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준기의 슬라보예 지젝 비판에 관한 코멘트 [140222]
Comment 2014. 3. 18. 12:24* 2014년 2월 22일 페이스북.
http://www.ilemonde.com/news/articleView.html?idxno=2479
예전에 지나가듯이 홍준기의 지젝 평가를 비판한 이택광의 글을 공유한 적이 있었다. 여기에 응답하는 건지, 아니면 이택광이 비판하는 글인지 모르겠지만 홍준기의 글을 어쩌다가 찾았다.
대략 훑어보고 나서 느낀 점은, 대중독자들에게 할 얘기로는 적합할지 몰라도 엄밀한 학술상의 논쟁감은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쉽게 말해 여기서 홍준기는 전혀 제대로 된 논리를 끌고 나가지 못하고 있다. 기본적인 진술 몇 가지는 동의할 수 있다. 지젝이 여러 사상들을 필요에 따라 가져와 자신의 논의를 진행시키는 건 당연하다. 지젝에게 맑스는 일단 무비판적인 진리-선의 차원으로 제시된다는 건 적어도 내가 읽은 지젝의 범위에는 맞다. 지젝이 아직까지 실천적 대안을 제시하지는 않고 있다; 이것도 동의할 수 있다. 그러나 대략 두 달 전에 작성된 홍준기의 글은 지젝의 정치적인 텍스트를 단 한 권이라도 꼼꼼히 읽어본 사람이면 누구나 알 수 있는 내용을 적어놓은 수준에서 단 일보도 전진하지 못한다. 그가 지젝의 주된 비판이라고 내놓는 것들을 조금만 살펴보면 제대로 된 비판이 성립하지 못함이 곧바로 드러난다.
첫째, 지젝이 라캉과 헤겔, 셸링을 포함한 여러 사상을 가져와서 자신의 논지를 세우기 위해 편의적으로 이용한다는 건 그 자체로는 비판이 될 수 없다. 학의 기초가 안 된 사람에게 여러 사상가를 멋대로 써먹지 말라는 조언이야 가능하겠지만, 지젝이 학적 연습이 안 된 사람도 아니고...자기가 자기 사상체계 만들고 세우는 데 뭘 가져다쓰든 그건 그 자체로 문제가 안 된다. 그런 비판이 성립한다면 우리는 헤겔이든 칸트든...아니 다른 무엇보다도 홍준기의 지적 근거라고 할 수 있는 라캉까지(루디네스코의 라캉 전기를 한 번만 읽어봐도!) 포함해서 아주 많은 것들을 인정하지 말아야 한다; 역사상 나름대로 사상의 진보를 이룬 사람들은 언제나 전대의 유물들을 자의적으로 활용하고 오독해왔다--단지 생산적인 방식으로. 사유의 여러 원천들을 얼마나 논리적으로 아귀가 맞게, 설득력 있게 배치했는지, 그리고 그것을 통해 현실을 조망하는 데 도움이 되는 원리를 끌어내느냐가 쟁점이 되어야지 지금처럼 누가 누굴 오독했네 어쩌네의 문제는 새로운 사유가 탄생하고자 하는 '예외상태'에서는 완전히 무력하다. 여기서 지젝의 논지가 얼마나 설득력을 갖는지는 어떤 면에서 일종의 세심한 점검과 내재적인 비판을 요구하는데(정직하게 말하자면 나도 아직까진 잘 모르겠다...나는 그 정도로 지젝에게 관심을 쏟지는 않았다), 홍준기의 텍스트에서는 그런 것이 전혀 수행되고 있지 않다. 이 글만 봐서는 그에게 그럴 능력이 있는지도 잘 모르겠고.
