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시민, <국가란 무엇인가>. 비판적 읽기

Reading 2017. 6. 27. 03:48

유시민, <국가란 무엇인가>, 개정신판, 돌베개, 2017[초판은 2011] 을 훑어읽었다.

 

본격적으로 논자시 준비를 시작하기 전 지난 반년 정도를 질질 끌어온 '국가, 통치및 서구 정치사상의 역사적 접근'(가제) 리딩 리스트를 거의 마무리해가는 단계에서, 한편으로는 오늘날 한국에서 대중적으로 가장 널리 읽히는 '국가론'이 어떤 것인지를 보고 싶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특히 노무현-문재인 지지자들의 대표적 이데올로그(난 이 단어를 가치중립적으로 사용했다)가 무슨 이야기를 펼칠지 궁금했다. 내 관점에서 이 술술 잘 읽히는 책은 장단점이 뚜렷하다. 국가와 정치사상에 대한 괜찮은 대중교양서, 혹은 정당정치인·장관으로서 직접 국가운영에 참여해본 사람의 통찰력을 기대하는 독자에게는 이 책을 전혀 권하고 싶지 않다. 그러나 87 이후 한국의 정치담론을 궤적을 따라가보고 싶은 독자, 특히 2000년대 이후 한국 정치에서 언제나 중요한 세력이었던 386-노무현-문재인 지지자 그룹의 논리가 어디까지 뻗어갔는가를 살펴보고 싶은 독자에겐 이 책이 흥미로운 자료가 될 것이다.

 


1.

 

내가 학계와 대중 사이에 가교를 놓는 '지식소매상'·'대중지식인'의 저술로서 <국가란 무엇인가>를 낮게 평가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나는 분명 전문적인 연구자에 가까운 위치에 있지만 대중독자를 대상으로 하는 뛰어난 저술들의 가치는 절대로 무시될 수 없으며 그 과정에서 대중교양인이 고유의 시각을 갖는 것 또한 충분히 정당화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저자가 당시에 학적으로 합의된 바를, 적어도 그 골자를 충분히 소화하고 이해했으며 단순히 논쟁적인 것을 넘어 명백히 틀린 내용을 전파하지 않는다는 한에서 그러하다. 유시민의 책은 두 가지 모두 충족시키지 못한다. 내가 아는 한에서만 말할 때, 그가 마키아벨리, 홉스, 로크, 스미스, 루소 등에 대해서 설명하는 내용 중 상당수는 오늘날 정치사상사의 논의를 참조한 독자들에겐 이미 논파된 지 반 세기 가까운 과거의 편견에 가까우며, 로크와 루소를 대조하면서 전자는 법치주의만을 주장했으나 후자는 인민이 부당한 정부를 무너트릴 권리를 가졌다고 설명하는 65쪽을 보면 저자가 연구사는 고사하고 로크의 1차 문헌을 직접 읽었는지 의심이 갈 정도다.

 

<국가란 무엇인가>에서 홉스는 국가주의=전제정의 옹호자로서 무려 피히테의 민족 이념의 선구자로 제시되며(감각·정념론으로부터 출발하는 <리바이어던>의 철저한 방법론적 개인주의는 어디갔는가?!), 마키아벨리는 전제군주를 위한 매뉴얼 작성자로(리돌피의 고전적인 마키아벨리 전기가 역시 좋은 한국어로 번역된 게 2000년이다), 로크는 그저 자유주의 + 법치주의자로(56쪽에 로크의 인간학을 짧게 설명한 대목을 보면 유시민이 "자연법" 같은 개념의 중요성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것은 분명하다), 스미스는 자유로운 시장경제의 옹호자로 설명되는 식이다. 저자는 스미스가 민병대가 아닌 상비군의 필요성을 강조했다는 점을 인용하면서도(60) 이 말이 길게는 마키아벨리로부터 이어지는 시민군과 덕의 문제, 짧게는 18세기 영국의 상업사회와 상비군 논쟁의 맥락에서 나왔음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것처럼 보인다. 경제학 쪽 필자가 이런 식으로 쓰는 거라면 딱히 놀랍지 않지만, 스미스의 국가론을 이야기하면서 이런 식으로 이야기하는 건 타박맞을 흠이 된다. 플라톤이 (포퍼의 견해를 빌어) 전체주의자로 퉁쳐지는 건 놀랍지도 않다.

