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지니아 울프『막간』의 문명, 자연, 자연-사
Critique 2015. 1. 23. 22:182014년 2학기 수업 기말과제로 쓴 글. 시간이 촉박한 상태에서 revise를 거치지 못하고 냈고, 실제로 그 문제로 많은 지적을 받았다. 지적받은 내용들 중 당장 수정가능한 부분만 손봐서 올린다. 가장 문제가 되는 부분은 뒤의 참고문헌목록에 실어놓은 리스트가 (실제로 읽었고 또 논지를 세우는 데 나름 간접적으로 도움을 받았음에도) 본문에 직접인용으로 활용되지 못했다는 것. 실제로 질리언 비어(Gillian Beer)의 논의를 지나가듯이라도 언급하지 못한 건 아쉬운 부분이다. 페이퍼로서의 완성도는 정말로 초고 수준인데, 이 주제 자체가 텍스트 읽기에 무의미하지는 않다고 생각해서 올려둔다. 핵심적인 모티프는 역시 벤야민과 아도르노에게서 따왔다.
『막간』(Between the Acts)의 문명, 자연, 자연-사(nature-history)
1. 오프닝: 타블로 비방
버지니아 울프(Virginia Woolf)의 『막간』은 일종의 타블로 비방(tableaux vivant)으로 시작한다. 1939년 제2차 세계대전의 발발을 몇 주 앞둔, 그리고 무엇보다도 마을의 연례행사이자 본 이야기 격인 야외극(pageant) 공연을 지척에 둔 여름날 밤 헤인즈(Haines) 가족과 올리버(Oliver) 가족이 대화를 나누며 함께 둘러앉아 있다. 곧바로 눈에 띄는 흥미로운 요소 중 하나는 인물들에 대한 묘사와 서술이 동물 혹은 자연적인 것의 형상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점이다. 두 번째 문단에서 첫 등장인물로 “농부 신사의 아내”("the wife of the gentleman farmer" 3) 헤인즈 부인(Mrs. Haines)의 초상이 묘사된다. 그녀는 “홈통에서 먹어치울 무언가를 찾아낸 것 마냥 튀어나온 눈을 가진 거위 상(像)의 여성”("goosefaced woman with eyes protruding as if they saw something to gobble in the gutter")이다. 그의 남편 루퍼트 헤인즈(Rupert Haines)에게 애정을 느끼는 이사벨(Isabel)은 “공작새”("peacocks" 4)가 새겨진 가운을 입고 있으며 그 행동거지는 마치 “자신의 행로를 따라 헤엄치는 백조와 같다”("like a swan swimming its way"). 이사벨과 루퍼트는 각자 자신들의 처지에 묶인 “두 마리 백조”("two swans" 5)처럼 두 사람만의 묘한 분위기를 공유하고 있다. 헤인즈 부인은 자신이 그들로부터 배제되었음을 알아차리고 그러한 분위기 자체를 “지빠귀가 나비의 날개를 부리로 쪼아 찢어내듯”("as a thrush pecks the wings off a butterfly") 부숴버리고 싶어 한다. 이윽고 올리버 가족의 집을 떠나며 “헤인즈 부인은 거위를 닮은 두 눈으로 그녀[이사벨]를 노려보면서 꾸르륵 거리는 새처럼 소리 내었다”("Mrs. Haines glared at her out of goose-like eyes, gobbling").
인간적인 것과 동물적인 것의 뒤얽힘은 단지 인물묘사에 동물의 이미지가 동원되는 데 그치지 않는다. 울프는 두 가지 모티프를 조금 더 본질적인 층위까지 파고 들어가 활용한다. 소설의 세 번째 문단을 주의 깊게 살펴보자.
“그리고 침묵이 있었다; 암소 한 마리가 기침했다; 그에 이끌려 그녀[헤인즈 부인]는 자신이 아이였을 적에 소들을 전혀 무서워하지 않고 오직 말들을 무서워 한 게 얼마나 이상한가를 이야기했다. 하지만 그 뒤 그녀가 유모차에 탄 작은 아이였을 때 커다란 짐말 한 마리가 그녀의 얼굴을 1인치 쯤 쓰다듬었다. 그녀는 안락의자에 앉은 노인에게 자신의 가족이 수 세기 동안 리스커드에서 살아왔다고 말했다. 교회에 있는 무덤들이 이를 입증해줄 것이다.”
Then there was silence; and a cow coughed; and that led her to say how odd it was, as a child, she had never feared cows, only horses. But, then, as a small child in a perambulator, a great cart-horse had brushed within an inch of her face. Her family, she told the old man in the arm-chair, had lived near Liskeard for many centuries. There were the graves in the churchyard to prove it. (3)
우리는 이 문단에서 인간적인 시간의 이미지가 처음부터 끝까지 나열되어 있음을 본다. 어린 아이, 그 다음 유모차에 탄 어린 아이, 안락의자에 앉은 노인, 그리고 마지막에는 무덤이 있다. 언어를 이미지화 해본다면 자연스럽게 한 인간의 삶이 그 시작에서 종말에까지 나아가는 선(線)적인 흐름을 그려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무덤을 통해 헤인즈 부인을 포함한 지금 살아 숨 쉬는 이들과 이미 죽어 묻힌 존재들은 “가족”이라는 단위에 속한다. 가족은 한 생물개체의 자연적인 수명을 초월한 인간적이고 역사적인 서사를 가능하게 한다. 즉 인간이 삶의 끝에 도달하는 무덤은 다시 인간존재를 수많은 인간들의 삶이 축적된 가족의 서사 혹은 역사로 안내한다.
가족과 무덤을 통해 인간적인 것이 역사적인 것으로 이어졌다면, 뒤이어 제시되는 장면에서 역사의 축적은 자연 위에 건설되는 문명의 이미지로 나아간다. 바솔로뮤 올리버(Bartholomew Oliver)는 그들이 마주한 평범한 오물구덩이가 역사적인 흐름에 어떻게 닿아있는가를 설명한다. 이 땅에는 먼저 고대 영국인들, 다음으로 로마인들이 만들어냈고, 엘리자베스 조 때의 영주저택이 지어졌으며, 19세기의 나폴레옹 전쟁 때 밀을 키워내기도 한 흔적이 남아 있다("the scars made by the Britons, by the Romans, by the Elizabethan manor house; and by the plough, when they ploughed the hill to grow wheat in the Napoleonic wars" 3-4). 노인의 이야기에서 인간적인 것, 문명은 자연 위에서 변하지 않는 자연을 끊임없이 이용하고 그것을 상처 입히는 역사적인 서사로 등장한다. 고대로부터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 온 인간과 문명의 역사를 읊조리는 올리버 본인은 인도 식민통치에 직접 관료로 참여한 이로서 대영제국이라는 ‘문명’ 그 자체의 표상이기도 하다("Mr. Oliver, of the Indian Civil Service, retired" 3). 앞서 헤인즈 부인의 이야기 속 한 인간의, 한 가족의 삶은 여기에서 그를 포함하는 한 국가 혹은 문명의 역사에 합류한다. 고대로부터 현대까지의 시간적 전진/축적은 개인이 가족으로, 가족이 민족국가로 나아가는 ‘공간적’ 확장과 결부되어 하나의 문명에 도달하고, 올리버 및 이 자리에 모인 두 가족의 여름밤은 문명의 산물이자 그 일부이다.
그러나 잠시 인간적인 시간 및 그 서사에 빠져들기를 멈추어보자. 헤인즈 부인과 올리버의 이야기에서 만들어지는 문명의 서사가 이 타블로 비방의 전부인가? 여기에는 인간적인 것으로 환원될 수 없는 영역 또한 존재한다. 그 자체로 암소의 기침소리로부터 유발된 헤인즈 부인의 어린 시절은 소와 말의 존재로 채워져 있다. 그녀의 말과 올리버의 말 사이에는 집 밖에서 기운차게 웃고 있는 새("A bird chuckled outside" 3)와 “벌레들, 달팽이들”("worms, snails")이 여전히 자리한다. 노인이 문명의 역사를 회상하고, “어머니가 바로 이 방에서 그에게 바이런의 작품들을 주었던”("his mother had given him the works of Byron in that very room" 5) 기억들을 떠올리는 동안 주변의 다른 이들의 모습은 어느새 제각기 나름의 동물을 닮아있으며 소설의 첫 대목이 끝나는 시점까지 이러한 특성은 단순히 생김새만이 아니라 그들의 행동거지에서조차도 분명해진다. 한 마디로, 동물 혹은 자연물의 이미지들은 인간의 서사에 끼어드는 이상으로 인간의 형상에까지 깃들어 있다.
