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안보기구의 정치개입의 의미와 그 귀결
Comment 2014. 11. 6. 19:54[단독]사이버사령관, 대선 때 매일 2회 ‘정치댓글 작전회의’(경향신문) 기사링크: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411060600045&code=910302
문자 그대로 군의 직접적인 정치/선거개입이다(투표함을 털어 조작표를 넣어야만 선거개입인 게 아니다). 국정원도 그렇고... 벌써 2년이 되어가는 지난 대선의 국가개입에 대한 종합적인 설명으로 이 깔끔한 링크를 참고(http://news.khan.co.kr/kh_infographic/kh_storytelling.html). 아래는 이 사태에 대한 논평.
김영삼 이래로의 '문민정부'들은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한 가지 합의를 공유했다. 이전까지 군부정권 통치의 중요한 축을 담당했던 안보기구를 국내의 정치적 의사결정에 직접적으로 활용하지는 말자는 것이다. 국정원(과거의 안기부)과 군대는 한편으로 보안을 이유로 사실상 어떠한 견제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다는 점에서, 다른 한편으로 초법적인 권한을 행사할 가능성을 언제나 포함한다는 점에서 너무나 매력적이면서도 위험한 통치도구였다; 한국에서 조르조 아감벤의 주권이론을 생각하고 싶다면 멀리 갈 필요 없이 여기부터 보면 된다. 박정희나 전두환처럼 통치자 자체가 초법적으로 군림하는 게 더 이상 불가능해진 상황에서 정부권력의 유지와 재생산에 이러한 도구를 활용할 경우 호랑이 등에 올라타는 격이 된다.
김영삼이 하나회를 포섭하고 활용하는 대신 숙청해버린 것, 노무현이 국정원장과 독대하지 않은 것은 실제의 활용과는 별개로 공식적으로 군대와 국가정보기관을 장기말로 써먹지는 않겠다는 '게임의 규칙'을 천명하는 행위였다고 이해할 수 있겠다. 물론 각종 행정기구를 통한 통치행위 자체가 교묘해졌을 뿐만 아니라, 여전히 검찰과 경찰이라는 강력한 도구들이 남아있었다는 사실은 짚어두자--검찰이 정권 중반을 이후 수명이 끝나가는 대통령의 주변에서 뭔가 하나씩 끌어내곤 했다는 점에서 문민정부들이 남아있는 도구를 100% 장악하지는 못했다는 것도. 어쨌든 국내정치에서는 국정원/군대라는 도구, 체스로 치자면 '퀸'에 해당하는 말을 쓰지 말고 모두가 고만고만한 상황에서 게임을 해보자는 게 1998년부터 2007년까지의 통치기조였다. 영장으로 사전통보를 받지 않는 한 내일 어디에서 깨어날지 걱정하지 않고 잘 수 있는 세상이랄까.
우리가 지금 목도하고 있는 사태는 이명박 또는 지난 7년간 이어져온 우파 정권이 이와 같은 합의를 실질적으로 파기했음을 보여준다. 국정원과 군대(사이버사령부)가 선거국면에 개입했다. 물론 댓글을 통한 여론전은 실제로 이 두 말이 할 수 있는 일들에 비하면 무척이나 작은 일에 불과하고--알려지지 않은 개입들이 더 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순 없다--, 그래서 지금 사태의 본질적인 성격이 사람들에게 제대로 와닿지 않고 있는 것 같다; 누군가는 2000년대 후반부터 우리 모두가 점차 판단력이 떨어지는 인간들이 되어가고 있다는 냉소적인 대꾸를 내놓는데 그렇게까지 비관적으로 생각하고 싶진 않다. 먼저 사실관계를 정리해보자. 우파 정부는 국가정보기관과 군대를 국내정치의 의사결정에 영향을 끼치기 위한 도구로 다시 활용했고, 사법부는 얼마 전 원세훈에 대한 판결을 통해 사실상의 면죄부를 주었다--내가 정보기구의 수장이면 당연히 악플러 몇십 명보다 대법관 이하 판사들의 삶부터 감시하고 '교정'할텐데, 판사들은 종종 자신들이 권력 앞에서는 일개 바둑알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잊어버릴 정도로 머리가 나쁜 것 같다. 연제욱 전 사이버사령관은 청와대로 들어갔다(더 나쁜 직장이라고 할 수는 없을 거다). 바꿔말해 지난 대선과 같은 수준의 개입은 앞으로 얼마든지 자행될 수 있게 되었다.
