로부터 사과를 받고, 대신 여기에 내 생각에 좀 더 완성된 형태의 판본을 올리는 것으로 만족하기로 했다.





누가 순수사회를 노래하는가?:

주디스 버틀러, 『혐오 발언: 너와 나를 격분시키는 말 그리고 수행성의 정치학』1)

이우창(인문학 연구자)


주디스 버틀러의 1997년 저작 『혐오 발언』을 쥐어든 2016년 한국의 독자들은 이 책에서 무엇을 읽을 수 있을까? 버틀러의 이론 혹은 사상에 관심을 갖고 있는, 그러나 분명 쉽게 읽힌다고는 말하기 힘든 그의 영어를 곧바로 접하기엔 부담스러웠을 독자들에게 이 책은 저자가 고유한 정치철학·주체이론을 형성해나가는 궤적을 보다 세심히 따라가 볼 수 있도록 해주는 징검다리처럼 다가올 것이다. 우리는 버틀러의 이론적 궤적을 설명함에 있어 한국에서 통상적으로 퍼져 있는 서사를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즉 비교적 전문적인 여성주의·젠더 이론에서 출발하여 특히 2004년 『불확실한 삶』을 거쳐 “타자의 윤리학”, “새로운 보편적 윤리의 가능성을 모색”하고,2) 나아가 비교적 최근작인 『박탈』에서 잘 드러나듯 이제는 난민 문제를 포함한 국제적인 정치경제적 이슈까지도 이론적 성찰의 대상으로 삼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서사를 받아들인다고 할 때, 『혐오 발언』은 저자가 개진하는 윤리·정치적 논변의 정당성이 고유의 주체 이론에 근거한다는 점에서 버틀러에게 양자가 결코 분리될 수 없음을, 혹은 그의 이론적 궤적이 단순히 주체에서 윤리·정치로의 이행으로 설명될 수 없음을 분명히 보여준다. 이후 2003년 출간된 『윤리적 폭력 비판』에서 보다 상세한 이론적 논의가 전개되는 걸 볼 수 있지만,3) 『혐오 발언』에서 버틀러는 언어 이론과 정신분석의 결합을 통해 견고한 개체성의 장벽 안에 머무는 대신 언제나 타자와의 대면 및 ‘상처받을’ 가능성에 노출되어 있는 “취약한”(vulnerable) 주체 모델을 제시한다. 여기에는 우리가 유동적인 정체성을 가질 뿐만 아니라 타자에게, 자신이 속한 세계에 새로운 보편성을 제시할 수 있는 역량의 주체이기도 하다는 빛나는 자신감 또한 깃들어 있다.


물론 『혐오 발언』은 구체적인 시공간적 맥락에 놓인 언어적 실천이기도 하다. 저자 자신이 직접 “이 책의 주된 관심사는 수사적이고 정치적”이라고 밝히고 있듯(38), 『혐오 발언』은 1990년대 미국의 포르노그라피·인종주의·군대 내 동성애 문제 등을 둘러싸고 벌어진 논쟁에 개입하고자 한다. 논쟁의 전체적인 맥락과 저자의 개입이 어떠한 효과를 산출했는지를 다루는 일은 현재 나의 역량을 초과하는 일이나, 버틀러가 국가의 법적 규제가 공중 혹은 시민사회의 언어적 실천을 검열하고 위축시킬 수 있다는 프레임 하에서 이 상황을 이해하고 있으며 독자들 또한 혐오 발언(hate speech)의 국가규제를 거부하도록 설득하고자 한다는 점은 분명하다. 이론적 난해함이 지나치게 강조되다보니 정작 그가 얼마나 뛰어난 수사를 구사하는 필자인지는 잘 언급되지 않는 편인데, 예컨대 2장의 “국가 발언/혐오 발언”(State Speech/Hate Speech) 절(183-95)은 설령 저자의 입장에 동의하지 않는 독자라 할지라도 기술적인 측면에서는 감탄할 만큼 섬세하고 교활하게 논지를 전개하는 대목으로, 한국어판 번역 또한 이러한 탁월함을 무리 없이 옮겨놓은 것처럼 보인다.


