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정태. <논객시대>. 비판적 읽기.

Reading 2014. 12. 4. 15:12

노정태. <논객시대: 인문 사회 담론의 전성기를 수놓은 진보 논객 총정리>. 반비, 2014.


: 노정태가 프레시안 북스에 연재했던 칼럼을 종합하고 개고해서 낸 책. 한국에서 90년대 중반 이후 2010년대까지의 대중정치담론적 지형을 이해하기 위한 드문 시도라는 점에서 노정태의 책은 그 자체만으로도 가치가 있다. 질과 깊이를 떠나 이런 시도가 더 적극적으로 많이 행해져야 한다. 이 책에서 노정태는 강준만, 진중권, 유시민, 박노자, 우석훈, 김규항, 김어준, 홍세화, 고종석이라는 아홉 명의 '논객'들을 비판적으로--'깐다'는 뜻이 아니라 행간과 맥락을 따진다는 뜻에서--논평한다. <논객시대>는 정해진 포맷에 충실한 책이고 그 포맷 내에서 이 책은 매우 잘 씌어진, 그러니까 무리없이 잘 읽히는 책에 속한다. 그러나 이 책을 생산적으로 읽기 위해서 노정태가 암묵적으로 어떠한 시대적 흐름을 상정하는지 따져보는 게 필수적인데, 부분적으로 이러한 독해를 가로막는 것은 노정태가 (<사기>의 '열전'을 언급하며) 취하는 저자비평이라는 형식 그 자체다. 현재의 결과물이 더 큰 해석틀을 펼치고 싶은 욕망을 간신히 억누른 자제의 결과물인지 아니면 자신이 선택한 포맷에 기계적으로 복종하는 성격의 결과물인지는 모르겠다. 내 생각에 (적어도 책으로 개고하면서) 그가 조금 더 자신의 필치를 자유롭게 풀어놓거나 아니면 논객들의 '별자리'--그가 벤야민으로부터 가져온 것인지 아니면 벤야민을 활용한 진중권으로부터 가져온 것인지는 모르겠지만--를 어떻게 읽은 것인지에 대한 나름의 종합적 서술을 시도했다면 더 중요한 책이 되지 않았을까.


 사실 앞 문단에서 다 이야기한 셈인데, 이 책의 장점과 한계는 명확하다. 장점은 노정태는 자신의 목표에 매우 충실한 저자라는 것이다. 그는 자료를 가능한한 꼼꼼하게 찾아읽고, 이를 당시의 정치적 담론의 맥락과 연결시켜 풀어 논평한다(물론 그게 잘 된 대상과 아닌 대상이 나뉜다). 그리하여 최종적으로 일종의 정치적 기능으로서 자신이 다루는 대상에 대한 인물평으로 나아간다. 노정태가 (재기가 없지 않으면서도) 성실한 저자임은 이 작업을 거의 비슷한 수준으로 반복할 수 있다는 데서, 그리고 그 과정에 암묵적으로 자신의 입장을 계속해서 견지한다는 데서 나타난다; 우리는 아홉 편의 글 모두에서 거의 동일한 시선과 얼굴을 유지하는 저자를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장점은 곧 이 책의 한계이기도 하다. 그는 자신이 정해놓은 틀과 자신의 시야를 거의 벗어나지 않기 때문에 그 포맷만으로 수렴될 수 없는 대상 앞에서 이 책의 분석은 열악해진다.


