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가분. <일베의 사상>. 비판적 읽기.

Reading 2014. 9. 24. 21:04

박가분. <일베의 사상>. 오월의 봄, 2013.


 지인들에게 조금씩 아이디어를 풀고 있는데, 일베, 정확히는 한국의 새로운 극우파들의 등장에 대해 나름대로의 입장을 정리하는 글을 쓰고 싶다. 대략 나의 큰 관심사는 90년대 이후 한국의 자유주의적 진행이 제반 조건들과 맞물려 어떻게 현재 한국에서 나타나는 것과 같은 극우파적 정신을 형성했는지, 그리고 그 정신이 이후의 조건에서 어떻게 움직일 것인가를 붙잡는 데 있다. 개념적 용어를 사용한다면, 일베의 정신이 어떻게 형성되고 전개되는가를 다루려고 한다. 어차피 학술적인 글이라기보다는 비평적 스케치에 가까울 테지만, 기본적으로 내가 일베를 포함한 극우파 커뮤니티를 빈번하게 드나드는 편이 아니기 때문에--더불어 '정신'이라는 단어에서 드러나듯 이번에 하고 싶은 작업도 그런 경험적인 성격의 것과는 조금 다르다--어느 정도 다른 문헌들에 대한 참고가 필요하다. 출간된지 대략 1년쯤 지난 박가분의 책은 이미 들어 알고 있었지만 주변에 괜찮은 서평이라고 할 만한 게 없어서인지 그 내용을 제대로 알지는 못했다. 그의 블로그는 예전에 종종 놀러가보기도 해서, 아마 부분적으로는 내 또래 '이론 키드'에 대한 복잡한 거리감이 의식적으로 그 책을 읽지 않게 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일베와 그 정신에 대해 글을 써야겠다고 생각한 것은 비교적 최근의 '폭식투쟁' 이후였고, 결국 어떤 식으로든 박가분의 책을 한 번 정도 읽어야겠다고 마음은 먹었으나 여러 우연이 겹쳐 생각보다 빨리 읽게 됐다.


 짧은 인상부터 쓰자면, 내 예상보다 훨씬 중요한 책이다. 나는 이 책을 읽기 전에 박가분이 (언제 쓸지는 불분명하지만) 나의 글이 상정하는 도식의 일부분만을 담아낼 거라고 생각했다. 읽은 뒤 지금은 나와 완전히 겹치지는 않지만, 그리고 몇 가지 지점들은 명료하지 않게 넘어가지만, 그가 꽤나 큰 시공간적인 범위를 설정하고 있으며 적어도 내가 다루어야겠다고 생각한 지점들을 이미 상당히 건드리고 있다고 생각한다. 세부적인 대목들에서는 나와 의견이 다른 지점들이 매우 많지만, 전체적인 방향성은 거의 겹친다. 부분적으로 내가 쓰려는 글에서는 그의 글에 암시되어 있지만 분명하게 표현되지 않은 지점들을 언어화하는 작업이 포함될 것이다. 기본적으로 내가 동의하지 않는 지점들을 포함해서 그가 중요한 주제들을 상당히 많이 건드렸기 때문에, 내 글은 최초의 기획보다 <일베의 사상>과의 대화적인 성격이 조금 더 강하게 부여될 것 같다.


 <일베의 사상>의 약점은 명확하다. 일반론부터 제시한다면, 박가분이 드러내는 미숙한 지점들은 지적 훈련이 결여되었음을 보여준다. 이전의 국역된 지젝 텍스트식의 글쓰기가 국역된 가라타니 텍스트 식의 글쓰기로 옮겨간 것은, 물론 후자가 전자보다는 훨씬 읽을만한 글쓰기라는 점은 부인할 수 없지만, 그의 문장이 여전히 제대로 다듬어지지 않은 데서 드러난다. 나 역시 독자에게 다가서는 문장을 쓰는 사람은 절대로 아니나 박가분의 글에 나타나는 명백한 일본어 번역투를 지나치기는 어렵다. 그러나 훈련의 결여는 문장쓰기의 문제보다 이론적 사유의 층위, 여기서는 현실의 사태에 대한 개념의 적용에서 드러난다.