 

역사적인 디테일함은 그렇다치고, 그가 제시하는 세 가지 유형학, 즉 국가주의, 자유주의, 맑스주의에 대한 내용도 불충분한데, 나는 특히 자유주의를 개인의 자유와 법치, "더 적은 통치"라는 개념으로만 설명하고 넘어가는 것이 무척 불만스럽다. 한국어로 읽을 수 있는 텍스트에 한정한다고 할지라도, 저자는 자유주의와 국가의 문제를 다루면서 이미 2010년대 초반에 읽을만한 번역이 나온 푸코의 강의록을 전혀 읽지 않은 것 같다. 자유주의적 통치와 시민사회, 시장이라는 개념적 상관물들이 단지 개개인을 단위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정부가 직접적으로 개입할 수 없는 고유의 질서를 가진다는 통찰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에 유시민이 설명하는 자유주의 '국가론'은 정작 국가에 대한 설명으로는 무척이나 공허하다(이 문제는 이 글 말미에서 한번 더 언급할 것이다). 이 책에서 유시민은 본인이 70-80년대에 읽었을 독서목록에서 거의 나아가지 못했고--미주에 언급된 참고문헌들을 보면 명백한데, 독자적인 연구서라기보다는 깔끔한 입문서에 가까운 카야노 도시히토의 책을 제외하면 그의 국가에 대한 시야는 사실상 80년대 독서목록을 벗어나지 못한다--국정운영에 참여하면서 느낀 국가·정부의 본질에 대한 인식이랄 것도 없다. 나는 솔직히 이 책이 1980년대가 아닌 2010년대 후반에도 널리 읽힌다는 것, 동시에 그동안의 연구를 반영한 더 좋은 대중적 저술을 꼽기가 힘들다는 사실이 무척 불만스럽다. 한국의 인문사회 저술가들이 (근대)국가에 대해 사고하는 법을 망각한 시간이 길어질수록 인문사회분야가 신변잡기로 추락하는 것을 막기 어려워질 것이다.

 

 

2.

 

그렇다면 이데올로그 유시민의 저작으로서 <국가란 무엇인가>는 무엇을 이야기하는가? 첫 세 장에서 그가 (암묵적으로 한국 보수층과 동일시되는) 국가주의에 매우 비판적이며, 자유주의에 대해서는 사실상의 승인을, 그리고 (한국 진보좌파와 연결된) 맑스주의에는 다소 양가적인 감정이 섞인 거부감을 드러낸다는 것은 쉽게 알 수 있다. 저자의 입장이 보다 선명히 표명되는 것은 4장 및 6장인데, 여기서 그가 가장 승리의 월계관을 수여하는 사상가는 흥미롭게도 칼 R. 포퍼다. 유시민에게 국가주의적 보수는 국가에 종속적이라서 모든 혁신을 가로막고, 그 반대편의 맑스주의는 국가 자체를 타도하려 하기에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남는 것은 필연적으로 혁명을 거부하되 진보적인 성향을 띠는 점진적 개혁노선으로, 유시민은 포퍼가 자신이 "진보자유주의"라고 부르는 입장의 가장 적절한 대변자라고 주장한다(그리고 '신자유주의자' 하이에크는 국가의 역할을 전면 거부함에 따라 모든 현실의 개선을 가로막는 과민한 퇴행적 사상가로서 포퍼와는 분명히 다르다고 선언된다). 그러한 명명에서 알 수 있듯 유시민은 자유주의를 시장 보수·신자유주의와 진보적 자유주의로 다시 한 번 나누고 자신이 속한 후자와 진보·사회주의·맑스주의 진영이 연합해야 할 필요성을 강조한다. 요컨대 그의 유형론은 결국 중도와 진보가 연합하여 보수를 제압하고 정치적 권력을 획득해야한다는 매우 낯익은 정세제시로 귀결된다. 물론 진보의 (국가적) 유토피아주의는 사실상 실현불가능하다는 조언을 빠트리지는 않는다.

