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준만. <싸가지 없는 진보>와 덕성의 언어
Reading 2014. 12. 4. 15:49강준만. <싸가지 없는 진보: 진보의 최후 집권 전략>. 인물과 사상사, 2014.
: 나는 강준만을 이 책의 저자로 처음 접했다. 그 전에 내가 알고 있는 인상은 노정태의 <논객시대>의 강준만 파트가 전부다. 그래서 그가 원래 평소에 어떠한 입장에서 어떠한 의미를 자신의 글에 부여하는지 모른다. 다만 이 책만 독립적으로 바라보면, 한번 읽고 (사료로서의 접근하는 게 아닌 한) 두번 읽을 책은 아니다. 강준만의 언어는 시원시원하고 재밌으며 나름의 설득력이 있다. 기본적으로 이 책은 특정한 틀을 한번 설정한 뒤 그에 따라 전방위적으로 비판을 가하고 있다. 바꿔말하면 계속 읽어도 특별히 새로운 이야기가 안 나오는 일종의 동어반복에 가깝다(물론 끝에 가면 은근히 강준만은 자신의 정치적 지향점을 마치 옷깃을 살짝 내려 붉어진 얼굴을 드러내는 새색시마냥 보여준다). "전략"이라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정국에 대한 인상비평의 나열에 가깝다. 아마 한 문단이면 강준만의 요지를 다 정리할 수 있을 터이다.
그러나 그런 무익한 일을 할 생각은 없다. 오히려 나는 강준만의 무기, 즉 "싸가지"라는 걸 조금 다른 언어로 풀어 일종의 (특정한 역사적 조건 하에서 이뤄지는) 이념적 도구로 바라보고 싶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강준만이 들고 나오는 "싸가지"가 (대중적 형태로 구성된) '덕성'virtue 또는 탁월함의 언어를 표상한다고 생각한다. 강준만이 자신의 개념을 뭐라고 정의하든 그가 실제로 이 텍스트에서 "싸가지"에 부여하는 기능은 다음과 같다. "싸가지"는 적과 아군을 (불필요하게) 나누지 않고 우리 모두가 동일한 공동체에 속해 있음을 인식시킨다(25쪽의 "파괴적 싸가지"의 두 가지 특성, 곧 자기중심주의--타자에 대한 이해와 배려의 배제--와 적에 대한 인정없는 극단적인 공격은 정확히 강준만의 개념이 공동체 개념에 대한 요청과 맞닿아 있음을 보여준다). "싸가지"는 진정성으로 "책임"(43)을 포함한 윤리적 덕목이다. 디테일을 생략하고 말하면, 강준만의 요점은 좌파 진보가 대중적 영향력을 획득하기 위해서는 일종의 공동체 도덕을 다시 회복하고 역으로 다시 그 안에서의 (타인에게 존경을 끌어낼 수 있는) 도덕적 탁월함을 함유해야 한다는 데 있다; 즉 도덕적 탁월함을 가질 때 진보의 요구에 귀를 기울이는 공동체를 재구축할 수 있다는 것이다.
강준만 자신의 주장이 옳건 그르건을 떠나 이 주장이 갖는 역사적 성격은 고려해볼만 한데, 4년 전 엄기호는 "왜 20대는 투표하지 않게 되었나"라는 글에서 20대의 정치적 무관심=속물주의를 지적하며 이걸 해결하기 위해서는 이성적 분석이 아니라 20대를 끌고 갈 수 있는 "탁월함"이 요청된다고 이야기했으며(당연히 공화주의적 전통에서 '덕성'은 탁월함, 단순히 개인적인 탁월함만이 아니라 타인의 인정을 끌어낼 수 있는 탁월함을 가리킨다), 2009년 말 출간된 사회학자 김홍중의 <마음의 사회학>은 속물 대 진정성이라는 지극히 덕성의 언어에 기초한 구도를 설정하고 있기 때문이다(내 블로그의 이전 게시물을 참고하라 http://begray.tistory.com/102). 물론 한국사회에서 4년은 매우 많은 일들이 벌어지는 시간이지만, 어쨌거나 2010년대 전반부에 한국사회 곳곳에서 대중정치를 덕성의 언어로 다시 서술하는 작업들이 벌어지고 있고 강준만이 여기에 최신주자로 합류한 셈이다.
덕성의 언어는 좋든 싫든 인격과 도덕적 판단형식이라는 틀을 갖는다. 다시 말해 덕성의 언어로 사유하는 사람은 특정한 정책의 효과를 논하는 대신 정치집단을 일종의 인격화하여 거기에 도덕적 판단을 내리고 그에 따라 지지와 반대를 논한다. 이는 우리가 바라볼 수 있는 대중정치의 가장 원초적인 형태이기도 하다; 결국 우리는 만물을 인격이라는 우리 자신에게 가장 친숙한 존재형식으로 바라보는 경향에 기울어지기 쉬울 뿐만 아니라, A라는 정책에 대한 판단이 A를 수행하는 주체인 B의 됨됨이를 판단하는 걸로 대체될 결국 B의 됨됨이만 확실하면 B가 수행하는 다른 정책들도 신뢰할 수 있기 때문에 불필요한(?) 사고과정과 같은 노동을 큰 폭으로 절약할 수 있기도 하다. 즉 대중정치에서 인격의 언어, 덕성의 언어는 필연적으로 계속해서 돌아올 수밖에 없다. 뒤집어 말하면 정책과 효과의 언어가 아니라 인격의 언어가 다시 등장할 때 해당사회의 정치분석의 수준 역시 후퇴하고 있는 셈이다. 다시 말해 덕성의 언어가 재등장한다는 것은 우리의 정치적 언어 자체가 맞이한 어떠한 벽, 혹은 무능력을 암시하는 일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나는 강준만이 '전술적 필요'에 따라 덕성의 언어를 "싸가지"라는 이름으로 들고 나온 걸 복잡하게 바라볼 수밖에 없다; 이는 우리 시대가 정치를 이해하고 작동시키는 방식 또한 명백히 후퇴하고 있음을--강조하건대 나는 강준만을 비난하는 것이 아니다--보여주는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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