이 글의 목표는 상기한 문제의식에 따라 도입부에서부터 결말까지 『막간』의 전반에 드리워진 인간적인 것과 자연적인 것의 모티프가 어떻게 드러나는지, 그리고 양자가 어떠한 관계를 맺는지를 살피는 데 있다. 양자의 관계를 살피고 또 이를 해석하는 작업은 우리를 단순히 부분적인 모티프의 해명만이 아니라 텍스트 전체의 서사를 재구축하는 과정으로 이끈다. 이를 위해 먼저 소설에서 문명, 역사, 인간적인 것의 이미지가 어떠한 이념적 서사를 드러내는지를, 뒤이어 자연적인 것의 이미지가 기능하는 바를 살핀다. 마지막으로 양자의 관계를 다시 해석하는 작업을 통해 『막간』을 다시 읽는다. 울프의 텍스트에서 자연과 인간문명의 순진한 대립에 기초하는 대신 양자가 근본적으로 분리될 수 없는 관계에 있다. 두 이질적이지만 동시에 분할될 수 없는 영역들이 서로를 대면하고 또 서로에게 연결되면서 울프가 희구하는 새로운 세계가 어떻게 자연으로의 도피적 퇴행과는 질적으로 다른 경로의 가능성인지 분명해질 것이다.
2. 문명과 그 불만
첫 대목이 끝나고 시작하는 『막간』의 본 줄거리의 중심에는 올리버의 이야기를 보다 넓고 깊게 되풀이하는 야외극이 있다. 소설의 두 번째 대목은 바로 그 야외극의 배경이 되는 포인츠 홀(Pointz Hall) 저택에 대한 묘사로 시작한다. 올리버 가족은 수백 년 이상 이 마을에 머물러 온 사람들에 비하면 비교적 짧은 기간인 120여 년 간 이 저택에 살아왔다("Only something over a hundred and twenty years the Olivers had been there" 6). 포인츠 홀에서 우선적으로 눈에 띄는 특성은 그 위치다. 왜 저택이 북쪽을 면해 다소 황량한 느낌을 주도록 지어졌는가를 묻는 동생 루시 스위딘(Mrs. Lucy Swithin)의 질문에 올리버 노인은 “그야 명백히 자연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지”("Obviously to escape from nature" 7)라고 답한다. 여기에 대해 서술자는 다음과 같은 논평을 보충한다.
“포인츠 홀을 지은 이가 꽃밭과 채소 너머 높은 지대로 향하는 땅이 있었을 때 저택을 텅 빈 골짜기에 지은 것은 유감스러운 일이었다. 자연은 택지를 제공했고, 사람은 자신의 집을 골짜기에 지어버렸다.”
It was a pity that the man who had built Pointz Hall had pitched the house in a hollow, when beyond the flower garden and the vegetables there was this stretch of high ground. Nature had provided a site for a house; man had built his house in a hollow. (9-10)
여기에서 건축물에 자연적인 것과 대비되는 인간적인 성격이 강하게 부여되었으며 후자가 동시에 어떤 공허함과 연결되어 있음이 드러나는데, 이후의 대목에서도 사람의 손에 만들어진 건물과 “텅 빈”("hollow")과 같은 수사가 이어져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스 신전을 연상케 하는 광("The Barn" 24) “안에는 텅 빈 홀이 있다”("inside it was a hollow hall"). “종교개혁 전에 세워진 저택인”("the house before the Reformation" 29) 포인츠 홀의 천장엔 무언가 그 안에 숨겨진 공간이 있어 망치로 두드리면 “텅 빈 소리”가 난다("If you tapped--one gentleman had a hammer--there was a hollow sound; a reverberation; undoubtedly, he said, a concealed passage where once somebody had hid" 30, 인용자 강조).
포인츠 홀이 위치한 마을/공동체 역시 그곳에서 오랫동안 살아온 인간 존재들의 시간이 축적된 공간/집단이라는 점이 강조된다. “웨어링 가, 엘비 가, 매너링 가 또는 버넷 가와 같이 인척 관계를 맺고 그 안에서 통혼해온 오래된 가족들은 교회묘지 벽 아래에 마치 덩굴 뿌리처럼 뒤얽힌 채 안치되어 있었다”("the Warings, the Elveys, the Mannerings or the Burnets; the old families who had all intermarried, and lay in their deaths intertwisted, like the ivy roots, beneath the churchyard wall" 6). 여기는 “영국의 한 가운데 있는 이 벽지 마을에 도착할 때까지 기차를 타고 세 시간이 넘게 걸리기에 아무도 그 기나긴 여정을 감히 시도할 엄두조차 내지 못할”("For as the train took over three hours to reach this remote village in the very heart of England, no one ventured so long a journey" 15) 마을로 정착한지 120여 년 가량 된 올리버 가문과는 제대로 된 교분을 맺을 생각조차 하지 않는 오래된 가족들이 여론을 주도하고 있다. “1833년에 사실이었던 바가 1939년에도 유효하다. 그동안 새로 세워진 저택은 없으며, 새롭게 생겨난 마을도 없다”("1833 was true in 1939. No house had been built; no town had sprung up" 48). 변화가 없는 것은 사람 역시 마찬가지라, “만약 피기스가 주민들의 이름을 부른다면, 그들은 똑같이 대답하리라. 샌드 부인은 일리페 가족의 일원으로 태어났고, 캔디쉬의 어머니는 페리 가족의 일원이었다”("Again, had Figgis called the names of the villagers, they too would have answered. Mrs. Sands was born Iliffe; Candish's mother was one of the Perrys" 69). 그들은 오토바이, 버스, 영화를 비난하는 신부처럼("The motor bike, the motor bus, and the movies--when Mr. Streatfield called his roll call, he laid the blame on them") 무언가 새로운 것을 경멸하고 비난한다("That hideous new house at Pyes Corner! What an eyesore!"). 마을이 인간들의 오랜 역사가 축적된 공간으로서 영국 문명을 상징적으로 대변하는 장소라면, 이곳에서 풍경이 “침묵하고, 멈춰있으며”("silenced, stilled" 60), 소들은 “움직임이 없고”("motionless"), 자일즈 올리버(Giles Olver) 부부가 각각 “꽉 묶여있고”("bound tight") “옥에 갇힌 듯 느낀다”("felt prisoned" 61). 세계대전을 코앞에 둔 런던에서 유럽문명이 몰락 직전에 있음을 피부로 느끼는 자일즈가 마을 주민들에 대해 갖는 반감은 동시에 마을이 표상하는 문명 및 인간의 역사가 마주한 난국을 보여주는 지표이기도 하다.
“자일즈는 의자에 홱 하고 칼자국을 냈다. 그는 바다 건너 온 유럽이 마치...—그는 비유를 잘 다루지 못했다—처럼 들썩거리는 때에도 앉아서 커피와 크림 너머 풍경이나 보는 늙은 구닥다리들에 대한 짜증과 분노를 그렇게만 보여줄 수 있었다. 그다지 효과적이라고는 할 수 없는 ‘두더지’ 같은 단어만 그의 인상, 화포로 가득하고 비행기가 돌아다니는 유럽의 모습을 그려내 줄 뿐이었다. 어느 순간에라도 화포는 영국 땅을 밭고랑처럼 긁어낼 것이며, 비행기들은 볼니 민스터를 산산조각으로 찢어발기고 나이든 멍청이들을 폭격할 것이다.”
Giles nicked his chair into position with a jerk. Thus only could he show his irritation, his rage with old fogies who sat and looked at views over coffee and cream when the whole of Europe--over there--was bristling like....He had no command of metaphor. Only the ineffective word "hedgehog" illustrated his vision of Europe, bristling with guns, poised with planes. At any moment guns would rake that land into furrows; planes splinter Bolney Minster into smithereens and blast the Folly. (49)
좌절과 분노가 뒤섞인 자일즈의 마음은 새로운 가능성이라고는 찾아볼 길 없는 낡은 문명에 대한 절망적인 분노와 그러한 세계가 맞이하게 될 파국적 운명에 대한 두려움을 동시에 드러낸다.