 

특히나 <국가란 무엇인가>로부터 386-노무현-문재인 지지자들의 정치적 언어를 추적하고 싶은 독자들에게 흥미로울 대목은 7장부터 9장까지로, 유시민은 여기에서 국가·정치의 문제를 도덕과 윤리의 언어와 연결시킨다. 7장에서 그는 진보자유주의가 다시금 아리스토텔레스적인 목적론을 도입해야 하며, 진보자유주의정치는 "'미덕국가' 또는 '선행국가'"를 지향점으로 하는 국가론을 채택해야 한다고 주장한다--"자유주의적 국가론과 목적론적 국가론은 결합할 수 있"(225). 현대에 아리스토텔레스적 정치학을 가져오는 이들이 종종 부딪히는 물음은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가 함께 추구해야 할 선·덕이라는 것이 과연 무엇이냐는 것이다. 유시민은 이 물음에 대한 답변으로 8장에서 헌법을 끌어온다. 현행 헌법에 담겨있는 가치들이 곧 우리가 공통으로 추구해야 할 정의이자 선이라는 것으로, 이때 헌법에서 경제민주주의적 요소가 매우 강조된다(나는 포퍼가 정부의 "민주적 개입"을 통한 경제권력의 통제를 옹호했다는 유시민의 설명을 특히 몽페를랭 협회를 기억하는 정치적 포퍼주의자들이 어떻게 받아들일지 궁금하다).

 

다음으로 정치가·정당의 윤리·도덕을 다루는 9장은 베버의 책임윤리와 에두아르드 베른슈타인이 호의적으로 인용한다. 여기서 어떤 전개로 이어질지 눈치 빠른 독자들은 금방 알아챌 수 있다. 유시민은 진보진영이 책임윤리에 입각하여 자유주의 진영, 좀 더 솔직히 말하자면 더불어민주당의 노무현-문재인 지지세력과 연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내 생각엔 이 내용이 윤리의 언어로 기술되고 있다는 것이 중요하다. 만약 연합을 거부하고 보수진영이 정권을 가져가게 둘 경우, 이는 진보·자유주의 진영이 정치적으로만이 아니라 윤리적으로 책임을 져야하는 문제가 된다. 노무현 정권이 바이마르 공화국처럼 좌우파의 공격을 받아 무너졌다는 유시민의 매우 강한 해석적 기술 또한 이러한 논리의 연장선에 있다. 최근 불거진 강성 문재인 지지자들과 진보언론의 갈등을 잊지 않은 독자들이라면 이것이 정확히 강성 문재인 지지자들의 논리에 부합한다는 것을 쉽게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다. 노무현 정권의 패배와 몰락은 숙적 우파들만이 아니라 진보좌파들의 "신념윤리" 혹은 정치적 어리석음에 기인한 결과다. 진보진영이 자유주의자들과 함께 보수와 싸워 나가는 것이 현실정치로든, 윤리·도덕적으로든 "올바른" 선택이다. 그렇지 않고 자유주의자들을, 현 시점에서는 문재인 정부를 공격할 때 이는 윤리·도적적으로도 "잘못된" 일이다(물론 유시민은 자유주의자들고 연합정치에 책임을 져야 한다거나 노무현 정권의 역량이 부족했다는 멘트를 의례적으로 덧붙일만큼은 신사적이다). 물론 노무현 정권이 단지 진보언론과 보수언론이 물어뜯어서 몰락했다는 무척이나 단순화된 '역사'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이라면 이런 식의 정치적 윤리학이 실제로는 저자의, 그리고 여러 386의 자기반성능력의 결여를 보여주는 게 아닌지 역으로 질문해볼 것이다.

 

 

3.

