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르덴 형제. <내일을 위한 시간>. 서사, 윤리, 이데올로기.

Critique 2015. 2. 1. 05:34

장 피에르 다르덴&뤽 다르덴. <내일을 위한 시간>. 2014년. [감독은 통칭 "다르덴 형제." 원제는 _Deux jours, une nuit_로 직역하면 "두 번의 낮, 한번의 밤" 정도가 되겠다]


영화 줄거리를 먼저 알아도 상관없는 분--나는 석달쯤 전에 결말을 포함한 줄거리를 먼저 들었는데, 영화를 보는데 어떠한 지장도 없었다--을 위해 영화의 줄거리를 간략하게 요약한다. 읽지 않으실 분은 알아서 제끼시라.



우울증에 걸려 직장을 쉬고 있던 노동자 산드라(마리옹 코티아르 분)는 토요일 낮에 갑작스럽게 해고 통지를 받는다. 사장이 경영난을 이유로 "산드라를 복직시키고 보너스 1000유로를 안 받거나, 산드라를 해고시키고 남은 사람들이 보너스를 받거나"로 투표를 제시했고 그녀의 해고 쪽이 우세하게 나온 것이다. 절차상의 문제로 이틀 뒤 월요일에 투표를 다시 하게 되고, 산드라는 일자리를 유지하기 위해 주말 양일간(그래서 원제 "두 번의 낮, 한 번의 밤"이다) 직장동료 16명을 일일이 개인적으로 방문해 그녀를 위해 투표해줄 것을 호소한다--이 과정이 영화의 주 내용이다. 처음에 해고 14대 복직 2에서 8대 8까지 가지만 결국 과반수를 확보하지 못해 그녀는 일자리를 잃을 상황에 처한다. 결말부에서 사장은 갑작스럽게 (그녀를 위해 투표해준) 계약직과 재계약을 하지 않고 대신 그녀의 고용을 유지해주겠다고 제안한다. 그녀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 타인의 일자리를 빼앗을 수 없다며 단번에 거절하고, 당당하게 걸어나온다.



1. 


 <내일을 위한 시간>을 비평적으로critical 읽는데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 영화의 (한국어로 된) 리뷰가 놀라울 정도로 빈약하다는 걸 쉽게 알 수 있다. 곧바로 찾아볼 수 있는, 그러니까 나름 주요 언론에 실린 리뷰 네 편을 보자. 가장 먼저 (기계적인) 이론적 감상이 줄거리 요약에 덧씌워진, 그 결합이 소스와 내용물이 따로 노는 요리와 같다는 걸 알아차리기 위해 특별히 예민할 필요는 없는--변증법적으로 말하자면 '매개가 결여된'--한겨레 칼럼(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672945.html)이 있다(공정하게 말하자면, 글을 쓰기 위해 주어진 분량이 너무 짧다). 2주쯤 전 <씨네21> "신 전영객잔" 코너에 실린 김영진의 글(http://www.cine21.com/news/view/mag_id/78901)은 산드라의 몸짓 및 동선에 주목하지만 어떠한 기술적 분석도 결여한 채 주관적 감상으로 점철된 줄거리 요약이 되어버린다--사실 김영진이 이미 다르덴 형제라는 거장에 압도되어 있다는 건 한눈에 알아차릴 수 있다; 그는 처음부터 영화가 무엇을 얼마나 '잘' 표현/재현하는지 찾아내어 글을 쓰는 걸 목표로 했고, 결과적으로 우리는 일종의 감상문을 읽게 된다. <창비주간논평>에 실린 정홍수의 글(http://weekly.changbi.com/?p=5907)도 마찬가지로 영화 리뷰라기보다는 다르덴 형제가 "약자들의 고통"을 위한 "연대의 요청"을 영상화했음에 대한 찬사에 가깝다.