이러한 마을에서 포인츠 홀을 배경으로 상연되는 야외극은 『막간』의 핵심으로서 인간적이고 역사적인 모티프를 표현하고 동시에 그에 내재한 불만을 폭발시킨다. 라 트로브 양(Miss La Trobe)의 연출 하에 마을 주민들 앞에서 상연되는 야외극은 주지하다시피 문명과 인간의 역사를 대영제국이라는 민족국가의 역사로 상연함과 동시에 그러한 민족사의 서사를 내파한다.1) 비행기와 함께 소설에 등장하는 현대 기술의 산물 중 가장 대표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축음기(gramophone)의 “칙칙”("Chuff, chuff, chuff" 70)거리는 소리와 함께 연극이 시작된다. 비어있던 무대 가운데 한 소녀가 나타나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이것은 야외극으로, 모두가 알아차릴 수 있듯 / 우리 섬의 역사에서 소재를 취했습니다. / 저는 잉글랜드입니다”("This is a pageant, all may see / Drawn from our island history. / England am I"). 그녀가 맡은 배역은 하나의 인물이 아니라 민족국가로서의 영국이며—물론 우리는 여기에서 속류 헤겔주의에서 말하는 ‘정신’(geist)의 표상을 볼 수 있다—무대 위에서 진행되는 서사는 민족국가서사로서의 역사가 될 것이다. 앞서 헤인즈 부인의 이야기가 어린 아이 시절의 기억에서부터, 그리고 올리버 노인의 기억이 고대 브리튼 인들로부터 출발했듯 야외극에서 상연되는 민족사 또한 신생아의 형태에서부터 스스로의 여정을 시작한다. “새롭게 태어난 아이가 [...] / 바다에서부터 솟아 나왔고 / 강력한 폭풍에서부터 그 바다의 파도가 일어나 / 이 섬을 프랑스와 독일로부터 / 떼어 놓았죠”("A child new born, [...] / Sprung from the sea / Whose billows blown by mighty storm / Cut off from France and Germany / This isle." 71). “초서 시절의 잉글랜드”("England in the time of Chaucer" 73)가, “엘리자베스 1세”("Queen Elizabeth" 76)의 시대가 그 뒤를 잇는다.
그러나 마을의 주민들이 역할을 맡아 영국사를 재현하는 이 연극에 모든 이들이 이질감 없이 섞여드는 것은 아니다. “만레사 부인은 그 한 가운데서 미소 지었다. 그러나 그녀는 미소 지으면서 마치 자신의 피부가 갈라지는 듯 느꼈다. 합창하는 주민들 및 노래하는 아이와 그녀 사이에는 커다란 간극이 있었다”("Mrs. Manresa in the very centre smiled; but she felt as if her skin cracked when she smiled. There was a vast vacancy between her, the singing villagers and the piping child" 71). 이러한 이탈과 균열, 자신이 민족사의 진행에 온전히 포함될 수 없다는 감각은 다른 인물들에게도 마찬가지로 드러난다. 『캔터베리 이야기』에 나오는 순례자들을 보면서 루시는 “[저런 순간은]우리에게는 존재하지 않아, [...] 우리에겐 오로지 현재만 있을 뿐”("Which don't exist for us,[....] We've only the present" 75)이라 중얼거리며, 이사벨은 역으로 다음과 같이 떠올린다: “[저 순간의 아름다움은]우리를 위한 것이 아니야, 우리는 가진 것은 미래, [...] 우리의 현재를 어지럽히는 미래야”("not for us, who've the future, [...] The future disturbing our present" 75-76). 어느 누구도 스스로의 삶에서, 자신이 속한 시대에서 활기와 가능성을 찾을 수 없다. 연극 전반부가 끝나고 막간(interval)에 이사벨은 다시금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모든 게 끝났어. 파도는 부서졌지. 우리는 좌초되어 고립된 채로 남겨졌어. 자갈로 가득한 해변 위에 홀로 떨어져 있어”("All is over. The wave has broken. Left us stranded, high and dry. Single, separate on the shingle." 87). 이방인으로서 어느 곳에도 소속되지 못하고 “나는 가야 하나 머물러야 하나? 어딘가 다른 길로 슬쩍 빠져야 하나? 아니면 저 흩어진 무리를 따라서, 따라서, 따라서 가야 할까?” ("Shall I go or stay? [...] Slip out some other way? Or follow, follow, follow the dispersing company?")하고 읊조리는 윌리엄 닷지(William Dodge)는 그녀의 생각을, 만사가 끝났고 그들 각자가 고립되었다는 절망감을 공유하는 하나의 사례인 셈이다.
라 트로브의 연극은 본래 이 “흩어진 무리”를 하나로 묶어내고자 하는 것이었으나 상기한 사례들이 보여주듯 적어도 전반부를 통해서 그 목표를 성취하지는 못했다. “한 순간 그녀는 그들을, 흩어진 무리를 하나로 묶어내었다. 그녀는 25분간 그들로 하여금 깨닫게 하지 않았던가? 고통에서 구제된 깨달음이 주어졌다...한 순간에...한 순간. 그리고 음악은 마지막 우리라는 단어에서 점차 시들해졌다.[...] 그녀는 그들로 하여금 깨닫게 하지 못했다. 실패, 또 한 번의 빌어먹을 실패였다! 항상 그랬다. 그녀의 깨달음이 그녀로부터 달아나버렸다”("for one moment she held them together--the dispersing company. Hadn't she, for twenty-five minutes, made them see? A vision imparted was relief from agony...for one moment...one moment. Then the music petered out on the last word we [...] She hadn't made them see. It was a failure, another damned failure! As usual. Her vision escaped her" 88). 곧바로 외따로이 떨어진 또 다른 이, 자일즈가 등장한다. 그는 혼자서 마치 선사시대 야만인처럼 돌을 차고 놀다가 이 소설에서 가장 강렬한 이미지를 선보이는 광경 중 하나와 마주친다.
“뱀 한 마리가, 올리브 빛깔 녹색의 고리로 말려진 채로, 잔디밭에 웅크리고 있다. 죽었나? 아니, 두꺼비를 입에 물고 질식해 있다. 뱀은 삼킬 수 없었고, 두꺼비는 죽을 수 없었다. 경련이 갈빗대를 수축시켰으며 피가 배어나왔다.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간 탄생, 괴물 같은 도착(倒錯)이다. 그리하여 그는, 발을 들어, 그것들을 짓밟았다. 덩어리가 짜부라지고 또 흘러내렸다. 테니스화의 흰색 캔버스 천이 피로 더럽혀지고 찐득하게 되었다. 하지만 행동한 것이었다. 행동했다는 사실이 그에게 위안을 주었다.”
There, couched in the grass, curled in an olive green ring, was a snake. Dead? No, choked with a toad in its mouth. The snake was unable to swallow, the toad was unable to die. A spasm made the ribs contract; blood oozed. It was birth the wrong way round--a monstrous inversion. So, raising his foot, he stamped on them. The mass crushed and slithered. The white canvas on his tennis shoes was bloodstained and sticky. But it was action. Action relieved him. (89)
이 대목에서 자신이 스스로의 삶에서 능동적이고 주체적일 수 없다는 사실로부터 오는 괴로움과 그 괴로움에서 벗어나기 위해 설령 파괴적인 충동의 산물일지라도 “행동”하고 싶은, 능동적인 주체가 되고자 하는 욕망이 자일즈의 사고를 뒤덮고 있음은 분명하다. 그는 자신의 의사와 무관하게 “스스로의 삶을 사고파는 일에 쏟아야 하는”("spent their lives, buying and selling" 43) 증권 중개사다. “만약 선택권이 주어졌다면 그는 농사짓기를 선택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에겐 선택권이 주어지지 않았다. [...] 온갖 일들이 뭉쳐 당신을 평평하게 눌러 펴버리고, 물속의 고기처럼 꽉 붙들어버린다”("Given his choice, he would have chosen to farm. But he was not given his choice. [...] and the conglomeration of things pressed you flat; hel you fast, like a fish in water." 43). 그에게는 자신의 삶과 자신의 문명이 매한가지로 무기력하다는 인식, 무언가에 붙들려 다가오는 파국과 소진을 기다리고 있음에도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인식이 있다. 뷔리당의 당나귀(Búridan's ass)에 대한 이사벨의 설명을 들으면서 자일즈는 “자신이 바위에 매여 있고, 알 수 없는 공포를 수동적으로 보도록 강요받고 있다”("manacled to a rock he was, and forced passively to behold indescribable horror" 55)고 느낀다—이들은 “어떤 결과가 나오지 않고”("no conclusion come to") “우리는 가만히 앉아있어야 하며—우리는 관객일 뿐”("'We remain seated'--'We are the audience'")이라는 인식을 공유한다. 바솔로뮤 올리버의 표현을 빌린다면 이들은 “퇴화한 후손들”("degenerate descendants" 45)이다. 목이 옥죄어오는 감각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혹은 적어도 벗어난다는 기분을 느끼기 위해서는 무언가 “행동”을 해야 한다. 그게 자일즈로 하여금 “관객보다는 배우처럼 느끼게 하는”("making him feel less of an audience, more of an actor" 97) 만레사에게 빠져들게, 동시에 뱀과 스스로를 “잔디밭에서 깜빡거리는, 마음이 분열된 작은 뱀”("a flickering, mind-divided little snake in the grass" 67)으로 묘사하는 닷지를 향한 불합리한 공격성을 드러내도록 한다. 자일즈를 포함해 올리버 가족 및 이들과 함께 하는 인물들은 앞서 보았듯 자신들의 삶이 공동체를 이루지 못하고 파편화되었으며 동시에 한없이 무력하다는 절망감에 빠져 있다. 이들의 자기 인식이 자신들의 문명, (자일즈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직접적으로 목전의 전쟁을 언급하지는 않지만 모두가 그 몰락을 예감하는 자신들의 문명에 대한 인식과 맞닿아 있다는 점에서 우리는 이를 문명에 대한 불만이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3. 파국