3년 뒤의 다음 대선은 말할 것도 없고 1년 반 뒤의 총선에서 비슷한 수준의, 어쩌면 더 심각한 수준의 정치개입이 벌어질 가능성은 높다. 처벌을 받지 않고 다음 정부에 의해 두둑한 보상을 받을 수 있는데 똑같은 일이 벌어지지 않으면 더 이상한 거 아닌가? 만약 우파가 한번 더 집권하고 다시 한번 통치위기에 직면했을 때 조금 더 '결단력 있는' 정부라면 보다 직접적으로 이 도구들을 활용하는 방안을 고려해볼 수 있을 거다. 거기에서 단 한 발걸음이면 군사독재로 돌아간다. 군사독재란 무엇인가? 당신이 일하다 말고 한숨을 쉬었을 때, 월급이 적다고 불평했을 때, 친구에게 보내는 카톡메시지에 대통령 이름을 언급했을 때, 가끔은 정말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잠들었을 뿐인데 일어나보니 어딘지 알 수 없는 어두운 곳에서 군화발로 가슴팍을 채일 수 있다는 걸 뜻한다. 투표용지에 1번이 아닌 다른 칸에 기표했다는 이유로 물질적이고 신체적인 고통을 받고, 어딘가 부러지고, 평생에 길이길이 기억될 악몽을 꿀 신나는 체험을 하고, 가끔은 죽을 수도 있다. 강력한 권력이 견제받지 않으면서 자의적으로 작동할 때 이런 일은 쉽사리 일어난다(박정희 정권은 단 하나만 빼고 위의 모든 일을 할 수 있었다; 그때는 카톡이 없었으니까). 당신이 북한을 혐오하는 사람이라면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겠다. 지금 남한사회는 북한처럼 되어가는 중이며 생각보다 도착지점이 그리 멀지 않다고 말이다. 이런 전망 하에서, 북한은 남한의 과거이자 미래다.
시민의 신체와 정보, 법적 권리에 대해 무제약적/초법적으로 개입할 수 있는 기구의 재등장은 무엇을 뜻하는가? 역설적으로 이는 새누리당으로 대표되는 전통적인 우파 정치 자체에 위기를 초래할 요인이기도 하다. 앞서의 비유를 이어나가면, 호랑이 등에 올라탄 사람이 호랑이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까? 체스에는 퀸이 킹을 먹으면 안 된다는 규칙이 있지만 현실 정치에도 통용될까? 이른바 "비정상의 정상화", 곧 우파 정부가 초법적 안보기구를 통해 체제유지와 정권재창출을 시도하는 국면이 일상적이 된 상황을 가정하자. 통치자(대통령)와 국회의원은 선거를 통해 주기적으로 재선출되거나 교체된다. 반면 국정원과 군대처럼 조직화된 통치기구는 상급자의 명령을 제외하고는 사실상 누구에게도 책임을 지지 않고, 바꿔말해 명령권자의 교체없이 계속 작동한다. 우파 지배세력이 이 도구들에 의존하는 바가 잦아질수록, 그리고 이 도구들에 보다 적극적인 권한을 부여할수록 해당 기구의 명령권자가 실질적으로 획득하는 권력은 증대하며, 이는 선거를 통한 대표자의 교체와 무관하게 진행될 것이다.
사태가 일정 정도 이상 진전되었을 때 정보와 노하우, 권한을 축적한 안보기구는 드디어 우파의 정치적 지도자에 종속되는 대신 그 결정과정에 직간접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된다. 우리는 이를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의 뒤틀린 버전으로 이해할 수 있을 터이다. 이 끝에는 (박정희나 전두환처럼) 사실상 종신에 가깝게 재임하는 카리스마적 정치 지도자 또는 (소련의 노멘클라투라나 미국 FBI 초대국장 후버처럼) 정치적 의사결정 자체를 무력화시킬 힘을 갖춘 관료기구의 등장이 있다. 어느 쪽이든 (대의제)민주주의의 사실상의 종말이 기다린다. 마치 한국기업 내의 의사결정구조가 그러하듯 사회의 전체 권력이 특정한 지점으로 집중되며 집중된 권력은 누구에게도 책임을 지지않는다. 이를 17세기 유럽 정치이론가들의 표현을 빌면 전제정이라고 부른다; 전제군주는 신자유주의하에서 기업가적 지도자와 효율성의 이름으로 되돌아왔는데, 과거와 다른 점이라면 전제군주는 국가가 망할 때 함께 쇠락을 맞지만 오늘날의 기업가적 지도자들은 조직이 망하면 보너스를 챙겨 떠난다는 걸 꼽을 수 있겠다. 감이 잘 오지 않으면 그냥 속편하게 북한과 그 부유한 통치자들을 생각하면 된다. 물론 여기에서 우리들의 몸뚱이는 성이 김씨가 아닌 어떤 지도자 동무의 캐비어를 위한 한 방울의 기름이 될 것이다.