 예컨대 '전향'이나 '미학적 태도' 같은, 가라타니 고진의 독자라면 익숙한 개념들을 박가분이 사용할 때 그는 부분적으로 개념에 끌려가는 모습을 보여준다('가치 전도'와 같은 말의 용법도 마찬가지다). 그가 '정상국가'에 대한 욕망으로 2002년/2008년 촛불과 일베의 공통적인 면모를 발굴하려 할 때 그는 자신의 개념적 도식을 기계적으로 주장하기 때문에 후자가 도래한 시대의 차이를 제대로 짚지 못한다(예를 들어 103쪽); 지나치듯 말하자면 오늘날 '좌파'와 '진보'는 일베가 믿는 정상국가의 실현에 어떠한 실질적인 장애물로 기능하지 못하며, 전자에 대한 후자의 ('두려움'이 아닌) 조롱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미학적 태도' 또는 '낭만적 아이러니'에 대한 논의를 통해 일베의 '몰이상', 그러니까 모든 가치체계를 파괴하고 그것을 낭만화하는 경향을 짚어내는 건 좋지만 그러한 경향 자체가 무엇으로부터 기인하는지를 묻지 않기 때문에 '낭만적 아이러니'를 이야기하는 2장의 끝부분은 다시 일베와 국가의 관계를 이야기하는 3장과 어긋나 버린다.

 전자가 개념을 현실에 무리하게 적용하기 때문에, 그러니까 역으로 현실의 차이를 충분히 붙잡지 않기 때문에 생기는 문제라면, 그와 거꾸로 개념에 대한 숙고가 부족하기 때문에 논의가 약해지는 지점도 있다. 이는 사실상 이 텍스트의 이론적 논리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에 속할 '공론장'의 활용에서 제일 크게 불거진다. 그가 자신이 인용하는 사람들보다 공론장의 개념을 비교적 다각도로 바라본다는 점은 의심이 없지만, 공론장의 개념을 다소 도식적으로 가져오기 때문에 위르겐 하버마스의 진지한 독자라면 고개를 갸우뚱할 대목이 있다. 이는 (박가분에게만 고유한 것이 아닌)  "환멸을 견디는 구체적인 공간"에의 염원이 사실상 하버마스적 공론장의 틀로 다시 돌아온다는 것에서 분명히 나타난다. 물론 하버마스적 선택지 자체가 오늘날에 완전히 무용하다고 주장할 생각은 없으나, 자신이 비판하고 넘어선 것처럼 보이는 도식에 자각적인 언급없이 슬그머니 돌아오는 건 문제가 있다. 이는 하버마스적 논리에 내재한 근본적인 약점을 박가분의 논리가 그대로 이어받는다는 것으로 이어진다. 이는 박가분만이 아니라 그가 참고하고 인용하는 이들이 하버마스의 개념에 맺혀있는 '역사성'을 무시하고 그것을 하나의 전형으로만 간주하기 때문만도 무관하지 않다. 여기서 길게 설명하지 않겠지만 <공론장의 구조변동>이, 마치 <계몽의 변증법>이 그러하듯, 애초에 근대의 역사적 서사를 구축하는 기획이며 그러한 맥락에 대한 감안없이 온전히 이해될 수 없다는 것만 말해둔다.


 개념과 대상의 조우를 보다 섬세하고 사려깊은 형태로 진행하는 것과 개념 자체의 역사성을 따지며 개념을 '살아있는 것'으로 만드는 솜씨는 재능 이상으로 훈련을 통해서 만들어진다. 이런 점에서 <일베의 사상>에서 박가분이 보여주는 약점들은 경험과 훈련의 결여, 좀 더 나아가 재능있는 이에게 제대로 된 독서와 비평의 경험을 거의 제공해주지 못하는 한국의 열악한 조건을 다시금 상기시킨다. 분명히 그는 지금도 혼자서 더 성숙한 저자로 성장하는 중이겠지만, 특히나 경험적 훈련은 좋은 선생과 동료들과의 격투를 통해서--키배질과는 다른, 서로에 대한 깊은 이해를 전제한 비판 말이다--쌓을 수 있기 때문에, 나는 지금도 그가 그렇게 좋은 조건에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강조하지만 이와 같은 결함에도 불구하고 <일베의 사상>이 중요한 텍스트며 (설령 비판적으로 검토할 대상일지라도) 가치있는 서술들이 적지 않다는 점은 분명하다. 자신이 공부해온 이론의 논리들을 현실에 접근시켜 그로부터 '사상'을 도출하는 감각과, 부분적인 판단을 끌어모아 전체적인 틀을 나름대로 축조하는 시야의 넓이 역시 훌륭하다. 적지 않은 사람들은 이 텍스트를 읽으면서, 물론 충분히 소화할 능력이 된다는 전제 하에서지만, 일베라는 장소=공동체의 내적인 코드, 그것이 담지하는 '사상', 그러한 사상이 출현한 조건으로서의 국가와의 관계를 따라가면서 문화적인 것과 정치경제적인 것을 연결짓는 시도 자체의 중요성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물론 구글에 도서명을 검색했을 때 첫 페이지에 나오는 서평들은 대체로 그러지 못한 것 같다).