둘째, 홍준기의 논의에서 가장 취약한 것은 그가 지금 지젝의 텍스트를 포함한 최근의 자본주의비판에서 행해진 사민주의에 대한 논의를 전혀 따라가고 있지 못하다는 데 있다. 그가 알고도 모르는 척 하는 건지, 아니면 안 읽은 건지, 읽어도 이해를 못 한 건지는 글만 봐서는 모르겠다. 아주 쉽게 이야기하자면, 1990년대 이후 지젝, 가라타니 고진을 포함한 후기자본주의 비판의 맥락에서 사민주의가 과연 케인지언을 포함한 국가개입을 허용하는 자본주의(어떤 면에서 신자유주의도 이러한 유형에 포함된다)와 도대체 무엇이 근본적으로 다른지에 대한 질문이 제기되었다. 물론 (사실상 우파적 버전으로 강력한 국가개입이 이뤄지는, 그리고 그 과정에서 자본가들이 입은 손실을 국가가 배상하는) 신자유주의적 통치모델이 넓은 의미의 사민주의적 모델과 유사점을 갖는다는 정도의 문제제기는 비교적 최근이라고 하겠지만. 동시에 "제3의 길"을 천명했던 국가들이 줄줄이 경제적 위기를 맞으면서, 그리하여 신자유주의를 포함해 재정감축을 주장하는 우파들에게 정국의 주도권을 넘겨주면서--대표적인 케이스가 바로 지금 보수당의 캐머런이 쥐고 있는 영국 아닌가?--사민주의적 모델에 대한 회의감이 팽배해졌다. 스웨덴(네슬레)이나 핀란드(노키아)처럼 엄청난 해외매출을 유지한다는 전제 위에서만 가능한 북유럽모델도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란 얘기는 전부터 나왔고.
홍준기는 이러한 맥락을 전혀 언급하지 않은 채로 "유일하게 실천적인" 사민주의가 열심히 신자유주의랑 싸우는데 공산주의라는 '유령'이 둥둥 떠와서 사민주의 발목 잡는다는 식으로 풀이하는데, 지젝이 바라보는 세계정세는 반자본주의VS.(신자유주의, 사민주의를 포함한)범 자본주의 구도쪽이라고 보는 게 더 사실에 맞을 것이다. 지젝은 그 점에서는 계속해서 세계의 정치경제에서 어떤 일들이 벌어지는지 사례도 꺼내서 말하고 있고(<처음에는 비극으로, 다음에는 소극으로> 등등), 나름대로 참조하는 큰 흐름이 있다. 내 생각에 홍준기의 지젝 비판이 공허해지지 않으려면 전 세계적 자본주의/통치구조를 둘러싼 논의를 나름대로 정의하고 최근의 위기에도 불구하고 사민주의가 어떻게 계속해서 "유일하게 실천적인" 대안이 될 수 있는지를 간략하게라도 서술하는 작업이 선행되어야 한다. 유감스럽게도 나는 이번 글을 읽으면서 그가 사민주의에 어떤 대단한 기대를 걸고 있다는 사실을 빼고는 그가 자본주의문제를 어떤 방식으로 이해하고 있는지를 참고할만한 근거를 전혀 찾지 못했지만 말이다.
(최근 경제학을 전공한 선배랑 얘기하면서 나온 거지만, New Left Review 급 되는 저널에 글 쓰는 좌파대가들은, 당연히 문화연구나 정치철학 하는 사람들을 포함해서, 기본적으로 전 세계의 정치경제적 지배구조는 나름대로 정리하고 있다. 자기가 독자적인 이론까지는 못 만들어도 중요한 이론이나 해석은 얼추 따라가고 자기 얘기에 필요한 맥락은 놓치지 않고 끌어온다. 낡았네 논의가 단순하네 비판은 많이 받지만, 프레드릭 제임슨이나 데이비드 하비의 포스트모던에 대한 비판적 독해가 그 이전 이후의 수많은 논문의 홍수 속에서도 살아남는 이유 중 하나는 그들이 자기 나름대로 정치경제적인 맥락을 정리하고 그걸 문화텍스트에 대한 분석과 아귀가 맞게 연결시키는 작업을 했기 때문이다. 제임슨은 아예 서문에서 만델의 <후기자본주의>를 참고했다고 말하고, 하비의 책도 후반부에 가면 아글리에타랑 리피에츠의 조절이론 끌어와서 얘기한다. 이야기가 너무 도식적이네 뭐네 맘에 안든다고 할 수는 있지만, 그 정도 스케일을 그려내지 못하니까 한국은 말할 것 없고 미국의 문화좌파들도 그 책들을 완전히 찍어내버리지 못하고 있는 거다)