 김영진의 글 2주 뒤 같은 코너에 실린 정한석의 글(<씨네21> 990 (2015): 86-91 / http://www.cine21.com/news/view/mag_id/79037)은 적어도 그 분량에 있어 조금 신경 써서 읽을만 하다. 정한석은 "선택", "피로와 우울", "非공감", "비밀과 불투명함 그리고 부정"이란 네 개의 키워드로 각각 독립적인 파편들을 쓴다; 유감스럽게도 그는 벤야민이 아니기 때문에 본인이 의도했을 바와는 달리 이 파편들이 유의미한 형세configuration를 이루는 것 같지는 않다(벤야민 유행 이후 파편적인 글쓰기를 시도하는 사람들은 늘었으나 그중 자신의 논리를 구축하기 위해 벤야민이 쏟은 이론적 노력이 얼마나 되는지 이해하는 이는 드문 듯 하다). 네 개의 파편들 중 가장 읽을만한 것은 영화의 서사가 설득력을 결여하고 있음을 지적하는 "비공감"이다. 나머지 세 편의 조각들은 여러 이론의 개념을 가져와 영화를 설명하려고 하지만 대체로 설득력이 없다. 예컨대 "피로"는 제목에서 드러나듯 한병철의 성과주의-피로 도식을 가져와 산드라의 우울증에 적용하는데,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를 너무 잘 작동시킨 나머지 산드라의 우울증이 성과주의 사회가 강요한 피로의 결과물이라는 주장을 어떠한 근거도 없이 제출한다; 우울증 환자는 내적인 에너지를 결여하며 그 결과 쉽게 피로해진다는 기초적인 사실을 아는 사람이라면 정한석의 주장이 인과의 순서를 뒤집었음을 곧바로 알아차릴 것이다. 이론의 언어를 끌어들이는 조각글 셋은 마치 비평을 공부하는 학생들에게 "이론을 이런 식으로 써먹으면 분석이 망합니다"라는 교훈을 전해주기 위한 모범적인 사례 같다.


 이상의 리뷰들에서 동일한 전제를 발견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쉽게 말해, 네 편의 글은 모두 예술작품이 무엇인가를 재현하는데 성공하고 있으며, 그것을 발견하는 게 비평가의 목적이라는 대전제 위에서 사고한다; 서사의 비정합성을 지적한 정한석이 유일하게 이 전제를 벗어날 뻔 했지만 그는 본인의 비평적 감각을 믿는 대신 사상의 양념을 치는 좀 더 편의주의적인 방식을 택했고 결과적으로 그의 평은 인스턴트가 되었다. 사실 이건 이들만의 잘못이 아닌 게, 동종 업계 사람으로서 고백하자면 우리 모두는 학교에서 이런 전제를 끊임없이 주입받기 때문이다! 예술은 실패할 수 없고, 예술은 성공하고, 예술이 어떻게 성공하는지를 봐야 하고 등등의 정언명령 말이다. 우리가 보려 하지 않는 평범한 사실은, 실제로 한 편의 예술작품을 완성시키는 과정은 (기술적 숙달을 포함해) 제반 요소들의 종합을 포함한 매우 까다로운 작업이며, 흠 잡을 수 없는 완성에 도달하는 작품은 극소수에 가깝다는 것이다. 우리는 벌거벗은 임금님에게 손가락질 하는 아이와 같은 기분으로 <내일을 위한 시간>을 볼 필요가 있다. 다만 나는 한 가지 사항을 덧붙이고 싶은데, 이는 어떤 영화들은 그것이 별로이기 때문에 역으로 무언가 더 보여주는 게 있고 <내일을 위한 시간>이 그 한 예라는 것이다.




2.


