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과 종말론: 발터 벤야민의 <역사철학테제>에 관하여.
Intellectual History 2016. 3. 24. 03:32이 글은 수강 중인 대학원 수업 토론문으로 처음 쓴 글을 일부 수정보완한 것이다. 텍스트는 아래의 세 판본에 실린 것을 참고했다. 통상적으로 "역사철학테제"로 알려진 이 글은 최성만 선생의 선집이 출간됨에 따라 최근에는 원제인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로 불린다. 그러나 나는 여기에서 _Illuminations_에 수록된 영역본 "Theses on the Philosophy of History"를 주로 활용했고, 따라서 이를 직역한 "역사철학테제"란 명칭을 사용한다. 벤야민의 독일어 원 텍스트를 직접 검토할 역량이 되지 않는 나로서는 Harry Zohn의 영어 번역과 최성만 선생의 번역을 비교하는 수밖에 없었다--엄밀히 말해 "역사철학테제"와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는 서로 다른 판본에 기초하고 있으며, 후자와 대응되는 영역본은 2003년 하버드 대학 출판부 발터 벤야민 선집에 실린 "On the Concept of History"로, 길 판과 하버드 판은 각주 또한 상당히 많이 겹친다(단 하버드 판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는 "역사철학테제"의 번역을 부분적으로 참고한 것으로 보인다).
나 자신이 최성만 선생이 기획한 도서출판 길 판 선집을 따라 읽으며 벤야민을 접하게 된 사람으로서 선생의 업적이 갖는 무게를 결코 평가절하하지 않지만, 텍스트만 놓고 볼 때 영역본이 그 자체로 훨씬 명확하게 스스로의 요지를 전달하는 글임은 분명하다. 한국어판에서 불필요하게 모호하거나 혼동의 여지가 있는 대목이 영역본에서는 문맥에 맞으면서도 좀 더 분명해지기에, 불필요한 신비주의에 매혹을 느끼지 않는 독자라면 "역사철학테제"든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든 영역본을 천천히 숙독하는 쪽을 권하고 싶다. 두 판본 모두 영어는 그다지 까다롭지 않은 편이다.
나의 글은 벤야민을 이해함에 있어 카발라와 같은 머나먼 저편을 바라보며 그 알 수 없는 비의성을 칭송하듯 한탄하기 전에 신학, 특히 종말론 전통 및 (신학과 결부된) 시간관에 대한 이해가 필수적이라 주장한다--너무나도 쉽게 간과되지만, 메시아주의는 그 자체로 종말론적 사유의 한 유형이다. 종말론과 결부된 시간관, 특히 구원사(heilsgeschichte, 영어로 직역하면 the salvation history 정도)적 관점은 그 자체가 특정한 역사철학/신학의 산물로서 역사를 서사화하기 위한 하나의 근본적인 틀을 제공하며, 벤야민의 글은 바로 그것과 결부된 작업이다. 이 점을 염두에 둔다면 "역사철학테제"는 분명 과도하게 신비주의적이거나 난해한 텍스트는 아니다. 나의 목표는 벤야민의 서술이 전제하는 맥락을 보다 구체적이고 분명하게 제시함으로써 벤야민을 하나의 물신으로 만드는 대신 같은 눈높이에서 마주 볼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Benjamin, Walter. "Theses on the Philosophy of History." _Illuminations_. Trans. Harry Zohn. Ed. and Intro. Hannah Arendt. [1968] Preface. Leon Wieseltier. NY: Schocken Books, 2007. 253-64.
---. "On the Concept of History." _Walter Benjamin: Selected Writings Volume 4, 1938-1940_. Ed. Michael W. Jennings. Cambridge: Harvard UP, 2003. 389-400.
발터 벤야민.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 <발터 벤야민 선집 5: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 / 폭력비판을 위하여 / 초현실주의 외>. 최성만 역. 도서출판 길, 2008. 327-50.
기타 함께 참고한 벤야민의 글들은 다음과 같다.
발터 벤야민.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 관련 노트들(1940)". 선집 5권. 351-84.
---. "이야기꾼: 니콜라이 레스코프의 작품에 대한 고찰". <발터 벤야민 선집 9: 서사·기억·비평의 자리>. 최성만 역. 도서출판 길, 2012. 413-60.
