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우용 선생의 '시사인 사태' 글 비판
Critique 2016. 9. 9. 12:55[이 글은 편집을 거쳐 허핑턴포스트 코리아에 게재되었다: http://www.huffingtonpost.kr/woochang-lee/story_b_11924110.html ]
전우용 선생의 글을 재밌게 읽을 때도 있지만, 이 글(http://mlbpark.donga.com/mlbpark/b.php?p=1&b=bullpen2&id=5939046)은 인문학 연구자 입장에서 볼 때 (메갈리아/워마드 사태에 대한 해석 자체를 차치하고) 그냥 되도 않는 헛소리다. 여러 커뮤니티에서 돌고 있길래 한 번 세세히 다뤄본다.
1.
"메갈워마드의 정당성 문제는 먼저 아카데미즘 영역에서 치열한 토론을 벌였어야 할 문제입니다. 물론 여기에서 아카데미즘 영역이란 '여성학'에 국한될 수 없습니다. 사회학, 심리학, 정치학, 경제학, 교육학, 정신분석학, 역사학, 문학 등 여러 분야에서 함께 논의할 수 있고, 해야 할 문제죠. 이건 '여성문제'일 뿐 아니라 가치관과 규범, 사회 시스템 전반에 걸친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역사학의 경우, 타학문과의 경계가 허물어진지 오래이고, 프로와 아마추어의 경계도 흐릿한 상태입니다. 하지만 '여성학'은 아직 '외부'에서 발언하기 어려운 영역입니다. 접근을 망설이는 '외부'도 문제지만, "여성이 아니면 알 수 없다"와 "모르는 주제에 끼어들지 말라"는 '내부'의 배타성도 문제라고 봅니다."
-> 이 글의 괴상한 논리를 풀어보자면,
1) 어떤 논쟁적인 주제에 관해서는 아카데미즘이 먼저 발언해야 한다
2) 단 중요한 문제일 경우 여성학이 아카데미즘을 대표해서는 안 된다
3) 따라서 "사회학, 심리학, 정치학, 경제학, 교육학, 정신분석학, 역사학, 문학 등 여러 분야"에서 논의를 거처야만 한다
-> 내 생각에 전우용 선생이 원하는 것처럼 모든 분야에서 이 문제를 다 다룰 때까지는 한 반 세기쯤이 소요될 것 같다. 저널이 2010년대의 사건에 나름의 입장과 해석을 제시하기 위해 2060년대까지 기다려야 한다면, 해당 저널은 그 전에 망할 가능성이 높다(혹은 선생은 모든 언론의 연합뉴스화를 원하는 건가?).
전우용 선생께서 신봉하시는 바로 그 아카데미즘의 영역으로 들어가면 문제가 좀 더 복잡해진다. 그는 처음부터 "여성학"을 좁은 범위의 아카데미즘으로 한정하고 있는데, 물론 학문마다 편차가 있겠지만--물론 이 지점에서 한국사학과에 큰 기대를 갖게 되진 않는데, 예를 들어 서울대 국사학과 홈페이지의 현직교수란을 보면 12명 중 여성은 0명이다; 남성교수 100% 국사학과^^--여성학은 독자적인 전공영역으로서만이 아니라 다른 학문분과에서도 중요한 접근법 중 하나로 간주되고 있으며 여성주의의 여러 전제들 또한 점차 자명하게 받아들여지고 있다. 내가 공부하는 주제도 특별히 여성주의적이라고 할 수 없지만 그로부터 비롯된 주요한 전제들을 당연히 깔고 간다. 덧붙여 "여성학"에 "사회학, 심리학, 정치학, 경제학, 교육학, 정신분석학, 역사학, 문학"적 접근법이 안 들어간다고 생각하는 걸 보면 내 생각에 전우용 선생의 아카데믹한 레벨의 여성주의/학에 대한 인식에서 어떤 전문성을 기대하기는 힘들 것 같다.