막간이 끝난 뒤 재개된 라 트로브의 연극이 “흩어진 무리”를 다시 엮는 모티프로 시작하는 것은 당연하다. 음악소리가 다시 흘러나오고 관객들은 “음악이 우리로 하여금 숨겨진 것을 보도록, 부서진 것을 잇도록 하며”("Music makes us see the hidden, join the broken" 108) 꽃과 나무들이 “우리를 마치 찌르레기들처럼, 까마귀들처럼 함께 오도록, 함께 모이도록 만든다”("bid us, like the starlings, and the rooks, come together, crowd together")고 느낀다. 그러나 서툰 배우들은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고 관객들은 다시금 “부스러기와 파편들”("Scraps and fragments")로 돌아가 버린다—그러한 파편적인 문구들이 뒤섞인 문단들이 각각 느슨하게 이어진 분위기를 형성한다는 사실 또한 함께 지적되어야 할 것이다. 이때부터 연극은 계속해서 산만한 파편들로 돌아가려는 경향을 보여주는 관객들과 그들에게 통일된 “감정”("emotion" 124)을 부여하려는 라 트로브의 연출 간의 기묘한 줄다리기가 된다. 후반부 극의 감정을 이끄는 첫 주자는 주민 여성이 분한 “이성”("Reason" 111)이며 주민들은 “이성”의 노래에 맞춰 함께 노래하고 춤춘다(112). 다음은 “빅토리아 시대”("The Victorian age" 134)로, 여기에서 루시는 “그녀[라 트로브]는 방황하는 몸들과 부유하는 목소리들을 하나의 솥으로 끓여내는 사람, 그 무정형의 덩어리들로부터 재창조된 세계가 솟아나도록 하는 사람”("she was one who seethes wandering bodies and floating voices in a cauldron, and makes rise up from its amorphous mass a recreated world" 137)이라고까지 생각한다. 그러나 이사벨은 루시와 같이 빅토리아 시대를 살았던 이들이 느끼는 환희를 느낄 수 없다. 그녀는 자신의 처지를 이렇게 표현한다. “저녁이 그녀의 외투를 떨어트리도록 두지 않는, 해도 뜨지 않는 수확 없는 흐릿한 벌판에 있다. 그곳에서 만사가 똑같다. 거기에선 장미가 피지도 자라지도 않는다”("In some harvestless dim field where no evening lets fall her mantle; nor sun rises. All's equal there. Unblowing, ungrowing are the roses there." 139). 그녀는 지금의 세계에서 현전하는 과거의 무게가 자신을 짓누른다고 생각한다. “그들이 대지에서 길어낸 것들, 기억들, 소유물들을 내가 얼마나 많이 짊어지고 있는가. 이는 과거가 내게 부과한 짐이다”("How am I burdened with what they drew from the earth; memories; possessions. This is the burden that the past laid on me"). 이사벨에겐 주체적인 삶을 위한 어떠한 가능성도, 탈출구도 남아있지 않다는 절망이 있다.
야외극은 이사벨의 고뇌를 아랑곳하지 않고 19세기 대영제국의 서사, “여왕 폐하의 제국”("'Er Majesty's Empire" 145)의 서사로 나아간다. 대영제국의 관료로 분한 이가 부르는 노래에서 “순수성과 안전”("the purity and security")을 위시한 대영제국 지배 이데올로기의 언어가 여과 없이 표출된다. 한편에는 아프리카로 선교를 떠나는 이를 위한 국가(國歌) “대영제국이 지배하리라”("Rule Britania" 153)가, 다른 한 편에는 부르주아들의 사적 공간으로서 가정을 찬양하는 구호 “즐거운 나의 집”("'Ome, Sweet 'Ome" 154)이 무대를 가득 메운다. 그러나 지배 이데올로기의 언어가, 대영제국 ‘영광의 순간’을 상징하는 언어가 전면화하는 순간에조차 관객들의 마음 한 구석에는 의구심이 스며든다. 린 존스 부인(Mrs. Lynn Jones)이 무심결에 떠올리듯 빅토리아 시대의 대영제국은 완벽하지 않았다. “그녀가 의도한 바는, 만사가 완벽한지 않았다면 변화가 왔어야만 했다는 것이다”("What she meant was, change had to come, unless things were perfect" 156). 그녀가 떠올리듯 심지어 그녀의 가정에도 어떤 형태로든 변화가 찾아왔다는 사실은 그녀가 살았던 빅토리아 시기가 결코 흠결 없는 세계가 아니었음을 자연스럽게 연역하도록 한다. 루시 스위딘 또한 “빅토리아 인들, [...] 나는 그런 사람들이 살았다고 [...] 믿지 않아”("The Victorians, [...] I don't believe [...] that there ever such people")라고 중얼거린다. 그녀는 상상력을 발휘해 잠시 “[모든 것이]하나로 되는”("one-making" 157) 광경을 떠올려 본다. “양들, 젖소들, 잔디, 나무, 우리 자신—모든 것이 하나야[...]. 그래서 [...] 특정한 양, 젖소, 또는 사람의 고통은 필연적이야. 그렇게 [...] 우리는모두가 조화를 이룬다는 결론에 도달하지”("Sheep, cows, grass, trees, ourselves--all are one. If discordant, producing harmony[...]. And thus [...] the agony of the particular sheep, cow, or human being is necessary; and so [...] we reach the conclusion that ALL is harmony").
물론 누군가는 고통 받을 수밖에 없는 세계를 조화롭다고 말하는 루시의 사고전개는 아이러니한 느낌을 준다. 그나마 나이든 이들이 과거의 영광스러운 시절을 기억하며 부분적으로나마 위안 받을 수 있다면, 이러한 위안거리조차도 없이 “현재를 어지럽히는 미래”와 “과거가 부과한 짐”에 함께 짓눌린 지금의 젊은 세대들에게는 무엇이 남아 있을까?
“그[자일즈]가 (말없이) 읊조렸다. ‘나는 끔찍하게 불행한 걸.’
‘나도 그래,’ 닷지가 공명했다.
‘그리고 나도 마찬가지야,’ 이사벨이 생각했다.
그들은 모두 붙들려 갇혀 있었고, 죄수들이었고, 무대 위의 장관을 쳐다보고 있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He said (without words) "I'm damnably unhappy."
"So am I," Dodge echoed.
"And I too," Isa thought.
They were all caught and caged; prisoners; watching a spectacle. Nothing happened. (158)
“모두의 신경은 과민상태였다. 그들은 노출된 채로 앉아 있었다. 기계가 틱틱 거렸다. 음악은 없었다. 대로의 자동차들이 내는 경적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나무들이 휙휙 거리는 소리. 그들은 어떤 것도, 다른 무언가도 아니었고 빅토리아 인들도, 그들 자신도 아니었다. 그들은 존재가 결여된 채로 연옥에 매달려 있었다. 틱, 틱, 틱 기계가 돌아갔다.
All their nerves were on edge. They sat exposed. The machine ticked. There was no music. The horns of cars on the high road were heard. And the swish of trees. They were neither one thing nor the other; neither Victorians nor themselves. They were suspended, without being, in limbo. Tick, tick, tick went the machine. (159)
이들의 고통, 자기 자신으로 존재할 수조차 없다는 데서 비롯되는 고통은 루시가 떠올린 “일부의 고통”으로 한정될 수 없어 보인다. 오히려 이들이 각각 서로로부터 분리된 채로 인식하는 고통이야말로 그 자체로 전체의 아픔, 이 세계 자체의 아픔이지 않은가? 야외극이 “빅토리아 시대”에서 관객들 자신의 시대("'The present time. Ourselves.'" 160)로 넘어가는 도중의 휴지기에 내리는 비는 이들이 살아가는 세계에 만연한 고통과 슬픔을 직접적으로 언어화하는 계기이기도 하다.
“그리고 갑자기, 풍성하게, 소나기가 떨어져 내렸다. [...] 비는 세계 만인이 눈물 흘리듯 쏟아졌다. 눈물, 눈물. 눈물.
‘오 우리 인간들의 고통이 여기서 종결을 맞을 수 있겠구나!’ 이사벨이 중얼거렸다. 하늘을 올려다보는 그녀는 자신의 얼굴 가득히 두 개의 커다란 빗방울을 받아내었다. 그것들은 마치 그녀 자신의 눈물인양 그녀의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하지만 그것들은 만인의 눈물이자 만인을 위한 울음이었다. [...] 비는 급작스럽게 전 세계에[보편적으로] 내렸다.”