 우선적으로 두 가지를 말할 수 있다. 하나, 예술작품으로서 <내일을 위한 시간>의 근본적인 약점은 그 단순하고 빈약한 서사구조에 있다. 둘, 이 영화는 (전통적인 의미에서) 현실을 사실적으로 재현하는 영화가 아니며 오히려 '도덕극'에 가깝다. 그리고 이 두 가지 사항은 내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이미 정한석도 이야기했지만, 이 영화의 서사적 빈곤은 그 지나치게 단순한 구조에 있다. 산드라가 16명의 동료를 만나고 똑같은 질문을 반복하는 원 패턴이 (그나마 영화가 걷잡을 수 없이 지루해지는 걸 막기 위해 전화로만 얘기하는 서넛을 빼고는) 계속해서 반복된다; 사실 산드라가 사장에게 받는 질문도 "자신의 이익과 동료의 생존"이라는 윤리적 도식에 입각한다는 것은 마찬가지라서, 이 영화는 16명에서 생략되는 인물 몇을 빼고 거기에 1을 더한만큼 똑같은 패턴을 반복한다. 처음 한 두 번이야 신선하지만 뒤로 갈수록 영화 내에서도 이 동료들은 숫자로 표현되며 ("나를 지지해줄 X명" 식으로) 그나마 동료 같은 기분을 내는--하지만 다른 동료들을 설득하는 과정에 참여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질적인 차이를 가져오지 않는--안느를 제외하고 딱히 원 패턴의 반복과정에 유의미한 차이를 불어넣지 않는다. 심지어 다르덴 형제에게 경배드리 김영진조차도 <내일을 위한 시간>의 서사에 고조과정이 없이 증감을 반복한다는 것을 집어낼 정도인데, 중반쯤 가면 평범한 관객이라도 이 영화가 계속해서 어떻게 전개될지 예측하는 데 별로 어려움을 겪지 않는다(동료 노동자들의 수가 16명이 아니라 8명이나 32명이었어도 이야기에 근본적인 차이는 없다) . 


 여러 리뷰에서 언급하는 카메라웍, 코티아르의 배우로서의 매력, 그리고 "서스펜스"적 장치들을 활용하는 다르덴 형제의 노력은 냉정히 말해 서사의 빈약함을 덮기 위한 양념의 역할을 수행하지만 본질적인 약점이 완전히 가려질 수는 없다(어떤 면에서 다르덴 형제의 거장다움은 카메라웍이나 코티아르의 매력을 포함해 이토록 단순한 서사를 95분이나 크게 지루하지 않게 끌고 나갔다는 데서 찾아야 할지도 모른다). 이 영화의 역설은 긴장을 불러일으켜 서사적 빈곤을 가려주어야 할 서스펜스적 장치가 오히려 영화의 결점을 더 드러낸다는 것이다. 대표적인 장면이 바로 산드라가 안정제를 몰아서 먹고 자살을 기도하는 장면인데, 고민하던 안느가 뒤늦게 지지를 선언하자 산드라가 황급히 구토를 시도하는 전개에서 한껏 고양되었던 절망감은 어처구니없이 해소된다.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남편과 부둥켜안을 때 (4개월 가까이 섹스를 하지 않았던) 그들 부부 사이에 성적 에너지가 순간적으로 다시 차오르지만 곧바로 (식사가 오면서) 중단되는 장면도 마찬가지다. 이 장면들은 영화 어느 순간에 삽입되었어도 별 차이가 없다는 점에서 내적 필연성의 산물이 아니라 문자 그대로 서스펜스를 위한 서스펜스 장치에 불과하며, 그 가릴 수 없는 인위적 성격은 각 동료를 설득하는 작은 서사들이 종합적인 하나의 서사로 융합되는 과정이 비유기적이란 느낌이 들 정도로 단순하다는--그래서 그 작은 서사들의 순서를 바꾸어도 딱히 손해보는 게 없다는--사실을 더욱 강하게 드러낸다.


 이어 던져야 할 질문은 도대체 왜 이런 서사적 구조가 나오게 되었냐는 것이다. 우호적인 동료가 재투표 결정을 알리면서 모두를 모아놓고 함께 이야기하자는 방법을 제시하지만, 산드라는 생산직 노동자들을 다루는 영화에서라면 상식적으로 제일 먼저 고려할 집단적 연대의 시도 대신 열 명이 넘는 동료 노동자들을 일일이 설득하는 수고를 부러 선택한다. 초반부의 이 대목에서부터 영화의 줄거리를 (10회가 넘는) 개별적 대화의 반복으로 채우겠다는 의도는 분명히 드러난다. 이는 후반에 안느가 일행에 합류한 뒤에도 결국 마지막 설득에서까지 산드라와 동료들의 대화가 일 대 일로 이루어진다는 사실에까지 이어진다. 요컨대 동일한 모티프의 질적인 차이 없는 반복으로 구성된 서사의 단순함은 애초에 일 대 일, 개인과 개인의 대화라는 틀 자체를 유지하고자 하는 의도의 필연적인 결과다.


