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만. <글로벌 지식장과 상징폭력>. 비판적 읽기.

Reading 2016. 9. 14. 12:37
김경만. <글로벌 지식장과 상징폭력: 한국 사회과학에 대한 비판적 성찰>. 문학동네, 2015.

김경만 선생의 논쟁적인 저술을 읽었다. 내 주제에 도움이 될까 해서 찾아봤는데, 유감스럽게도 직접적인 연관은 없었다. 그러나 처음부터 끝까지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는 흥미로운 책임은 분명하다. <글로벌 지식장과 상징폭력>은 크게 한국 사회과학계, 특히 "'한국적' 사회과학"이라는 패러다임에 붙들려 있는 '원로'(강신표, 김경동, 한완상, 조한혜정, 강정인) 및 대중영합적(?) 사회과학자들을 비판하는 1부와 미국 과학(지식)사회학계라는 "글로벌 지식장"에서 주요한 행위자로 활약할 수 있었던 저자 본인의 지적 여정을 다룬 2부로 구성되어 있다. 두 부분의 관계가 독자들로 하여금 한국 사회학계와 미국 사회학계를 일종의 '야만' 대 '문명'의 구도로 대비시켜 바라보도록 설계되어 있다는 점은 명확하다. 아마도 저자는 한국 사회학계의 낙후된 태도를 거부하고 그 자신과 같이 "글로벌 지식장"으로서의 미국 학계에서 성공적으로 살아남기 위해 노력하는 것만이 오늘날 사회과학 연구자--적어도 이론사회학 연구자--에게 유일하게 유의미한 경로라고 주장하는 것처럼 보인다(저자의 인정욕망이 종종 노골적으로 드러나지만, 인간적으로 이해하지 못할 수준은 아니다).

때때로 사회과학적 연구를 참조하고, 또 김경만이 주요하게 언급하는 이론가들 중 일부를 매우 흥미롭게 읽었지만 한국 사회학계의 현황에 대해 구체적인 감은 없는 나와 같은 독자의 입장에서 볼 때, 이 책은 지적으로 보다 흥미로운 부분과 그렇지 않은 부분이 명확하게 갈린다. 전자는 말할 것도 없이 2부다. 한 명의 대학원생이 한 필드의 주요한 행위자로 성장해나가는 과정은 그 자체로 통속적인 재미가 있는 이야기일 뿐더러, 논문심사위원회 선정 문제나 저널 투고 과정에서의 에피소드는 연구자로 훈련받는 중인 이들에게 흥미를 끌 만하다. 더불어 20세기 후반기에 미국 과학(지식)사회학계의 주요한 입장들 사이의 갈등관계가 어떻게 형성되었는지를 비교적 명쾌하게 설명해주는 점은 그 자체로 이 책의 장점에 속한다.

대조적으로 1부의 서술은 그만 못하다. 간단히 말해 저자 자신이 존경심을 품고 있는 미국 사회학계와 그 구성원들을 다룰 때는 이것을 일종의 이론적인 언어로 설명하고자 하는 기제가 (간단한 수준에서나마) 작동하지만, 한국 사회학계에 대한 김경만의 서술에는 '기본도 안 된 것들'에 대한 경멸과 멸시의 정념이 너무 강하다보니 분석이라고 할 만한게 나오지 않는다. 물론 한국의 독자들이 이런 형태의 감정에 대해--그리고 그 반대급부로 존재하는 '나를 봐!'라는 태도에--좀 더 거부감을 갖는 것도, 그리고 그러한 감정을 <글로벌 지식장과 상직폭력>보다 좀 더 세련되게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이 없지 않다는 점은 사실이며, 아마도 이 점이 이 책이 일부 독자들에게 불쾌감을 선사했을 이유일 것이다. 그러나 내가 느끼는 아쉬움은 그런 저자의 정념 자체라기보다는 한국인 사회학자들이 왜 그렇게 행위해왔는지에 대한 학적인 고찰이 거의 상실된 채 일종의 도덕주의·능력주의적 비난만 남아있다는 점에서 유래한다.