"여성학"이 "외부에서 발언하기 어려운 영역"으로 인지되는 이유가 있다면, 그 중 하나는 바로 이 글의 전우용 선생처럼 해당 분과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제대로 파보지도 않고 멋대로 떠드는 케이스가 하도 많으니까 그런 것일 거라 생각한다. 메갈리아/워마드 사태에 대한 수많은 발언자들 중 이걸 좁은 의미의 "여성문제"로만 놓는 사람이 얼마나 있나? 아니 애초에 그 "여성문제"라는 걸 도대체 어떤 뜻으로 사용하는 건가? 이 케이스에 관심을 갖고 있는 연구자들 중 좁은 의미의 "여성학 전공자"(나는 도대체 이 말이 무슨 뜻으로 사용된 건지 모르겠지만)가 아닌 경우는 조금만 발품팔면 나오지 않나? 나는 전우용 선생의 스칼라십을 존중하지만, 이 글은 솔직히 말해 지적으로 게으른, 편견을 재생산하는 글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2.
"담론의 구조와 질서를 근본적으로 바꾸는 데 선봉 역할을 한 건 언제나 아카데미즘이었지 저널리즘이 아니었습니다.... 아카데미즘이 대중의 통념이나 사회 규범따위 무시하고 전진하여 새 영역에 깃발을 꽂는 특공대라면, 저널리즘은 그를 뒤따르며 참호를 파고 보급선을 확보하는 공병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기존 통념과 규범이 무너지는 것은 그 다음입니다.
[...]
시사인은 다른 학문 분야가 토론에 끼어들기 전에, 특공대가 깃발을 꼽기도 전에, 스스로 특공대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제가 편집장이었다면, 기자에게는 현상만 기술하게 하고, 해석과 평가는 아카데미스트들의 좌담이나 토론에 떠넘겼을 겁니다. 게다가 기자는 이 문제를 '오직 여성문제'로만 보아, 여성학적 발언이 아카데미즘 영역을 과잉대표하게 만들었습니다."
=> 세 가지 측면에서 헛소리.
첫째, 아카데미즘이 특공대고 저널리즘이 공병대로서의 역할을 한다는 식의 구별은 제한적으로만 유효하다. 인문사회분과에 한정해서 말하자면, 아카데미즘은 동시대의 사건들을 다루기까지는 어느 정도 시간과 자료의 축적을 요구할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그 시의성이 제약될 가능성이 높으며, 애초에 아카데미즘에 들어가 있는 사람들이 저널리즘 등에서 설정한 동시대의 프레임에 적지 않은 영향을 받는다. 전우용 선생의 코멘트 대로라면 우리는 정치평론이나 경제평론, 문화평론 같은 부분에서 사회의 통념과 어긋나는 질문들은 모두 학적 논의가 이루어질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고 주장해야 하는데, 아마 그랬다면 17세기 영국혁명이나 18세기 말 프랑스 혁명을 포함해 역사의 주요 장면이 현저히 다른 국면을 보여주었을 것이다. 저널리즘 쪽에서 명백히 틀린 작업을 할 때 아카데미즘이 이를 비판하고 교정할 수 있지만(그 역도 성립한다; 아카데미즘에서 헛소리가 안 나오는 것도 아니고...어떤 주제에 대해 한 100년 정도 연구사를 파다보면 살아남는 논문은 10%도 안 되는 걸 쉽게 알 수 있다) 그렇다고 저널리즘이 특정 주제에 침묵해야 한다는 건 그냥 되도 않는 아카데미즘 우월주의에 가깝다. 까놓고 말해 아카데미즘이 "특공대" 역할을 하는 때는 극히 제한적인 순간에 불과하며, 한국에서는 그게 더 힘들지 않나?
둘째, 전우용 선생은 아카데미즘과 저널리즘을 분리한 뒤 시사인의 해당 기사를 후자에 분류한다. 그런데 특히 논쟁적이었던 "정의의 파수꾼들" 기사를 보면, 분명 천관율 기자의 프레임 구축이 보이긴 하지만, 데이터 분석 자체가 해당 영역에서 아카데미즘적 훈련을 받고 전문가로서의 경력을 축적하고 있는 김학준 선생에 의해서 수행되었다. 이쯤에서 핵심적인 질문을 던져보자: 전우용 선생과 김학준 선생 중 인터넷 커뮤니티의 여론 분석에서 누가 더 아카데미즘에 속하고, 누가 더 전문가인가? 말할 것도 없이 후자다. 전우용 선생이 한국사학계에서 어떤 스칼라십을 쌓았든 간에, 그가 아카데미즘의 전문성이 무엇인지 이해하고 있다면 동의하겠지만, 이 주제에선 그냥 아마추어A 이상도 이하도 아니며, 시사인의 해당 기사야말로 좀 더 높은 수준의 전문성을 보유하고 있다. 솔직히 전우용 선생이 제시한 구별을 그대로 적용하자면, 지금 여기서는 선생이 침묵하는 게 훨씬 일관성 있는 태도일 것이다.