 물론 이러한 연결과정, 다시 말해 매개의 문제가 이 텍스트의 또 하나의 약점이라는 점만 언급해두자. 개념의 차원에서의 매개도 있지만, 각 파트의 연결 및 그 종합이 그렇게 잘 맞아떨어지는 것은 아니라서 부분부분에서의 중요한 논의들을 전체 책의 만듦새가 깎아먹는 측면이 있다. 문장교정도 그렇고, '오월의 봄'은 그렇게 좋은 편집진을 보유하지는 않은 것 같다. 더불어 일베에 대한 박가분의 결론은 일베가 '거리로 나온' 현재의 시점에서는 더 이상 적절한 것이 아니게 되었지만, 1년 전의 시점에서는 그렇지 못했다는 점을 같이 이야기해야 공정할 것이다.

 이런 점들을 감안할 때 <일베의 사상>을 가장 잘 활용하기 위해서는 비판적 독서가 요구된다(물론 이런 읽기가 한국에서 정말 드물다는 점도 사실이지만). 기본적으로 텍스트를 호의적으로 읽되, 저자의 판단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을 유보하고 중요한 단정이 나올 때마다 꼭 그렇게 되는지를 꼼꼼히 따지면서 보길 권한다. 그렇게 해서 틀린 지점들을 피할 수 있을 거라는 이야기가 아니라, 그렇게 할 때 가장 얻을 수 있는 게 많은 텍스트다. 즉 박가분이 사태에 대해 올바른 판단을 내리냐의 여부가 아니라 그가 맞든 틀리든 그가 던지는 질문들과 그가 주목하는 사안들 자체를 주의깊게 검토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이야기다. 이하는 <일베의 사상>에 대한 내 나름대로의 비판적 읽기라고 할 수 있다.



 직접 텍스트를 보자. 일종의 상식적인 문제제기, 곧 이 사태를 하나의 분석대상으로 진지하게 사유하자는 평범한(?) 주장을 담은 서문과, 일종의 '윤리', ethos를 제시하는 후기--박가분이 말년의 푸코를 끌고 들어오는 건 이 지점에서 아주 정확하다--를 제외하고 이 텍스트는 총 세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1부 "일베와 그들만의 문화"는 일베 및 일베에 주요하게 나타나는 문화적 특성들이 어떻게 형성되었는가에 대해 나름의 계보를 제시한다. 전반부의 세 장이 일베 및 인터넷 문화소개의 성격을 띤다면, 후반부의 두 장, 즉 '인터넷과 논객문화' 및 '인터넷과 국가'는 각각 2부와 3부로 이어지며 이 텍스트를 일종의 정치적 역사/사회비평의 성격을 부여하는 시발점이 된다. 전자는 한국 인터넷 상의 논쟁형식이 어떻게 형성되었가를 논객문화의 등장과 그 변모라는 맥락에서 바라보며(나는 여기에 동의하지만 조금 더 큰 맥락에서 보충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후자는 보다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역사적 맥락', 곧 2000년대 초반부터의 한국대중정치의 맥락에 일베를 포괄하는 인터넷 상의 대중정치를 위치시킨다(시기를 감안하면 확실히 이 텍스트는, 박가분도 감추지 않고 있듯이 저자의 자전적인 면모가 매우 짙다). 전자가 '사상', 정확히 말해 특정한 정치적 주체의 논리를 내적으로 분석하는 작업이라면 (그런 점에서 전술했듯 윤리의 문제로 돌아가는 후기에 이르기까지, 이 텍스트는 사실 일베의 '사상'보다는 '윤리'라는 제목이 좀 더 어울릴지도 모른다...) 후자는 그러한 논리가 어떠한 정치적 변화에 조건지어졌는가를 다소 거칠게 그린다. 양자의 조응 또는 매개가 그렇게 원활하지 않다고는 해도 큰 그림은 이렇다.


