故 신광현 선생님의 유고집 출간을 맞이하며

Comment 2015. 7. 8. 03:27

201577, 선생님 유고집 <주체, 언어, 총체성: 문학비평의 틀을 찾아서> 출간기념회에서 발표한 글. 선생님을 떠나보낸 뒤 4년이라는 시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선생님을 떠올릴 때 격해지는 감정을 억누르기 어렵다..

 

 


 

 

제가 신광현 선생님 생전에 함께 한 시간은 학부 3학년 때부터 석사논문을 쓰던 중, 그러니까 선생님께서 영면하실 때까지 만으로 4년 정도입니다. 그 시간의 밀도가 낮았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만, 이 자리에는 훨씬 오랜 시간을, 또 많은 추억을 함께한 분들이 적지 않으시기에 과연 제게 앞에 나와 이야기할 자격이 있는지 스스로 묻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무언가 말할 내용을 떠올릴 수 있다면, 이는 다른 무엇보다도 신광현 선생님께서 당신과 함께 한 시간에 독특한 빛깔을 부여하는 재능을 지니셨기 때문입니다. 선생님께서는 그 안에 있는 사람이 스스로가 무척 특별하고 소중한 존재로서 어떠한 심술궂음이나 악의도 없이 보살핌 받고 있다고 느낄 수 있는 당신만의 공간을 만들 줄 아셨습니다. 학생으로서 선생님을 마주했던 분들이라면, 선생님 고유의 영역에서 느낄 수 있던 온기를 쉽게 잊어버리기 힘들다는 것을 잘 아시겠지요. 그런 따스하고 행복했던 경험을 되살리고 공유하는 일이 선생님을 기억하는 데 본질적인 부분을 구성한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는 없습니다만, 이 자리에서 저는 그만큼 널리 알려져 있지는 않을지라도 마찬가지로 선생님의 삶에서 중요했던 지점들을 함께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선생님의 보다 실천적인, 활동적인 측면을 말입니다. 저는 때때로 이러한 주제들에 대해 선생님과 대화할 기회가 있었고, 다른 시간들과 마찬가지로 그 시간 또한 특별한 기억들로 간직하고 있습니다. 나아가 이 주제들은 저 자신이 대학원에서 학업을 계속하고 다른 한편으로 교육과정에 간헐적으로나마 참여할 기회를 갖게 되면서 계속 곱씹게 되는 것들이기도 합니다.


학부 졸업학기 때의 일입니다. 직업적인 학문의 길을 고민하는 다른 분들과 마찬가지로 저 또한 사회로 나아가 활동하는 진로와 대학원 진학 중 어떤 길을 택할지 깊게 고민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특히나 인문학 전공은 곧바로 가시적인 결과물을 제출할 수 있는 분야가 아니기에 이 공부가 과연 내 삶에, 특히 사회적인 삶에 어떠한 의미를 가져다줄 수 있을지에 대한 의문은 진로를 결정함에 있어 해결할 수 없는 장애물로 남아 있었습니다. 때마침 우연한 기회에 선생님과 면담을 하게 되었고 이러한 고민을 솔직하게 말씀드렸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잠시 멈추어 생각하신 뒤 학업이 실천적인 삶으로부터의 이탈을 의미하지는 않으며 오히려 더 충분한 앎이 더 나은 시야를 제공하기도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바로 지금 제게 떠오르는, 그리고 이 자리에 계신 모두가 기억하실 특유의 가벼운 미소와 따뜻한 목소리로 말입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당연한 말씀입니다만, 오늘날이 인문학이 단순한 장신구에 머물지 않고 우리의 삶을 어떻게 더 나은 방향으로 바꿀 수 있는가를 쉽게 이야기하기 어려운 시대임을 감안한다면 선생님의 목소리에 깃든 확신은 제게 지금의 길을 결심하게 할 만큼 강렬한 것이었습니다. 선생님의 비평이론 및 문화연구에 대한 관심사를 조금이라도 쫓아가본 사람이라면 선생님이 지적인 층위에서도 이 문제를 진지하게 고민하셨음을 분명히 아실 것입니다. 선생님께 설득당해 대학원으로 진학한 사람이 저 뿐만은 아니겠지만, 인문학 전공자로서 한국사회에서 살아간다는 것의 험난함을 체험할 때마다 저는 갓 끓인 차의 향기가 가득한 선생님 연구실에서의 그 순간을 떠올리며 힘을 얻고는 합니다.