 이 책에서 가장 훌륭한 부분은 말할 필요도 없이 앞의 두 논객, 즉 강준만-진중권을 논하는 부분이다. 유시민을 다루는 부분은 사실 논객으로서의 유시민의 위치가 어정쩡해서인지 그냥 무난하고, 고종석을 다룰 땐 애정이 있다. 김어준은 적어도 본질적인 문제는 그럭저럭 드러낸다. 이 책에서 가장 열악한 부분은 아마 우석훈을 다루는 파트일 것이다--이는 나 자신이 우석훈을 따라읽는 것으로 사회비평의 흐름에 입문했다는 것, 그러니까 나 자신이 이미 그에 대해 일정량의 독서와 인상을 축적했다는 것과도 무관하지 않겠지만. 이는 분명히 말해 노정태가 전제하는 관점/이해에 부합하는 이와 아닌 이 사이에 차이가 있다는 데서 비롯되는 결과물이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강준만과 진중권 파트를 비롯해 <논객시대>에서 고유의 힘을 잘 보존하는 대목들은 노정태가 암암리에 전제하는 서사에 잘 부합하는 것들이다. 예를 들어 강준만-진중권-유시민은 사실 하나의 서사로 묶일 수 있다. 87년 체제와 함께 본격적으로 중산층의 구매력이 올라가고, 90년대 한국진보의 서막을 올리는 안티조선운동이 시작되고, IMF 위기가 한국사회를 장악하고, 김대중이 드디어 대통령이 되고 신자유주의적 통치가 그 모습을 암암리에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이 일종의 시대적 배경이라면, 중심서사는 노무현의 등장과 당선, 탄핵정국, 민주당 분당 그리고 강경한 신자유주의적 통치와 함께 한국 진보의 기대가 집중되었던 노무현이 급속도로 몰락하고 비극적인 최후를 맞는 것이다(노무현의 죽음은 사실상 한국의 마지막 정치비극이다; 그를 좋아하든 아니든 여기에서 비극적인 것을 보지 못하는 이는 대중정치적 시야가 결여된 장님에 불과하다). 이후에 이명박-박근혜로 이어지는 '반동정국'이 등장하는 지금까지는 어쩌면 (진보정치의 관점에서는) 포스트-노무현 시기라고도 부를 수 있을지 모르겠다. <인물과 사상>으로 시작해 노무현의 자서전이 아닌 "평전"이 필요하다는 대목으로 끝맺는 강준만-진중권-유시민 파트는 각각 이 서사의 시작-가운데-끝을 이루는 위치를 차지하며 여기서 노정태의 글은 그 자신이 의식적으로 노력하지 않음에도 일종의 시대정신을 드러내는 것처럼 보일 정도다.


 뒤집어 말하면 이 서사에 부합하지 않는 이들을 다루는 파트는 그야말로 필자의 시선이 대상의 개인적 층위에 국한되어 있다. 예컨대 박노자를 다루는 부분은 박노자의 불교적 윤리에 대한 별 영양가없는--그리고 마지막에 약간 그럴싸하게 예의를 갖추는--동어반복이 항목의 절반 이상을 차지한다. '우리 안의 파시즘'이랑 (한국인들이 전범으로 삼는) 서구도 문제가 있다고 지적했다는 두 줄 빼면 사실상 논객으로서 박노자가 무엇을 했는가에 대한 이야기는 없다. 나 자신이 박노자의 저술은 한 권 밖에 읽은 게 없기 때문에 실제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그것밖에 없는 사람이었으면 <논객시대>에서 다룰 이유 자체가 없지 않은가? 결국 부정진술들, 즉 ~가 아니다, ~가 없다(부제부터 '어디에도 "없는" 남자' 다)는 말로 가득찬 다음에 이걸 불교윤리로 덮어버리고 끝나버리는데, 싸이에 대한 문화적 비판도 그런 식으로 넘겨버리는 걸 보면 내 생각에는 그냥 노정태에게 박노자를 읽을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었나 싶다. 기존에 짜여진 자신의 서사와 관심사에 맞지 않는 인물을 다룰 능력--결국 저널리스트에게 제일 필요한 능력 중 하나 아닌가?--말이다.

 이 문제를 이 책에서 가장 심각한 문제를 드러내는 부분은 물론 우석훈 파트다. 물론 우석훈 본인이 엄청나게 다양한 분야에 성공하든 실패하든 손을 뻗었고 노정태가 그걸 일일이 다 캐치하기엔 무리였을 터이다. 그러나 한국담론에서 우석훈이 자처한 역할의 핵심은 경제정책을 다루는 신좌파라는 데 있었다. 다른 말로 옮기면, (생태, 여성주의를 포함한) 문화정치의 대의를 목표로 삼고 경제분석/정책의 언어로 이 목표에 다가가는 게 우석훈의 독특한 입장이다; 예컨대 문화연구자들과 맑스주의 경제학자들 사이의 분리와 소원한 사이가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처럼--이건 한국만의 얘기는 아니다--한국에서 생태, 페미니즘, 퀴어 등의 소수자운동 및 소수자운동의 방법이기도 했던 문화정치와 노동운동-정치경제분석은 지금까지도 제대로 연결되지 못하고 있으며 양자의 시선을 동시에 갖춘 사람은 극소수다(푸코를 제대로 읽은 맑스주의자와 맑스를 제대로 읽은 푸코주의자가 얼마나 드문가를 생각해보자). 우석훈의 독특한 포지션은 (그의 역량을 떠나) 이 두 가지가 결합했고 여기에 정책입안자의 시야를 갖추었다는 데 있었다.