 서명과 가장 가까운 관계에 있는 2부 "일베의 사상이란 무엇인가"는 일종의 문화비평이라고 볼 수 있다. 박가분은 일베의 구체적인 언어적 실천으로부터 출발해 여기에 어떠한 '정치적 무의식'이 자리해 있는가를 드러낸다. "일베의 혐오문화는 합의기반이 존재하지 않는 실재의 정치적 적대에 뿌리내리고 있다"(123), "인터넷의 혐오 문화, 타인에 대해 비아냥거리는 능력의 과시 등은 오히려 진보적인 인터넷 논객 쪽에서 시작되었다. 일베의 새로움은 그러한 혐오 문화를 집단적인 문화, 집단적인 권리로 공유한다는 점에 있다"(132)는 지적은 타당하다. 이 책 전체를 통해서 논리적으로 가장 약한 고리에 속하는 2부의 2장과 3장은 팩트숭배로부터 낭만적 아이러니와 같은 미학적 태도로 나아가는 이론적 곡예를 펼치는데 그다지 설득력 있지는 않다(아도르노의 <부정변증법>에 대한 완전한 오독은 둘째치고). 요컨대 팩트숭배=몰이상 또는 (내 용어로 표현하면) 반-감상적 감상주의=낭만적 아이러니의 논리가 제시되지만, 1항에서 2항으로, 2항에서 3항으로 넘어가는 대목이 모두 약하다. 팩트숭배로부터 '감각적으로 확인할 수 없는' 이념 및 감성에 대한 거부와 같은 태도를 읽어내는 건 동의할 수 있지만, 나는 여기에서 곧바로 몰이상의 미학적 태도로 넘어가는 대신 이러한 팩트숭배의 기저에 깔린 국가권력숭배의 기저를 읽어내는 게 맞다고 생각한다. 결정적으로 (가치판단 및 사실판단으로부터 자유로운) '미학적 공동체'로서 일베를 읽어내게 된다면, 다른 무엇보다도 일베의 구성원들이 이토록 민감하게 정치적인 이슈에 반응하는 것을 설명할 수 없다. 박가분이 가라타니의 비평을 활용하고 싶어하는 마음을 이해할 수 없는 건 아니지만, 그러한 논리를 가져와 '낭만주의 미학'(물론 프레더릭 바이저를 참고하면 낭만주의 미학을 박가분식으로 단순화하는 게 맞는지조차 잘 모르겠다), 자크 랑시에르, 미시마 유키오를 일베에 끼워맞추려는 노력은 득보다 실이 더 많다. 가라타니의 해당 비평이 근본적으로 포스트모던적 주체의 해명으로 향한다는 점에서 박가분의 비평은 암묵적으로 일베와 포스트모던적 주체를 연결시키려고 하는 것처럼 보인다. 나는 그가 암묵적으로 주장하는 바에 일리가 없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그보다는 통상적인 포스트모던적 (소비)주체의 성립 이후에 그 주체가 어떻게 변모하는가를 살피는 쪽으로 논의를 짜는 게 보다 설득력 있었으리라 생각한다.



 아마 정치 및 사회이론/비평에 관심있는 독자들에게 가장 흥미로울 대목은 역시나 3부 "일베와 한국의 정치"일 것이다. 실제로 나는 박가분의 이론가적 야심이 가장 집중된 대목은 3부라고 생각한다. 3부는 하버마스의 공론장 개념과 이를 비판하며 일종의 대안적 민주주의(?)를 제시하는 아즈마 히로키(<일반의지 2.0>,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에 대한 설명으로 시작한다. 앞서 말했듯 하버마스, 정확히 말해 공론장 개념과 그 문제적인 성격을 언급하는 대목은 이론적으로 빈약하지만 그것이 꼭 박가분만의 잘못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솔직히 공론장 개념을 활용하는 사람들 중 상당수가 <공론장의 구조변동>의 역사적 퍼스펙티브를 무시하곤 한다...하버마스는, 물론 그가 페리 앤더슨의 비판이 암시하듯--<역사유물론의 궤적> 및 좀 더 자세한 논평이 실린 <스펙트럼>을 참고--관념적인 영역으로 돌아가기는 하지만, 기본적으로 물질적인 영역을 포함한 서구근대의 전개과정을 그 맥락으로 깔고 있다). 박가분은 아즈마의 논의, 공론장 대신 '데이터베이스'를 사고하자는 논리를 훨씬 공들여 설명한다.