Benjamin, Walter. "The Storyteller: Observations on the Works of Nikolai Leskov." _Walter Benjamin: Selected Writings Volume 3, 1935-1938_. Eds. Howard Eiland & Michael W. Jennings. Cambridge: Harvard UP, 2002. 143-66.
1.
벤야민은 「역사철학테제」의 테제1에서 역사철학의 본질을 일종의 속임수에 빗대어 설명한다. 체스를 두면 백전백승인 기괴한 모양의 자동인형이 있다. 그러나 승리의 비결은 따로 있으니, 체스의 달인 “작은 곱사등이”(a little hunchback, 253)가 그 속에 숨어 인형을 조종하고 있었던 것이다. 바둑의 달인인 기계가 사람을 조종하여 승리하는 광경을 실시간으로 보는 오늘날엔 역으로 평이해 보이는 이 비유에서 자동인형이 “역사유물론”(historical materialism)이라면, 체스의 달인에 해당하는 것은 “신학”(theology)이다. 벤야민에게 신학은 역사유물론의 승리를 위한 필수불가결한 요소이며, 어쩌면 그 핵심일지도 모른다. 이러한 설명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다음의 두 가지 물음을 해결해야 한다. 신학이란 무엇이며, 그에 힘입어 역사유물론이 투쟁해야 할 상대는 무엇이란 말인가? 결코 즉각적으로 소화할 수 있는 언어로 쓰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벤야민의 단편은 분명 이 두 질문에 대한 답변을 준비해놓고 있다.
곧바로 이어지는 테제2 “신학”의 성격을 이해할 수 있는 키워드로 “구원”(redemption), “메시아적 힘”(Messianic power)을 제시한다(254). “행복에 대한 우리의 상은 구원의 상과 풀어낼 길 없이 결속되어 있다”(our image of happiness is indissolubly bound up with the image of redemption)--우리삶의 지향점은 구원이다. 그러나 벤야민의 관심사는 단순히 구원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이라는 개념을 두고 역사를, “과거”(the past)의 의미를 재구축하는 것이다. "과거는 구원을 가리키는 은밀한 지침을 지닌다"(The past carries with it a temporal index by which it is referred to redemption). 테제3에서 “오직 구원받은 인류만이 과거의 충만함을 획득한다”(only a redeemed mankind receives the fullness of its past)고 말할 때, 이는 과거가 의미(significance)를 획득하기 위해서는 구원이라는 지향점이 필요함을 뜻한다. 역사가 그 어떤 사건도 상실함 없이 완전하게 담아내기 위해선(nothing that has ever happened should be regarded as lost for history) 그러한 완전성을 가능하게 해주는 중심점이 필요하며, 구원이 바로 그 역할을 수행한다--"역사의 진행이 여러모로 해어진 가닥이고 수천 가닥으로 흐트러진 밧줄로서 풀어진 머리 다발처럼 늘어져 있다면, 그 가닥들이 모두 모여 머리 장식으로 엮이기 전까지 어떤 가닥도 특정한 장소를 갖지 못한다"는 벤야민의 비유는 그 자체로는 무의미한 파편에 불과한 역사적 사실들이 하나의 전체 속에서 모두 각자의 자리를 가지는 광경을 떠올릴 수 있게 해준다("노트들" 358).
테제4에서 태양을 따라 회전하는 꽃의 비유는 실로 의미심장하다. 꽃 혹은 과거는 그 자체로는 하나의 고립된, 파편화된 점에 불과할 뿐이지만, 구원이라는 태양과 이어질 때 하나의 선 혹은 보다 적절하게 어떤 전체의 일부분으로서 의미를 획득할 수 있다. 이때 과거에서 구원으로 향하는 선이 바로 “계급투쟁”(the class struggle)으로서의 역사다. 물질적인 것들을 둘러싼 계급투쟁이 있을 때 비로소 "정련되고 정신적인 것들"(refined and spiritual things)이 존재할 수 있다.이것들은 현재의 지배적인 해석들, 즉 "과거로부터 지금까지 지배자들이 거둔 모든 승리"(every victory, past and present, of the rulers, 255)를 의문시하여 우리를 꽃들의 움직임을 따라 태양을 좇도록 이끌 것이다.