선생님의 실천적인 면모가 가장 잘 발현된 장소가 교육 현장임을 부인하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입니다. 실제로 수업을 들었던 이들 모두는 강의실 안팎에서 어떠한 흔들림 없이 학생을 향한 깊은 관심을 유지할 수 있었던 선생님의 모습을 기억합니다. 고백하건대 저는 그분처럼 학생들의 이름과 관심사를 졸업 후 몇 년이 지난 뒤에도 여전히 잊지 않을 자신이 전혀 없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저는 선생님께서 학생과의 면대면 접촉 못지않게 수업 자체를, 나아가 교육환경을 어떻게 구성할 것인가에 깊은 관심을 가지셨음을 좀 더 강조하고 싶습니다. 한국문학 영어번역 모임 KLETO에서 활동하셨던 분들께서 알고 계시듯 한국문학의 영어번역 관련 특강들은 선생님의 교육적인 관심사와 아이디어가 잘 표현된 대표적인 사례였습니다. 한국어 문학텍스트가 어떻게 상이한 언어체계에 자리 잡을 수 있는지 또 그 과업이 좀 더 좋은 형태로 실현될 수 있는지를 고민하는 일은 영미권의 텍스트를 깊게 읽고 소화하는 일 못지않게 영문과에서 얻을 수 있는 가장 귀중한 경험입니다. 선생님의 번역 수업은 단순히 실용적인 필요나 흥밋거리를 충족시키는 대신 학생들이 이전까지 별다른 자의식 없이 속해 있던 한국어의 독특함 또는 윤곽선에 맞닿기를 요구하는 것이었습니다. 변증법에 대한 선생님의 관심사를 참조한다면, 선생님께서 학생들로 하여금 자신들이 처한 언어적 조건을 역사적인 것으로 인식하기를 원하셨다고 이해해도 큰 오해가 아니라고 믿습니다. 저 역시 한번은 학부생으로서, 다음으로 대학원생 참관자로서 수업을 들었고 선생님의 문제의식을 부분적으로나마 체감할 수 있었음을 다행으로 생각합니다. 교육의 목적과 방법이 여러 가지 다양한 형태로 표현될 수 있음을 깨달았다는 점에서도 말입니다.

마지막으로 가장 개인적인 기억들을 소환하는 일이 허락된다면 선생님의 건강이 악화되기 전까지 종종 함께 했던 산행모임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저를 포함한 몇몇 대학원생들은 선생님과 함께 주말마다 방배동의 우면산을 오르곤 했고, 우리는 그 모임을 우면오름회라고 불렀습니다. 선생님께서 돌아가신 직후 여러 사람의 목숨을 앗아간 산사태가 있었고 그 뒤에는 가보질 않아 풍경이 어떻게 바뀌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그때 우면산은 두어 시간 정도면 완주하고 내려올 수 있는 적당히 걷기 좋은 산이었습니다. 오전에 등반해 딱 기분 좋게 피로해져서 내려오면 주변에서 점심을 먹었는데, 처음 모임에 들어갈 때는 함께 돈을 모아 점심값을 낸다고 들었지만 실제로는 거의 대부분 선생님께서 밥값을 내셨습니다. 그때는 어린 나이에 땀 빼고 밥 먹는 것만 좋아했지만 돌이켜 보면 그 또한 선생님께서 대학원생들과 관계 맺는 방식이었습니다. 꼭 당신의 수업을 듣지 않는다고 해도, 전공 분야가 겹치지 않는다고 해도 대학원에서 보내는 시간과 삶과 고민을 공유할 수 있는 관계를 만드는 방식 말입니다. 실제로 갓 석사에 입학했던 저는 이전까지 생각해보지 않았던 많은 고민들로 힘들어 하던 시기였는데, 우면오름회가 없었다면 훨씬 더 힘든 시간을 보내지 않았을까 합니다. 특히나 대학원에서 학문공동체라는 개념이 희미해지고 동학들과 공부 및 삶을 함께 하는 관계를 맺기 어려워진 지금은 선생님과 함께 했던 등산모임과 같은 일이 얼마나 소중했었나를 깊이 생각해보게 됩니다.


어느 누구의 삶도 일면적으로 간추릴 수 없다는 사실이 문학 전공자들의 제일원칙이라면, 신광현 선생님처럼 다양한 학생들을 제약 없이 포용하셨던 분의 삶이야말로 그 원칙에 가장 부합하는 사례일 것입니다. 저의 개인적인 기억으로부터 나온 추억이 선생님의 삶이 지녔던 풍성함을 되살리는데 아주 약간의 역할이라도 할 수 있기만을 희망합니다. 언젠가 선생님을 다시 뵐 때, 이 글이 완전한 오독이라는 코멘트만 피할 수 있다면 저는 기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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