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론>을 처음 읽은 순간

Comment 2014. 11. 9. 01:08

<스스로를 지운 '자본론' 번역자, 그는 지금 어디에>

기사 링크: http://h21.hani.co.kr/arti/world/world_general/38282.html



“비루하고 누추한 이 현실의 누더기 속에서 한 세대의 젊은 사람들이 <자본론>을 금기로부터 해방시켰고 <자본론>을 읽을 수 있게 함으로써 그것을 비신화화했다”




기사 본문의 요지랑은 특별히 연관이 없는 한 문장이다. 그럼에도 나는 이 문장을 곱씹는다. 우리는 정말로 <자본론>을 읽고, 제대로 이해하고, 또 그것을 비신화화했을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학생운동과는 특별한 접점이 없고 좌파는커녕 당대 분위기를 따라 어중간한 자유주의자들이 가득한 시공간에서 학부시절을 보냈다. 신기한 일은 머리 한 켠에 맑스와 <자본론>에 대한 무언가 어렴풋한 의무감이 계속해서 있었다는 것이다. 주변에 그 책을 읽으라고 권하는 사람도, 그 책을 읽고 있는 사람조차도 없었는데--적어도 내 눈에 띄진 않았는데--언젠가는 <자본론>을 읽어봐야 한다는 생각이 어딘가에 있었다. 무언가 나와 전혀 별개의 곳에 있는 지식일 듯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다지 좋아할 수 없는 세상의 질서에 대해 가장 반항적인 지점에, 다른 한편으로는 지식으로서 가장 고차원적인 지점에 <자본론>이 있다는 근거없는 생각이 있었다; 당시 내 주변의 또래들은 아무도 이 책을 읽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게 나 혼자만의 느낌이 아니었음은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본론>으로 가는 길은 험난해보였다. 선배들이 저 책을 읽기 전에 사전연습으로 이진경의 책을 읽다가 매우 어려워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내 위의 두 학번 정도를 기점으로 반에서 공부하는 모임은 사실상 존속하지 않았고 그래서 그러한 어려움을 버티고 같이 책을 읽어나갈 선배들 또한 없었다. 학부 4년 간 선배들 없이 동기 및 후배들과 세미나를 했고 어쩔 수 없이 거의 항상 세미나의 진행에 책임을 떠맡은 입장으로 살았다. 당연히 이 책을 어떻게 읽어야 할지, 이 책이 어떤 책인지 이야기해주는 사람은 전무했다. <자본론>은 누구나 한번 읽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지만 아무도 읽지 않는 매우 어렵다고만 알려진 책이었다. 무협지의 표현을 빌려 '주화입마'에 빠지지 않으려면 사전 독서가 굉장히 중요하다는 말만 떠돌았다. 잘못 읽으면 읽는 이의 정신까지 망가트릴 정도로 엄청난 책인 셈이었다(물론 정신의 파괴를 감수하고 도전하는 사람은 내 주변에는 없었다). 심지어 그 사전 독서리스트가 무엇인지 명확하게 이야기해주는 사람도 없었으니 나는 그 말이 도대체 누구의 입에서 나온 것인지조차 알지 못한다. 단지 <자본론>의 어려움에 대한 유령이 심지어 아무도 그 책의 주제에 관심을 갖지 않는 과반 공간에서조차 조용히 한 구석에서 과반을 배회했다. 나 역시 그 책을 세미나에서 함께 읽기에는 스스로가 지적으로 너무 부족하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혼자 <공산당 선언>만을 읽었다. 강유원의 입문서는 독학을 강요받은 이에게는 나름 귀중한 자산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석사 들어오면서 처음 맞은 이론 세미나에서 <독일 이데올로기>를 발췌독으로나마 흘깃 보았다. 대학원 선배들 중에도 <자본론>을 어느 정도 읽은 사람은 매우 드물었고 아무도 그 책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았다. 알튀세르의 이름은 흘깃 나왔지만 막상 <자본론>은 논의의 대상이 아니었다. 알튀세르가 <자본론>은 매우 읽기 어려우니 책을 읽는 순서가 따로 있다고 말했다는 이야기를 듣는 정도였다. 그렇다고 학내외 공부모임을 찾아다니기에는 그 분위기가 너무나 두려웠다; 어쨌든 '나는 운동권이 아니다'는 그런 나이브한 감각이 있었다(대신 혼자서 벤 파인의 개설서를 찾아 읽었고, 주변 사람들을 모아 스미스의 <국부론>을 읽었다). 한번 <자본론>을 읽기 위한 모임에 들어갔지만 역시 목표에 이르지 못하고 끝났다. 결국 처음 <자본론>을 펼친 때는 정확한 시기가 기억나지 않는데 아마도 석사 1년 차가 끝날 때쯤이었을 것이다. 하루에 국역본으로 100쪽 정도씩 읽었던 것 같다. 알튀세르가 했다고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초반부 어딘가에 정말 매우매우 어려운 부분이 있고 이 부분에서 막히면 일단 다른 부분들을 읽은 뒤 되돌아와야 한다고 했다. 독학자는 어디가 그렇게 흉악한 부분일까, 어디쯤에서 막힐까 두려움을 갖고 각 장을 넘겨야했다. 정신을 차려보니 끝까지 다 와 있었다. 특별히 막히거나 너무 어려워서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한 부분은 없었다.