2.
서술의 속도가 가속화되기 시작하는 테제6에서 벤야민은 자신이 이야기하는 구원이 유대-기독교 종말론 전통의 언어와 밀접히 닿아있음을 보여준다. “메시아는 구원자로서만이 아니라 적그리스도를 굴복시키는 자로서 강림한다”(The Messiah comes not only as the redeemer, he comes as the subduer of Antichrist, 255)는 문장이 대표적인 예다. 아우구스티누스적 시간관에서 명확히 드러나듯 역사가 인간의 타락으로 시작하여 “신의 왕국”(civitas dei)이 실현되는 것으로 정지한다면, 종말론은 시간이 정지하는 순간이기도 한 구원 직전에 벌어지는 일들을 다룬다. 그 논리의 원형을 제공하는 「요한계시록」에서 묵시록의 순간은 적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투쟁으로 그려진다. 벤야민은 "맑스는 계급 없는 사회의 관념 속에 메시아적 시간관을 세속화했다"("노트들" 354)는 말에서 드러나듯 역사유물론 혹은 계급투쟁의 역사를 종말론적 서사와 중첩시킴으로서 자신의 고유한 역사관을 완성한다("세속화"라는 단어는 매우 흥미롭지만 여기서는 단지 그 존재를 언급하는 것만으로 만족하자).
노트를 또 다시 참고한다면, 벤야민은 맑스의 세 가지 기본 개념을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계급투쟁, 역사적 발전의 과정(진보), 계급 없는 사회"로 설정한다(358). 통상적으로 맑스주의가 "일련의 계급투쟁을 통해 인류는 역사적 발전 과정 속에서 계급 없는 사회에 다다른다"고 이해된다면, 벤야민은 "계급 없는 사회는 역사적 발전의 종점으로 구상될 수 없"으며 "계급 없는 사회의 개념에 그것의 진정한 메시아적 얼굴이 다시 부여되지 않으면 안 된다"고 강하게 주장한다. 메시아의 시간이 이전의 역사적 시간과는 질적으로 다른 무엇이라는 전제를 깔고 있는 이러한 대목은 맑스가 제시한 인류의 도달점을 벤야민이 메시아의 시간 혹은 구원의 순간과 등치시키고 있음을 보여준다; 널리 인용되는 "혁명은 이 기차를 타고 여행하는 사람들이 잡아당기는 비상 브레이크"(356)이라는 문구는 이런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한 가지 강조해야 할 것은 벤야민의 메시아주의는 원천적으로 (맑스 또한 그러했듯) 구원 이후에 어떤 삶이 펼쳐질지에 대해 알 수 없다는 철저한 불가지론이기도 하다는 사실이다; "물리학자가 태영광의 스펙트럼에서 자외선을 찾아내듯이, [역사의 구조를 탐구하는 역사적 유물론자]도 역사 속에서 메시아적 힘을 찾아낸다. '구원된 인류'가 어떤 상황에 있는지, 이러한 상황이 등장하는 일이 어떤 조건에 묶여 있는지, 언제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지를 알고자 하는 사람은 대답이 없는 질문들을 던지고 있는 셈이다"("노트들" 355-56).
[*물론 애초에 맑스와 엥겔스의 <공산당 선언>(The Communist Manifesto)은 자유의 왕국이 도래하기 전 프롤레타리아와 부르주아 계급이 충돌하는 운명의 순간이 올 것이라는 종말론적 서사적 구조를 토대로 하고 있으며, 이들의 역사철학에 토대를 제공한 헤겔 역사철학 자체가 유대-기독교 구원사로부터 배태되었음을 고려한다면 벤야민의 시각이 아주 이질적이기만 한 것만은 아니다(헤겔과 기독교 구원사에 관해서는 뢰비트(Karl Löwith)의 <역사의 의미>(Meaning in History)를 참조). 벤야민의 종말론적 색채는 “세속 및 그 사건들로부터 등을 돌린”(to turn them away from the world and its affairs, 258) 수도사들의 자세를 언급하는 10절에서 다시금 확인할 수 있는데, 이는 명백히 야콥 타우베스(Jacob Taubes)가 바울 서신에서 강조한 대목들, 「로마서」 13장 및 「고린도전서」 7장 29-32절을 떠올리게 한다(<바울의 정치신학> 129). 벤야민의 사유에서 종말론적 사고를 짚어낸 것으로 타우베스의 책 7장을 참고하라)--타우베스의 강의록은 그 자체로도 매우 탁월하지만 한국어로 읽을 수 있는 최상급의 벤야민 안내서에 속한다.]