시선을 돌려 이 책이 직접적으로 겨냥하고 있는 1997년의 미국이 아닌 그보다 20년 가까운 시간이 흐른 다른 사회, 즉 지금 여기에서 어떻게 읽힐지를 살펴보자. 역자 본인이 해제의 서두에서 직접적으로 언급하듯, 2016년의 한국사회는 “일베, 김치녀, 소라넷, 강남역 살인 사건, 여성 혐오 랩 가사, 퀴어문화축제, 고위 공직자의 ‘개돼지’ 발언, 데이트 폭력, 표현의 자유, 메갈리아” 등을 포함해 혐오표현을 둘러싼 이슈가 흘러넘치는, 좀 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그 범람이 드디어 인식되고 있는 곳이다(305). 한편으로 이제까지 암묵적으로 행해지거나 당연하게 받아들여져 왔던 언어가 혐오의 범주를 통해 새롭게 규정되었으며, 다른 한편으로 기존의 혐오수행자를 직접적으로 겨냥한 ‘혐오 발언’이 폭발적으로 증대했을 뿐만 아니라 “미러링”과 같은 이론적 자기정당화까지 제시하고 있다.4) 이러한 맥락에서 출간된 『혐오 발언』 한국어판이 특히나 반(反)여성혐오적 혐오 발언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메갈리아 커뮤니티와 전적으로 무관하게 남아있을 수 있다면 그쪽이 오히려 더 기이한 일일 것이다. 실제로 이 책을 소개한 주요 언론기사는 (출판사의 보도자료와 비교해야겠지만) 『혐오 발언』을 사실상 메갈리아 측이 주장해온 미러링의 정당성을 뒷받침하는 텍스트로 바라보며, 한국어판 역자 또한 『한겨레』와의 인터뷰 및 보다 앞서 간행된 자신의 논문에서 그와 같은 입장을 분명하게 피력한다.5)


그렇다면 그러한 정당성은 구체적으로 『혐오 발언』의 어떠한 논리에 의해 뒷받침 되는가? 각각 (이 책으로 철학석사학위논문을 취득한) 역자와 한국 여성주의 이론연구의 대표적 인물에 의해 작성된, 따라서 적어도 한동안은 이 책의 한국 수용에 중요한 영향력을 행사할 세 편의 리뷰가 제시하는 버틀러의 입장은 다음의 세 진술로 축약될 수 있을 것 같다.6) ①혐오 발언의 영향력은 제한적이며, 혐오 발언의 주체 또한 전능하지 않다. ②혐오 발언의 청자는 이 발언을 다르게 전유하거나 되받아칠 수 있는 저항의 역량을 보유하고 있다. ③국가의 법적 규제는 청자가 보유한 저항의 역량까지 제약할 수 있으므로 거부되어야만 한다. 『혐오 발언』 한국어판 정면 표지에 새겨진 문구, “국가는 혐오 발언을 생산한다”는 말은 이중 세 번째 주장이 갖는 무게를 강조한다. 임옥희의 『프레시안』 서평 또한 참고하자: “국가는 천연덕스런 얼굴을 하고서 자신의 폭력성을 은폐하고 혐오 발언의 책임을 개별 발화자에게 떠넘긴다. [...] 국가법은 자신의 폭력성을 은폐하고 법을 인용하는 개인에게 자율성을 부여해 주면서 책임을 전가한다. 혐오 발언의 책임을 개인에게만 묻는다면 국가법의 폭력성은 은폐된다. 이렇게 본다면 혐오 발언을 규제하기 위해 법을 제정하자는 호소는 아이러니하게도 혐오 대상을 끊임없이 재생산하는 국가와 공모하게 된다.” 이것이 다소 과도한 감은 있으나 버틀러의 입장, 적어도 『혐오 발언』에 제시된 바와 크게 다르지는 않다. 그러나 특히나 정치적 행위를 위한 전략의 설정이라는 관점에서, 우리는 이러한 주장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 우리는 국가와 사회의 관계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다시 버틀러의 저작을 따라가 보면, 우리는 적어도 『혐오 발언』 이후의 여러 지면에서 그가 국가와 법에 대해 명시적으로 비판적인 견해를 지니고 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이러한 입장이 가장 잘 드러난 대목을 바로 2000년 출간된 『우연성, 헤게모니, 보편성』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여기에서 버틀러는 특히 동성결혼 합법화 운동을 비판적으로 거론하면서 “결혼(혹은 군대) 제도에 참여할 자격을 청원하는 건 바로 그 제도의 권력을 확장시키고, 그 권력의 확장 속에서 국가에 의해 합법화 되는 친밀한 결연의 형태와 그렇지 않은 형태의 구별이 강화될 것”이라고, 다시 말해 이처럼 국가제도에 기입되고자 하는 운동이 “국가 자체의 헤게모니”를 강화시킬 것이라고 말한다.7) 그렇다면 이러한 국가권력에 대항하여 버틀러가 지향하는 지점은 어디인가? 이어지는 대목을 보자: “다양한 종류의 법적 자격을 위한 전제조건이라는 지위를 결혼에서 제거하는 [...] 움직임 속에서 지배적 용어를 해체하고 문화와 시민사회의 수준에서 다양한 형태의 가능성을 증대시키는 비국가 중심의 결연 형태로 돌아가는 길이 능동적으로 모색될 것이다”(247). 요컨대 적어도 이 시기의 버틀러에겐 국가·법이 포괄하지 못하는 새로운 보편성을 탐색하고 그것이 국가의 침투에 의해 억압 혹은 규제되지 않도록 사회적인 영역을 지켜내는 것이 올바른 정치적 지향점으로 주어져있는 듯 보인다.8) 바로 혐오 발언이 국가로부터 규제받지 않고 시민사회 내 발화자들을 위한 발화양식으로 남아 있어야 하는 것처럼 말이다.9)