 요점은 아즈마가 주장한 데이터베이스 또는 (포스트모던적) 대중의 정치적 욕망의 직접적인 표출이 2008년의 촛불집회며, 다소 변형되었지만 근본적으로 유사한 형태의 집단이 일베라는 것이다. 어떤 면에서 3부는 사실 일베가 아니라 2008년의 촛불을 해명하기 위한 글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박가분이 여기에서 서로 다른 층위의 개념을 섞어쓰다보니 교통정리가 잘 되지는 않는데, 잘라낼 걸 잘라내고 개략을 말해보면 다음과 같다. 2002년의 민족주의적 촛불집회가 노무현이라는 매개 혹은 질료를 통해 스스로의 정치적인 목적을 구체화하고--끝내 배반당하지만--실현=표현할 수 있었다면(213), 2008년은 그와 같은 표현의 수단을 갖지 못했기 때문에 "촛불시위가 확산될수록 의식적인 레벨에서 자신이 정확히 무엇을 욕망하는지 알지 못하는 무정형의 대중이 참여하는 집단행동이 된 것이다"(199). 다시 말해 공론장 혹은 숙의를 거쳐 스스로의 주장을 공적인 영역에 반영하는 시민사회가 (정치적으로 무력한) 포스트모던적 대중사회로 옮겨갔고, 그 무능력이 분명한 정치적 목표를 결여한 촛불집회와 같은 양상으로 나타났다는 것이다.

 실제로 포스트모던적 조건, 또는 나의 언어로 자유주의적 탈정치화가 2008년의 촛불에 끼친 영향을 무시할 수 없다는 데는 동의하지만, 내 생각에는 박가분의 해석 자체가 촛불의 실패에 대한 상처--예컨대 대중의 정치적 역량에 대한 환멸--를 드러내는 것 같다. 정말로 시민사회의 자기상실 및 포스트모던적 대중의 등장이라는 설명을 밀고 간다면 애초에 그 정도로 광범위한 촛불집회가 일어나지 않는 게 맞다(마치 가라타니가 왜 일본인은 데모를 하지 않느냐고 묻는 것처럼 말이다). 더불어 시민사회적 의제의 상실과 정치적 표현을 가능케할 매개의 부재는 (2008년의 야당은 집회가 그 정도로 커지는 동안 도대체 무엇을 했단 말인가?) 별도의 요인으로 간주해야 하며, 반정부적-반신자유주의적 대항운동과 같은 경향을 포함한 복수의 요인들이 중층결정한다는 설명 쪽이 더 타당해보인다. "평범한 시민들의 목소리"=데이터베이스적 정치에 국가가 귀를 기울여달라는 식의 해석(203)은 솔직히 아즈마의 틀에 현실의 사태를 끼워맞춘 무리수다(그리고 데이터베이스 정치에 대한 비판은 다시금 박가분을 결론에서 암묵적으로 하버마스에 접근하도록 만든다; 아즈마를 하버마스 비판으로 끌고 왔다면, 다시 아즈마의 데이터베이스=현재의 포스트모던적 대중정치(일베, 촛불)를 비판하면서 하버마스로 되돌아가는 식으로 말이다).

