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20일 일기. 데이트폭력, 도덕과 정치, 사적 정의의 정당성.

Comment 2015. 6. 20. 21:02

장염을 억누르고 페이퍼를 다시 쓰려 앉았는데 예기치 않은 일들이 터졌다. 사태의 전말을 아주 제한적으로밖에 모르는 데다 스스로의 언어가 어떤 효과를 초래할지 예측할 수 없는 상황에서는 폭력에 대한 비판과 상처받은 이의 고통에 대한 위로 말고는 말을 아끼는 것이 온당할 터이다. 일단은 쓸 수 있는 것만을 쓴다.



1.


어제 메르스갤러리저장소에서 관련 게시물을 읽었고 또 이른바 "상남자 만화"를 보면서 역겨움을 느꼈던 터라--대중문화에서 '상남자'라는 단어가 소비되는 방식을 보면서 별로 달가워한 적이 없는지라 이참에 아예 이 단어가 한동안 공중의 언어 밑바닥으로 가라앉기를 희망한다--데이트폭력에 관해 나 자신의 입장이 이미 확고하게 정립되어 있다고 생각했다. 하루 지난 오늘 그것이 착각임을 깨달았다. 솔직히 말해, 나는 연달아 터진 고백들을 본 뒤에야 비로소 자신의 과거를 진지하게 되돌아보는 스스로를 발견했다--지금은 화를 내기보다는 그냥 무시해버리는 편이지만, 20대 초중반 한창 격정적이었을 때 진짜 화가 나면 그냥 자리를 박차고 떠나버리곤 했다는 것에 약간의 안도감을 느끼면서 말이다. 이 이야기는 다시 말하면 어제까지 나의 데이트폭력 비판은 그만큼 진지하지 못했다는 것도 된다. 가장 개인적인 층위에서 볼 때 이번 일은 나 자신을 포함해 어떤 사람이든 상황에 따라 폭력의 가해자가 될 수 있다는 당연한 사실을 다시금 심각하게 숙고하도록 해주었다.


이번 일들을 보며 한국사회에서 성차가 우리들이 관계를 형성하고 이해하는 방식에 얼마나 깊게 각인되어 있는지도 새삼 돌아보게 된다. (특히 이성애 관계에서) 한국사회에는 남성이 여성에게 어떤 형태로든 폭력을 휘두르는 것을 제약하는 윤리적/사회적 기제들이 아직 충분히 형성되어 있지 않다. 데이트폭력이 이토록 일상적으로 출현한다는 사실은 연애관계에서 스스로의 공격성을 폭력적인 방식으로 표출해도 된다는 (무의식적) 믿음이, 그리고 (이성애적) 연애관계가 이토록 쉽게 폭력을 동반하는 권력관계로 이행하는 상황이 그만큼 일상적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이번 일로 심지어 비교적 진보적 스탠스를 자처하는 사람들조차도 무신경하게 발화하곤 하는 '진정한 여성주의' '남성이 상대적 약자인 사회' '여성 상위시대' '그런 것까지 신경쓰면 피곤해서' 같은 무반성적인 담론들이 수그러드는 계기가 된다면 아주 약간은 다행일 것이다. 한국사회는, 우리는 아직 충분히 여성주의적이지 않다; 단순히 성차의 인지라는 측면에서만이 아니라, 성차와 결부된 폭력-권력관계에 대한 반성이 결여되어 있다는 점에서 더욱.



2.


부차적인 것 같지만 지금의 사태가 SNS의 이른바 여론에 의해 전유되는 양상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먼저 분명히 짚고 넘어갈 것은 (특히나 좌파/진보 정치와 관련해) 정치적 인격과 도덕성은 불가분하다는 사실이다. 물론 이 사태로 좌파/진보의 위선 운운하는 반응이야 신경쓸 것도 없는 클리셰에 불과하지만, 그에 대응해서 정치적 스탠스와 도덕성의 분리가 '상식'임을 주장하는 입장에도 나는 동의할 수 없다. 역사적으로 권력의 정치적 사용이, 적어도 그것이 사람들을 설득하는 과정에서, 정당성과 분리되었던 때는 거의 없으며 대중정치의 출현 이후로는 더욱 그렇다(심지어 상대적으로 정치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비중이 적었던 17세기 영국혁명기에도 반대파의 타락을 비난하고 스스로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엄청난 양의 문서들이 생산되었다). 그리고 정당성의 형성에는 인격적 덕성이 언제나 상당한 비중을 차지해왔다. 덕성의 구체적인 내용이 어떻게 이해되는가에 의견의 불일치가 있을 수는 있겠으나, 인격의 덕성을 포기하는 것은 완전히 비인격화된 영역을 다룰 때를 제외하고는 불가능하다(뒤집어 말하면 대중정치의 영역에서 활동하고자 하는 사람은 그것이 어떠한 도덕이든 스스로를 도덕적으로 정당화하고 타인을 설득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은 현실적인 조건이다). 좌파가 도덕성의 감옥에 갇힐 것을 우려하며 인격적 덕성과 정치적 스탠스의 분리를 주장하는 입장은 정치적으로 자멸에 가까운 선택이며, 주관적인 희망은 될 수 있지만 현실적인 대안일 수는 없다.