(미리 변명을 해둔다면, 나는 <자본론>을 통해서 맑스의 경제이론 체계를 구축한다거나 철학적으로 맑스를 한 줄 한 줄 따라 읽는다거나 하는 데 전혀 관심이 없었다. 내 관심사는 단지 맑스가 대충 어떤 이야기를 하는지 큰 개요를 흐릿하게나마 붙잡는 것, 혹은 조금 평범한 말로 문자 그래도 <자본론>을 읽는 것이었다...<자본론>을 연구하거나 비판하는 건 일단 '읽은' 뒤의 일이다. 지금도 그렇다. 읽기의 가장 기본적인 목표는 세목에서 맑스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이해하고 그 끝에서 대략의 요지 및 주장을 정리하는 것이다)




<자본론>은 그렇게 난해한 책이 아니었다. 물론 그 책을 깊게 학적으로 연구하고 이해하려면 여러 맥락에 대한 많은 독서가 필요하다. 그러나 그 책을 마치 동시대의 저자가 쓴 책처럼 죽 읽고 요점을 이해하는데 백과사전적 독서가 필요한 건 아니다. 마찬가지로 수학에 대한 이해도, 맑스의 경제이론적 체계를 발전시키기 위해서라면 모를까, 특별히 필요하지 않다. 어차피 맑스는 미적분이 아닌 대수학, 쉽게 말해서 거의 산수 수준의 수학과 평범한 공식들을 사용한다. 맨 처음에 설명하는 C가 상품, M이 화폐(돈)이라는 식의 개념과 p 는 이윤profit, v는 가변자본variable capital, c는 불변자본constant capital ... 등등의 기초적인 정의만 잘 따라가면 맑스가 그것들을 기초로 설명하는 분수식과 공식들은 거의 직관적인 수준에서 이해할 수 있다(적어도 아직 읽지 못한 <자본론> 3권 1/7 이전의 지점까지는 그렇다). M-C-M'은 아주 평범한 이야기다. 돈이 있고, 돈을 들여서 상품을 만들고, 상품을 팔아서 돈을 더 벌고...라는 상식적인 과정이다. <자본론> 1권 후반부는 거의 역사기록에 의거한 현실고발에 가깝다. 공식을 전부 까먹어도 맑스가 무엇을 말하고 싶은지 이해하는 건 평범한 대학생의 머리로도 어렵지 않다. 어차피 일반적인 독자의 목적은 이 사람이 이야기하는 내용이 독자 자신이 살고 있는 세계의 원리를 그럭저럭 무리없이 서술하고 설명하느냐에 있지, 이 공식을 세부적으로 파고 들어서 당장 전 세계의 이윤율이 어떻게 운용되는지에 있는 게 아니다. 후자는 맑스주의 경제이론가들이 할 일이며 독자가 맑스를 이해하는데, 심지어 맑스주의자가 되는 데도 맑스의 모든 경제/철학적 논의가 타당한지 점검하는 과정이 반드시 필요한 건 아니다.


