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 8월 12,13, 15일. <세속화 시대>의 시간의식.

Intellectual History 2016. 8. 15. 05:56


1. (8월 12일)


이틀간 밀린 일의 절반쯤 처리했고, 오늘은 (5시간쯤 자고) 아침 9시에 일어났다. 오늘 남은 일정 두 개를 더 소화하면 이제 본격적으로 읽고 쓰고 세미나하는 과정에 돌입할 수 있다.

1) SA 세미나 준비
2) 로크 관련 문헌 읽기; Dunn은 다 읽었으니(그러나 정리할 수 있을까?) Tully랑 Waldron만 읽으면 된다.
3) 투고 논문 수정작업
4) 찔끔찔끔 Moyn의 인권사 책들 읽기(_The Last Utopia_랑 _Christian Human Rights_).
5) 다음 학기 수업 준비. 고대 서사시와 중세 로맨스...
6) 사람들 만나기

?) 가끔 시간이 남으면 여행기를 쓰기.


2. (8월 13일 새벽)

간만에 다음 날을 염려하지 않고 새벽까지 술자리에 머물렀다. 동국대에서 술이 깰듯 말듯한 이의 배웅을 받으며 택시를 탔다. 장충단공원, 대한극장, 남산공원으로 이어지는 길을 지나는 동안 창밖의 풍경을 보며 서울 한가운데에 이처럼 녹빛이 가득한 공간이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아직 조명이 꺼지지 않은 새벽의 공원에 슬몃 들어가 등산복을 입은 할머니들을 앞질러 깊게 우거진 여름새벽의 나무 사이를 거니는 상상을 남겨두고 택시는 덩굴진 입구를 통과했다. 번쩍거리는 유리로 된 고층빌딩이 아닌 회색과 바닐라색이 섞인 그다지 높지 않은 건물들이 도로변을 오갔고 나는 서울의 새벽빛 때문인지 이 풍경이 간직한 과거의 인상 때문인지 혹은 영국을 다녀왔기 때문인지 알 수 없는 채로 단지 낯익은 낯설음을 느꼈다. 곧 도로 양 옆의 벽을 뒤덮은 덩쿨들이 자동차들의 행렬 사이로 끝없이 나부꼈다. 미터기의 3색 불빛은 차 앞유리에 빗줄기처럼 긴 자욱을 냈다. 인생사를 이야기하는 기사의 목소리가 조금씩 커져가는 가운데 우리는 한강다리를 건너 습기인지 먼지인지 그저 새벽빛인지로 부우연 대기 안으로 달려들어갔다.


3. (8월 15일 새벽)


찰스 테일러 세미나는 내가 당초 예상한 것보다 많은 인원이 모였다(물론 나는 통상적으로 세미나 실제 참여인원을 전체 참가인원의 1/2 정도로 설정해둔다). 단지 인원수 뿐만 아니라 참여자들의 지적 다양함을 포함해 여러 가지 측면에서 내가 지금까지 해온 그 어떤 세미나보다 높은 기대치를 가질만한 구성이라, 섣부른 기대감은 금물임을 알면서도 희망적인 전망을 그려보게 된다. 아마 특별한 일이 없으면 8월 마지막 주말부터 매주 주말에 진행하게 될 것 같다. 한 주 정도 여유시간이 나는 셈이긴 하지만, 투고준비 및 대학원 수업준비 등을 고려하면 실제로는 전혀 여유롭다고 할 수 없는 상황이라 SA를 미리 읽기 시작했다. 당초 영국 여행 중에 2장 정도까지는 읽어두는 게 목표였지만 던의 책을 읽는 것도 버거워서 거의 손을 대지 못했다. 10여쪽 정도 읽고 한동안 내버려둔 1장을 뒤이어 읽느라 1장의 절반쯤 와서 비로소 내 독서 회로가 다시금 작동하는 기분이 든다.

