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곤, 인간의 자원화, 부자유, 계몽. [140116]

Comment 2014. 3. 18. 12:46

* 2014년 1월 16일 페이스북


통상적으로 물질적 빈곤은 부자유의 가장 큰 원인으로 간주된다. 만약 좀 더 미시적인 차원으로까지 렌즈를 들이댄다면, 우리는 물질적 빈곤의 선 혹은 "필요한 만큼의 재산"의 명확한 기준을 정함에 있어 외적인 편견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이 극히 드물다는 사실을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편견의 대표적인 예로 98년 이른바 IMF사태 이후로 한국인들의 의식을 지배하는 강렬한 불안을 들 수 있다. '샌드위치 위기론'처럼, 한국인들은 자신들의 경제적 위치가 언제든지 붕괴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현재 물질적인 것들의 구조가 어떤 상황에 있든지간에, 그들은 자신들이 언제든 생존경쟁에서 도태되어 비참한 미래로 도달할 수 있으며 그러한 결과를 피하기 위해 최대한 노력해야 한다고, 다시 말해 자본축적을 수행해야 한다고 믿는다; 한국인들에게 두드러지는 배금주의는 이러한 불안으로부터 일정 부분 기인한다. 그러나 단순히 개인적인 차원의 배금주의만으로는 한국인들의 의식구조를, 특히 극우 지지자들의 사고체계를 충분히 설명할 수 없다. 정부 및 대기업의 시점에서 "경영을 최대한 효율화하는 것", 다시 말해 인간을 시민이 아닌 이윤창출을 위해 언제든 희생가능한 자원으로 취급하는 시점은 우리가 근대사회의 가장 일반적인 인간관으로 간주하곤 하는 개인주의/자유주의 전통에서 볼 때는 무척이나 이질적인 것이다(한편으로 맑스가 "시초축적"이라 부른 모든 행위가 벌어진 곳에서는 인간의 자원화가 보편적이었을테지만 말이다; 인간자원화가 요구되었던 또 하나의 경우는 지금과 같은 공황/불황의 "예외상태"에서다). 그와 같은 의식구조를 존재론적으로 분석하는 작업은 나름의 의의가 있겠지만, 지금은 정부와 기업들을 포괄한 국가적 규모에서의 경제 자체의 생존 및 번영을 위해 필요하다면 그 공간 내외부에서 얼마든지 인신공양을 해도 좋다는 식의 사고방식이 꽤나 광범위하게 퍼져있다는 걸 지적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이러한 메커니즘을 활용해 자신들의 자본축적을 강화하는 특수한 집단의 존재는 이러한 논리구조의 범람에 비하면 부차적인 문제에 불과하다. 지난 16년간 지속적인 (나오미 클라인을 인용한다면) '충격요법'이 한국인들의 심성구조에 끼친 가장 커다란 영향은 나와 국가경제를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타인의 삶을 희생시키고 도구화할 수 있다는 사고방식의 고착화에 있다. 생존과 자유를 위한 최소한의 보장이 결여된 무한경쟁시대는 다음과 같은 오래된 경구로 옮겨적을 수 있다: 인간은 (다른) 인간에게 늑대다. 우리가 인간을 스스로 자유로울 수 있는 존재로 깨우친다는 뜻에서 계몽이란 단어의 의미를 다시 음미한다면, 계몽된 인간이란 우리가 서로를 뜯어먹어야 살 수 있다는 속박에서 탈피한 자일 것이며 비판적인 교육이란 우리가 (가장 부정적인 의미에서) 짐승이 아님을 배우고 가르치는 일일 것, 물질적인 속박과 함께 정신적인 속박을 끊어내는 일일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자유롭지 않다. 자유로워지기란 우리를 둘러싼 속박들이 얼마나 두터운지를 이해하는데서부터 시작한다. 우리가 끊어내야할 속박 중에 가장 단단한 것은 모든 타인들의 부자유와 나의 자유가 공존할 수 있다는 편견이다. 탈무드 인용 중 가장 널리 퍼진 이야기로, 두 사람이 함께 굴뚝청소를 할 때 한 명만 얼굴이 깨끗할 수는 없다는 가르침이 있다. 세상에서의 자유도 마찬가지다. 단 한 명이라도 속박된 이가 있다면 그 사회의 어느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다(어슐러 르 귄의 걸작단편 <오멜라스를 떠나는 사람들>이 떠오른다). 누군가 내게 지나치게 공산주의적이라고 비난한다면 나는 오히려 그쪽이야말로 자본주의의 영향력을 과소평가하고 있다고 응수할 것이다; 모든 인간존재를 연관시키는 체계로서의 자본주의를 말이다.

사람들은 종종 근대세계의 연구가 무슨 쓸모가 있는지 묻곤한다. 어떤 면에서 근대세계의 연구는 우리에게 너무나 자연스럽기에 그 존재조차 망각되고 있는, 어쩌면 자연스럽게 우리 존재의 일부처럼 간주되는 사슬이 실은 속박임을 다시 드러내는 작업일지도 모른다. 그런 면에서 나는 나의 작업이 한없이 자유와 관련된 것임을 주장한다; 나는 부자유를 다루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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