 나는 박가분이 거의 증후적이라 생각될 정도로 사용하지 않고 있는 '신자유주의'라는 키워드가 이 경우에 더 절실하게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단순히 심화된 자유주의가 아니라, 미셸 푸코가 설명하듯(<생명관리정치의 탄생>) 국가가 시민사회의 견제와 요구로부터 자립하여 역으로 사회와 시장을 구축하는 임무를 수행하는 체제로서의 신자유주의 말이다. 물론 군부독재시절을 포함하여 대한민국의 역사에서 국가가 중요하지 않은 적은 없었다. 그러나 노무현 정부가 '눈치를 보지만 결국 마음대로 하는' 국가의 모습을 보여주었다면, 2008년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의 극우파 정부는 근본적으로 '눈치를 보지 않고 마음대로 움직이는' 정부, 나아가 시민사회의 여론형성에까지 직접적으로 개입한다는 점에서 사회의 요구로부터 자유로운, 사실상의 유일한 주체이다. 더불어 이들과 함께 본격적으로 북한과의 긴장관계가 강화되면서 시민사회에 대한 '국가'의 위상이 훨씬 더 강화될 수 있는 여건이 갖추어졌다(실제로 박가분이 지적하듯 일베 이용자들이 안보와 외교라는 측면에서 국가를 지지한다고 할 때, 이 두 가지 영역이야말로 외부국가에 대항한다는 점에서 진정으로 국가를 상징하는 영역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2008년의 촛불은 그런 점에서 박가분이 생각하듯 국가 위의 시민사회를 주장하는 욕망의 표출이었다기보다는(물론 그 설명이 틀린 건 아니다) 이제 완전히 독립적으로 움직이면서 시민사회의 제반조건 및 중간세력을 부숴나가는 국가에 대한 저항 혹은 발악이었다고 보는 편이 좀 더 타당할 것이다. 물론 그 운동은 실패했고, 국가는 시민사회의 저항을 분쇄했다. 우리는 광우병 파동을 식량주권 및 과학적(?) 논쟁으로만 기억하지만, 우리의(그리고 박가분의) 망각과 달리 그 본질적인 성격은 경제적인 영역에 맞닿아 있다. 국가는 한편으로 경제를 무기삼아 시민사회를 억눌렀고, 뒤이어 4대강과 같은 사업에서 경제적 영역으로서의 국가적/사회적 자본을 침탈하기 시작한다. 물론 일베는 그와 같은 경제적 신자유주의화, 국가의 자본편향적 경제정책의 산물이기도 하다.


 박가분은 포스트모던적 대중의 등장 및 '성장'으로 2002년, 2008년의 촛불을 놓고, "과거 광우병 촛불시위의 '정신'을 더 급진화"한 형태가 일베라고 본다(215). 말하자면 포스트모던화=시민사회의 공적 영역에 개입하는 능력의 무력화가 점차 심화되다보니 2002년과 2008년을 거쳐 그 정도가 점점 커지고 마침내 '몰이상' / '낭만적 아이러니'를 표상하는 일베가 나왔다는 것이다. 일베를 "사회적 무의식을 [...] 전면화하여 자립적인 언설의 주체로 만들고자 하는 존재", 조금 직설적으로 정리한다면 현실정치=공적영역과의 연결고리를 끊고 자폐적이고 무의미한 (단지 소재가 정치일 뿐인) 유희에 몰두하는 집단으로 설명하는 것이다(물론 1년 뒤 오늘의 시점에서 일베가 자폐적이고 현실정치에 개입하지 못하는 집단이라는 설명은 설득력을 상실했다).

 박가분의 설명은 두 가지 근본적인 문제점을 갖는다. 1) 포스트모던적 대중사회화라는 현상 혹은 효과를 복수의 기제들의 충돌이 아닌 그 자체로 혼자 전진하는 실체적인('물신화된') 개념으로 간주한다--이 점에서 박가분은 그가 인용하는 아즈마의 포스트모던론에 함축된 이론적 결함을 되풀이한다. 2) 1번의 연장선에서, 국가라는 독립된 주체의 행위와 그것이 대중/사회에 가하는 효과를 고찰하지 않는다. 박가분은 조윤호를 인용하여 "'국가'를 넘어서지 못한 '국민'이 촛불집회 실패의 원인"이라고 말한다(257); 이러한 종류의 진술에서 정말로 주체가 되고 싶은 엄청나게 강력한 욕망을 읽지 못한다면 이상할 것이다. 그러나 저 진술을 뒤집으면, '국민'보다 강력한 '국가'가 곧 집회 실패의 원인이기도 하다. 우리가 2008년도 촛불을 '국민'이 패배한 서사가 아니라 '국가'가, 극우파 정권이 승리한 서사로 읽는다면 이 책이 사실상 제대로 건드리지 않는 일베와 국가의 관계, 나아가 일베의 국가주의를 설명할 논리가 나타난다.