 일대일 대화라는 포맷, 즉 전체 서사를 구성하는 작은 서사 혹은 모티프 자체에서 이 영화의 핵심이 있다. 영화에서 산드라와 동료들의 모든 대화는 (그리고 앞서 지적했듯 결말부 산드라와 사장의 대화도) 사실 동일한 윤리적 선택지의 반복이다: "자신의 이익과 동료와의 공존 중 무엇을 택할 것인가?" 그러니까 산드라를 포함해 총 17명에게 동일한 질문이 주어지는 셈인데, 다르덴 형제는 거의 노골적으로 이 선택들을 일종의 사유실험으로 구축한다. 즉 인물들은 현실의 선택상황에서는 있을 수 없는 비교적 '순수한' 윤리적 질문과 대면하며, 상대방이 어떤 선택을 하든 책망하지도, 폭력을 행사하지도 않는 산드라의 담담함은 사실 인물의 성격이라기보다는 윤리적 선택의 실험실을 만들어내기 위한 장치에 가깝다--"<내일을 위한 시간>은 사회윤리학 실험과도 같은 영화"라는 이동진의 단평(http://blog.naver.com/lifeisntcool/220228236421)은 이 부분의 핵심을 올바르게 짚고 있다. 16명의 동료들은 (피부색이 다른 계약직 알퐁스를 제외하고) 전부 엇비슷한 상황의 하층계급 노동자로 설정되었다--하층계급 노동자들의 삶을 잘 보여주는 게 이 영화의 미덕이라는 평가는 엄밀히 말해 이 영화의 목표 자체가 리얼리스틱한 재현이 아님을 (결정적으로 이 영화는 그들이 함께 일하는 공장의 노동현장을 단 한번도 다루지 않는다!) 이해하지 못했다는 데서 핵심을 비껴간 셈이다. 이 영화에서 산드라를 지지하지 않는 인물들 중 단순히 이기적인 인물들의 평면성은 <내일을 위한 시간>이 본질적으로 윤리극 또는 도덕극으로 만들어졌음은 더욱 잘 보여준다.


 이 도덕극의 핵심질문, "자신의 이익이냐 동료와의 공존이냐"가 관객들을 연대의 덕목으로 이끌고 있음은 분명하다. 단순한 서사구조에서 지속적으로 작용하는 모티프가 하나 있다면, 이는 산드라의 삶이 폐쇄적인 개인의 삶에서 동료들의 삶에 책임을 지는 타자윤리적인 것으로 성장해 나간다는 것이다. 최초에 그녀가 우울증 환자로 나온다는 사실은 질문을 던져볼 만한데, 영화가 전혀 설명해주지 않는 우울증의 원인을--성과주의의 산물이든, 자본주의 착취의 결과물이든--상상할 게 아니라 우울증 자체가 여기에서 의미하는 바를 물어야 한다. 곧바로 말하자면 우울증은 자기폐쇄적인, 고립된 개인의 삶을 가리키는 하나의 증상이다(남편과의 섹스 없는 관계도 마찬가지다); 거친 도식을 그린다면, 우울증에서 더 하강할 때 완전한 고립인 잠과 죽음이, 우울증의 고립에서 벗어나 상승할 때 연대와 상호책임의 관계맺기가 있다.


 <내일을 위한 시간>은 그러니까 홀로 잠들어 있던 우울증 환자가 걸려오는 전화와 자신을 깨우는 남편에 의해 일어나서, 남남이나 다름없던 동료들과 대화해야 하는 상황과 마주하고, 마침내 자신을 도와준 타인을 위해 스스로의 이해관계를 포기한 뒤 남편과 전화로 대화하면서 걸어가는 것으로 끝나는 이야기인 셈이다. 첫 대목의 침묵, 수면이 가리키는 고립과 정지의 상태는 마지막 장면의 통화와 걷기라는 보다 열리고-동적인 삶과 명백히 대조된다. 그 사이에는 여러 대화를 통해 (자신의 이익을 포기하고 연대를 선택한) 8명의 지지자를 모으는 과정이 있다. 본래 단 한 명의 선택을 보여주는 것만으로 충분할 도덕극을 개별자들의 선택을 여러 차례 반복하는 것으로 구성한 까닭은 개별자들을 집단적 연대로 이끄는 흐름 자체를 구성하기 위해서이다. 산드라를 포함한 17명의 노동자들은 모두 서로로부터 분리된 고립된 삶을 살아간다는 점에서 '우울증 환자'들이며, 그런 맥락에서 이 이야기는 산드라가 타인들과의 대면을 통해 자기 자신만이 아니라 타인들의 삶 또한 고립에서 구출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3.


