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일러, <세속화 시대> 1부 4장 정리

Intellectual History 2016. 9. 10. 01:51
찰스 테일러의 <세속화 시대>(_A Secular Age_) 1부 마지막 4-5장을 마치기 위해 5시간 동안 세미나를 했다. 4장에서 테일러는 그로티우스-로크적 자연법 이론의 자장으로부터 배태된 18세기의 "근대의 사회적 상상"(Modern Social Imaginaries) 세 가지, (시장)경제, 공론장, 인민주권을 다룬다. 그로티우스-로크가 제시한 "도덕 질서"(moral order)의 핵심이 합리적이고 사회적인 인간 존재들, 각자 자유를 핵심으로 하는 권리들의 보유자로 상정된 평등한 개인들로부터 시민사회를 재구성하는 논리적 흐름에 있었다면, 이 세 가지 사회적 상상은 공통적으로 개인들로부터 사회 전체가 구성되는 방식을 보여준다. 이로부터 우리는 테일러가 강조하듯 근대 세속화 과정에서 근대적 개인주의가 전근대적 인간학을 대체해가는 과정이 결코 사회 혹은 공동체적 기제를 소거하는 결과로 이어지는 게 아니며 그 개인들을 규합할 수 있는 다른 형태의 사회적 모델을 도출하게 됨을 알 수 있다.

서구 근대 세속화가 "빼기"(subtraction)가 아니라 그 자체로 인간학과 세계(사회)모델을, 그리고 양자의 관계를 새로운 형태로 제시하는 과정이라고 할 때, 가장 중요한 변화 중 하나는 이것이 과거 불균등한 시공간들이 공존하는 위계적 세계로부터 오로지 세속의 세계라는 시공간 단 하나만의 현전을 인정하는 세계로 바뀌어 간다는 것이다. 세속적 시공간만이 홀로 현전하는 세계는 더 이상 과거와 같이 가치평가의 기준을 제공하는 외부의 초월적인 심급을 제공하지 않는다. 이 세계의 유일한 선은 "일상적인 삶"(ordinary life)으로부터 피어나는 "인간적 번영"(human flourishing)이라는 내적 척도 뿐으로, 더 이상 규범적인 우주적 질서(cosmos)는 천리로서 작용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 세속적 시공간과 이 안에서 진행되는 인간의 삶은 그 어떤 외적 가치기준도 인정하지 않는, 철저하게 내재적인 평가기준을 갖는 독립된 지평으로 등장하며, 이는 이른바 그 어떤 특권적인 중심 없이 각자의 '세속적' 이해관계에 따라 작동한다(이것이 도덕적 가치평가 자체를 소거시킨다는 뜻으로 오해되어서는 안 된다; 단지 그 가치평가의 최종적 원천이 오로지 인간적인 것에 귀속된다는 뜻이다). 이 세계는 마치 구(球) 위에 거주하는 이들과 같이 모든 곳에서 자기 자신이 있는 곳이 중심이라고 외칠 수 있는 곳이다.

스미스를 중심으로 놓는--물론 혼트Istvan Hont가 훌륭하게 보여주었듯 국가의 덕virtue을 중심으로 하는 담론과 개별 행위자의 덕과 국부를 별개의 것으로 사고하는 논리의 충돌은 18세기 초부터 지속되는 걸 볼 수 있다--18세기의 시장경제 담론의 핵심은 저 유명한 "보이지 않는 손"(invisible hand)이란 말이 보여주듯 개별자들의 사적 이익추구가 일종의 공동선으로 귀결될 수 있다는 신학적 전제가 개인과 통치자 모두에게 받아들여진다는 것이다. 주의해야 할 것은 "상업사회"(commercial society) 담론에서 볼 수 있듯 시장경제 혹은 상업에 참여하는 인간들은 상호적대적인 야수들이 아니라 세련된 예의범절을 갖추고 서로에게 친절을 베푸는 사회적/사교적(sociable) 인간으로 상정된다는 점이다--교역의 필요성은, 칸트의 세계공화국적 이상에 잘 제시되었듯이, 인간을 상호의존적으로 만들어 난폭함을 가다듬어진 문명화된 존재로 만든다. 즉 각자가 개인적인 이해관계를 추구한다면, 이 이해관계는 시장경제 안에서 교묘하게 맞물린다; 서로가 서로에게 의존한다는 점에서 시장경제는 모두를 이어 상호이익(mutual benefit)으로 이끄는 거대한 상호결속적(interlocking) 체계가 된다. 이 체계에서 생산하고, 교역하고, (건전하게) 소비하는 일상의 '생산적인 삶'은 그 자체로 하나의 종교적 소명으로까지 제시되며, 이는 결과적으로 종교적 엘리트와 세속의 평신도 사이의 위계적 질서를 평준화하는 데까지 이어진다(물론 이런 상업사회의 담론은 공화주의적 담론, 각 시민을 스스로를 통치할 수 있는 군사적·경제적 덕을 갖춘 이들로 상정하는 강력한 경쟁자와 공존했다).