 우석훈이 '고장난 시계'처럼 단순한 분석을 반복하는 인물로 간주되는 게 그의 능력부족/자포자기인지, 아니면 그를 이해하고 수용할 능력을 지닌 사람이 없어서인지, 그냥 전반적으로 한국 진보-좌파 학술언어가 지리멸렬해서인지는 모르겠다. 어쨌거나 그는 (프랑스 신좌파에게 강한 영향을 받은) 정치적 입장/감성과 경제분석이라는 툴을 연결하고 최종적으로 그걸 정책적 제안을 포함한 어떠한 형태의 '대안제시'로 끌고가는 논리패턴에 따라 움직였다. 그렇다면 노정태는 우석훈을 어떻게 읽는가? 그가 세대론만으로 우석훈을 다 논할 수 없다고 한 것은 옳다. 그러나 골프장을 키워드로 골프장 속의 관료들에게 훈수를 두려는 "엘리트 위의 엘리트"라고 표현한 건 역으로 지적 무능력의 사례다. 그는 문화정치가 우석훈에게 어떤 의미를 가졌는지 설명하는 대신 생태랑 뭉뚱그려서 "골프장"으로 묶어버렸고 (문화의 측면을 사유할 때 노정태가 보여주는 무능력은 일관된다) 우석훈이 내놓는 정책이 진짜로 의미가 있는지 아니면 문제가 무엇인지 논하는 대신 '독자를 엘리트들로 한정하는, 엘리트에게 훈수 두고 싶어하는 엘리트'라는 설명으로 대체해버린다. 이건 정책입안자, 행정가, 관료와 같은 시선을 이해하지 못하는 나이브함이라는 비판을 받아도 할 말이 없다; 특히나 박근혜 정부에서 정치와 정책이 완전히 사멸하기 전에 한시적으로 우파랑 중도우파, 좌파가 정책으로 싸우던 시절이 잠시 열렸고 우리가 어쨌든 그 때로 다시 돌아갈 수밖에 없음을 감안한다면 더욱 그렇다.


 김규항과 김어준을 다루는 부분은 비록 상대적으로 빈약하지만 어쨌든 나름의 흐름이 있는데, 이는 이들의 서사가 강준만-진중권-유시민으로 이어지는 '노무현의 영광과 몰락' 서사를 보충하는 서사이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 강준만-진중권-유시민이 어쨌든 지적인 형태의 담론생산자로서 영향을 끼쳤다면, 김규항과 김어준은 바로 이런 형태의 '비판적 지식인' 상과 거리를 둔 형태의 '민중/대중적 진보'라는 집단의 형성과 무관하지 않다. 김규항이 지식인 비판을 반복하다가 비판의 대상이 사라지면서 교착상태에 빠졌다거나, 김어준이 민족주의에 너무도 쉽사리 빠졌다가 다시 일종의 자기계발담론모델로 돌아온다는 식의 논리는 노정태가 '민중/대중' 및 정념의 정치에 대해 표명하는 말끔하게 정리된 비판이다(물론 아래에서 언급하겠지만 김어준은 노정태가 언급하는 것 이상으로 엄청나게 강력한 영향을 끼쳤다). 인물의 재구성에서 보다 '문학적'인 성격을 강하게 띠는 홍세화와 고종석 파트는 앞의 서사랑은 잘 맞지 않지만 나름의 독립적인 위치를 유지한다. 이는 부분적으로 앞의 박노자/우석훈 파트가 노정태의 중심서사에 제대로 편입되기 어려운 '점'으로 간주되었다면 이 책에서 가장 연장자에 속하는 홍세화/고종석은 중심서사보다 시간적으로 더 길지만 그럭저럭 못 어울릴 이유는 없는 나름의 서사에 속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노정태가 서사나 이야기와 같은 언어를 별로 달갑지 않게 생각하리라 예상하지만, 역설적으로 <논객시대>야말로 '이야기'라는 것의 중요성을 아주 잘 보여주는 텍스트다. 대상이 노정태의 서사에 얼마나 잘 부합하느냐에 따라 논의의 질이 등락하는 상황을 달리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겠는가? 뒤집어 말하자면 우리는 97년부터 2010년까지의 한국대중정치담론을 이해함에 있어 노정태가 제시하는 서사를 부분적인 유효성을 지닌 것으로 걸러읽을 필요가 있다. 박노자-우석훈 (그리고 부분적으로는 홍세화) 파트에서 공통적으로 드러나는 것 중 하나는 한국의 90년대-2000년대 대중정치의식의 형성에서 절대로 빼놓을 수 없는 문화의 정치를 노정태가 아예 읽지 못하고 있거나 회피하고 있다는 점이다. 실제로 신좌파의 언어는 좋든 싫든 한국의 좌파-진보에게 깊숙히 밀려들어왔고 (홍세화의 "똘레랑스"는 단순히 진보적인 프랑스 사회의 언어일 뿐만 아니라 신좌파-문화정치와 절대로 분리될 수 없는 정체성의 정치와 매우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표어이기도 하다...최종적으로 그것이 또 다른 형태의 자유주의적 전술에 휘말려들어갈 운명이었다고 해도 말이다) 생태, 페미니즘, 그리고 여전히 이슈의 크기에 비해 운동으로서는 주변적인 퀴어와 같은 주제를 형식적으로나마 '존중'하지 않는 진보좌파는 갈수록 소수가 되어가고 있다. 이와 같은 표준적인 의제에 속하지는 않지만 문화와 정치를 연결시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딴지일보에 대한 이야기가 김어준 파트에서 아예 빠져있는 것은 비판의 여지가 있다; 오늘날 일베와 오유 등에서 동시에 행해지고 있는 '정치의 유머화'의 계보는 DC inside 이전에 딴지일보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으며 어떤 면에서 딴지일보야말로 현재 웹에서 정치가 소비되는 방식의 모태를 제공한 곳이기도 하다; 딴지일보는 단순히 김어준에게 중요한 정도를 넘어 그 자체가 연구의 대상이 될 필요가 있을 정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것들에 대한 언급이 노정태의 논객'시대'에는 부재하다. 페미니즘은 김규항을 곤란하게 한 적수로 잠깐 등장할 뿐이며, 생태는 우석훈의 '골프장' 한 단어로 축약되고, 퀴어는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 노골적으로 말해 포스트모던적 기조를 통과한 이후의 사람에게는 노정태가 그리는 '이성애자-남성-중산(상)층-지식인'들의 역사가 신좌파적 계몽을 회피/거부하는 반동적 입장을 품고 있는 게 아닌지 충분히 의심해볼만할 것이다. 민족/국가와 계급에 대한 논의를 거부하고 (오로지 계급적 정체성만 배제한) 정체성의 정치로 끌려들어간 속류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이 결국 포스트모던적 소비주의-자유주의라는 자본지배의 이데올로기에 너무나 쉽게 끌려들어갔다면, 역으로 미시정치/정체성의 정치를 제대로 고민하지 않은채 계급과 민족/국가라는 '거대담론'만 다루는 이들이 또 다른 형태의 억압에 기여하는 길을 피할 수 있을까? 글쎄, '진보적인' 교수들이 대학원생 제자들을 마음껏 착취하거나, 어느 먹물들 사이에서 퀴어주체를 아웃팅하고 입 다물거나, 운동조직 내부에서 벌어지는 성추행 및 이를 은폐하고 피해자를 내쫓는 일이 버젓이 벌어지는 사회에서 나는 별로 낙관적이지 않다. 좋든 싫든 우리 시대의 진보-좌파정치는 이렇게 조금 더 엄격한 기준을 갖추게 되었고 나는 그쪽이 옳다고 생각한다.