영역본(penguin 판)에 기초한 김수행 선생의 <자본론> 국역본 1권을 읽으면서 어떤 인상을 받을 수 있을까? 지금까지도 남아있는 중요한 인상은 맑스는 결코 자신의 책이 어렵게 읽히기를 바라지 않았다는 것이다(적어도 그가 생전에 완성해 출간한 <자본론> 1권은 그렇다). 직접 읽어보면 안다. 상품과 가치만이 아니라 자신의 주요 개념과 공식들을 설명하는 거의 모든 부분에서 맑스는 반복에 가까울만큼 상세하게 설명한다. 이미 앞부분을 읽고 대략의 요지를 이해한 독자에게는 거의 지겨울 정도로 했던 말을 약간의 뉘앙스를 달리해서 또 한다. 연구자에게는 이러한 설명이 현상을 조금 다른 각도에서 기술하려는 각고의 노력으로 보이겠지만, 비전문적인 독자의 시선에서 보면 이건 그냥 저자가 엄청나게 친절한 것에 가깝다. 쉽게 말해 맑스는 자신의 책을 읽는 독자들이--당연히 노동자들이 포함된다--자신의 이야기를 어려워서 이해하지 못할까봐 몇 번이고 쉽게 풀어서 설명해주려고 하는 거다. 한번이라도 남을 가르쳐본 사람은 쉽게 동감할 수 있지 않은가? 자신의 이야기가 조금 어려워보일 때 학생들의 흥미를 붙잡으려고 약간 표현을 달리해서 훨씬 쉽게 풀어주려는 노력을 하는 순간 말이다. <자본론> 1권은 온통 맑스의 이러한 친절함으로 뒤덮여 있다. 내 생각에 이 책의 맑스는 사상사에서 거의 비견될 이가 없을 정도로 독자가 자신의 말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각고의 노력을 기울인 매우 예외적인 저자에 속한다.


둘째, 앞서도 이야기했지만 <자본론>의 언어 표현은 그 자체로 그렇게 어려운 게 아니다. 김수행 역을 읽으면서 갖가지 한문 용어들에 골치아프셨던 분들은 (기본적인 영어독해가 가능하다면) 한번 김수행 역이 대본으로 삼은 펭귄 판 영역본을 읽어보시길 바란다. 문장은 대체로 그렇게 길지도 까다롭지도 않다. 어휘도 무척이나 쉽다. 가변자본이라고 쓰면 무언가 어려워보이지만, variable capital할 때 variable은 중고등학교 영어교육에서 기본적으로 가르치는 단어다. 몇 년 전에 맑스에게 두려움을 가진 한 학부신입생의 편견을 깨주기 위해서 <자본론> 1권의 서문들을 영어판으로 직접 읽으면서 직독직해(...)를 해줄 기회가 있었다. 너무나 간결하고 쉽게 읽혀서 그 학부신입생이 당황해했던 기억이 난다. 사실 김수행 역은 펭귄판에 엄청나게 충실하며 주요 개념어 번역을 뒤져보면 거의 직역에 가깝게 옮겼다. 단지 한자어로 번역된 개념어들이 오늘날의 독자들에게 직관적으로 잘 녹아들지 않는 것 뿐이다. 영어로 영어판을 읽어보면 정말 맑스만이 아니라 영역자도 이 책을 어떻게든 쉽게, 전문적인 교육을 받지 않은 독자들에게도 무리없이 읽힐 수 있도록 엄청나게 노력했다는 인상을 받는다. 나는 <자본론> 독어판의 원전으로서의 우월성을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반대할 생각은 없지만, 영어판이 갖고 있는 미덕은 그 나름대로 존중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솔직히 말해 나는 맑스에 대한 괜찮은 개설서가 한 권 더 나오는 대신 <자본론> 자체를 조금 더 편한 말로 풀어쓴 번역본이 하나 더 나오는 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학술적 용도를 위한 판본이야 이미 나와있지 않은가). 어차피 개설사 100권 읽어도 원 텍스트를 읽는 것과 같을 수가 없다. 진정으로 맑스의 의도에 충실하려는 사람들이라면 <자본론>을 높은 교육수준 없는 독자들도 막히지 않고 술술 읽을 수 있는, 즉 더 많은 사람들이 더 어렵지 않게 접할 수 있는 번역본을 만드는 작업을 진지하게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강신준 역이 매우 잘 읽힌다고 들었는데 아직 읽어보지 못했다). 맑스는 교양독자와 전문가들의 전유물이 아니며 맑스주의는 그런 사람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복잡한 걸 의도적으로 쉽게 만드는 건 폭력이지만, 쉽게 읽히길 바란 책을 어려운 것으로 그냥 두는 것 역시 좋은 자세는 아니다.