시장경제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을 개별자로 놓는 기제 자체는 간직했다면, 특히 하버마스 및 워너(Michael Warner)로부터 끌어오는 18세기의 공론장(public sphere)은 개인의 사적 담론을 "공통의 마음"(a common mind)으로 재구성하는 역할을 수행하는 기제로 상상될 수 있다. 즉 여기에서 개별자들의 파편적인 사고는 합리적인 의사소통과정을 통해 더 높은 수준의 공통의 합리성에 도달한다. 이는 한편으로 사회를 구성하는 인민들의 현재 의견이 융합한 비인격적(impersonal) 결과물이라는 점에서 정치적 정당성을 갖는 것으로 상정되며(이때 정치적 정당성이 사회의 기원적 합의가 아니라 현재 구성원들의 합의로부터 기원한다는 점은 주목해야 한다), 다른 한편으로 합리적 의사소통의 결과물로서 보다 "계몽된"(enlightened) 의견, 고전적인 정치언어를 빌리자면 "탁월한"(virtuous) 의견으로 이해된다. 즉 공론장의 결과물은 스스로를 정치적 정당성과 탁월함을 함께 갖춘 것으로 제시하면서 정치사회(political society) 혹은 정부(government)로부터 독립적인 위상을 확보할 뿐만 아니라 후자가 나아갈 방향을 지도하고 훈계하고 견제하는 역할을 수행할 것으로 기대된다. 여기에서 두 가지를 짚어야 하는데, 하나는 이런 여론=이성과 정부=권력의 양자구도 자체가 고전적 정체 모델에서는 나타나지 않았던 여론과 정치권력의 분리를 상정한다는 점이며, 다른 하나는 공론장이 그 자체로 자율적으로 작동하는 독립된 영역으로 존재한다는 것이다--즉 공론장은 다른 무엇이 아닌 자기 자신이 생산한 담론들에 기초하여 스스로를 끊임없이 재생산하며, 그런 점에서 고유의 독립적인 시공간을 확보한다.

미국혁명과 프랑스혁명을 주된 분기점으로 잡아 확산되는 인민주권(popular sovereignty)의 원형적인 논리는 전근대 사회로부터 존재했던 "인민의 법"(the Law of People)으로부터 기원한다--영국의 경우 이것은 포칵이 강조한 "고래(古來)의 헌정"(Ancient Constitution)이라는 개념으로 잘 묘사될 수 있다. 이는 영국에 대항하는 북미의 독립 주들에 의해, 그리고 과거의 귀족적 체제를 타도하고자 했던 프랑스인들을 통해 과거의 기원이 아닌 현재 인민의 주권적 권리에 기초해서 정치적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다는 논리로 점차 재탄생하게 된다(물론 이 과정은 테일러 자신이 짧게 언급하듯 결코 직선적이지 않다; 사회적 상상은 우리들이 떠올릴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과거의 유산에 의지한다). 이때 특히 프랑스 혁명 및 이후의 혁명전통에 심대한 영향을 끼친 것이 루소의 사유인데, 그는 무엇보다도 사회의 평판에 휘둘리지 않는 자유로운 의지를 지니고 있으며 자기애(self-love, amour de soi)와 공공선에 대한 사랑이 합치되는 "합리적이고 덕 있는 인간 존재"(rational and virtuous human being)들에 의해 형성된 "일반의지"(general will, la volonté générale)에 기초할 때 진정으로 유덕한 정치사회가 세워질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이러한 사고는 프랑스의 혁명가들에 의해 정치에 덕성을 현현시키고자 하는 시도로 이어졌으며, 이들은 특히 루소로부터 미덕의 "투명성"(transparency), 즉 인간 내면의 덕이 어떠한 재현의 기교 없이 순수하게 타인에게 가 닿을 수 있다는 사고를 물려받았고, 이것이 여러 차례에 걸쳐 시민들의 덕을 전시하는 "공적 축제"(the public festival)의 실천으로 이어진다. 테일러는 이러한 형태의 루소주의가 다수의 시민들에게 덕이 결여되어 있다는 현실과 마주할 때 사실상 유덕한 소수가 다수를 지도하는 전위대 정치(vanguard politics)로 이어질 수 있다고 지적한다--레닌의 공산주의는 그러한 사례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사회적 상상들을 통해 근대의 개인주의는 개인 이외의 영역을 소거하고 자율적인 개인의 이상을 물신화하는 대신 개인을 국가, 운동, 인류 공동체와 같은 보다 "넓고 비인격적인"(wider and more impersonal) 실체들에 귀속시킬 수 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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