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로베르. <부바르와 페퀴셰>

Reading 2014. 12. 4. 13:54

귀스타브 플로베르. <부바르와 페퀴셰>. 1881. 진인혜 역. 개정판. 전2권. 책세상, 2006.


: 책세상에서 개역판으로 나온 <부바르와 페퀴셰>_Bouvard et Pécuchet_ 국역본을 읽었다. 내가 원문 대조할 역량은 없고, 진인혜 선생의 국역은 그 자체로는 잘 읽힌다(<통상관념사전>도 번역하셨으니 플로베르 전문가가 아닐까). <감정교육>이 아무 것도 결정하지 않은 채로 마치 진동하는 시계추처럼 오가는 특정한 정신상태를 보여주었다면, <부바르와 페퀴셰>는 역으로 모든 것을 극단적으로 실천하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전자의 주인공 프레드릭 모로처럼) 아무 것도 이루지 못하고 무한히 이 영역 저 영역을 방황하는 주인공들을 그린다. 정확히는 그 주인공들을 통해 19세기 중후반 프랑스 부르주아지들의 정신과 삶, 각종 문물들을 그려낸다고 할 수 있겠다; 이 책과 함께 나올 예정이었던 <통상관념사전>을 보면 이 사실이 조금 더 분명해진다. 발자크가 굉장히 선(line)적인 서사를 통해 19세기 전반부 프랑스 부르주아지의 삶을 관통하는 어떤 운동하는 정신, 패턴을 그려냈다면, 플로베르는 이후 2월 혁명-루이 보나파르트의 당선-쿠데타로 이어지는 시기의 무력하고 왜소해진 부르주아지의 삶들을 정지된 화면의 스케치를 그려내듯 묘사한다. <감정교육>이 아이러니 한켠에 어떠한 비애와 같은 감성을 찾을 수 있다면 <부바르와 페퀴셰>는 바보극farce에 가깝다. 가령 발자크의 텍스트에 나오는 보트랭이나 루이 랑베르, (<잃어버린 환상>의) 라스티냑 같이 날카롭고 무시무시한 동력을 가진 인물들은 플로베르의 유작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부바르와 페퀴셰가 파리를 떠나 정착한 시골마을에서는 귀족 백작부터 최하층까지 결국에 상황과 분위기, 자신의 보잘것없는 욕망에 따라 이리저리 흔들리는 인물들 뿐이며 순간적인 변화의 가능성이 엿보였던 혁명기는 곧바로 원래의 유사한 정신과 패턴을 반복하는 구도로 귀결된다.


 <적과 흑>에서 시골에서도 일정 이상의 부를 축적하고 사회를 올라가는 것이 가능했고(쥘리앵에게 동업을 제안하는 친구를 보라), <잃어버린 환상>에서 파리는 역동성이 넘치는 장소이며 심지어 시골에서조차도 새로운 발명과 사업이 태어난다면--물론 그 결과물은 곧바로 탐욕스러운 짐승들에 의해 먹어치워지지만--플로베르의 시골에서 부바르와 페퀴셰가 벌이는 갖가지 시도들을 포함한 모든 변화의 모티프들은 찻잔 속의 움직임처럼 처음부터 그 실패가 노정되어 있다. 최초에는 당황스러운 기분으로 읽던 독자들이 이내 변화무쌍한 실패의 반복에 익숙해지고 나중에는 또 어떤 바보극이 반복될 것인가를 기대하는 심리로 인도받도록 하는 게 플로베르의 목적이었는지도 모른다. 비극적인 로맨스물의 정조를 깔고 있던 <보바리 부인>, 무기력 어딘가에 파국적인 위기감이 들어가 있는 <감정교육>에 비교하면 훨씬 편안한 마음으로 마음껏 웃으면서 읽을 수 있다. 등장인물들은 죽지 않으며 이제 주인공들은 아예 파리로부터 떨어져 혁명과 쿠데타 모두를 '거리를 두고' 안전하게 접할 수 있게 되었다. 이 텍스트를 부바르와 페퀴셰의 실패담이라는 무한한 반복으로 읽고 싶은 사람도 있을지 모르겠지만, 플로베르의 궤적을 따라가보면 그러한 구도를 그려내는 심리 자체를 역사적인 대상으로 간주하는 쪽이 더 생산적이지 않을까.


별개로 최근 19세기 미국문학 수업을 들으면서 (여성과 맺어지지 않는) 남성 독신자의 모티프를 계속 생각하게 되었는데, <감정교육>도 그렇지만 <부바르와 페퀴셰>도 마찬가지다. 부바르는 실패하는 로맨스가 있고(전처는 재산을 들고 도망갔고 새로운 로맨스 대상 또한 부바르 본인의 땅에 욕심을 낸다), 총각 페퀴셰의 로맨스-섹스는 매독으로 끝나지만... 표준적인 교양소설bildungsroman이 결혼으로 끝나고, 그 대척점에서 19세기 중반의 미국작가들, 호손, 멜빌, 트웨인의 소설이 연애가 없는 독신맘자들이 우글거린다면, 양자 사이에서 기묘한 위치를 점하는 플로베르의 텍스트는 어떻게 읽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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