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리주의(효용주의), 사유의 맥락, "정신의 역사" [130917]

Comment 2014. 3. 18. 13:19

*2013년 9월 17일


영화 <머니볼>의 일부를 볼 기회가 있었다(가능하면 처음부터 끝까지 한 번은 보고 싶다). 이 영화에서 개혁자의 사명을 띤 듯 보이는 통계덕후들은 일종의 utilitarian 인건데, 거슬러 올라가 보면 사실 Bentham으로 대표되는 utilitarian 들도 본래 개혁자들이었다. Introduction to the Principles of Morals and Legislation 앞 부분만 읽어봐도 Bentham 이 타겟으로 하는 사람들이 누구인지 명확하다(뒤집어보면, 효용주의의 이론적 기초를 제공한 영국 경험론 자체가 일종의 '비판철학'이다, 아도르노 또한 인정하듯). 이 사람들의 입장을 보다 선명하게 보여주는 텍스트를 보고 싶으면 J. S. Mill 의 자서전도 있다. 이후 보다 급진적인 논쟁이 벌어지면서, 선택의 기로에서 어디에 기울어졌는가에 따라 보수주의자들로 간주되었다고 보는 게 맞다. 이게 영국에서 19세기 전반부에선 선거법 개정을 둘러싼 싸움, 후반부에서는 쇠퇴하는 자유주의의 대안에 대한 논쟁에서 결정되었고, 오늘날 우리가 상식적으로 이해하는 판세가 되었다. 그러니까 가장 급진적인 쪽에 William Morris 같은 사람이 있고, 그 다음에 누구, 누구 이런 식으로. 결국에 비판 혹은 개혁은 그 상대가 누구냐에 따라 결정되는 법이다. 그러니까, 특히나 중요한 문제에서 우리가 왜 근본적인 지점까지 내려가서 생각해야 하는지, 때로 실천적이고자 할 수록 추상적이어야 하는지는 이런 사례들을 생각해보면 분명해진다. 사소해보이는 입장의 차이가 사실은 아주 근본적인 수준에서 그 입장들의 도착지점을 양립불가능한 것으로 만들어버린다. 극단까지 사유하자는 입장들은 종종 지나치게 난해하고 불필요한 방법론이라고 (특히나 '중용의 지대'에 있는 실용주의자들에게) 비난받지만, 시간선을 조금만 길게 잡으면 그러한 입장이 결코 비실천적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주기도문의 한 구절에서 우리는 신에게 우리를 선으로 인도해달라고 부탁하는 대신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라고 말한다. 우리의 입장이 최종적으로 어떤 악에 닿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우리는 입장의 근저에 있는 사유들을 가능한한 끝까지 전개시켜야 한다.

결론은 오늘날 우리에게 사유의 역사를 공부하는 것은 물질의 역사를 공부하는 것만큼이나 중요하다는 뻔한 이야기가 되겠다... 이때 사유의 역사는 결코 전통적인 사상사와 동일한 개념으로 옮겨질 수 없다. 사상이 어떤 조건에서 생겨났는지, 어떤 상대와 싸웠는지, 어떻게 변했는지, 누구에게, 어떻게 패배했는지, 그리고 다시 살아날 수는 없는지... 아마도 우리는 헤겔의 뒷자락을 잡아채와 이것을 "정신의 역사"라고 부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어떠한 조건에서 태어났으면서 동시에 그 조건을 움직여간, 환경과 상호작용하는 생동하는 실체로서 말이다. 다른 무엇보다도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방식 자체의 뿌리를 들춰내는 것으로서. 정신은 허공에서 생겨나는 법이 없다. 동시에 정신은 결코 그냥 사라지지 않는다. 이유없이 생겨난 것은 없으며, 모든 것은 제각기 세상에 자신의 흔적을 남긴다. 정신 또한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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