3.


개인적으로는 이번에 언급된 데이트폭력과 같은 '사적 영역에서의 폭력' 앞에서 여론을 구성하는 제3자들이 어디까지 어떻게 대응하는 게 옳은지의 물음이 가장 까다롭게 다가온다. 이하는 이번 사건 자체에 대해서라기보다는 조금 일반론적인 고민으로 받아들여주기 바란다.


통상적인 범죄라면, 사법부와 같은 공적 기관이 죄의 경중을 측정하고 그에 걸맞은 책임을 부과한다. 이때 제3자들은 나름의 코멘트를 할 수는 있겠지만 책임을 묻는 주체는 되지 않는다. 그러나 지금과 같은 경우처럼 공적 주체의 개입이 없이 사태에 대한 판단이 온전히 (사인들의 집합인) 여론에 맡겨졌을 경우, 특히나 SNS처럼 각자의 논평이 계속해서 기록되어 남고 가해자/피해자에게 노출될 수 있는 경우에는 어떻게 되는가? 피해자들이 사법절차를 이용한다는 의사표명 없이--적어도 지금까지는 그럴 것 같지는 않아 보인다--직접적으로 여론에 의지하게 되는 경우, 나를 포함한 제3자들은 어떻게 대응하는 게 옳은가? 피해자의 상처에 공감하고 스스로의 상황을, 사회에 편재한 폭력을 되돌아보는 것 이외에, 그리고 가해자에게 사과와 반성을 요구하는 것 외에 가해자에게 어떤 행위를 해야 하는가?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나는 곳곳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가해자를 향해 행위에 대한 비판을 넘어 그가 보든 말든 인격모독을 가하는 게 적절한 대응인지 묻게 된다; 나는 나 자신이 이러한 행위에 참여한 적이 있기 때문에 더욱 그러한 행위에 종종 내포되곤 하는 사디스틱한 쾌감이 편하지 않다(차라리 탁 내뱉는 욕설이라면 마음 편하게 수긍할 수 있다). 공적인 처벌이 부재하여 '정의'가 사적인 차원에서 집행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면, 나는 그 정의의 적절한 수준이란 어디까지일까를 생각해보게 된다.


엄격하게 말하자면, 우리는 심지어 명백히 잘못을 저지른 누군가를 비난하는 순간에조차도 그 누군가에 대한 인격적 책임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없다; 우리는 사형만을 선고하는 법정의 재판관이 아니다. 만약 경미한 일이었거나, 법적인 처리과정을 따르는 일이라면 오히려 더 쉽게 냉소섞인 신랄한 비판을 표출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일상적인 담화로 해갈되기엔 너무 무거운 유형의 사건이 또 법적인 처분으로는 이어지지 않는 상황이라면, 동시에 적어도 가해자-피해자 두 인격이 관련되어 있음을 감안하면 제3자/여론이 표현/제재할 수 있는 범위가 어디까지인지는 오히려 쉽게 판단하기 어렵다. '피해자가 페미니스트인게 문제다' 따위의 쓰레기 같은 발언이 옳지 않다면, 우리는 가해자에 대해 어디까지 말할 수 있는지도 생각해봐야 한다. 그리고 나는 아직 여기에 대해 만족할만한 답을 내리지 못했다. 누군가 내 말이 씹선비같다고 비난한다면, 나는 이 상황 자체가 씹선비같은 고민을 요구한다고 응수하겠다.



모쪼록 지금 일과 연관된 사람들뿐만이 아니라 한국 사회에 만연한 (잠재적인) 데이트폭력 가해자들이 스스로의 행위를 반성하고, 사과하고, 되풀이하지 않기를, 그리고 피해자들이 지금까지 받은 고통과 상처를 이겨낼 수 있기를 바란다. 현재로서는 이 이상으로 정당한 진술을 남길 자신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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