서구근대정치사상에 어느 정도 익숙한 독자라면 버틀러의 전제가 국가·법·정부 대 자율적인 시민사회라는 오래된 구도의 연장선상에 있음을 쉽게 알아차릴 것이다. J. G. A. 포칵의 탁월한 저술이 그려내듯 18세기 초 잉글랜드 의회에서 이러한 대립구도는 전제적인 지배를 획책하는 타락한 왕당파들의 궁정(court)·중앙정부와 이에 굴하지 않고 독립적인 토지보유에 근거해 자율적인 역량을, 그리하여 미덕(virtue)을 보존하는 지방파(Country members)라는 형태로 먼저 등장한다.10) 19세기부터 오늘날의 급진좌파들에게까지 이어지는 국가의 억압 대 시민사회의 저항이라는―오늘날 한국인들에겐 국가폭력 대 민중이라는 구도로 좀 더 친숙할―고전적인 형태로 계승되어 온 이러한 이항대립에서, 시민사회는 인민해방의 유토피아적 기획을 실현시키거나 자율성을 보존할 수 있는 동력의 원천으로 제시되며 이때 국가의 통치가 초래할 굴종과 타락으로부터 시민사회의 영역을 지켜내는 것이 중요한 정치적 과제가 된다.11) 물론 현실의 시민사회가 그러한 희망에 부합하리라는 보장은 경험적으로든 선험적으로든 주어져 있지 않으며, 그런 점에서 ‘순수한 시민사회’를 추구하는 입장은 이론이라기보다는 일종의 신학적 믿음에 가깝다.12) 슬라보예 지젝은 버틀러의 입장이 맞이할 난점을 정확하게 지적한다: “버틀러는 해방적 투쟁을 일차적으로 국가의 규제 메커니즘에 맞서 시민사회 내에서 발생하는 이런 주변적 행위자들의 저항 속에 위치시킨다. [...] 오늘날에는 심지어 국가와 시민사회의 바로 그 대립조차 전적으로 양가적이다. 놀랄 것도 없이 도덕적 다수파는 스스로를 자유주의 국가의 ‘진보적’ 규제 개입에 맞선 국지적인 시민사회의 저항으로 제시한다(그리고 사실상 그런 것으로서 조직된다)”(『우연성, 헤게모니, 보편성』 423).


버틀러의 입장이 당시의 맥락에서 어떤 의미를 지녔는지, 그리고 오늘날 혐오발언에 대한 규제가 어떻게 이루어져야 하는지를 여기서 물을 생각은 없다.13) 그러나 버틀러의 ‘사회신학’ 혹은 국가혐오를 2016년의 한국사회에서 그대로 되풀이하는 일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따져볼 필요는 있다. 세 가지를 지적하고 싶다. ①특히나 오늘날 한국에서 순수한 시민사회, 국가의 통치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영역은 존재하지 않는다. 애초에 우리가 맞닥트린 혐오발언의 범람 자체가 국가의 폭력독점으로 인해 사회구성원들이 행사할 수 있는 폭력의 범위가 지극히 제한된, 엘리아스(Norbert Elias)의 표현을 빌리자면 “문명화”된 상황의 산물이다. ②다른 누구보다도 푸코가 잘 보여주었듯, 국가의 통치기술이 단순한 억압과 금지, 처벌 이상의 것을 수행하게 된지 이미 오래다. 비록 현재 우리의 정부가 매우 놀라운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고 해서 그것이 국가의 통치기술이 특정한 환경을 조성하고 행위자들에게 역량을 부여하고 있음을 부인하도록 하지는 않는다.14) ③무엇보다도 ‘순수한 시민사회’와 국가를 나누고 후자를 거부하는 태도는 여성주의자들을 포함한 우리들로 하여금 국가·정부가 보유한 광범위한 자원과 영향력에 대한 접근 자체를 하지 못하도록 가로막는다. 다시 말해 국가에 대한 거부는 우리를 더 자유롭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행위영역을 제약한다. 익숙한 표현대로 한국사회는 정말로 “기울어진 운동장”이며, 지금도 혐오세력들은 공적 영역에서의 발언권을 획득하기 위해 정치세력화하고 있다.15) 이러한 상황에서 공적 영역을 활용하지 않는 것은 단지 어리석을 뿐만 아니라 자멸적이기까지 한 선택이다. 국가 규제에 대한 거부는 하나의 통치방식으로서 전술적으로 선택될 수는 있어도 그 자체가 원칙이자 신념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런 점에서 버틀러의 빼어난 작품은 적어도 한국 현실정치의 관점에서는 비판적으로 읽혀야 한다.