셋째, 전우용 선생은 해당 기사가 이 사태를 "오직 여성문제"로만 본다고 주장하는데, 애초에 "정의의 파수꾼들" 기사는 대규모 온라인 데이터 분석에 기초한 담론분석이며 굳이 범위를 좁히자면 남성성 분석에 속한다는 점에서 해당 글이 "오직 여성문제"로만 본다는는 전우용 선생의 말은 어폐가 있으며(물론 그가 동시대의 사회과학 필드에서 진행되는 담론분석을 이해하고 있는지는 모르겠다), 더불어 어떤 기자가 '사태를 충분히 전체적으로 조망'하는 완성된 위치에 서야 한다면... 그럼 그냥 수십 년 뒤 두꺼운 책 한 권을 쓰지, 뭣하러 짧고 시의성 있는 기사를 쓰나? 왜 학자나 전문가가 할 일을 기자에게 자의적으로 떠넘긴 다음 기자가 잘못했다고 평하나?
3.
간단하게 정리해보자. 이 글에서
1) 전우용 선생의 아카데미즘/저널리즘 구별 및 기능분배는 도대체 어떤 근거로 이뤄지는지, 그게 동시대에 대해서도 맞는 주장인지 모르겠고
2) 전우용 선생의 "여성학" "여성문제"에 대한 정의가 도대체 어떤 건지, 과연 그 주제에 대해서 선생이 아는 범위가 어디까지인지 잘 모르겠고(뭘 읽어보셨을까?)
3) 여성학이 배타적이고 좁은 영역이며 중요한 주제를 다룰 때 다른 분과에서 충분히 들어올 때까지는 제대로 된 사회적 발언권을 행사할 수 없다는 믿음은 어디에서 근거한 건지 모르겠고(그럼 국정교과서 사태도 어디 교육행정학 전공자들이 논문을 써줄 때까지는 아카데미즘의 합의가 이뤄진 것이 아니니 언론들은 조용히 팩트만 전달하라고 해 보자--정부의 의사결정과정을 포함해 수많은 분야가 연루된 주제에서 한국사학계가 "과잉대표"되지 않도록 말이다)
4) 시사인 기사에서 선생 본인의 스칼라십보다 더 높은 수준의 전문성이 들어갔다는 건 이해하지 못하시는 것 같다.
간단히 말해, 이 주제에서 전우용 선생이 드러내는 여러 가지 편견은 그가 동시대 여성학, 사회과학, 저널리즘에서 벌어지고 있는 다양한 현상을 전문적으로 조망할 역량을 갖추지 못했음을 보여준다. 내가 내린 결론은 이 주제에 관해 전우용 선생의 발언이 가진 무게는 평소에 뉴스를 (취사선택하여) 열심히 읽는 동네아저씨A의 무게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자신이 다루지 못한 전문분과의 지적 역량에 대한 존중이 오늘날 아카데미즘의 기본이라는 점에서, 이 글은 아카데미즘의 기본을 충족시키지 못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인문사회 연구자로서 아주 솔직히 한 가지를 지적해보면, 예전부터 여성주의적 이슈가 나올 때마다 (진보연하는 사람들 포함해서) 다른 연구자들이 "그것은 여성에 국한된, 보편적이지 않은 연구이기 때문에 받아들일 수 없다"라고 반응하는 건 한국의 인문학계에서 하나의 클리셰였다. 성차에 관련된 문제가 보편적이 아니라 지엽적인 것이라 주장하신 분들께서 진정한 "보편적인" 연구를 수행하셨는지, 그 위대한 결과물이 어디에 있는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말이다. 냉정히 말해 이 글은 그런 해묵은 태도를 일말의 반성없이 반복하고 있으며, 전우용 선생은 그런 점에서 최근 조롱의 대상이 되고 있는 강신주 인터뷰(http://bookdb.co.kr/bdb/Interview.do?_method=InterviewDetailM&sc.mreviewNo=72721)의 '여성주의는 보편적이지 않다'는 80년대 대학가에 유행하던 편견을 공유하는 셈이다. 선생이 이 주제에 대해 유의미한 발언을 지속하실 의향이 있으시다면, 그 편견으로부터 먼저 탈출하셔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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