다시 나의 독서경험으로 돌아오자. <자본론>을 읽으면서 내가 느낀 가장 커다란 감정은 지금까지 속고 살아왔다는 분노, 허탈감, 어이없음이었다. <자본론>은 유령이 아니었고 너무나 어려워서 토할 것 같은 책은 절대로 아니었다(개인적으로 칸트는 물론이고 <꿈의 해석>보다도 훨씬 쉽게 읽힐 수 있다고 생각한다...나는 벤야민이나 스피노자, 정신분석적 비평을 읽는 사람들이 <자본론>을 어려운 책이라고 말한다면 뭔가 심각한 문제가 있는 게 분명하다고 생각한다). 그 겹겹이 쌓인 소문과 편견의 장막을 걷어내고 직접 책을 읽었을 때 거기에는 그저 한 권의 명료한 문제의식을 가진 책이 있었을 따름이었다. 이후 맑스가 내 공부의 방향에 엄청난 영향을 끼친 것은 맞지만, 그건 논의가 어려워서가 아니라 세계를 조금 더 분명하고 일관성 있는 논리로 설명할 수 있게 해주었기 때문이다. 깊이 읽으려고 든다면 다르겠지만--물론 모든 책은 그렇게 어렵게 읽을 수 있다--그 자체의 요지로는 전혀, 전혀 난해한 책이 아니다. 그래서 학부 기간 <자본론>의 이름을 꺼낼 때조차 전전긍긍했던 수년 간의 세월이 너무나 바보처럼 느껴졌고, 바보처럼 살아왔다는 것에 화가 났다. 주화입마가 어쨌다고? <자본론>을 읽으면 뭐뭐를 반드시 읽고 선행학습을 거쳐야 한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이때 알튀세르의 맑스 독해에 대한 깊은 불신감이 생겼다...그 나름의 맥락이 있는 건 이해하지만, 어쨌든 한국에서 이런 방식으로 그의 말이 돌고 있는 건 아니다). 그런 말을 하는 사람들은 결국 대부분 자신이 직접 책을 읽어보지도 않고 누군가의 말을 옮겼을 따름이지 않은가.


<자본론>을 읽은 때를 기점으로 나는 내 바로 위의 선배 세대들의 학문적 판단에 심각하게 회의적인 시각을 갖기 시작했다(물론 이 편견은 드물게 존재하는 성실한 연구자들에게는 적용되지 않는다). 자신이 직접 끝까지 읽어보지도 않았으면서 그렇게 오랜 시간을 남의 말을 그대로 옮기면서 살아올 수 있다니, 나로서는 좀처럼 납득이 되지 않는다. 읽지 않았으면 그냥 읽지 않았고 모른다고 하면 될 일인데 뭘 먼저 읽는 게 맞는지 아닌지에 대한 이야기가 왜 튀어나오는가. 한편으로는 선배들의 말을 결코 곧이 곧대로 듣지 말고 한번쯤은 의심해볼 필요가 있다는 것, 더 근본적으로는 결국 어렵다는 평을 듣는 책일수록 남의 말에 의존하지 말고 직접 읽어봐야 한다는 '경험주의적' 태도를 갖게 된 것도 이러한 충격적인 경험을 통해서이다. 결국 내가 읽고 내가 정리하는 게 가장 기본이 되어야 하며 그 다음에 다른 이들의 의견에 비추어 나의 독해를 교정하는 쪽이 맞다. 타인의 의견을 내 의견으로 삼고 싶다면 그 타인이 과연 믿을만한 사람인지부터 먼저 검토해야 한다. 나중에 이 태도는 학위논문을 쓰면서 내가 다루는 텍스트에 대한 온갖 엉터리 논문들을--저자가 한국인이건 미국인이건 탑스쿨 출신이건 교수건 간에--접하면서 조금 더 굳건해졌다.


이런 경험들을 통해서 나는 최초에 인용한 코멘트에 여전히 반문할 수 있겠다. 사람들은 정말 <자본론>을 읽었는가? <자본론>은 비신화화되었는가? 적어도 내 또래의 수년 간에는 전혀 그렇지 않다. <자본론>을 하다못해 1권이라도 처음부터 끝까지 자기 힘으로 읽어낸 사람은 여전히 드물고, <자본론>은 마치 상상의 동물처럼 신비화된 텍스트로 남아있다. 이 책이 잊히고 있다면 그건 이 책의 효력이 다해서가 아니라 사람들이 지적으로 무책임하기 때문이다; <자본론>이 수명을 다했다는 선언이 실제의 독서에 기초한 자신의 판단을 대체하기 때문에. 실제로 이 책을 읽어보면 19세기 영국을 배경으로 하는 맑스의 논의가 어떻게 21세기의 한국에 이토록 잘 들어맞는지 엄청나게 놀랄 것이다. 예컨대 산업예비군에 대한 맑스의 설명을 들으면 오늘날 도서관에 처박혀 스펙쌓기에 몰두하도록 강요받는 대학생들의 처지가 어떤 것인지 아주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부분적으로는 맑스 자신의 탁월함에, 부분적으로는 우리들의 사회가 명백히 과거의 구도를 반복하고 있기 때문에 <자본론>은 여전히 시의성을 갖는다. 진짜로 시의성이 결여된 쪽은 지식과 독서에 대한 우리들의 잘못된 태도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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