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열-통합, 사유의 성숙, 비평과 가치, 이론과 논리, 훈련 [131116]

Comment 2014. 3. 18. 13:09

* 2013년 11월 16일 페이스북


분열된 삶을 유지하기란 그것이 보람되고 생산적인 만큼이나 위험하고 어렵다. 이때 삶의 분열이란 단순히 서로 다른 요소들이 무관하게 존재한다는 것이 아니라, 상관적인 요소들이 언제든 충돌할 위험을 갖춘 채로, 혹은 이미 충돌하며 동일한 차원에 움직이며-존재함을 가리킨다. 둘의 분열을 동일한 인격/주체 안에 거두어들일 수 없을 정도로 예민하고 연약한 자아를 지니지 않은 사람들, 곧 그것의 모순을 감내하면서 끌고 가는 사람들은 어떤 형태로든 양자를 끌어안으면서 살아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혹은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양자를 어떤 형태로든 포괄하는 또 다른 자아를 갖출 수밖에 없게 된다고. 그것이 매개의 형태이든, 불안한 공존이든, 혹은 제3의 자아의 (폭력적일 수도 있는) 지배에 따른 평화이든. 다시 말해 상호모순되는 삶의 파편들은 어떤 형태로든, 때로 그것이 독립적인 자아라기보다는 그저 기능에 불과할 때도 있을텐데, 그것들을 유지하기 위한 계기를 요구하고 낳는다. 그러나 그 계기가 결코 완전할 수 없음을 아는 일은 중요하다. 혹은 그런 식으로 필연적인 모순들을 제거하는 일이 완전히 유익하지만은 않다는 것을 인정하는 일은 중요하다.

사유가 오로지 작동을 통해서만 생존하고 성장한다는 것에 동의한다면, 그리고 그러한 작동이 끊임없는 미지의 영역 혹은 타자, 낯선 것과의 대면을 통해서만 이어질 수 있음에 동의한다면, 우리는 생산적인 독서란 우리의 두뇌에 끊임없이 병균을 침투시키는 행위와 같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비유는 한 가지 오류를 함축한다. 통상적으로 육체의 생존(그 자체로 선과 등치되는)은 병균과의 대립을 통한 항체의 생성, 그리고 더 강해진 육체에 의한 병균의 제압을 요구한다. 그러나 우리가 위대한 사유와 맞닥트릴 때 우리는 우리가 그때까지 갖추고 있던 보다 열등한 사유를 단지 조금 더 튼튼히 하는데 만족하는 대신 그것을 근본적으로 뒤집고 위대한 사유의 위대함을 우리의 특성으로 만들 방도를 찾아야만 한다. 우리는 위대한 낯선 것을 제압하는 대신 위대함에 저항하는 자기 자신을 제압해야만 한다. 다시 말해 사유의 성숙은 기존 사유를 보존하는 데 있지 않다. 그런 면에서 지양aufheben과 같은 단어의 온건하지 않은 색채, 그것의 파괴적인 성격은 귀기울여 들을 필요가 있다. 동시에 사유의 옆에서는 우리가 갖 맞아들인 위대함의 완벽하지 않음을 파악할 준비가 된 검찰관이 준비되어 있어야만 한다. 이때의 함정은, 그 검찰관 또한 완벽하지 않다는 사실을, 그 또한 나의 일부분임을 망각하는 데 있다. 그런 면에서 논리는 사유의 창조물이자 동시에 사유에 의해 끊임없이 파괴되는 대상이면서도 근본적으로 사유보다 강하다. 위대한 사유들이 최종적으로 파편적인 성격을 띠는 경우들이 있기는 하다. 그러나 대체로 사유는 파편적인 방랑을 통해서 성숙하는 게 아니라 논리와의 접촉, 논리에 올라타기, 논리를 부수기를 거치면서 성숙하다. 갖가지 입장들을 경유하면서 자신의 편력 자체만을 자랑하는 사유가 있다. 그런 사유는 논리를 통해 노련하게 훈련된 또 다른 사유 앞에서 단박에 부숴져 버린다.