 정리해보면, 다르덴 형제가 <내일을 위한 시간>을 도덕극으로, 그러니까 인물이 성장을 통해 연대라는 가치관에 도달하는 극으로 구성했다고 이해할 수 있다. 개인들의 윤리적 선택이라는 모티프를 반복해서 제출하는 것 역시 그런 점에서 연대라는 가치에 필요불가결한 다수/집단의 존재를 형성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문제는, 2절의 앞부분에서 설명했듯, 정확히 이러한 의도의 실현이 전체의 서사를 단순하고 밋밋한 구조에서 벗어날 수 없도록 제약한다는 데 있다. 각각의 미시적인 모티프들이 전체 서사의 구성으로 이어지기 위해서는 모티프들의 단순한 연쇄적 나열이 아니라 실제로 그것들을 축적하여 유기적인, 적어도 총괄적인 '서사'로 만들기 위한 구조적 배치가 필수적이다. <내일을 위한 시간>의 가장 근본적인 결함은 개별 모티프에서 전체 서사를 창출하는, 또한 전체 서사에서 개별 모티프에 의미를 부여하는 매개적 구성이 부재한다는 것이다.


 서사 상에서 구조의 실질적인 결여는 영화의 정치적/윤리적 내용에도 마찬가지로 영향을 끼친다. 산드라의 삶이 집단적 연대를 향해 나아가지만 결과적으로 영화 속에서 실질적인 연대/집단형성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산드라를 지지하는 8명의 동료들은 결국 비밀투표를 통해 개인으로서의 선택을 했을 뿐이며, 산드라 또한 알퐁스를 위해 사장의 제의를 거절하고 실직자가 되지만 결국 직장을 나온다. 모두가 각자 윤리적인 선택을 했고 연대를 '지지'한다는 것은 알겠다. 그러나 그들이 연대에 대한 지지를 넘어 실제로 연대하는가를 질문한다면, 영화에서 딱히 희망적인 답변을 찾을 수 없다--산드라는, 비록 그녀에게 좋은 남편과 사랑스러운 가족이 남아 있고 그녀의 내면에는 강한 윤리적 힘이 있지만, 고립된 실직자다. 전체 투표 및 산드라의 최후의 선택을 통해 연대라는 가치에 대한 믿음이 최고조로 달한 순간에 우리는 우리의 발 밑에 아무 것도 없음을 깨닫게 된다. 다르덴 형제가 제시한 미덕은 허공 위에서 그 무엇도 되지 못한 채 공허하고 추상적인 파편으로 남는다. 이 영화에서 연대성의 미덕을 발굴해내어 떠받드는 이는 연대 자체가 무엇을 뜻하는지를 깊게 사고하지 않은 셈이다.


 그러나 이러한 서사 및 교훈 상의 근본적인 결함을 지적하는 게 나의 목표는 아니다. 예술작품에서 재현의 문제의식을 끝까지 밀고 나갈 때 우리는 예술이 무엇을 재현하는가라는 물음 자체를 재고찰하기에 이른다. 아도르노식으로 사고한다면, 성공하지 못한 예술작품 앞에서 우리는 예술 작품이 무엇을 재현하려 하는가를 읽고 그것의 소망을 대신 충족시켜주는 대신 도대체 무엇이 예술작품의 소망을 좌절시킬 정도로 작품 내 깊숙히 각인되어 있는가를 물어야 한다. 쉽게 말해, <내일을 위한 시간>의 (서사의) 형식적 의도와 정치적/윤리적 메시지 자체가 공허한 추상으로 남는다면, 그러한 제약은 무엇 때문인가를 물어야 한다.