90년대 초반부터 2000년대 중반까지, 혹은 지금까지 한국 사회학계의 이론적 사고가 지리멸렬했을 수도 있고 (난 이 필드를 잘 모르지만 크게 이의를 제기할 생각이 없다) 91년도 조한혜정 선생의 강의가 약 25년 뒤인 지금 읽으면 솔직히 한심한 것도 사실이다(물론 25년 전의 강의를 '현재형'으로 비판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나 싶기도 하다). 하지만 존경할만한 성실하고 엄격한 연구자--어쨌든 <담론과 해방> 같은 책처럼 회의주의적 논변을 끝까지 관철하려는 시도는 그러한 태도가 없으면 출현할 수 없다--김경만이 이러한 상황을 비판적으로 다룬다고 할 때 우리는 그가 이 상황을 나름의 학적인 시야를 갖고 서술해주길 기대할 수 있다. 그러나 <글로벌 지식장과 상징폭력>의 1부는 그 기대를 충족시키지 않는다. 좋다, 한국 사회학계의 이론적 사고가 무척 나이브하며, 그들이 전문성과 자율성을 갖춘 독자적인 학술장을 만들지 못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그들이 왜, 어떻게 그러한 실천을 반복하게 되는지를 사고하는 대신 이들이 어떤 점에서 한심한지를 열거하고 비난하는 선에서 끝나는 게 어떤 점에서 지적으로 유의미할 수 있는지는 잘 납득되지 않으며, 이는 2부의 미국의 뛰어난 사회학자들에 관해 이야기할 때의 자세와 비교하면 더욱 크게 느껴진다(뛰어난 이들은 학적으로 다뤄도 되고 못한 이들은 그냥 욕하고 지나가면 된다고 반론을 제기하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그가 학적 연구의 기본조차도 갖추지 못했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내 생각에 한국의 어떤 학문분과, 학계에 대한 '비판적 성찰'로서 <글로벌 지식장과 상징폭력>의 첫 번째 약점은 저자의 서술에 역사적인 시야가 사실상 부재한다는 사실이다. 단적으로, 근대 서구 학술장이 어떻게 형성되어 왔는지를 아주 조금이라도 느껴볼 기회가 있던 사람이라면, 그것이 한두세기에 걸쳐 급작스럽게 형성된 것이 아니라 서구 각국의 특수한 조건에 따라 수 세기에 걸쳐 조금씩 만들어져 왔다는 걸 알고 있을 것이다(나는 김경만의 스칼라십이 이걸 모를 거라 생각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한국 사회학계에 대한 논의에는 역사적인 시선이 사실상 결여되어 있는데, 예를 들어 그가 주된 비판의 타깃으로 삼는 '한국식 사회과학' '한국의 실천'에 집착하는 태도는 단지 연구자들의 선진화가 덜 되었기 때문에 나타나는 것이 아니며, 80년대까지의 민중주의적 역사철학 및 그 주요한 전제가 그러한 프레임에 깊게 영향받을 수밖에 없었던 연구자들에게 잔존한다는 점을 먼저 염두에 두어야만 이해할 수 있다. 80년대 후반 급작스럽게 맑스주의·민중주의가 쇠퇴하고 미국을 통해 푸코를 포함한 20세기 후반의 주요한 이론적 논의들이 쏟아져 들어오는 상황에서 이전의 패러다임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새로운 학문적 담론에 휩쓸린 이들이 그것을 오독하거나(1991년, 영어로 된 이론텍스트를 제대로 읽는 사람조차 그렇게 많지 않았던 한국 대학에서 윌리엄스로 삽질하는 게 그렇게 충격적인 일인가?) 자의적으로 비판하거나 반동적인 태도를 취하는 건, 물론 그것들이 결국에는 무의미해질 수밖에 없다고 해도, 사상사적으로 볼 때 그다지 놀라운 일은 아니다.

역사적 시야의 결여와 분리될 수 없는 문제이지만, 특히 한국 학술장에 대한 대안적인 지점을 제시하려는 '사회과학자'에게 제도에 대한 시선이 부재하다는 것도 당황스럽다. 간단히 말해, 현 상태가 지속된다고 가정할 때, 김경만의 조언을 받아 열심히 글로벌 지식장에서 상징자본을 축적하고 돌아온 학문후속세대들의 미래는 그 자신처럼 밝을 것이며, 한국의 사회과학계는 전문성과 자율성을 갖춘 학술장이 될 수 있을까? 나는 그다지 낙관적이지 않은데, 가장 큰 이유는 한국의 고등지식생산자들은 단지 개개인의 인식이나 문화적 레벨 이전에 정부관련부처 및 산하기구가 관할하는 재정정책 및 프로젝트 지원정책에 종속되어 있기 때문이다--펀딩에 대해 고민해보지 않은 연구자들이라면 이를 간과할 수 있겠지만 말이다. 간단히 말해 자율적인 학술장은 단지 의식있는 개별 전문가들의 연합에서만 생겨날 수 있는 게 아니라, 그 자체로 (재정을 포함한) 수많은 제도들의 축적과 상호작용 위에서 생성되고 또 작동한다. 학술장의 성격은 동시에 한 사회 안에서 학술장이 어떤 위치에 놓일 수 있는가에 대한 사회적 합의와 무관할 수 없다. 김경만이 노골적으로 경멸하는 '대중영합적' '보직추구형' 사회학자들의 경우, 그들의 지적 게으름과 별개로 대중매체 및 공적 의사결정과정이 전문가를 어떤 식으로 활용하는지에 대한 고민 없이 비난해봐야 바뀔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런 점에서 연구자의 제도적 참여와 여론 개입에 대한 김경만의 태도는 때때로 나이브해보일 정도다. 요컨대 학술장의 형성과 작동은 역사와 제도 바깥에 있지 않다는, 근대적인 연구자라면 누구나 인지하고 있을--그리고 대대적인 대학구조개혁과 함께 한국의 인문사회연구자에게는 과거보다 가시화되고 있는--당연한 사실이 이 책에 충분히 강조된 것 같지는 않다.