 역사적 논평이라는 주제로 돌아오자. 단순히 윤리적 층위에서만이 아니라 실제로 (90년대 대중정치운동에서 빠질 수 없는) 페미니즘을 포함한 다양한 문화정치가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한 90년대-2000년대를 생각할 때 노정태의 분석은 극히 제한적인 가치를 갖는다. 그가 선택한 인물열전이라는 방법도 (그가 좋든 싫든 박노자와 우석훈을 자신의 논의대상으로 선정했으므로) 딱히 변명이 되지는 못하며, 정확히 말해 그가 다룬 논객들을 조명하는 일 또한 이와 같이 운동의 근본적인 방향과 초점이 바뀌는 배경을 이해하지 못할 때 부분적으로 밖에 이해될 수 없다고 말하고 싶다. 예를 들어 페미니즘과 김규항의 잘못된 대립을 김규항의 논리반복이 가져온 궁지 중 하나로 언급하고 끝내버린 것, 명백히 대중문화연구와 분리될 수 없는 진중권이 상상력을 키워드로 자신의 작업을 전개한 시기를 일종의 일탈처럼 그려낸 것은 <논객시대>의 취약점 중 하나다. 80년대 후반은 진중권의 소비에트에 대한 믿음이 깨어진 시기일 뿐만 아니라 맑스주의적 사회비판언어가 (일부 분과를 제외하고는 그렇게 생산적이었다고 하기 힘든) 푸코-들뢰즈의 '프랑스 이론' 및 문화연구의 언어로 대체되는 과정이기도 했다. 진중권과 김규항에게서 배경으로 등장하는 영화잡지들의 대두도 대중문화연구라는 영역의 대두와 무관하지 않다. 이러한 맥락과 노정태가 2002-2005년 사이에 (월드컵부터 황우석 사태까지) 짚어낸 어떠한 전환점--그 자신이 직접적으로 강조하지는 않지만 그의 서사에 이 시기는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은 완전히 별개일까? 어쨌거나 조금 더 포괄적인 사관이 필요하며 노정태의 텍스트는 완결로서가 아닌 비판적 독해를 통해 우리를 상승시킬 시작점으로서의 가치를 갖는다는 말로 끝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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