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11일 일기. 혼자됨과 말하기

Comment 2017.02.13 01:01
버스 정류장 표지판에 기댔다. 종종걸음으로 내려와 줄 선 사람들의 입은 추위로 굳게 닫히어 쌕쌕 하얀 김조차 내뿜지 않았다. 문득 눈길을 떼어 산과 하늘을 본다. 먼 능선 끝을 자세히 보면 검게 그림자 진 나무들 틈새로 흰 허공이 있다. 능선 위 하늘은 한겨울의 저녁을 이끄는 봉홧길이 멀리서 이어지듯 점차 짙어지는, 그러나 아직은 옅은 오렌지 빛깔의 노을로 조금씩 차올랐다. 구르는 눈동자를 따라 그 색채는 점점 옅어져 연한 하늘빛이 되고, 이윽고 고개가 직각으로 꺾일 때쯤엔 구름이라도 낀 양 순간 어둔 그을음이 잠깐 비쳤다. 숨을 한번 훅 불고 눈을 감았다 뜨자 조금 아래 각도에 빛나는 점이 있었다. 아주 멀리서부터 달려왔을 별빛은 강하면서도 날카롭지 않았고, 맑으면서도 부드러웠다. 왕궁에서 행차한 사자를 보는 것만으로도 눈물을 흘렸다던 어느 옛 사람의 이야기처럼 지금도 그 별빛의 맑음을 음미하는 것만으로도 맑은 물을 솟아내는 눈이 있을지 모른다 생각했다가, 지금이 그런 사람들이 더 남아있지 않은 시대인지 혹은 바로 그런 시대를 다시금 지난 시대인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오로지 알 수 없다는 것만 분명하다. 나는 모른다, 그렇게만 존재한다.

가까운 언덕 위에는 키 큰 나무들이 얽혀 나란히 섰다. 눈 좋은 이의 장점 하나는 능선 꼭대기에 선 나뭇가지들을 하나씩 따로 떼어 바라보고 헤아려볼 수 있다는 것이다. 잎새도 없이 쭉 뻗은 가지들은 처음에는 엉킨 실타래처럼 혼란스럽다가 숨을 고르며 자세히 보면 하나씩 그 윤곽이 분명해지고, 이어 각자가 따로 또 같이 있는 하나의 광경을 이룬다. 가지 하나를 보며 쭉 뻗은 늘씬한 팔 끝에 바깥쪽으로 살짝 꺾인 채로 잔을 쥔 손을 떠올렸다가, 이윽고 어린 아이들이 귀여운 목소리로 대사를 읊는 그림자 연극의 배경에 깔린 아름다운 문양마냥 한 그루 나무에서 뻗어나온 검은 선들이 예쁘고 복잡하게 얽힌 것을 본다. 겨울에 홀로 두드러지게 무성한 솔잎무더기는 겨우내 가벼워진 만물이 텅 비고 맑은 하늘을 채우고자 떠오르지 못하도록 우리의 세계에 밀도를 더한다. 가장 우뚝 솟은 건 용도를 알 수 없는 장식을 얹어놓은 쇠기둥이지만, 나는 잠시 그것을 피해 푸르고 하얀 허공 아래 검고 가는 선으로만 남은 겨울나무들을 살핀다.

한 주 뒤에 지난 3년간, 총 5년간 살았던 장소를 뜬다. 다시 못 올 것도 없지만 그럴 일이 좀처럼 없음을 이미 안다. 두텁지 못한 주머니를 안고 지금보다 더 작은 방으로 옮겨간다는 것은 그다지 기운 나는 일은 아니다, 특히 찬 바람이 휫휫거리는 계절에는. 며칠 전엔 사람들로 말로 빛으로 가득한 세계에 있었지만 내일엔 비좁은 자기만의 방에서 단지 저 멀리서 엔진울음만이 들려오는 창밖을 멍하니 바라볼 수도 있다. 아무도 찾지 않는 곳에서 사람을 보려면 거울을 들여다보는 수밖에 없고, 거울을 보려면 다시 무거운 걸음을 떼어 화장실까지 가야만 하는 삶은 외롭고 또 괴롭다. 잠시 속으로 그러한 나날에 가득할 침묵의 밀도를 재어보다 하늘과 산과 나무가 다시 눈에 들어왔다. 이것들을 바라보는 동안 마음 속의 혀가 조금씩 움직여 말을 만들어내기 시작함을 알았다. 뱃속에서 끈적거리는 실을 내뿜는 거미처럼 어디에서든 말의 뭉치를 토해내어 기괴하고 복잡한 구조물을 만들 수 있다면, 홀로 있어도 혼자가 아닐 수 있다. 사람들에 대해서 쓸 수 없게 되는 순간에도 무언가 말하고 쓸 수 있도록 하는 원천이 남아 있다면, 이 바닥 없는 세계에서 나를 위한 바닥은 하나쯤 남아있는 셈이다.

덜컹거리는 버스 안 우두커니 선 사람들 틈 어느 기둥에 기대어 광고문구를 하나씩 읽는다. 차창 밖으로 공사장이 스쳐 지나가고 가로수는 그 모든 신비를 털어내고 깔끔하게 먼지만을 뒤집어쓰고 있었다. 하지만 작은 희열 하나는 간직하고 있다. 종점이 오고, 버스에서 내리고, 다시금 무언가를 우두커니 보며 골똘히 생각할 수만 있다면 무엇이 됐든 어쨌든 만들어내기는 할 것이다. 지금은 그것으로 됐다, 세상에 내가 앉을 자리가 없지는 않다, 그렇게만 마음을 정리했다. 횡단보도 옆 신호등의 불빛이 바뀌고, 녹색불 속 보행자가 나타났다. 시골에 시골의 목가가 있다면, 이것 또한 도시의 목가를 이루는 하나의 이미지일 것이다. 그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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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무연 2017.02.18 13:53 Modify/Delete Reply

    “두텁지 못한 주머니를 안고 지금보다 더 작은 방으로 옮겨간다는 것은 그다지 기운 나는 일은 아니다, 특히 찬 바람이 휫휫거리는 계절에는”이라는 문장이 마음에 걸리네요ㅠㅠ 무언가 좋지 못한 사정이라도 생긴 것일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잘 지내고 있는 거죠?

    날 따뜻해지면 지난번처럼 얼굴 한 번 보아요^^ 건강히 지내고 있는 거면 좋겠습니다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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