And then the shower fell, sudden, profuse. [...] Down it poured like all the people in the world weeping. Tears, Tears. Tears.
"O that our human pain could here have ending!" Isa murmured. Looking up she received two great blots of rain full in her face. They trickled down her cheeks as if they were her own tears. But they were all people's tears, weeping for all people. [...] The rain was sudden and universal. (162)
비를 통해 개별자들의 고통은 세계에 살고 있는 모든 이들의, 나아가 세계 자체의 고통이 되며 흘러내리는 빗방울을 통해 상징적으로 표현되는 눈물은 세계 만민의 고통을 애도하는 울음이 된다. 즉 여기에서 비는 개별적 존재들과 보편적인 것의 층위를 매개할 뿐만 아니라 이 세계에 현전하는 문명의 고통과 상흔을 드러내고 또 그에 항의하는 장치로 등장한다. 이들의 고통은 전체의 조화를 위해 마땅히 감당해야 할 주변적인 희생으로 치부될 수 없다.
이어 잠시 (아마도 제1차 세계대전으로) 파괴된 문명을 복구해야한다고 말하는 듯 한 짧은 대목 이후 라 트로브는 지금까지의 서사를 완전히 뒤집어 내파해 버린다. 즉 영국의 탄생부터 전성기를 거쳐 재생과 복구의 메시지가 암묵적으로 기대되는 시점에 그녀가 제시한 것은 희망찬 줄거리를 완전히 배반하는 ‘현재’의 절망적인 상황 그 자체다. 현재를 표현하기 위해 그녀는 지금까지 모든 관객에게 통일된 감정을 부여하기 위해 사용되어 왔던 축음기를 통한 청각적 자극을, 그리고 무대에 다른 배우가 아닌 거울을 올려 관객들 자신의 모습을 비춰주는 시각적 자극을 활용한다. 양자의 결합을 통해 관객들과 그들의 시대 자체를 형상화한 대목은 『막간』 전체에서 가장 강렬한 장면이다.
“음조가 바뀌었다. [...] 이게 무슨 낄낄거리는 웃음소리며, 불협화음일까! 아무 것도 끝맺지 않았다. 갑자기 비약한다. 그리고 퇴폐적이다. 지독한 분노, 지독한 모욕이다. 그리고 명백한 것은 없다. [...] 오 겨우--다행히도--잠깐 동안만 ‘젊은이들’일 세대의 불경함이란. 젊은 것들은 무언가 만들어내지 못하고 오직 부숴버릴 뿐이다. 그들은 오래된 깨달음을 산산조각 내버리고, 통일된 전체였던 것을 원자들로 으깨버린다. [...]
보라! 수풀에서 그들이, 잡동사니가 나온다. 아이들인가? 도깨비들, 요정들, 마귀들이다. [...] 무언가를 비추기에 충분히 밝은 것이면 뭐든 가져온 듯 한데, 설마 우리 자신을 비추려는 건가?
우리 자신들이다! 우리 자신들이야!
[...] 얼마나 끔찍한 폭로인가! 심지어 노인들도, 생각해보건대, 더 이상 그들 자신의 얼굴을 신경쓰지 않았다....주여! 시끄러운 소리가 들린다! 다름 아닌 젖소들이 섞여들었다. 비틀거리고, 꼬리를 내려치는 와중에 자연의 과묵함은 사라져버리고 주인인 인간을 짐승들로부터 구별해주던 장벽들은 폐기되어버렸다. 그리고 개들도 끼어들었다.
The tune changed; [...] What a cackle, a cacophony! Nothing ended. So abrupt. And corrupt. Such an outrage; such an insult. And not plain. [...] O the irreverence of the generation which is only momentarily--thanks be--"the young." The young, who can't make, but only break; shiver into splinters the old vision; smash to atoms what was whole. [...]
Look! Out they come, from the bushes--the riff-raff. Children? Imps--elves--demons.[...] Anything that's bright enough to reflect, presumably, ourselves?
Ourselves! Ourselves!
[...] What an awful show-up! Even for the old who, one might suppose, hadn't any longer any care about their faces.... And Lord! the jangle and the din! The very cows joined in. Walloping, tail lashing, the reticence of nature was undone, and the barriers which should divide Man the Master from the Brute were dissolved. Then the dogs joined in. (164-65)
질서정연한 음조들을 대체한 불협화음이, 그리고 소음과 함께 혼란에 빠진 사람들 사이에 뒤섞인 동물들의 존재가 지금까지 관객들이 믿고 따라온 질서를 한 순간에 무너트린다. 이윽고 배우들이 한꺼번에 등장해 자신들의 대사 중 아무 구절을 한꺼번에 외치는 장면에 이르면(166) 이전까지 유지되어온 체계, 나아가 이러한 체계가 나름의 내적 정합성을 지니고 있는 신뢰할만한 대상이라는 믿음 자체를 무너트리는 게 라 트로브의 목적인 것처럼 보인다. 인간 역사의 축적을 통해 형성된 오늘날의 문명을 대변하는 존재들이 관객들 자신이라면, 그들 자신의 모습이 단순한 혼란을 넘어 지금까지 인간을 (짐승과 구별되는) 인간 존재이게 해 주었던 경계선까지 흐릿하게 만들 정도일 때 그들이 마주한 동시대의 난국은 그들이 유지해온 문명과 역사 자체에 무언가 근본적인 모순이 내포되어 있을지 모른다는 의심을 불러일으킨다. 아도르노(Theodor W. Adorno)의 표현을 빌린다면, “우리 시대의 공포는 우리 자신들의 역사에 내재한 역학에서 비롯되었기에 예외적인 사례인양 설명될 수는 없다”("The horror of our day has arisen from the intrinsic dynamics of our own history; it cannot be described as exceptional" HF 7-8)는 인식이 여기에 깃들어 있다. 다시 말해 라 트로브의 야외극은 그 절정부분에서 문명 혹은 인간 역사를 대변해온—또는 그것을 협소화시켜 참칭해온—영국사에 대한 단순한 불만제기를 넘어 그것이 더 이상 유지될 수 없다는 근본적인 물음을 제기한다.
4. 자연
우리는 『막간』으로부터 동시대 문명 또는 영국인들이 만들어 온 역사에 대한 근본적인 비판의 모티프와 함께 울프가 그것으로 환원될 수 없는 요소를 텍스트 내에 함께 배치하였음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즉 한편으로 본고 2절 및 3절에서 확인하였듯 『막간』의 중심부에 문명과 민족사에 대한 강력한 비판을 제기하는 서사가 자리한다면, 바로 그 곁에서 문명 혹은 인간적인 것으로 수렴되지 않는 이미지들이 마치 벽돌로 지어진 건물 틈새에 뿌리를 틔운 풀꽃처럼 등장한다. 그 이미지들은 앞서 소설의 첫 대목에서부터 확인했듯 자연적인 것의 형태를 띠고 나타난다.
포인츠 홀이 올리버의 표현처럼 “자연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 지어졌다면, 꽃들과 잔디밭, 거대한 나무들은 그럼에도 여전히 저택 주변을 둘러싸고 있다. 자일즈 부부의 아이들이 하루 종일 뒹구는 그곳은 자체로 하나의 완전함을 보여준다. “꽃은 뿌리 귀퉁이들 사이에서 반짝였다.[...] 꽃 너머에 나무가 있다. 잔디와 꽃과 나무는 완전한 광경을 이루고 있었다”("The flower blazed between the angles of the roots.[...] And the tree was beyond the flower; the grass, the flower and the tree were entire." 10). 『막간』에서 사람의 손에 의해 지어진 건물과 자연적인 것들의 뒤얽힘을 가장 선명하게 보여주는 대목은 야외극 막간에 잠시 언급되는 “700년 전에 지어진 광”("the barn that had been built over seven hundred years ago" 90) 속의 풍경일 것이다. 보는 이들마다 그리스 신전 혹은 중세 시대와 같은 먼 과거를 떠올리게 하는 이 광은 지금은 각종 물자들만이 쌓여 있을 뿐이다. 그리고 “광은 비어 있었다”("The Barn was empty")는 문장 직후에 곧바로 단지 인간의 눈에 띄지 않을 뿐 얼마나 다양한 생명체들이 이 공간에서 살아가는가가 서술된다. 쥐들("Mice"), 제비들("Swallows"),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풍뎅이들과 다양한 곤충들”("Countless beetles and insects of various sorts")이 있고, 암캐 하나는 숫제 구석에서 새끼들을 키운다("A stray bitch had made the dark corner where the sacks stood a lying-in ground for her puppies"). 개개로는 작고 미약해 좀처럼 눈에 띄지 않을 이 동물들의 눈길과 움직임, 바스락거리는 소리들이 수백 년 전 인간들이 만들어놓은 공간, 인간의 역사가 퇴적된 장소를 가득 메우고 이 시공간에 충만한 생명력을 부여하고 있다(그리고 오로지 루시 스위딘만 창고를 메운 생명들의 존재를 인식한다).
