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베르크의 <실패한 이념의 도덕적 파산>에 대한 반론

Comment 2015. 6. 30. 13:30

허핑턴 포스트 기사 링크: http://www.huffingtonpost.kr/bawerk/story_b_7684778.html


이런 멍청한 글이 잘도 떠돌아다니기에 한심해서 코멘트를 적는다. 허핑턴포스트에서 이상한 글을 올려놓는 건 한두번 본 게 아니지만 이번에도 역시나 혀를 차게 된다.


필자 바베르크의 요점은 페리 앤더슨Perry Anderson의 <서구 마르크스주의 읽기>_Considerations on Western Marxism_를 요약정리하면서 (나는 이 책을 직접 읽은 적이 없기 때문에 얼마나 타당한 요약인지는 모르겠다...이 요약대로라면 별로 관심이 가는 책은 아니다) 그 구도를 '진보논객의 데이트폭력'과 연결시키고 있다. 간단하게 몇 가지 반론을 적자.


1. 유감스럽지만 유럽 신좌파 전통에 대한 페리 앤더슨의 코멘트는 지적으로 그닥 신뢰할 만하지 않다. 물론 앤더슨의 깊고 날카로운 서평(<스펙트럼>)이나 유럽 봉건제 및 절대왕정에 대한 연구는 무척 흥미롭고 숙고할 만한 책이지만, 예컨대 <서구 마르크스주의 읽기>의 후속작으로 나온 <역사 유물론의 궤적>_In The Tracks of Historical Materialism_을 본다면 푸코나 라캉에 대한 그의 코멘트가 철저한 몰이해에 기초하고 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아마 앤더슨이 <앎의 의지>에 대해 남긴 코멘트를 푸코가 읽었다면 정확히 자기가 읽지 말라는 방향으로 읽어내는 걸 보면서 조소를 금할 수 없었을 거다(그 책에서 그나마 쓸모있는 건 당대 유럽 좌파이론 전반에 대한 간략한 개요와 하버마스에 대한 코멘트 정도다). 간단하게 말해서 필자 바베르크는 자신이 언급하려는 대상에 관해 어떤 저자가 신뢰할 만한 저자인지 분별할 능력을 갖추지 못했다. 예전에도 페리 앤더슨을 원용하면서 국내의 신좌파 이론 수용자들을 비판했던 이들이 있었는데, 앤더슨을 좋아하는 입장에선 그의 저술 중에서 가장 별로인 것들을 꺼내어 당당하게 외치는 모습이 전혀 달갑지 않다.


2. 아도르노나 알튀세르에 대한 바베르크의 요약정리(?) 및 평가는 그 자체로 질이 떨어지는 코멘트다. 아도르노에 대한 지적 전기를 조금이라도 진지하게 읽어봤다면 (설령 68학생운동에 대한 아도르노의 입장에 동의하지 않더라도) 그게 '위선'이 아니라 아도르노의 이론적 입장에서 일관된 태도일 수 있음을 이해하는 게 그렇게 어렵지 않을텐데, 유감스럽게도 필자는 사상가들을 다루면서 사상에 대한 이해를 철저하게 결여한 걸로 보인다. 여기서 그는 故 정운영 선생을 다시 한 번 인용하는데, 신좌파 및 이후의 '이론'에 대한 정운영 선생의 코멘트는 그의 진정성과 별도로 그닥 지적으로 중요하게 간주할 자료가 되지 못한다; 공정하게 말하자면 그는 자신이 이해하지 못하는 대상에 대해 글을 썼다. 그러니까 바베르크는 잘못된 권위에 의존해 잘못된 코멘트를 재생산하고 있을 뿐이다. 더불어 알튀세르의 정신병력 및 아내 살해를 옹호할 수는 없겠지만 그게 좌파 이론가들의 위선이라는 레테르가 붙을 일은 아니다--바베르크의 글을 보면서 드는 생각은 그가 "위선"이라는 단어의 윤리적 값을 제대로 정의할 능력조차도 없다는 거다.


3. 바베르크의 주장은 다음과 같은 명제들로 정리될 수 있다. 1) 의식 및 상부구조의 분석을 추구한 서구 마르크스주의자들은 "현실과 유리된 고담준론이나 내세운" 이들이다. 2) 그들은 윤리적으로 비판받을만한 행위를 했다. 3) 따라서 "현실과 유리된 고담준론이나 내세운" 이들은 윤리적인 결함을 가지며, 이것은 이념적 파산이기도 하다. 4) 한국의 좌파들, 특히 진보논객들은 "현실과 유리된 고담준론이나 내세운" 서구 마르크스주의를 수입했고 마찬가지로 현실과 괴리되어 있다. 5) 따라서 한국의 진보논객들도 윤리적으로, 이념적으로 파산할 수밖에 없다.