유쌤은 종종 비평이란 그것의 가치를 이해하는 일appreciate이라고 말한다. 단순한 칭찬도, 단순한 폄하도 대체로 쓸모가 없다. 가치를 이해하는 비평은 몇 가지 덕목을 보여준다. 지적인 성실함, 쓸데없는 부분까지도 세세히 듣는 참을성 있는 귀, 그리고 대상의 맥락을 이해할 수 있는 폭넓음. 마지막으로 이 모든 것들을 통해 종합된 대상의 비틀린 면모를 단숨에 쪼개는 날카로움. 만사를 조롱으로 대하는 사람들은 대체로 좋은 비평가가 되기는 힘들다. 그들은 온갖 것에 대해 공격적이면서도 공격적인 자기 자신에게 공격적이지는 않다는 점에서 보편적이지 않다. 때로 자기 자신에게까지 공평하게 공격적인 사람이 있다. 이 경우 그는 그 결과가 자기 자신을 쓸모없는 인간으로 만들 뿐만이 아니라 그것이 내놓는 폐허와 같은 결과를 공격하지는 않는다는 점에서 편협하다. 아마도 지적으로 전혀 배경이 없는 사람이 좋은 비평가가 될 수 있는 자질을 보여줄 때는, 대상의 장점을 깨닫고 "이해하지 못하지만 어떤 뛰어남이 있는" 상황을 간파하는 직관을 보여주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자신의 날카로움을 그 한계지점까지 밀고 나갈 때, 그때 무슨 일이 생겨나는지를 이해할 수 있고 스스로의 최초의 입장부터 수정해야한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 있을 때일 것이다.

그런 면에서 비판적인 사유는 진실로 논리를 다루는 힘을 갖추어야만 한다. 학계의 관점에서 이야기한다면, 특히나 내가 속해있는 문헌학적 연구의 전통에서 다독은 압도적인 장점이다. 그러나 논리가 결여된 다독은 사적인 취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교실에서 필요한 구체적인 이야기로 들어가자. 이론을 배운다는 것은 논리를 다루는 법을 배운다는 것이다. 무엇으로부터 어떤 논리가 잠재해있는지를 깨닫고 파악하는 방법, 논리의 작동이 무엇을 낳는가를, 다시 말해 논리-시간적으로 뒤이어 나타날 결과를 파악하는 방법, 최종적으로 그 논리를 평가할 방법. 논리를 사용하고 논리를 폐기할 방법. 이상적으로, 논리를 실천적인 지평과 연결시키는 능력. 철학은 개념으로부터 시작한다고 누군가가 말한다면, 그는 동시에 철학은 절대로 비평이 될 수 없다고 말하는 셈이다. 비평-이론은 철학이 아니며, 따라서 비평-이론을 배우는 과정은 철학적 지식을 습득하는 것과 전혀 달라야만 한다. 그것을 사실상 같은 과정이라고 오판하기 때문에 책을 아무리 많이 읽어도 앵무새처럼 그것을 되풀이하는 멍청한 두뇌가 생겨난다. 가르치는 방법의 열악함 때문에 한국에서 이론은 사람을 깨우치는 게 아니라 바보로 만들곤 한다(차라리 정직하게 개념을 연구하는 철학전공자들에 비해 문학비평의 전공자들이 단지 조금 더 새로운 유행을 소화한다는 사실을 제외하고는 왜 질적으로 열악한 연구자들이 되는지를 생각해보라). 이론의 언어들을 숙지할 필요는 원론적인 차원에서 전혀 없다. 사유의 흐름을, 논리를 파악하는 것이야말로 비평가에게 제일 필요한 것이다. 우리의 두뇌는 단지 낯선 언어를 많이 접하는 것만으로도 그 언어를 이해하고 그 사유의 흐름을, 논리를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힘을 지녔다고들 한다. 그렇다면 비평이론의 개설서만을 충실히 학습하는 행위는, 그리하여 '원전'이라는 물신화된 대상으로부터 개설서에서 읽은 선지식을 재발견하는 데 그치는 행위는 우리의 두뇌가 이미 갖고 있는 사유구조의 형성을 전혀 기능하게 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참으로 신비롭다. 다시 말해 그런 형태의 배움은 우리의 두뇌를 퇴화시키는, 혐오해야할 것이다. 이론을 이해하면서 가르치는 이들이 절대로 개설서만을 읽는 방식으로 공부하지 말 것, 발췌독으로 공부하지 말 것, 빨리 읽는 대신 천천히 생각하며 읽을 것을 당부할 때 여기에는 경험적인 지혜가 있다. '요약본'으로 공부하는 이는 단순한 지식만을 얻어서 문제가 아니라 요약본의 사고구조를 습득하기 때문에 문제가 된다. 고전은 오래 전에 집필되었기 때문이 아니라(그런 이유에서라면 옛 사람의 편견을 그만큼 많이 간직하고 있을 책이 뭐가 좋을까) 그 사유를 따라가고 싸우는 과정이 우리의 뇌-사유를 훈련시키기 때문에 중요하다.