시작부터 결말까지 텍스트 곳곳을 메우고 있는 이러한 자연물들, 인간 아닌 것들의 존재는 그 자체로 문명의 전개를 표현하는 야외극에까지 영향을 끼친다. 막간이 끝나고 “이성”의 등장으로 다시 시작한 라 트로브의 연극은 밸런타인(Valentine)과 플래빈더(Flavinda)가 등장하는 극중극이 종료되면서 순간적으로 (관객들을 묶어준) 감정을 상실한다. 극의 마지막 노랫소리가 바람에 휘말려 사라지고 “어떠한 소리도 나오지 않았으며”(“no sound came” 125) “무대는 텅 비었다”(“the stage was empty”). 관객들을 사로잡던 “환상이 실패하고”(“Illusion had failed” 126) 라 트로브가 절망에 빠질 때 갑작스럽게 “암소들이 그 몫을 떠안는다”(“the cows took up the burden”). 새끼를 잃어버린 암소 한 마리가 울기 시작하자 모든 암소들이 따라서 운다. “원시의 목소리가 지금 이 순간 귓가에 강하게 울렸다. 그러고 나서 전체 무리가 그 정념에 함께 빠져들었다”(“It was the primeval voice sounding loud in the ear of the present moment. Then the whole herd caught the infection”). 울음소리에 담긴 정념이 “텅 빈 순간을 채우고 감정을 지속시켰다”(“filled the emptiness and continued the emotion”). 그리고 짐승들이 자신들의 감정을 가다듬는 순간까지 관객들은 짐승들에 동감한다. 이 대목에서 암소들로 표상되는 자연은 한편으로 라 트로브의 연극 자체의 빈 공간을 메우고, ‘원시의 목소리’로서 관객들에게 일시적으로나마 자연이라는 보다 넓은 공통된 정체성으로 끌어들인다. 이처럼 연극이 본래의 의도를 다하지 못하고 라 트로브의 기획이 그 성패의 갈림길에 들어설 때 자연물이 그 빈 공간을 보충하는 구도는 이후에도 두 차례 더 반복된다. 앞서 3절에서 살펴보았듯 한번은 “빅토리아 시대” 부분이 끝난 뒤의 소나기 장면에서, 다른 한 번은 거울이 관객들을 비추는 순간 젖소와 개들이 끼어들어 혼돈을 더욱 완전한 것으로 만드는 장면에서 우리는 야외극의 ‘의도’를 자연이 완성시키는 구도를 다시금 목도한다.
야외극이 끝난 뒤에도 자연의 명백한 개입은 계속된다. 라 트로브의 연극이 끝나고—그 자체가 과거 문명의 연장과 지속을 의미하는 상징적인 행위라 할 수 있는—교회 수리를 위한 모금활동을 위해 스트릿필드 신부(Rev. Streatfield)가 단상으로 올라오지만 소들과 구름은 신부를 노골적으로 무시한다("ignored by the cows, condemned by the clouds" 171). 그가 자신의 의도에 맞춰 연극의 ‘의미’를 정리해 설명하려는 순간 “마치 야생 오리처럼 날아가는”("like a flight of wild duck" 174) 비행기들이, 그리고 앞서 파커 부인(Mrs. Parker)에 의해 덜 “문명화”("civilized" 100)된 존재라고 경멸받은 마을의 백치 앨버트(Albert)가 나타나 신부의 언어를 완전히 흐트러트려 버린다("His command over words seemed gone" 174). 그리고 아무도 “어떻게 끝을 맺어야 할지”("How to make an end" 175) 알 수 없다. 지금까지 문명과 민족사를 구성한 서사가 혼란에 봉착했다는 것을 야외극이 보여주었고, 신부의 발언이 다시금 저지됨으로써 과거의 질서를 회복하여 되풀이하는 것 또한 불가능해졌다면 이들에게 남은 것은 도대체 어떠한 미래란 말인가? 그 순간 주민들은 야외극의 배우들이 자신들의 역할을 마치고 뒤섞여 있는 것을 본다. “각자는 여전히 그들의 의상에 따라 이전에 맡지 않았던 부분을 상연하고 있었다. 그들 위에 아름다움이 있었다. 아름다움이 그들을 드러냈다”("Each still acted the unacted part conferred on them by their clothes. Beauty was on them. Beauty revealed them." 176). 이 대목은 기존의 질서를 벗어난 형태의 새로운 역할들이, 그리고 그러한 역할들이 함께 만들어내는 새로운 종합으로부터 현재의 난국을 벗어난 어떤 아름다움이 출현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연극이 끝나고 루시 스위딘과 라 트로브가 마주하는 장면은 그와 같은 새로운 희망이 자연적인 것에 깃들어 있음을 명백하게 보여준다. 모두가 흩어진 후 홀로 남아 상념에 빠진 루시는 물속의 고기들을 보며 마치 “우리 자신들”("Ourselves" 184)과 같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잿빛 물속에서, 희망적이게도, 어렴풋한 믿음을 회복한 그녀는 특별히 이성의 힘을 빌리지 않은 채 고기들을 좇았다. 얼룩이 있는 놈, 줄무늬가 있는 놈, 그리고 얼룩덜룩한 놈. 그 광경에서 그녀는 우리 자신들에게 있는 아름다움, 힘, 그리고 영광을 보았다”("And retrieving some glint of faith from the grey waters, hopefully, without much help from reason, she followed the fish; the speckled, streaked, and blotched; seeing in that vision beauty, power, and glory in ourselves." 185). 라 트로브 또한 자신의 연극이 결국 무의미로 귀착되고 말았다는 생각에 다시 한 번 실패했다고 신음하지만, 신음을 내뱉기 무섭게 갑자기 새들과 나무들이 한데 어우러져 소리를 내기 시작한다. “나무는 광시곡이, 전율하는 불협화음이, 핑 하는 소리가 되었고 힘차게 맥박치는 환희가, 가지들이, 잎이, 새들이 조화를 이루지 않고 삶, 삶, 삶이라 말했다”("The tree became a rhapsody, a quivering cacophony, a whizz and vibrant rapture, branches, leaves, birds syllabling discordantly life, life, life" 188-89). 그리고 그녀는 다시 “막이 올라갈 것”("The curtain would rise" 189)을 느낀다. 첫 대사가 떠오르지 않지만, 이윽고 “진흙 밭을 터벅거리며 걷고 있는 짐을 실은 둔한 황소들 위로 단어들이 솟아올랐다. 의미를 싣지 않은 말들, 멋진 말들이었다”("Words rose above the intolerably laden dumb oxen plodding through the mud. Words without meaning--wonderful words." 191). 그리고 소설은 원시의 이미지로 되돌아가는 결말부로 이어진다.
이러한 대목들로부터 우리는 『막간』이 단순히 문명에 대한 좌절로 끝맺는 텍스트가 아님을 확인할 수 있다. 분명 이 소설을 이야기하면서 현재의 문명 및 그 역사-서사에 대한 비판과 절망감을 생략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 텍스트는 그 이상의 것들에 대한 희망과 암시 또한 포괄하고 있으며 이는 문명과 대비되는 자연적인 것들의 이미지로 선명하게 나타난다. 그러나 동시에 울프가 자연을 문명에 대한 대안으로 제시했다는 데 멈추는 것은 그 자체의 타당성을 부분적으로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텍스트에서 자연의 이미지들이 보여주는 복잡한 면모를 짚지 않는다는 점에서 미진함을 낳는다.2) 야외극의 주요 대목에서 관객들의 감정을 유지시키고 (물론 최종적으로 야외극은 자신이 형성한 서사에 대한 비판적인 인식으로 관객들을 인도하지만) 관객들을 민족사의 서사에 계속해서 동참할 수 있게 하는 것 또한 자연이다. 그 다양한 역할들을 종합할 수 있다면, 우리는 『막간』에서 자연을 한편으로 문명의 서사, 그리고 포인츠 홀과 같은 저택을 포함한 인간적인 것들을 가능하게 하면서 동시에 인간적인 것의 영역으로 환원되지 않는 생명력과 충만함을 지속적으로 발현하는 공간이자 원천으로 해석할 수 있다.