이 글의 전체적인 논리구조는 일차적으로 명제1부터 3까지의 기묘한 삼단논법(?)으로 구성되어 있고, 그 다음 그에 기초해서 4-5의 연결을 정당화하고 있다. 당연하지만 명제1-3의 '삼단논법'은 논리적으로 오류고, 따라서 4-5의 논증의 정당성도 성립하지 않는다. 팩트 차원에서 적자면, 명제1은 틀렸고(그는 그런 이론들이 필요해진 역사적 맥락을 전혀 모르고 있다; 그람시랑 같이 감옥에 10여년 정도 갇혀 보면 대중정치 및 보편선거의 등장과 함께 왜 의식분석이 중요해졌는지 좀 감이 올 거다...이건 심지어 앤더슨이 열심히 칭송했던 E. P. 톰슨의 <영국 노동계급의 형성> 서문만 꼼꼼히 읽어봐도 알 수 있다), 명제2는 수상쩍으며(아도르노와 알튀세르의 행위에 '위선'이란 개념을 적용하기는 어렵다), 명제3은 본인이 한 번도 설명한 적이--혹은 설명할 능력이--없는 '이념적 파산'을 갑자기 끌어들인다. 명제4가 "두 논객"에게 맞는 설명인 것 같지는 않다; 나는 그냥 바베르크가 한윤형이나 박가분의 글을 제대로 읽어보지 않았다고 생각한다--그들을 단순히 서구 마르크스주의 전통의 수용자로 부르기는 어려우며 실제로 그들은 보다 다양한 분야에서 지적 자원을 끌어온다. 명제5는, 위의 모든 명제들이 성립불가능해졌을 때, 필연적으로 부서진다. 만약 바베르크의 글에서 실제로 파산하는 무언가가 있다면 그것은 오직 그의 논증능력일 것이다(조금 심술궂게 말하자면, 진짜로 폭로된 것은 좌파 이론가들의 위선이 아니라 그의 지적 게으름이다).


4. 마지막으로 덧붙이자. 나는 경제영역 혹은 좀 더 포괄적으로 (예컨대 물리적 폭력의 제도적 배치를 포함한) 물질적 영역의 분석이 오늘날의 진보/좌파적 정세분석에서 필수불가결하다고 믿는다. 물질적 영역과 결부된 정책비판/분석/대안제시를 할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하는 순간 진보/좌파 이론은 현실적인 영향력을 상실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것이 인간 의식/무의식 분석을 포괄하는 문화적 측면의 분석을 하지 말아야 할 이유는 되지 않는다; 엄격하게 말하자면 <자본>은 19세기 영국인들이 믿었던 경제적 세계관에 대한 비판적 분석이기도 하며, 이데올로기 개념에 내포되어 있는 존재와 의식의 괴리는 물질적인 영역에 대한 분석만으로는 인간 행위를 설명할 수 없다는 통찰을 내포한다. 가장 초보적인 수준에서, 우리는 계급배반투표를 설명하기 위해서 어떤 형태로든 인간의 사고과정에 대한 분석을 실시할 수밖에 없다. 정치적 행위에 대한 분석은 단순히 물질적 층위에 대한 분석을 덮어씌우는 것만으로는 불가능하다; 물질분석과 의식분석은, 마치 계급이 성차를 대체할 수 없는 것처럼, 서로를 대체하고 배제하는 관계가 아니라 함께 수행되어야 할 작업이다.


내가 바베르크의 글에 담긴 태도에 대해서 비판적일 수밖에 없는 건 위와 같은 평범한 사실 위에서다. 바베르크는 암묵적으로 문화/의식에 대한 주요한 분석 전통 자체를 "가장 치열한 문제인 정치와 경제의 현실" 분석과 분리되고 대립된 것으로 놓는다(나는 그가 "정치"와 "경제"로 뭘 지칭하려는 건지 정확히 모르겠다...자신의 말에 책임을 지는 필자라면 이런 식으로 문장을 쓰지는 않는다). 그에겐 미안한 말이지만 이건 정치와 경제를 포함해 다양한 요소들의 상호침투로 이어지는 현실의 복잡함을 외면하는 반지성주의적 태도의 일환일 뿐이다. 그가 "고담준론"과 같은 수사를 사용할 때, 여기에는 의식, 주체, 문화분석에 관한 이론들이 과도하게 난해하다는--그 자체로는 어느 정도 사실인--불만이 들어가 있다. 우리가 경제학이나 정치학이 전문가들만의 학문이 되어간다고 불만을 표하는 것과 마찬가지의 의미에서 바베르크의 불만은 나름의 타당성을 갖지만, 그게 전문화된 정치학/경제학을 폐기해야 한다는 주장으로 이어질 수 없는 것처럼 의식적 층위의 분석 또한 그렇게 쉽게 거부될 수 없다. 복잡한 이론틀을 명징한 언어로 풀어낼 수 있는 저자들을 한국 사회가 배태하지 못한 건 분명 문제적인 현실이지만, 그걸 이런 식으로 해당 영역 자체에 대한 비합리적인 거부감으로 표현하는 행위는 그 자체가 지적으로 반동적인 퇴행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그가 "위선"이란 말을 쓰는 용법보다는 내가 "퇴행"이라는 말을 쓰는 용법이 좀 더 정확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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