물론 현실이 이러한 도식대로 흘러갈 가능성은 낮다. 한국에서 생각보다 권력의 주체들은 다양하게 남아있는 편이며--아직 우린 공식적인 언론을 통해 안보기구의 선거개입뉴스를 접할 수 있다!--한국의 국제정치경제적 위기국면은 언제 어떤 형태로 판세를 뒤집어놓을지 모른다(지난 대선 때 1번을 지지하는 한 부사관이 박근혜 당시 후보의 토론을 보면서 깊은 한숨을 내쉬던 장면이 떠오른다). 다만 앞서 전망한 사태를 현실화시킬 수 있는 불안요소가 있다. 이명박 전 대통령이 바로 이 건에서 보여준 것처럼, 한국의 우파들은 그때그때 자기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장기적으로-전체적으로 치명적으로 작용할 선택을 거리낌없이 실행하는 경향이 있다. 필요하다면 모두에게 해가 되는 결정이라도 자신의 이익을 위해 얼마든지 내릴 수 있다는 극한의 이기적인 태도가 우파들에게 있다(나는 그들을 악마화하는 게 아니라 단지 그들이 그러한 논리에 입각해 움직이는 경향을 보인다고 말할 뿐이다). 그들에게는 권력유지를 위해서--또는 감옥에 가지 않기 위해서--초법적 기구의 초법적 행위를 얼마든지 허용할 의사가 있다; 나는 선거에서 우파를 패배시키는 것이 우리 모두의 정치적인 안전을 위해서 매우 중요하다고 믿는다. 이건 양떼 무리에 늑대를 끼워넣으면 목축이 망한다는 정도의 상식적인 판단이다. 사회공동체의 기본조건은 서로를 해치지 않는다는 약속이며, 이를 기꺼이 어길 이들에게 권력을 줄 수 없다는 게 딱히 이상한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덧붙여서 나는 한국의 우파 지지자들, 특히 (페이스북의 <자유주의> 페이지 운영자&지지자들과 같은) '자유주의자'들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하고 싶다. 당신들의 자유주의란 무엇을 뜻하는가? 당신들의 자유주의가 국가의 통신망감청을 기꺼이 찬성하는 것이라면, 그리고 시민들의 자유의사에 따라 결집한 각종 정치적 집회를 비난하는 것이라면, 그 '자유주의'는 개인이 아니라 국가와 기업의 자유를 뜻한다; 정확히 당신과 같은 개개인들을 억압하고 착취할 '자유'말이다. 그러한 '자유'를 옹호하기 위해 당신들은 어디까지 자신의 자유를 기꺼이 침해당할 준비가 되어있는가? 당신들의 마조히즘 또는 피지배욕은 마치 정수장학회의 탄생이 그러한 것처럼 당신들 자신의 재산을 기꺼이 국가와 거대기업에 '헌납'하는 것까지 포함하는가? 만약 그러하다면 서울로부터 대략 40여km 북쪽에 당신들을 위한 아주 좋은 환경이 있다. 그곳에서 당신들은 통신망은 물론 일상적인 생활까지 '체제의 안정'을 위해 국가가 친절하게 감시해주는 정부 밑에서 살 수 있다. 원한다면 당신의 재산은 물론 생명까지도 기꺼이 헌납할 수 있는 곳이다. 자유롭게 풀뿌리를 캐어먹을 수 있고 남의 산에 함부로 들어갈 수도 없으니 사유재산의 보장과 이익추구도 그럭저럭 되는 셈이다. 정말 '자유주의'를 위한 이상적인 곳이 아닌가? 그게 아니라면 당신들 자신의 '자유주의'를 한번쯤 재고해보기를 진심으로 권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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