1) 주디스 버틀러, 『혐오발언: 너와 나를 격분시키는 말 그리고 수행성의 정치학』, 유민석 역, 알렙, 2016. 원서 서지사항은 Butler, Judith. Excitable Speech: A Politics of the Performative. NY: Routledge, 1997. 이후 본문 인용 시 한국어판 쪽수만 표기.

2) 인용은 각각 임옥희, 『주디스 버틀러 읽기: 젠더의 조롱과 우울의 철학』, 여이연, 2006, 26쪽 및 주디스 버틀러, 『불확실한 삶: 애도와 폭력의 권력들』, 양효실 역, 경성대학교 출판부, 2008, 208쪽의 역자후기에서 참조.

3) 주디스 버틀러, 『윤리적 폭력 비판: 자기 자신을 설명하기』, 양효실 역, 인간사랑, 2013.

4) 일부 옹호자들의 주장과 달리, 여성혐오자들을 겨냥한 “미러링”의 언어가 그 자체로 강력한 혐오감을 표출하는 사례는 손쉽게 찾아볼 수 있다. 물론 이것이 여성혐오의 등가물이 될 만한 “남성혐오”가 존재함을 뜻하지는 않는다.

5) 관련 언론 기사로는 김계연, 「메갈리안을 위한 변론…주디스 버틀러 '혐오 발언'」, 『연합뉴스』, 2016년 8월 9일(http://www.yonhapnews.co.kr/bulletin/2016/08/08/0200000000AKR20160808156900005.HTML); 이유진, 「혐오 발언, 규제할 것인가 되받아칠 것인가」, 『한겨레』, 2016년 8월 11일(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756300.html); 김남중, 「혐오 발언에 맞서라, 되받아쳐라」, 『국민일보』, 2016년 8월 10일(http://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923602021&code=13150000): 김지원, 「‘미러링’의 되받아치기서 ‘의미 전복’의 역설적 희망」, 『경향신문』, 2016년 8월 12일(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608121921005) 참조(최종접속일자는 모두 2016년 10월 24일). 역자의 글은 유민석, 「혐오발언에 기생하기: 메갈리아의 반란적인 발화」, 『여/성이론』 33(2015년 12월): 126-152를 보라.

6) 임옥희. 「“그래, 내가 '잡년'이다 어쩔래?”: [프레시안 books] <혐오 발언>」, 『프레시안』, 2016년 9월 30일(http://www.pressian.com/news/article.html?no=142073): 유민석, 「혐오의 시대에 혐오에 저항하는 법: 혐오 발언에 말대꾸하기」, 『동국대학원신문』, 2016년 9월 26일(http://www.dgugspress.com/news/articleView.html?idxno=1589): 유민석, 「“국가는 혐오 발언에 대한 어떤 규제도 제정하지 말아야”: 『책을 말하다_ 『혐오 발언』 주디스 버틀러 지음|유민석 옮김|알렙|367쪽|18,000원」, 『교수신문』, 2016년 8월 30일(http://www.kyosu.net/news/articleView.html?idxno=32889). 최종접속일은 모두 2016년 10월 24일. 임옥희의 입장은 『주디스 버틀러 읽기』 6장과 7장에도 개진되어 있다.