5. 자연사와 '자연의 역사‘
그러나 자연이 『막간』의 세계와 그 안의 서사에서 차지하는 역할을 이해한다고 해서 모든 논의가 종결되는 것은 아니다. 설령 자연이 대안적인 가능성을 품고 있으며 또 이를 보여준다는 주장을 받아들인다 하더라도, 우리는 사고를 정지하는 대신 여전히 그 대안이 어떠한 성격을 지녔는지를 붙잡고 물어야만 한다. 단순히 자연이 문명의 대안이라는 해석, 혹은 자연이 현재의 문명을 초월하는 이상적 지향점을 보여준다는 해석은 서구 근대의 예술가들이 “원시적인 것”("the primitive")을 현재의 세계에 대한 단순한 대립항으로 설정해버리곤 했다는 비판(Torgovnick 9-10)에 울프를 표적으로 바치는 결과를 낳을 뿐이다. 『막간』에서 가장 자연의 이미지와 맞닿아 있는 루시 스위딘을 면밀하게 좇을 때 이처럼 과도하게 단순화된 신화적 구도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루시의 첫 등장 장면에서 주목할 점은 “그녀가 가장 아끼는 책이 『역사의 윤곽』”("her favourite reading--an Outline of History" 8)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허버트 조지 웰스(H. G. Wells)에 의해 집필된 이 책은 소설에서 명시적으로 밝히고 있듯 지구와 인간의 등장 이전 지구에 살았던 생물들과 그 시대를 다루는 ‘역사서’이다. 루시는 이 책을 읽으면서 원시의 숲을, 영국과 대륙이 영불해협으로 갈라지기 전 하나로 붙어 있던 순간을, 지금은 멸종되어 사라진 거대한 동물들이 거니는 세계를 떠올린다. 그녀에게 그러한 이미지는 단순히 더 이상 존재할 수 없는 손이 닿지 않는 과거로 남는 대신 상상력을 통해 그녀의 삶에 지속적으로 침투한다—마치 『막간』 자체에서 자연이 지속적으로 인간적인 것에 침투하듯이 말이다. 루시는 창밖의 찌르레기를 보고 “그 광경에 이끌려 과거에 대한 상상적 재구성을 이어가기 위해 잠시 멈추었다. 그녀는 과거 혹은 미래로의 비행을 통해 그 순간의 경계선을 확장시키는데 빠져 있었다”("Tempted by the sight to continue her imaginative reconstruction of the past, Mrs. Swithin paused; she was given to increasing the bounds of the moment by flights into past or future" 8-9). 여기서 “그 순간의 경계선을 확장시킨다”는 말은 곱씹을 필요가 있다. 앞서 언급했듯 이사벨, 자일즈, 윌리엄 닷지와 같은 이들이 스스로를 “연옥”에 매달려 갇힌 존재라고 말했다는 사실을 상기해보자(159). 연옥의 거주자들은 최후의 심판일이 될 때까지의 무한한 기간 동안 자신의 운명이 결정되지 않은 채로 그곳에 갇혀 있어야만 한다. 즉 그곳에서의 삶에는 오직 유예기간으로서만 의미를 가질 수 있는 시간이, 미래가 존재하지 않는 무한한 현재만이 남아 있다. 이것이 더 이상 어떠한 가능성도 남아있지 않은 이 시대 문명의 불모성을 상징한다면, 인류 이전의 역사에 대한 루시의 상상은 현재의 폐쇄적 성격을 뚫고 그것을 과거로, 미래로 확장시키려는 가능성에 대한 추구이기도 하다. 만약 야외극이 보여주는 바와 같이 민족의, 문명의, 인류의 역사 자체가 파국과 불모로 우리를 이끈다면, 태고의 이미지로 대변되는 인간 이전의 시간과 현재의 인간적인 시간의 접촉은 후자에게 새로운 이야기를 시작할 수 있는 시공간을 마련해준다.
여기에서 루시의 태고에 대한 상상이 결코 현재의 삶에서 벗어나 초역사적인 것으로서의 자연적인 세계에 빠져드는 게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자. 애초에 “순간을 확장시킨다”는 말에서도 확인할 수 있지만, “피카딜리의 로도덴드론 삼림”("rhododendron forests" 8)과 같은 표현에서 분명히 드러나듯 그녀의 상상은 태고의 자연적인 형상과 현재의 세계를 접촉시키고 양자를 연결한다. 정확히 이러한 연결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질적인 시간의 접촉과 연결이라는 모티프에 주목해서 볼 때, 『막간』은 단순히 자연을 문명과 명확히 구별되는 대안으로 제시하는 대신 오히려 양자를 단일한 세계로 수렴시킨다—앞서 오래된 창고 곳곳에 파고들어 자신들의 세계를 구축한 작은 생명들이 좋은 예시가 될 것이다. 자연적 형상, 그리고 자연적 형상과 분리되지 않는 아주 먼 과거의 것들이 현재의 인간적인 요소들과 뒤섞이는 광경을 우리는 텍스트의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자신들이 살고 있는 마을과 바다와의 거리를 이야기하면서 루시는 유럽대륙과 영국 사이에 바다가 없었던 시간을, “스트랜드 거리에 로도덴드론 숲이 있고 피카딜리에 매머드가 있던”("There were rhododendrons in the Strand; and mammoths in Piccadilly" 27) 시절을 상기한다(이 대목에서 루시가 태고의 풍경과 현재의 지명을 연결한다는 사실은 짚어두자). 루시의 상상을 받아 이사벨은 “우리 인간들이 야만인이었을 때죠”("When we were savages")라 말하고, 이어 야만인들이 벌써 틀니("false teeth")를 발명했었다는 사실을 떠올린다. 그리고 올리버는 자신의 입에 끼워진 틀니를 보여주다가 스위딘 가문이 정복왕 윌리엄의 침임 전부터 있어왔던 오래된 가문임을 이야기한다(28). 여기에서 태고의 이미지는 야만인의 이미지로, 야만인의 이미지는 틀니라는 (인간에 의해 발명된) 장치로, 그 장치는 (대영제국의 관료 출신으로) 오늘날의 문명화된 삶을 대변하는 올리버에게로 연결되고, 올리버의 사고는 다시 천 년 가까이 전의 먼 과거에 대한 기억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마치 자신의 꼬리를 좇아 도는 뱀과 같이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이 대목은 『막간』에서 자연, 태고, 문명과 현재와 같은 시공간들이 분리되는 대신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서로가 서로에게 초월적으로 분리된 세계가 아님을 보여준다.
마치 분리되어 있던 것만 같던 시공간의 연결이라는 모티프는 자연의 위협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의도를 담고 건축된 포인츠 홀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선조들의 초상화("Two pictures" 33)가 걸려있는 “그 방은 시간 이전에 존재했던 무언가를 노래하는 조가비였다”("The room was a shell, singing of what was before time was"). 루시 스위딘은 바로 그 방을 윌리엄 닷지에게 안내하면서 선조들을 소개하다 문득 창밖의 잔디를 본다. 빛나는 잔디밭 위에서 “하얀 비둘기 세 마리가 무도회복장을 차려입은 숙녀들처럼 화려하게 구애하며 발끝으로 걷고 있었다”("Three white pigeons were flirting and tiptoeing as ornate as ladies in ball dresses" 64). 전자가 역사적인 삶이 축적된 공간이 조개껍데기의 은유를 통해 원시의 자연물로서의 색채를 띠는 대목이라면, 후자에서는 자연물이 인간적인 것의 언어로 묘사된다. 두 대목에서 역사/문명적인 요소와 원시/자연적인 요소는 서로에게 스며들어가 뒤섞인다. 이러한 이미지의 연결은 저택의 다른 장소에서도 마찬가지로 찾아볼 수 있다. 저택에는 과거 자금부족으로 인해 증축공사 중에 공사가 중단되어 오로지 벽만 남아있는 곳이 있다("But funds were lacking; the plan was abandoned, and the wall remained, nothing but a wall" 47-48). 그곳에 “후에 다른 세대가 과일 나무를 심었고 [....] 나무들이 하나는 뺨을 붉게 물들이고, 하나는 녹빛인 것이 벌거벗은 채로 무척이나 아름다워 스위딘 부인은 그것들[살구나무]을 벌거벗은 채로 두었고 말벌들은 구멍을 내어 파고들었다”("Later, another generation had planted fruit trees [....] they were so beautiful, naked, with one flushed cheek, one green, that Mrs. Swithin left them naked, and the wasps burrowed holes" 48). 여기에서 살구나무와 같은 자연물은 인간문명의 잔해인 벽 위에 세워졌다는 점에서 그 자체로 인간적인 기원을 갖는다. 일견 『막간』의 전반을 흐르는 듯 보였던 자연적인 것과 인간적인 것의 분할은 양자가 하나의 세계에서 서로 뒤얽히고 연결되는 이러한 대목들에서 흐릿해진다. 저택이 자연에 둘러싸여 있다면, 자연은 다시 저택 자체를 자신의 근거지로 삼고 곳곳에서 솟아난다. “자연의 역사와 인간의 역사[....]는 나뉘어질 수 없다”("the history of nature and the history of men [....] are [...] inseparable" HS 122)