 도식적으로 보면 나는 일베의 국가주의라는 상황이 꽤나 전형적인 오이디푸스 컴플렉스 및 초자아의 형성을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쉽게 말해 촛불집회를 형성한 욕망의 대중을 국가라는 아버지가 억누르고 아이=일베는 아버지를 존경하며 또 아버지처럼 되고 싶어한다는 것이다. '진보'에 대한 적대는 단순히 반감상주의라는 미학적 태도에서만 기인한 것이 아니라 아버지=국가와의 상상적 동일시를 통한 공격성의 발현으로 보는 편이 좀 더 설득력 있다(특히 세월호 사태를 둘러싼 극우의 반응을 보면 이쪽이 맞는 것 같다...'어버이'연합은 그런 점에서 부분적으로 일베의 미래를 보여주기도 한다). 물론 여기에 "싸가지없는" 논객문화로 대표되는 자유주의적 태도의 진행과 같은 요소들이 덧붙여져야겠지만, 근본적으로 국가에 대해서만큼은 팩트숭배에 기초한 (찰스 테일러의 표현을 빌어) "계몽"이 향하지 않는다는 점을 설명하는 논리로 크게 흠이 있는 것 같지는 않다. 정확히 이러한 설명이 사태를 복수의 요인/주체들이 빚어내는 보다 정교화된 구도로 보는데 도움이 된다.



 최종적으로 우리는 박가분이 제시하는 대안, 그러니까 새로운 윤리에 기초한 공동체 또는 (사적영역과 공적영역을 매개한다는 점에서) '공론장'에 대해 어떠한 평가를 내릴 수 있을까? 부분적으로 나 또한 가라타니 고진의 논리(<트랜스크리틱>)와 같이 윤리-사회이론-(경제적)공동체형성이라는 도식에 동감하는 바가 있기 때문에, 다시 말해 새로운 형태의 경제적 성격을 지닌 공동체가 하나의 대안적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설명에 동의하기에 박가분과 근본적으로 달라질 것 같지는 않다. 그러나 나는 박가분 자신이 암시하면서도 서술하지 않는 결론, 즉 사회의 '실재적 적대'를 조금 더 끌어내야 한다고 믿는다. 다시 말해 오늘날 한국의 신자유주의적 질서가 우파적 국가와 자본의 카르텔, 즉 지배세력의 연합으로 인해 결성된 주체가 있으며 이 주체에 의해 국가 내외부의 '비국민' 또는 피착취자가 지정된다는 점에서 자본주의국가에 내재한 사회적 적대를 심화시킨다면, 나는 이러한 적대의 분할선과 구조를, 그리고 누가 사실상의 주체와 객체인지를 직시해야 한다고 믿는다. 요컨대 하버마스와 그에 기초한 박가분의 논의가 우리 모두가 주체라고 간주하고 주체와 주체 사이의 관계를 논한다면, 나는 오늘날의 권력의 이행 자체가 우리를 주체와 주체가 될 수 없는 객체로 분할하고 전자에 의한 후자의 착취/억압을 낳는 방식으로 작동한다고 본다--그런 점에서 나는 명백히 아도르노의 논리틀을 따라가고 있다. 하버마스가 아도르노의 난제에 대한 답변으로 주체-주체 간의 의사소통적 이성을 제시했다면, 오늘날의 정치경제적 조건은 하버마스적 사회가 성립할 수 있게 해주는 전제 자체가 무너지고 다시금 사회는 주체-객체로 나뉘어 전자의 후자에 대한 지배로 퇴행하는 국면을 보여준다. 결국 객체에 대한 주체의 지배를 어떻게 끝장낼 것인가라는, 맑스로부터 이어지는 오래된 물음으로 회귀하는 셈이다(나는 맑스가 자본주의 사회 내에서 적대의 분할선, 주체와 객체를 가르는 선이 어떻게 만들어지는가를 탐구했으며 <자본>이야말로 그를 보여주기 위한 연구라고 생각한다). 물론 이것이 정치적 주체로서 공동체의 재구축이라는 목표와 모순될 이유는 없다. 단지 나는 공동체를 형해화시키는 구조적 힘에 대한 고찰 없이 공동체를 만들 수는 없다고 믿을 뿐이다; 앞서 언급한 가라타니 고진의 작업은 이런 점에서 어떻게 적대없는 경제적 공동체를 만들 것인가라는 물음과 닿아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