7) 주디스 버틀러, 에르네스토 라클라우, 슬라보예 지젝, 『우연성, 헤게모니, 보편성: 좌파에 대한 현재적 대화들』, 박대진, 박미선 역, 도서출판b, 2009, 244. [이러한 입장이 놓인 맥락을 이해하기 위해 20세기 미국 정치사상·정치이론의 역사를 개괄하는 Terence Ball 의 짧고도 명료한 글 "Discordant Voices: American Histories of Political Thought"(The History of Political Thought in National Context, Dario Castiglione & Iain Hampsher-Monk eds., Cambridge: Cambridge UP, 2001, 107-33), 특히 여성주의 정치학·다문화주의를 다룬 121-25쪽의 대목 또한 참고할만하다. - 2017년 4월 26일의 덧붙임]

8) 이 시기 버틀러의 다른 저작, 가령 『안티고네의 주장: 삶과 죽음, 그 사이에 있는 친족관계』, 조현순 역, 동문선, 2005, 특히 72를 보라. 내 생각에 적어도 『불확실한 삶』과 가야트리 스피박과의 대담집 『누가 민족국가를 노래하는가』(2007, 한국어판은 주혜연 역. 산책자, 2008)까지 이러한 입장은 유지되는 것 같다. 다만 2013년 출간된 아테나 아타나시오우와의 대담에서 그는 좀 더 조심스러운 태도를 취한다: 『박탈: 정치적인 것에 있어서의 수행성에 관한 대화』, 김응산 역, 자음과모음, 2016, 140-43.

9) 여성주의 이론에서 국가의 문제에 대한 개괄로는 The Oxford Handbook of Feminist Theory, Lisa Disch&Mary Hawkesworth eds., NY: Oxford UP, 2016 에 수록된 Johanna Kantola의 글 "State/Nation"(915-33)을 보라; 이중 버틀러의 국가 이해 및 그에 대한 비판의 소개로는 920쪽을 참고. 같은 선집에 수록된 신기영(Ki-young Shin)의 "Governance"(304-25) 및 Emanuela Lombardo&Petra Meier의 "Policy"(610-31)도 함께 보라.

10) J. G. A. 포칵, 『마키아벨리언 모멘트: 피렌체 정치사상과 대서양의 공화주의 전통』, 곽차섭 역, 전2권, 나남, 2011, 특히 12장 “궁정·지방·상비군”을 참조. 이러한 ‘궁정 대 지방’ 모델이 오늘날의 미국에까지 지속되고 있다는 지적으로는 같은 저자의 "From The Ancient Constitution to Barbarism and Religion: The Machiavellian Moment, the History of Political Thought and the History of Historiography," History of European Ideas 2016, DOI: 10.1080/01916599.2016.1198517 를 보라.

11) 이 주제에 대해 한국어로 읽을 수 있는 정치사상사적 저술은 유감스럽게도 많지 않은데, 조금 오래되었긴 하지만 여전히 흥미로운 글로 셸던 월린, 『정치와 비전: 서구 정치사상에서의 지속과 혁신』, 제2권, 강정인·이지윤 역, 후마니타스, 2009의 9장과 10장을 보라(원문 초판은 1960년에 출간되었다).

12) 시민사회 자체가 서구 18세기에 대두한 개념으로서 “통치테크놀로지의 상관물”이라는 푸코의 지적을 참고하라: 『생명관리정치의 탄생: 콜레주드프랑스 강의 1978~79년』, 오트르망 역, 난장, 2012, 12강.

13) 후자의 물음에 관해 한국어로 읽을 수 있는 문헌 중 가장 뛰어난 것들 중 하나로는 다음을 보라: 홍성수, 「혐오표현의 규제: 표현의 자유와 소수자 보호를 위한 규제대안의 모색」, 『법과사회』 50(2015년 12월): 287-336. [이 논문과 함께 국가인권위원회가 2016년 12월에 발간한 보고서 『혐오표현 실태조사 및 규제방안 연구』를 보라. 더불어 이제 우리는 이 문제에 관한 제러미 월드론(Jeremy Waldron)의 매우 중요한 저작을 깔끔한 한국어로 읽을 수 있게 되었다; 제러미 월드론, 『혐오표현, 자유는 어떻게 해악이 되는가?』, 홍성수·이소영 역, 이후, 2017 참조. - 2017년 4월 26일의 덧붙임]

14) 예를 들어 홍성수, 「규제학―개념, 역사, 전망」, 『안암법학』 26(2008): 379-406을 참고하라. [마크 비버(Mark Bevir)의 Governance: A Very Short Introduction(Oxford: Oxford UP, 2012)은 20세기 후반부터 지금까지 통치의 문제가 얼마나 더 복잡한 것이 되었는지를 잘 안내해준다. - 2017년 4월 26일의 덧붙임]

15) 나라, 「누군가의 삶에 반대한다?: 성소수자 운동이 마주한 혐오의 정치세력화」, 『여성혐오가 어쨌다구?』, 윤보라, 임옥희, 정희진, 시우, 루인, 나라 공저, 현실문화, 2015, 227-255.

: Comments 14

Write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