셋째, 지젝의 공산주의가 실체가 없다고 비판하는 건 맞는데, 애초에 지젝의 최근 작업이 공산주의 자체를 명확히 규정하는 게 아닌 궁극적인, 하지만 실현가능한 지점으로서--여기서 지젝의 설명이 충분히 이뤄지는 지점은 아직 보지 못했다--공산주의=이념을 이야기하는 철학적인 작업이다. 그가 페터 슬로터다이크를 끌어와서 현재의 대중적인 이데올로기를 얘기하는 것에서도 알 수 있겠지만, 바로 그러한 이데올로기들을 넘어서기 위한 이념으로서, 목표지점으로서 공산주의라는 형이상학적 개념을 재구축하는 게 현재의 작업 아닌가?(이 부분은 나도 자세히 말할 정도로 알고 있지 못하며, 단지 몇몇의 기사에서 읽은 수준임을 미리 말해둔다) 과연 그 이념이 실체적인 방법으로 전달될 수 있는지를 비판하는 거라면 유효한 지점이 있겠지만--나름 구체적인 대안을 제시하려 한 에릭 올린 라이트라든가, 훨씬 철학적 성향이 강한 가라타니의 경우에도 곧바로 공산주의로 넘어간다, 이런 종류의 이야기는 안 한다--, 애초에 지젝이 하지 않으려는 작업을 갖고 그를 비판하는 건 올바른 방법이 아니다. 쉽게 말해서, 지젝은 현재 전 세계적 자본주의지배체제가 어떤 상태에 있는데, 이걸 넘기 위해서=전 사회적인 운동이 일어나기 위해서 이데올로기적 목표지점이 필요하고, 그 위치에 가장 적합한게 공산주의라고 말하는 거다. 현존 자본주의 체제가 근본부터 잘못됐고 국가의 역할이란 것도 어림 없다고 말하는 데서는 지젝이 급진적radical인 게 맞지만, 그렇다고 딱히 실현가능한 대안의 제시까지는 안 나간다는 점에서 그가 특별히 위험하지 않게 읽히는 것도 틀린 건 아니다. 한국의 지젝수용이 전자의 사실을 얼마나 진지하게 여기고 있는지도 모르겠고.
또 하나, 물론 이건 지젝이 좋게 말해 여러 가능성을 탐색하고 나쁘게 말해 (자본주의로는 안 된다는 부정명제를 제외하고는) 자신이 생각하는 공산주의를 충분히 구체적으로 말하지 않았기 때문에 생기는 문제이기도 하지만, 홍준기는 지젝이 공산주의라고 말할 때 그게 무엇을 뜻하는 건지를 전혀 생각하지 않고 있는 것 같다. 그는 지젝이 맑스-레닌-스탈린의 이데올로기와 같다고 간주하는 모양인데, 내가 읽은 텍스트에서 지젝이 맑스와 레닌까지는 연결시켜도 스탈린을 곁들여서 대안으로 제시하는 건 보지 못했다. 공산주의란 이름으로, 맑시즘이란 이름으로 제시되는 계보는 생각보다 복잡하고 다양하고, 레닌과 스탈린의 관계 같은 것도 제법 오래된 주제다. 자기가 공산주의이자 맑스주의라고 주장하는 트로츠키주의자들, 제4인터내셔널 같은 정파들을 홍준기는 어떤 언어로 정의할지 참으로 궁금하다(내친 김에 트로츠키가 스탈린에게 암살당한 것도 위장이며 둘은 처음부터 끝까지 한편이었다고 주장하면 일관성이 좀 더 생길 것 같다). 여튼 홍준기는 지젝을 충분히 사려깊게 읽었다는, 공산주의의 계보를 관심을 갖고 살펴봤다는 티를 전혀 내지 않으면서 무리하게 보이는 진술을 반복한다. 지젝의 공산주의는 실체가 없다고 비판하다가 그게 스탈린주의의 망령을 되풀이하는 거라고 비판하는 식의 자기모순은 덤이고.
솔직히 내 페북을 보는 사람들 중에서 지젝이니, 라캉이니, 홍준기니, 이택광이니, 사민주의VS공산주의 같은 주제에 관심을 갖고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지 모르겠다. 혼자서 새벽의 체조를 한 느낌이긴 한데, 정리해보자. 나는 한국의 지젝수용이 유의미한 방식으로 이뤄지는지 모르겠고, 지젝이 정말 새로운 얘기에 도달할 건지도--다만 그건 포스트모던의 비판자들에게는 공통적으로 주어지는 난제다--잘 모르겠고, 한국에서 공산주의와 사민주의(사실 지난 대선에서 모든 정당의 모든 후보는 사민주의자들이었다!) 중 어느 게 좀 더 유효한 전략인지도 아직 분명히 답을 못 내겠다. 그래서 홍준기가 지젝을 물고 늘어지는 게 아주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런 형태로, 겨우 저 정도의 식견과 논리만으로 지젝을 유효하게 비판했다고 믿는다면 저건 명백히 "자신의 한계를 멋대로 벗어나는" 행위일 것이다. 어디가서 홍준기의 논지랑 똑같은 수준으로 지젝을 비판하면서 "이걸로 지젝은 끝!"이라고 외치는 바보들과 마주칠 일이 없기만을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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