3.
테제7부터 글은 본격적으로 역사유물론이 투쟁해야 할 적수들에 대한 논의로 접어든다. 벤야민의 첫 공격대상은 (테제 6에 언급되는) 랑케(Leopold von Ranke)의 “있는 그대로”(the way it really was, 255)의 역사 혹은 퓌스텔 드 쿨랑주(Fustel de Coulanges)의 “이후의 역사적 진행에 관해 알고 있는 것들을 모두 지워버리는”(blot out everything they know about the later course of history, 256) 관점이다. 이는 결과적으로 그때그때의 살아남아 문화/문명을 전리품으로 챙긴 승리자들, 또는 피억압자들을 짓밟은 통치자들의 관점에서만 역사를 바라보는 것으로 이어지며, 벤야민은 그것을 두 대립항을 기묘하게 연결시킨 “문명의 기록치고 동시에 야만의 기록이 아닌 것은 없다”(There is no document of civilization which is not at the same time a document of barbarism)는 유명한 문구로 집약한다. 역사유물론을 따르는 역사가는 인류가 남긴 유산들만을 바라보는 것을 필사적으로 거부하고 (언젠가는 승리하게 될) 억압받은 이들, 지워진 이들의 중단된 삶을 미래의 구원으로 나아가는 온전한 역사의 일부로 포함시킬 수 있어야만 한다.
그러나 벤야민이 지목하는 진정한 ‘적그리스도’는 다른 무엇보다도 테제8부터 13까지 거론되는 “진보”(progress)의 관념으로, 그는 파시즘 및 (베른슈타인을 연상하게 하는) 사회민주주의를 진보의 역사관을 공유하는 적수들로 지목한다. 벤야민이 파시즘과의 투쟁에 맞서 “진정한 비상사태”(a real state of emergency)를 초래하는 것, 혹은 테제9에서 진보라는 “폭풍”(storm)을 거슬러 “낙원”(Paradise)에 도달하는 과업을 말할 때(257), 우리는 대체로 무한한 진보를 긍정하는 사회에 속한 독자들로서 혼란스러움을 느끼게 된다. 벤야민은 오해의 여지가 없도록 근세 인문주의 이래 서구 근대의 공통된 합의점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는 “인류의 무한한 완성가능성”(the infinite perfectibility of mankind, 260)을 자신이 비판하는 진보의 관념의 예시로 직접 꼽는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13절 말미에서 벤야민이 덧붙이듯 ‘진보 사관’에 대한 비판이 “텅 빈, 균일한 시간”(a homogeneous, empty time, 261)에 대한 비판이기도 하다는 것, 즉 시간관의 문제와 결부된 것임을 인식해야 한다.
중세 말에서 근세에 이르는 기간 동안 서구에서 이루어진 개념적 진전 중 하나는 바로 즉 모든 것들이 덧없이 스러질 세속의 시간(tempus)도, 모든 시간의 흐름이 정지하는 신의 시간 혹은 영원(aeternitas)도 아닌 제3의 시간관으로서 ‘천사들의 시간’(aevum)이라는 개념이 사람들의 세계관에 침투하기 시작했다는 것으로, 이 제3의 시간관은 칸토로비츠(Ernst H. Kantorowicz)가 잘 설명했듯 필멸자들의 무한한 진보를 수용할 수 있었다(The King's Two Bodies 275-84). 그러나 벤야민에게 이러한 제3의 시간은 실질적으로는 (아우구스티누스가 박멸하고자 한 고대의 유산인) 무한한 순환으로서 영원회귀의 시간을 그럴싸하게 가져온 것에 불과하다(이는 칸토로비츠 또한 aevum이 아리스토텔레스주의의 되풀이라고 진술한 바와 일치한다). "영원회귀는 우주로 투사된 유급의 형벌이다. 즉 인류는 그들의 텍스트를 무수하게 반복하여 베껴 써야 한다"("노트들" 358)는 대목이나 다른 글에서 오귀스트 블랑키의 절망적인 꿈을 언급하는 대목은 벤야민의 텍스트에서 고대 그리스-로마의 시간관과 유대-기독교 시간관의 충돌이 되풀이 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진보가 이럴 것일진대 질적으로 다른 시간으로서의 "구원은 진보를 막는 경계선의 방어벽"이라는 진술이 나오는 것도 타당하다("노트들" 360).