 <내일을 위한 시간>이 자본가와 노동자, 그리고 실업 및 노동자연대를 소재로 하는 영화치고 무척이나 기이한 점은 사장=자본가가 이야기의 한쪽 귀퉁이에 처박혀 있다는 것이다. 이 영화의 핵심적인 갈등은 각 개인들이 자신의 내면에서 직면하는 이윤 대 연대라는 가치선택이다--브룩스Peter Brooks가 제임스Henry James 소설의 특징을 가리키기 위해 사용한 "의식의 멜로드라마"the Melodrama of Consciousness라는 표현을 상기할 수 있겠다. 물론 마지막 장면에서 사장은 메피스토펠레스적인 유혹자로 나오지만, 이때도 쟁점은 산드라의 내면에 있기에 그는 악의 원인이라기보다는 내적 갈등을 극복하는 인물의 덕성을 강조하기 위한 서사적 기능에 가깝다. 이러한 구도 안에서 사장의 존재는 아무래도 좋은 것이 되는데, 이는 영화가 노동과 자본의 대립구도라는 유서깊은 도식을 실제로 전혀 활용하지 않는다는 사실과도 통한다;  물론 산드라와 동료들은 "사장이 선택을 강요"했음을 지속적으로 환기하지만, 이는 플롯의 전개와 인물 내적 갈등에 핵심적인 사실을 가리킨다기보다는 "나도 구조적 문제를 알고 있다"는 면피용 멘트에 가까워보인다.


 정확히 이 사실, 즉 노동자들이 무엇에 대하여 싸워야 하는지가 불분명하다는 것이야말로 <내일을 위한 시간>의 서사와 정치적 메시지를 함께 공허하게 만드는 이유다. 계급의식을 다루는 맑스주의 전통에서 분명히 강조하듯, 노동자의 연대의식은 그들이 동일한 노동자라는 데서 나오는 게 아니라 그들이 함께 자본 및 정치적 권력의 착취대상이 된다는 사실에, 즉 그들이 자본가계급 및 국가와의 동일한 적대관계를 공유한다는 데서 나온다. 그러나 이 영화는 갈등의 위치를 자본 대 노동에서 고립된 노동자들의 윤리적 의식 속으로 옮겨버린다. 마치 "오, 나도 자본가들이 나쁘다는 건 알아, 하지만 연대를 하려면 우리들 각자가 먼저 연대라는 가치를 선택해야 하지 않겠어?"라고 말하는 것처럼 말이다. 맞서 싸우기 위해 단결해야 할 현실적인 적수가 없는 상태에서--좋든 싫든 배타적 성격은 집단적 정체성의 핵심적인 요소다--연대가 단순히 듣기 좋은 말 이상이 되지 않는 것은 당연하며, 이는 각자에게 연대를 주문하지만 어떠한 연대도 없는 황량함을 낳는다.


 영화는 심지어 사장을 위한 변명까지 미리 마련해 두었다. "아시아 쪽과의 경쟁"이 심화되었고 따라서 인건비를 줄일 수밖에 없다는 사장의 말은 영화에서 어떠한 의심도 받지 않는다; 그는 유혹자일 수는 있지만 거짓말쟁이도, 악의를 가진 사람도 아니며, 오히려 공정하지 못한 투표임을 알고 한번 더 기회를 주기까지 하는 공정한 인물이다. 이처럼 서사에서 중립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사장은 영화의 갈등구도에서 빠져버리고 남는 것은 노동자들의 윤리적 결단밖에 없다. 하지만, 자본이 국제적 경쟁에서 밀리고 있으며 사람을 줄이고 더 많이 일해야 한다는 사장의 주장 자체를 논박하지 않은 채라면, 이들이 결단을 내려 서로 연대하는 게 도대체 무슨 실천적인 해결책으로 이어질 수 있단 말인가? 연대를 했을 때 얻을 수 있는 바를 보여주지 못한다면 연대라는 가치가 말 그대로 빛 좋은 개살구 이상이 될 수 없지 않은가?



4.