 

진보진영과 노무현 지지자들 사이의 해묵은 갈등을 역사적으로 풀어나가는 건 흥미로운 과업이지만 여기서 내가 할 일은 아니다. 내 생각에 <국가란 무엇인가>가 정말로 문제적인 측면은 그것이 실제로 '근대국가'에 대해서 매우 피상적인 묘사 이상의 것을 하지 않는다는 점에 있다. 저자의 입장이기도 한 자유주의 국가론을 소개하는 2장에서 그 빈곤함으로 인해 역설적으로 드러나는 바와 같이 우리는 이 책을 읽은 뒤에도 근대적인 국가가 정확히 무엇인지, 무엇을 수행하는지, 어떻게 통치하는지, 어떤 어려움과 직면하는지와 같은 물음에 답변할 수 없다. 이 책은 사실상 국가가 어떠해야 한다는 당위적 진술로 채워져 있을 뿐 정작 국가가 무엇"인가"를 말해주지 않는다. 유시민의 저술에서 결여된 바는 회의주의적 중용을 추구한다는 점에서는 어느 정도 유사한 마이클 오크쇼트의 <신념과 의심의 정치학>과 비교할 때 명확히 드러나는데, 오크쇼트는 계속해서 근대가, 근대국가가 무엇이며 어떤 조건을 제공하는지를 질문하면서 자신의 입장을 서술해나간다. 유시민에게는 근대국가를 둘러싼 모호함에 대한 인식이 없다. 맑스주의로부터 고개를 돌린 이들 특유의 회의주의적 정조가 유시민을 보수로부터 국가와 사회를 지킨다는 마니교적 이분법으로부터 자유롭게 해주지는 못한 것 같다. 그러한 딜레마, 즉 투쟁적인 도덕적 신념에도 불구하고 스스로의 입장을 결국 보수와 대척점에 놓을 수 있을 뿐 그 자체로 고유한 정치적 비전을 보유하지는 못했다는 문제가 그를 결국 미덕·선행·정의의 국가론이라는 전근대적인 목표로 몰고간 게 아니냐는 질문을 해볼 순 있다. "진보정치는 국가로 하여금 선을 행하게 하려는 활동이다"(225)와 같은 진술은, 보수정치라고 해서 고유의 선을 추구하지 않는 것은 아니라는 너무나 당연한 반론은 둘째치더라도, 우리가 근대의 정치가에게 기대하는 말은 아니다.

 

아리스토텔레스적 국가론이 서구 근대에서 더 이상 논의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지적하면서 유시민은 "르네상스 시대 이후 수백 년 동안 유럽의 내로라하는 지식인들 가운데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를 공부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는데도 목적론적 철학에 입각한 국가론, 선을 실현하는 것을 국가의 목적이라고 보는 국가론을 누구도 계승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라고 질문한다(223). 당연하지만 정치체와 선을 연결짓는 전통, 덕의 정치를 실현하려는 전통은 (유시민이 읽은 매우 한정된 문헌에서는 언급되지 않았겠지만) 초기 근대까지도 매우 강력하게 존재했다. 우리는 그러한 전통이 근대적 조건 하에서 점차 주변적인 것으로 밀려나는 과정을 2011년 번역된 J. G. A. 포칵의 걸작 <마키아벨리언 모멘트> 3부에서 다소간의 씁쓸함과 함께 읽어볼 수 있다(물론 19세기 말 영국 관념론자Idealist들은 복지국가 담론과 함께 이 전통을 다시 소환할 것이다; <국가란 무엇인가>에서 유감스러운 지점 또 하나는 복지국가의 출현에 대한 사상적 이해가 매우 얕다는 것이다). 우리는 유시민과 함께 국가가 고유의 선을 가지며 이를 실현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믿을 수는 있다. 그러나 그러한 선이 무엇인지, 그리고 무엇보다도 누가 그 선의 구체적인 내용을 알 수 있는지, 어떤 선의 실현과 맞바꿔야 하는 대가가 무엇인지 등을 떠올려본다면, 이러한 믿음을 확언하기가 무척 까다롭다는 것을 잊을 수 없다. 이른바 근대적 조건이라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이러한 난관을 직시하기를 요구한다. 근대국가란 도대체 무엇인가? 여기에 대한 질문을 빠트린 채 <국가란 무엇인가>가 스스로의 표제에 걸맞은 책이 될 수는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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