결과적으로 <글로벌 지식장과 상징폭력>은, 저자의 진정성을 의심할 수 없으며 분명 읽는 재미가 있는 책임에도 불구하고, 유감스럽게도 대학원생을 위한 '자기계발서'처럼 보일 때가 있다. 많은 자기계발서들이 실제로 그러하듯 이 책에는 유용한 점이 많다. 실제로 이 책을 읽고 성공적인 커리어를 쌓는 대학원생들도 나올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이 저자가 의도한 것처럼 한국 사회과학 학술장의 성격 자체를 개선시킬 수 있을까? 나는 고등교육연구 과정에 관심을 갖고 있는 독자로서 연구자들이 그러한 목표를 진짜로 성취하기 위해서는 이 책이 말하지 않는 지점들을 좀 더 냉정하게 바라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덧.

이 텍스트를 좀 더 생산적으로 읽는 방법은 아마도 이 텍스트 자체를 90년대 이후 한국 학계의 '근대화과정'의 과도기에 나타나는 여러 요구들 중 하나로 받아들이는 것일지도 모른다. 즉 80년대 후반까지의 대학 분과들이 대표적으로 공학처럼 한편으로 정부주도 발전의 한 장치로서 작동하거나, 주로 사회학이 그러했듯 국가에 대항하는 '민중해방의 이론'으로 스스로를 정당화할 수 있었다면, 양자의 경우 모두 학술과 (정책적, 정치적, 사회적) 실천은 밀접한 연관을 가질 수밖에 없다. 김경만이 비판한 사회학계 원로들의 태도나, 아직도 적지 않은 사회과학 연구자들에게 남아있는 때때로 낭만적이기까지한 실천적 의지는 이러한 전통의 연장선상에 있다. 그러나 주지하다시피 90년대 이후 한국사회에서 특히 민중주의의 붕괴와 함께 이러한 요구가 점차 그 토대를 상실하면서, 저항 이론으로서 스스로의 정당성을 주장하던 학문적 흐름 또한 그 존재의 근거가 점차 불확실해진다.

87 이후 30년 가까운 시간이 지난 현재의 시점에서 볼 때 학문 혹은 연구자가 스스로의 제도적 생존을 정당화하는 주된 방식은 1) 적극적으로 정부 및 기업자본의 필요에 부응하거나 2) 소비자대중으로서의 '사회'의 수요를 충족시키거나 3) 2번의 연장선으로서 서구권에서 상징자본을 획득하고 이를 통해 한국 사회의 인정을 받는 것이다. 유감스럽게도 전문가들의 공론장이 자신의 존재 근거를 사회로부터 인정받는다는 의미에서의 독립분화는 여전히 그 실현가능성이 희박한 하나의 이상으로서만 남아 있으며, 앞으로도 한동안은 저 세 가지 입장들 사이의 경쟁적 공존이 학계를 지배할 것이다. 여기서 김경만의 입장은 명시적으로는 역량을 갖춘 전문가들의 자율성을 추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아마도 그러한 이상이 어떠한 사회적 토대없이 성립할 수 없다는 점을 무의식적으로라도 인지하기 때문에 사실상 3번의 선택지를 따르면서 "글로벌 지식장"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그러나 그 자신의 강변과 달리 다른 두 선택지는 (정부의 근본적인 결단 없이는) 결코 쉽게 사라질 수 없으며, 3번 또한 실제로 한국사회에서 전문가들의 자율적 네트워크 형성을 그 자체로 담보하지는 않는다. 다른 무엇보다도 한국의 학술장은 한국 사회를 지탱하는 여러 영역 중 하나로서 사회 전체의 작동을 위한 광범위한 분업-협업 체계의 일부로 존재하기에, 그가 주장하는 것처럼 글로벌 지식장에서의 성공은 그 자체로 연구자와 학문분과의 제도적 생존을 보장하지 않는다. 그런 사실을 망각한다는 점에서, 김경만이 제시하는 학문관은 유감스럽게도 그 자체가 다소 나이브한 현상인식에 기반한 하나의 이데올로기라는 비판을 쉽게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제기한 논쟁은 근대화한 한국사회에서 제도 내 학문 및 연구자의 존재 근거가 어디에 있는가에 대한 물음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에서 가볍게 무시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그의 해답을 따르지 않더라도 그의 질문을 진지하게 숙고할 필요가 있는데, 이는 결국 그것이 우리 자신의, 학문의 미래의 문제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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