 문강형준의 한겨레 칼럼이 추상적으로나마 지적하듯, 여기에는 자본주의의 국제적 경쟁체제 하에서 유럽의 자본 및 노동이 마주한 정치경제적 난국이 자리한다. 오늘날 제조업은 국제적 과잉경쟁구도에 돌입했으며 유럽 역시 현 체제를 유지하는 한 그러한 경쟁이 요구하는 갖가지 사항들을 피해갈 수 없다. 영화는 윤리적 갈등을 촉발하는 현재의 상황은 사장을 비롯한 어느 누군가의 악의가 아니라 오늘날 세계경제의 필연적인 산물이라는 점을 무의식적으로나마 알고 있다. 이 상황에서 우리 모두의 연대만이 최선의 선택지라는 영화의 입장을 유지하고 싶다면 다음 질문에 답변을 해야 한다. 연대를 한다면, 무엇에 대항해서 누구와 함께 연대하는가? 


 두 가지 선택지가 있다: 자본가에 대항해 만국의 노동자들이 연대하든가(흑인 이민자 알퐁스와 백인 여성 산드라의 연대가 이러한 선택지를 매우 희미하게 암시한다), 아시아 및 다른 경쟁자들에 대항해 같은 국가의 자본가와 노동자들이 연대하는 것이다. <내일을 위한 시간>은 양자 중 한 쪽을 선택하는 대신 개인의 내면 및 덕성으로 파고드는 전략을 취한다(이 사례야말로 고전적인 맑스주의 비평에서 "이데올로기적 봉합"이라고 부르는 대상이다!) . 그 결과 사회주의냐 파시즘/민족주의냐는 양자택일을 피했지만, 필연적인 귀결을 거부한 결과 영화의 서사와 메시지 자체의 공허함이라는 대가를 치러야만 했다.


 <내일을 위한 시간>에서 가장 힘있는 장면인 산드라의 마지막 선택은 이러한 공허함을 가리기 위해 세심하게 고려된 것이다. 알퐁스를 그만두게 하고 그녀의 직장을 유지하라는 사장의 제안은 전형적인 '매력적이지만 옳지 않은' 선택지로, 이런 유혹을 거부하는 것만으로도 산드라에게는 자연스럽게 관객들의 박수를 불러일으키는 윤리적 미덕이 부과된다. 이 영화는 국제적 자본주의에 내재한 적대적 관계(그것이 국가별 갈등이든 계급갈등이든)에 대한 태도결정을 포기한 상태에서 어떤 구체적이고 실질적인positive 답변을 제시해줄 수 없었다. 대신 다르덴 형제는 부정적인negative 형태로, 다시 말해 유혹을 거부하는 형태로 자신들이 지지해온 연대라는 가치를 부각시키는데, 엄밀하게 말하자면 이는 무대 장치 자체의 구조적 결함을 가리는 깜짝 트릭에 가깝다. 윤리 이전에 존재하는 정치경제적인 위기 자체로부터 기인하는 이 영화의 근본적인 갈등은 당연히 윤리적 선택만으로는 지워질 수 없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이 영화가 이중의 차폐막을 깔고 있다고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 가장 핵심적인 지점에는 정치경제적인, 사회구조적인 갈등이 있고 인물들의 내면에서 벌어지는 윤리적 갈등은 전자의 갈등이 요구하는 적대적 관계 자체를 은폐하는 구실을 한다. 그러나 이러한 '이데올로기적 봉합'은 서사와 정치적 메시지의 빈약함을 대가로 치를 수밖에 없었다. 2절에서 언급한 코티아르의 매력, 인물의 동선을 따라가는 카메라웍, 서스펜스적 장치들, 그리고 결정적으로 알퐁스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데 어떠한 주저도 없었으며 임대 아파트로 돌아가야 하는 미래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은 채 씩씩하게 걸어가는 산드라의 마지막 모습은--이 모든 것들을 주저없이 재빨리 해치워 관객들에게 의심할 틈을 전혀 주지 않는 다르덴 형제의 테크닉은 탁월하다--바로 이 형식과 내용의 공허함을 가리는 두 번째 은폐막이다. 그 은폐 기술 자체의 노련함에 초점을 맞추고 그것이 영화라는 예술장르가 갖는 힘이라고 이야기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밑에 깔린 해결되지 않은 질문은 박수 소리로 덮을 수 있는 게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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