이미 정립된 이론을 물신화할 필요는 전혀 없다. 그것을 거부하든, 숭배하든, 이론-텍스트를 고정된 완성품으로 간주하고 그것을 직접 해부해볼 생각조차도 못하는 태도를 나는 이론물신화라고 부른다. 이론의 물신화는 지식의 습득량과 비례하여 사유와 논리의 능력이 퇴화한다는 사실을 스스로가 자각하지 못하기 때문에 정말로 위험하다. 이론을 스스로가 이미 알고 있다고 자부하는 것은 어리석다--이론 앞에서 자신의 사유의 열등함을 이미 인정할 준비가 되어 있는 이론 노예의 태도만큼이나.

이론이 유행을 따라 바뀌는 것은 맞다; 매 시대는 자신의 시대에 필요한 이론을 요구하니까. 그러나 그러한 경험적인 현상을 바탕으로 이론의 무용함을 말하는 교수들은 자신들의 진술이 어떠한 논리적 타당성조차도 지니지 못한 무의미한 것임을 자각하지 못할 정도로 사고과정에 녹이 슨 자들이다. 이론은 그들이 선호하는 문헌학적인 연구방식만큼이나 하나의 방법이다. 비평이 사유하기를 멈추지 않는한, 그러니까 비평의 종언이 초래되기 전에는 그것은 끊임없이 움직일 수밖에 없다. 유행에 대한 비판은 비평의 이동이 질적인 도약없이 그저 새로운 소재에 탐닉하는 '새로움에 대한 물신'에 그치는 점에 초점이 맞춰져야지, 이동 자체에 대한 비판이어서는 안 된다.

확실히 푸코는 탁월한 파괴자였다. 그가 끊임없이 방법의 문제를 고민하면서도 어떤 결정적인 방법에 도달하지 않은/못한 것은 그의 근본적인 성향을 드러낸다. 그러나 파괴자들은 오로지 파괴할 대상이 있을 때에만 존재가치를 갖는다. 영미권의 문학연구자들 중 푸코를 자신의 기치로 삼은 이들, 그러니까 신역사주의라는 타이틀을 보유하는 비평가들의 비평적 쇠락은 파괴자들에게 파괴대상의 상실이 존재가치의 상실로 이어진다는 것을 아주 잘 보여준다. 단지 그들은 (방법의 차원에서) 자신의 존재가치가 이미 상실되었다는 사실조차도 잘 인지하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아주 탁월한 파괴자들은 파괴를 통해 무언가 새로운 것의 창조로, 혹은 "순간적으로 모든 방향으로의 길이 보이는 국면"에 들어서곤 한다(칸트를 시작으로 하는 독일관념론의 후계자들이 어떻게 그 짧은 기간 동안 그렇게 생산적일 수 있었을까를 생각해보라). 그런 점에서 우리는 적어도 이론의 진행을 묘사할 때만큼은, 혹은 자신의 무기가 어떻게 발전할 것인가를 희망할 때만큼은 모두 변증법의 신봉자들이 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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