벤야민이 진보의 역사 혹은 “역사의 연속체”(the continuum of history)를 “폭파”(explode)시키고 “현재의 현존으로 충만한 시간[지금시간]”(time filled by the presence of the now, 261)을 거론할 때, 우리는 그가 소환하고자 하는 것이 영어판 주석자가 정확하게 지적한 “영원한 현재”(nunc stans), 곧 구원 이후 만물이 정지상태에 놓인 영원한 시간(aeternitas)임을 알 수 있다(*엄밀히 말하자면 우리는 벤야민의 지금시간이 과연 스콜라철학자들이 말하는 영원한 시간과 같은 것인지, 아니면 유대적 혹은 벤야민 고유의 체계에서 다소간 다른 뉘앙스를 띄는지 검토해야 하나, 그것은 현재 내 역량을 넘어선다): “역사유물론자는 움직이지 않는 현재, 시간이 가만히 서서 정지하게 될 그러한 현재라는 개념을 가져야만 한다”(A historical materialist cannot do without the notion of a present which is not a transition, but in which time stands still and has come to a stop, 262). 로베스피에르의 혁명이 고대 로마 공화국의 의장을 되풀이하고자 했다면, 벤야민이 말하는 계급 없는 세상이라는 맑스주의적 전통은 아직 오지 않은 미래의 순간으로 도약한다. 아직 주어지지 않은 목적/끝(end)이 드디어 현시되는 순간, 일종의 유토피아적 순간으로 말이다.
4.
테제14부터 테제18 및 보론 A, B에 이르기까지 「역사철학테제」의 후반부는 ‘지금시간’ 및 그에 기반한 (신학적) 역사관을 상술하는 데 할애된다. 지금시간은 “메시아적 시간의 부스러기들로 가득한”(which is shot through with chips of Messianic time, 263) 때로, 우리는 현재의 매순간으로부터 “만사가 메시아적인 중단을 맞이하리라는 신호, 또는 달리 말하자면 억압된 자들의 과거를 위해 투쟁할 혁명적인 기회”(the sign of a Messianic cessation of happening, or, put differently, a revolutionary chance in the fight for the oppressed past)를 인식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이 순간에 하나의 구체적인 작업은 일생의 작업으로, 시대로, 전체 역사로 지양되어--이러한 논리 자체는 <독일 비애극의 원천>에서 강조한 알레고리를 떠올리게 한다--더욱 커다란 보편적인 의미를 획득할 수 있게 된다. 요컨대 진보의 시간이 끝나고 메시아가 강림하는 순간 가장 사소한 것을 포함한 모든 사건/사물들은 고유의 자리를 찾아 하나의 완성된 역사를 구성하게 된다; 어떤 점에서 우리는 이것을 정지한 시간이 공간화하는 광경으로 떠올려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대목을 이해하는 데 한층 도움이 되는 것은 벤야민의 중요한 문예비평 「이야기꾼: 니콜라이 레스코프의 작품에 대한 고찰」이다. 이 글에서 특히 죽음과 구원사의 문제를 직접적으로 거론하는 10절부터 12절까지는 「역사철학테제」를 읽는데 거의 곧바로 활용할 수 있다. 부가설명 없이 중요한 대목만 인용한다.
