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적권력, 판단, 이성에 대한 개별적인 노트들[131223]

Comment 2014. 3. 18. 12:59

*2013년 12월 23일 페이스북


자신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을 원한다면 언제든 물건처럼 치워버려도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의 지배 하에 굴종하고 싶어하는 더 많은 사람들만큼이나 심각한 문제는 전자에게 자신의 생각을 약간의 노력만으로 현실화시킬 기회를 제공하는 제도 자체가 아닐까. 우리는 어떤 사람들이 주도권을 쥐게 되었는가, 그들이 어떤 잘못을 저지르는가를 따지는 것만큼이나 어떤 제도와 규칙들의 토대 위에서 그 사람들이 그토록 쉽게 잘못된 행동을 저지를 수 있게 되었는지를 따져보아야 한다. 힘은 의지만이 아닌 힘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들로부터 나오며, 그 조건은 내용만이 아닌 형식을 아울러 가진다. 악의 내용만이 아닌 악의 형식을 함께 비판하기. 규칙의 타당한 적용을 논하기 전에 규칙 자체가 타당하고 건전한지를 묻기.

이솝우화에 보면 개구리들의 왕 이야기가 나온다. 왕을 원하는 개구리들의 기도에 신은 최초에 통나무로 응답했고, 더 강력한 왕을 요구하는 개구리들에게 황새로 다시 응답한다. 이 우화를 조금 더 발전시킨다면, 우리는 황새가 다른 개구리들을 잡아먹는 걸 보며 언제고 자신도 마찬가지의 운명에 처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손뼉을 치며 즐거워하는, 더 많은 희생을 연호하고 황새가 먹다남긴 신체의 파편들을 잽싸게 주워먹는 개구리떼(그중 다수는 아무 쪼가리도 얻어먹지 못하지만 빈 속에도 배부름을 느낀다!)의 풍경을 덧붙일 수 있을 것이다. 이 이야기에서 이솝이 말하지 않은 선택지가 있다. 그것은 통나무조차도 필요로 하지 않는 개구리들의 세상이다. 폭력과 권력의 불가피성을 사실로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은 "왕 없는 개구리들의 세계"가 어떻게 가능할지 고민해야만 한다.

칸트에게 있어 공적이고 보편적인 유일한 영역 이성은 학자들을 통하여 현전한다고 간주되었다. 헤겔은 각 당파들을 초월하여 올바른 방향으로 사회를 이끌어가는 사람들, 곧 국가이성으로서의 관료계급을 말했다. 최근에서야 우리는 칸트와 헤겔의 시대가 완전히 종결되었음을 본다. 우리가 목도하는 근본적인 문제들 중 하나는 어디에서도 보편적인, 공적인 입장을 탐색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 다시 말해 모두가 특수자로서의 이익집단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다(백낙청 선생이 최근의 한국사회에서 공적인 정신의 급속한 쇠퇴가 일어났다고 지적한 것은 옳다). "모두에게 자신의 이익을 추구할 권리를 공평하게 배분하는 것"과 같은 최소한의 윤리는 이윤추구가 곧 생존경쟁으로 격화되는 지점에서 무력화될 수밖에 없다. 이런 사회는 근본적으로 "만인이 만인에게 늑대"인 상태와 그다지 다르지 않기 때문에, 사회 안의 인간들은 어떤 형태로든 이념으로서의 보편성을 다시 요구하도록 강요받는다. 1년 전에 우리는 스스로가 보편자라고 주장하는 유사pseudo-보편자들의 목록을 배송받았고, 결과적으로 하나의 유사보편자가 자신의 개별성을 강제할 수 있는 위치에 도달한다. 1년 후에, 어쩌면 그보다 더 오랜 시간 동안 우리가 목도하고 또 직접 겪을 고통은 진정으로 보편적인 것을 가려낼 분별력이 없었다는 점에서 기인한다. 바꾸어말한다면, 오늘날 미래를 생각하는 모든 기획은 진정으로 보편적인 것이 무엇인지를 고민하는 지점을 그 근본적인 출발점으로 갖는다. 상식의 부재가 문제라는 진단에 대하여, 상식을 따르지 않는 게 문제가 아니라 상식을 철저하게 검토하지 않는 태도 자체가 문제라고 답할 수 있다.

'민주정' 앞에서 우리는 질문한다; 만약 다수가 동의한다면 소수를 공동체로부터 배제 혹은 절멸시키자는 결정이 정당화될 수 있는가? 이런 사회에서 비-대중적인 존재들, 반-대중적인 존재들은 언제든 희생될 수 있는 '잠재적인 수용소'에 수감되어 있는 셈이다. 여론은 단지 조작될 수 있기 때문에만 문제인 게 아니다(이 문제는 뒤집어 말해서 사고과정의 조작으로부터 스스로를 지켜낼 힘이 없는 다수를 전제한다). 여론은 그 자체로 아름답지도, 선하지도, 참되지도 않다. '그 자체로 공정하고 올바른 여론'은 '그 자체로 공정하고 올바른 시장'만큼이나 허구적인 개념이다; 시장이 당위의 기준이 될 수 없다고 믿는 사람이라면 마찬가지로 여론의, 대중의 선택을 당위로 간주해서는 안 된다. 지난 3세기 가까운 기간동안 많은 사람들은 대중-여론에게 최종적인 진리가를 부여하기 위해 노력했고, 그 노력의 기반에는 그러한 결정이 사회의 모든 구성원들에게 정치적 자유와 생존권을 보장할 수 있으리라는, 다시 말해 이 과정을 통해 사람이 스스로의 주인이 될 수 있으리라는 믿음이 자리했다. 내가 묻고 싶은 것은, 이들이 단순히 나이브하지 않았는가란 질문이 아니라, '자기-주인됨'으로서의 자유라는 개념이 달성되었는가를 판정하는 기준이 너무 낮지 않았는가이다. 주인으로서 사유할 수 없는, 혹은 그러한 능력을 기를 수 없도록 조건지어진 이들에게 칼자루를 쥐어줄 때, 어떻게 그 결과물이 '자유로운 선택'으로서 타당성을 지닌다고 판단할 수 있는가? 기관총과 감시 앞에서 치러지는 선거가 자유롭지 못하다면, 올바른 판단을 내리기 위한 충분한 판단력과(오해를 피하기 위해서 말하건대, 나는 학력 따위와 판단력을 등치하는 게 아님을 밝혀둔다--학력과 지식의 축적이 판단력을 보장하지 않는 사례는 다른 누구보다 나 자신이 충분히 많이 보아왔다; 명백한 고학력자가 별다른 근거도 없는 감정적인 호오에 따라 유치한 선택을 내리는 장면은 그리 드문 게 아니다) 근거를 제공받지 못한--그런 수단을 이용할 방법조차도 제공받지 못한--사람들의 선택은 도대체 어떤 의미에서 자유롭다고 칭해질 수 있는가? 나는 그러한 사람들로부터 선택의 권리를 박탈하자는 게 아니다. 단지 그러한 의견들의 집결체로서의 대중, 여론을 그 자체로 자유로운 선택에 따른 정언명령인양 간주하는 전제가 올바른지를 물을 따름이다. 혹자는 그러한 자유로운 선택의 반복이 최종적으로 진정한 자유와 선으로 우리를 인도하리라고 주장할지도 모른다. 내 생각에 그러한 주장은 자유시장이 시간만 주어진다면 우리 모두를 번영케하리라는 교리와 본질적으로 차이가 없다; 자유와 이성은 목표로서 제시될 수는 있겠지만 이미 우리 곁에 현전한 것으로 간주되는 순간부터 덫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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