테일러는 뒤에 충분히 많은 분량이 남아있다는 걸 주지시키며 "뒤에서 다시 이야기하겠지만-"을 수시로 덧붙이지만, 이처럼 도입부적인 설명의 역할을 하는 1장조차도 내 기대 이상으로 재밌고 지적 자극을 준다. 가령 1장 5절(54-61)은 그 짧은 분량에도 불구하고 근대 이전의 시간의식(time-conscious)과 근대의 시간의식에 관해 내가 지금까지 읽어 온 문헌 중 가장 폭넓고 간결한 설명을 제공한다; "기존의 문헌"이 포칵, 코젤렉, 칸토로비츠임을 감안할 때, 물론 이들을 먼저 접하고 테일러를 접했기 때문에 비로소 후자의 짧은 서술에 깊은 흥미를 갖고 읽을 수 있는 것이겠으나, 테일러의 역량에 굳이 찬사를 덧붙일 필요는 없으리라. 역시 서구의 세속화 문제를 다루기 위해서는 시간의식의 변화를 이해하는 과제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다시금 체감한다.

테일러의 영어는 조근조근하면서도 가끔 역시 헤겔리안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라서 가령 퀜틴 스키너처럼 거의 따로 정리가 필요없을 정도로 명료하지는 않다. 그래서 1장 5절을 아주 간략히 정의해보자면, 테일러는 근대의 세속화된 시간의식--벤야민을 인용하여 "균질적이고 텅 빈"(homogeneous, empty)이란 형용사가 붙을 수 있는--과 대조적인 위치에 있는 근대 이전의 "보다 높은"(higher) 시간, 영원성을 담보하는 시간의식들을 나열한다. 이는 고대적 전통, 중세 기독교적 전통, 민속적(folk) 전통으로 분류될 수 있다. 첫째로 고대적 전통은 시간적 변화 자체의 바깥에 있는 지고한 차원으로서 플라톤적 이데아의 시간 및 이보다 아래의 차원에서(sub-lunar) 만물이 순환하는 자연적 세계의 시간의 위계로 구성된다. 아우구스티누스로 대표되는 중세 기독교적 전통은 의미를 상실한 세속의 시간으로부터 수난(Passion)/행위(action)를 통해 과거-현재-미래로 이어지는 질서를 부여받아 마침내 모든 시간을 포함하는 신의 시간, "영원한 현재"(nunc stans)로 도약하는 시간의식을 가진다. 마지막으로 민속적 전통에서 주로 찾아볼 수 있는 "기원의 시간"(time of origins)은 사물의 질서가 확립된 어떤 위대한 시간으로, 우리는 갖가지 제의를 통해 그에 다시 가까워질 수 있다.

근대의 세속적 시간의식은 전술한 시간관에 함축된 "보다 높은" 세계, 즉 그와 근접할수록 '질서 지어진 전체'(ordered whole)의 조화가 완벽해질 수 있는 시간 자체의 존재를 포함하지 않는다. 그것은 이질적인 시간층의 위계 혹은 접합으로 구성되는 대신 단 하나의 균질하고 텅 빈 시간, 그 안에 어떠한 '내용'(content)이든 담아낼 수 있는 '형식'(form)으로서의 시간만을 인정하며, 우리는 그 대표적인 예시를 뉴턴적 시공간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러한 형식으로서의 시간의식 속에는 우주적 질서(cosmos)와 구별되는 텅 빈 우주공간(universe)만이 있으며, 따라서 우리 인간은 의미로 충만한 "살아가기"(living)가 아니라 그러한 속성 자체를 결여한 "있기"(being)를 수행하는 존재가 된다. 요컨대 근대 세속적 시간의식은 우리에게 의미를 부여해줄 외부의 초월적인 차원을 위한 자리를 남겨두지 않는다. 대신 바로 이처럼 보편적이고 균질한 형식으로서의 시간은 인간이 사물을 측정하고 조작할(measure and control) 수 있게 하는 중요한 도구로서 기능하게 된다.

즉 시간의식의 변화는 세계/우주에 대한 의식, 나아가 그것과 인간 사이에 어떠한 관계맺음이 가능한지에 대한 근대적 변화와 이어져 있으며, 그런 점에서 세속화 과정에서 중요한 축을 담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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