10절 후반부, "중요한 것은 인간의 지식이나 지혜만이 아니라 무엇보다 그가 살아온 삶--이야기가 되는 소재로서의 그 삶--이 임종에 이른 사람에게서 비로소 전수될 수 있는 형태를 취한다는 점이다. 삶이 마감되는 순간에 인간의 내면에서 일련의 이미지들이--스스로 깨닫지 못한 채 마주쳤던 자기 자신의 모습들로 이루어진 이미지들이--떠오르듯이, 돌연 그의 표정과 시선에서 잊을 수 없는 무엇인가가 떠올라 그 사람에 관한 모든 것에 권위를 부여하게 된다. 제 아무리 하찮은 사람이라도 죽음의 순간에는 살아있는 사람들에 대해 그러한 권위를 갖는다"(Yet, characteristically, it is not only a man's knowledge or wisdom, but above all his real life-and this is the stuff that stories are made of-which first assumes transmissible form at the moment of his death. Just as a sequence of images is set in motion inside a man as his life comes to an end-unfolding the views of himself in which he has encountered himself without being aware of it-suddenly in his expressions and looks the unforgettable emerges, and imparts to everything that concerned him that authority which even the poorest wretch in the act of dying possesses for the living around him.). 11절의 첫 문장, "죽음은 이야기꾼이 보고할 수 있는 모든 것에 대한 인준이다. 그는 죽음으로부터 자신의 권위를 부여받는다"(Death is the sanction for everything that the storyteller can tell. He has borrowed his authority from death, 두 대목 모두 한국어판 434, 하버드판 151).
무엇보다 분명한 12절을 보라. "중세의 연대기 기록자들은 그들의 역사 이야기를, 해명할 수 없는 신의 구원 계획의 바탕 위에 둠으로써 처음부터 입증 가능한 설명을 해야 한다는 부담을 떨쳐냈다. 바로 그러한 설명의 자리에, 특정한 사건들의 엄밀한 연쇄를 다루는 것이 아니라 그 사건들이 해명 불가능한 거대한 세상사의 흐름에 편입되어 있는 방식을 다루는 해석이 들어선다. [...] 이야기꾼 속에는 연대기 기록자가 변화된 형태, 말하자면 세속화된 형태로 보존되어 있다. 레스코프는 이러한 사정을 매우 분명하게 입증해주는 작가들의 반열에 속한다. 그의 작품에는 구원사적 방향을 지향하는 연대기 작가와 세속적 방향을 지향하는 이야기꾼이 똑같이 작용하고 있다. 그리하여 그의 이야기들이 짜이는 직조의 바탕이 세상사의 흐름에 대한 종교적 관점이 반영된 금실의 바탕인지 아니면 그 흐름에 대한 세속적 관점이 반영된 다채로운 색실들의 바탕인지 거의 구별할 수 없는 경우가 많다."(By basing their historical tales on a divine-and inscrutable-plan of salvation, at the very outset they[the chroniclers of the Middle Ages] have lifted the burden of demonstrable explanation from their own shoulders. Its place is taken by interpretation, which is concerned not with an accurate concatenation of definite events, but with the way these are embedded in the great inscrutable course of the world. [...] In the storyteller the chronicler is preserved in changed form--secularized, as it were. Leskov is among those whose work displays this with particular clarity. Both the chronicler, with his orientation toward salvation, and the storyteller, with his profane outlook, are so represented in his works that in a number of his stories one can hardly determine whether the web in which they appear is the golden fabric of a religious view of the course of things, or the multicolored fabric of a worldly view, 한국어판 437-38, 하버드판 152-53, 강조는 나의 것).
벤야민은 '이야기꾼'을 역사유물론적 역사기술의 전범으로 삼았고, 「역사철학테제」는 이야기꾼의 작업에 기초해 유물론적 역사기술원칙을 제시하기 위한이론적 실천이라고 할 수 있다. 주목해야 할 단어가 바로 "세속화"로, 벤야민은 이 단어를 맑스와 이야기꾼의 작업 양자에 모두 적용한다. 앞서 "노트들"에서 인용했듯 맑스의 계급 없는 사회가 세속화된 메시아적 시간관이라면, 이야기꾼은 구원사에 입각해 역사를 기술하는 연대기 기록자의 세속화된 형태이기도 하다.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이 시기 슈미트("현대 국가론의 중요 개념은 모두 세속화된 신학 개념이다", <정치신학> 3장 첫 문장, 한국어판 김항 역 54)를 포함해 세속화는 매우 인기있는 개념어였으되 각 사용자마다 그 용법이 미묘하게 달랐다는 점이다. 인용한 12절의 대목은 벤야민이 세속화라는 단어를 쓸 때 결코 부정적으로 사용하지 않으며, 오히려 세속화 개념을 통해 종교적인 것과 세속적인 것들이 하나의 대상/사건에 공존하는 '깊이 있는 장'을 만들어낸다는 것을 보여준다. 마치 "런던"의 블레이크(William Blake)가 눈 앞의 대상에서 현세의 구체적인 고통과 묵시록적 순간을 동시에 보는 것처럼, 벤야민은 맑스주의에서 물질적 투쟁과 정신적인, 신학적인 역사라는 두 가지 층위를 동시에 바라본다. 신학은 우리가 마주하는 현실에 더욱 깊은 층위를 부여한다.