여기에서 자연물의 세계는 인간적인 세계에 대한 단순한 대립항으로 출현하지 않는다. 야외극의 후반부에서 “이성”은 다음과 같이 노래한다. “땅을 갈고 파헤치고, [...] 대지는 언제나 변함이 없으니까, 여름이 가고 겨울이 가고 봄이 온다, 그리고 봄이 가고 다시 겨울이 오는 법, 밭을 갈고 씨 뿌리고, 먹고 자라나고”("Digging and delving, [...] for the earth is always the same, summer and winter and spring; and spring and winter again; ploughing and sowing, eating and growing" 112). 같은 경로를 반복해서 돌아가는 자연, 영원히 변하지 않는 초월적인 지평으로서의 자연의 이미지가 “이성”의 입을 빌어 노래되는 순간, 정작 자연 그 자체인 “바람이 그 말들을 날려버렸다”("The wind blew the words away"). 자연이 시간과 변화의 축적물인 인간적인 것에 대한 대립물로서 (변화를 허용하지 않는) ‘비역사적인 것’이 아니라면 『막간』에서 자연의 형상은 어떠한 성격을 지니고 있는가? 루시에게 가장 소중한 책 『역사의 윤곽』은 자연 자체가 어떻게 이해될 수 있는가에 대한 중요한 지침을 제공한다. 이 책의 이름은 소설의 처음(8), 가운데(98), 끝(196)에서 정확히 세 번 언급된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첫 부분에서 루시가 책에서 읽은 원시의 이미지와 자신의 현실을 중첩시키고 연결한다면, 가운데 부분에서 그녀는 “제비”("swallows" 97)를 보며 그것들이 바다 건너 다른 대륙에서 온다는 사실을 떠올리고("Across Africa, across France they had come to nest here" 98), 나아가 과거 대륙들이 갈라져 있지 않았을 때 지구를 거닐었던 “노래하는 새들”(“humming birds”)을 상상한다. 그녀의 머릿속에서 해마다 날아오는 제비는 그녀의 사고가 미치는 공간적인 범위를 확장시킬 뿐만 아니라 머나먼 과거와의 연결을 통해 자연 또한 나름의 역사를 갖고 변해가는 세계라는 사실을 일깨운다. 자연과학적인 시선으로 집필된 웰즈의 자연사(natural history) 서술은 자연 또한 변해가는 것, 역사를 가진 것임을 알려주는 ‘자연의 역사’(history of nature)이기도 하다.3)
자연사이자 ‘자연의 역사’를 말하는 텍스트 『역사의 윤곽』은 『막간』의 마지막에서 다시 한 번 등장한다. 야외극이 끝나 모두가 떠나가고 밤이 되었다. 이미 잠든 올리버를 두고 루시는 다시 『윤곽』을 펼친다. “매머드, 마스토돈, 시조새”("mammoths, mastodons, prehistoric birds" 196)와 같은 멸종된 동물들을 다루던 부분이 끝나고, 책 속에서 ‘자연의 역사’는 새로운 부분으로 들어선다. “그때 잉글랜드는 [...] 늪지였다. 두터운 삼림이 대지를 뒤덮고 있었다. 엉켜 헝클어진 가지들 위에 새들이 노래했다”("England, [...] was then a swamp. Thick forests covered the land. On the top of their matted branches birds sang..."). 인간적인 이름 따위는 등장하지 않을 것만 같았던 자연의 역사 안에 “잉글랜드”라는 지명, 인간이 붙인 이름이 등장한다. 영원회귀의 궤도를 도는 대신 나름의 시간을 쌓고 새로운 무언가로 변모해가는 자연은 그 자체로 (불변의 ‘자연’이 아니라) 하나의 역사이기도 하다. 그리고 『윤곽』의 서술을 통해 인간 또한 자연의 역사가 나아가는 바와 함께 새로운 존재, 질적으로 다른 존재로 변모한다. “반은 인간 반은 유인원이었던 선사인은 반쯤 웅크린 자세에서 일어나 거대한 석기를 들어올렸다”("Prehistoric man, [...] half-human, half-ape, roused himself from his semi-crouching position and raised great stones." 197). 웰즈의 서술은 인간이 이족보행을 시작했음을, 그리고 석기를 포함한 도구를 사용하기 시작했음을 말한다. “반은 인간 반은 유인원”이었던 생물에서부터 문명의 기원이 태어나고, 시간은 그 위에 줄달음질쳐서 다시금 이전에 없었던 새로운 문명을 바라볼 것이다. 인류 문명의 전환점은 자연과 (인간의) 역사가 나누어질 수 없으며 양자는 끊임없이 서로의 영역에서 재탄생하리라는 인식의 지표이기도 하다. 자연이 (2절과 3절에서 다루었던) 지금 이 순간의 문명과 역사에게 새로운 가능성의 영역이라면, 역사화된 자연으로서의 ‘자연의 역사’는 그러한 가능성이 현실과 괴리된 꿈이 아니라 그 자체로 역사가 움직인 가능성으로서 우리 곁에 늘 있어왔고 또 앞으로도 있을 것임을 보여준다.
올리버와 루시가 잠든 뒤 오늘 내내 지금껏 한 마디도 나누지 않았던 자일즈와 이사벨은 드디어 단둘이 대면한다. “둘이서 따로 남겨지자, [그들의] 적대감이 드러났고 사랑 또한 마찬가지였다. 잠들기 전 그들은 싸워야 했다. 싸운 뒤 그들은 끌어안았을 것이다. 그 포옹에서 새로운 생명이 잉태되었을 것이다”("Alone, enmity was bared; also love. Before they slept, they must fight; after they had fought, they would embrace. From that embrace another life might be born"). 둘의 대면은 갈등과 적대의 표출만이 아닌 사랑의 표출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 사랑에서, 마치 역사가 반복을 깨트리고 새로운 국면으로 계속해서 전진하듯, 지금껏 존재하지 않았던 새로운 생명이 출현할 것이다. 둘은 지금껏 하던 일을 멈추었다. 이사벨이 등진 창문은 색깔 없는 어둠으로서 그들의 집이 위치한 시간을 넘어 태고의 하늘이 된다. “그리고 커튼이 올라갔다. 그들은 입을 열었다”("Then the curtain rose. They spoke"). 마지막 대목은 포인츠 홀과 그곳이 상징하는 지금 여기의 문명이 세계의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그리고 항존 하는 가능성의 세계가 인간의 세계를 둘러싸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 세계는 루시의 책에서 알 수 있듯 ‘역사’의 이름으로, 그리고 마지막 두 문장에서 나타나는 ‘극’(act)의 이미지로 연출된다. 역사와 극 모두 그 인간적인 성격이 뚜렷한 서사라는 점에서 『막간』의 마지막 장면은 자연의 세계 또한 인간적인 서사의 형상으로 계속해서 등장할 것임을, 그리하여 아직 우리가 알지 못하는 가능성이 계속해서 우리의 세계 내부에서 불현듯 하지만 필연적으로 출현하리라는 인식을 표현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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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istory and Freedom: Lectures 1964-1965. Ed. by Rolf Tiedemann. Trans. by Rodney Livingstone. Cambridge: Polity Press,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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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ty, Jed. A Shrinking Island: Modernism and National Culture in England. Princeton: Princeton UP,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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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rgovnick, Marianna. Gone Primitive: Savage Intellects, Modern Lives. Chicago: th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90.
Westling, Louise. "Virginia Woolf and the Flesh of the World." New Literary History 30.4(1999): 855-75.
Woolf, Virginia. Between the Acts. Oxford: Oxford UP, 2008. [Oxford World’s Classics ed.]
1) 양차대전 사이 영국 야외극의 민족주의 이데올로기적인 성격은 Esty, 54-107 참조.
2) 알트(Alt) 나 웨슬링(Westling) 등이 주장하는 ‘생태학적’(ecological) 해석은 이런 점에서 자연의 성격에 대한 충분한 규명 없이 지나치게 서둘러 울프가 문명에 대한 확실한 대안으로 자연을 제시했다는 결론에 빠져든다.
3) 아도르노는 「자연사의 이념」("The Idea of Natural History")에서 자연과학적 관찰로서의 자연사와 역사와 자연이 교차하는 장으로서의 자연의 역사를 구별한다. 자연사에 대한 아도르노의 논지는 30여년 뒤 1964-65년 『부정변증법』(Negative Dialectics) 집필과 함께 행해진 강의 『역사와 자유』(History and Freedom) 중 “자연의 역사”("The History of Nature")를 언급하는 대목에서 조금 더 분명하게 정리된다(114-129). 그는 청년 맑스를 언급하며 “역사와 대립하는 실존물 혹은 존재의 절대적 영역으로서의 고립된 자연의 세계에 대해 말하는 것은 더 이상 의미가 없다”("there can no longer be any point in talking about an insulated sphere of nature as the absolute realm of being or as existence as opposed to history" 122)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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