5.
맑스주의 혹은 사회주의의 다양한 판본이 넘쳐흘렀던 전간기에 벤야민과 같이 독특한 형태의 맑스주의 역사철학이 존재했음은 그 자체로는 그다지 놀랄 일이 아닐 수 있으며, 특히 이 시기 독일이 타우베스, 슈미트(Carl Schmitt)나 바르트(Karl Barth)와 같이 종말론을 곁에 두고 작업한 이들이 왕성하게 활동하던 곳이었음을 감안한다면 더욱 그러하다. 하지만, 심지어 맑스와 엥겔스의 사유에 내재한 역사철학적 계기를 매우 강조한다고 하더라도, 벤야민과 <공산당 선언> 사이에 자리한 중대한 간극을 놓칠 수는 없다. 이는 다름아닌 역사의 주체라는 물음이다. 주지하다시피 <공산당 선언>을 비롯해 맑스주의의 핵심적인 테제 중 하나는 혁명을 담당할 역사적 주체로서의 프롤레타리아 계급이 ‘필연적으로’ 등장한다는 것으로, 이는 전도된 형태라 할지언정 주관적인 행위와 객관적인 운동을 아우르는 헤겔적 전통의 핵심요소이기도 하다.
그러나 “시간의 매 순간은 메시아가 들어올 수 있는 좁은 문이다”(For every second of time was the strait gate through which the Messiah might enter, 264)라는 진술로 문을 닫는 「역사철학테제」에서 혁명적 시간을 개시할 몫은 우리 자신이 아닌 메시아라는 극도로 낯설고 알 수 없는 이에게 주어져 있다. 메시아주의는 기본적으로 타력구제로부터 출발하는 사유이며, 그중에서도 벤야민의 역사철학은 17세기 영국혁명의 종말론 등과 비교하더라도 분명 수동적인 측면, 우리가 어떻게 해볼 도리 없는 측면이 강조되어 있다--때에 따라서 구원은 우리가 원하지 않는 순간에 원하지 않는 형태로 주어질 수 있으며,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이러한 체계에서는 구원을 더욱 구원답게 만들어주는 일일 것이다(이 점을 강조하는 대목으로 타우베스의 책 178-79를 보라). 그런 점에서 벤야민의 텍스트는 맑스주의 역사철학에 내재한 하나의 계기를 급진화한 것이면서도 동시에 후자가 유지하는 미묘한 균형을 무너트리는 역할 또한 수행하지 않는가?
분명한 것은 종말론을 포함한 신학적 언어가 결코 단순히 열등하고 미개한 사유, 비합리적인 것의 지배를 뜻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종교의 언어는 인간에게 세계를 '합리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관점을 부여하며, 그중에서도 종말론 전통은 나약한 인간을 과감한 행위에 나서도록 하는 가장 강력한 기제이기도 하다. 나는 운동을 이끌어내는 이데올로기로서의 맑스주의에 내포된 종말론적 성격이 결코 배제되어야 할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오히려 그것을 벗어나 순전한 '과학'이 되었을 때 맑스주의는 한갓 강의실의 방법론으로 쪼그라든다. 이는 이데올로기의 메타레벨에 서기를 요구받는 연구자들에게 역시 마찬가지로, 설령 맑스주의 혹은 벤야민의 신학적 계기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이것이 그들의 사유가 사람들을 뒤흔들 수 있게 한 핵심적 요소임을 이해하지 않는 한 연구자들은 그저 맹목적인 근대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채 남겨질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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