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 마생. <로베스피에르, 혁명의 탄생> [140216]

Reading 2014. 3. 18. 12:27

*2014년 2월 16일 페이스북


장 마생Jean Massin의 <로베스피에르, 혁명의 탄생>_Robespierre_ 국역본을 읽었다. 원저 초판은 1956년에 출간되었고 국역본은 1970년에 출간된 제2판을 바탕으로 하는 듯하다; 일단 저작권 관련 페이지가 적어도 내가 갖고 있는 책에는 없고 역자 해제에도 책의 서지사항에 관한 언급이 전무하다. 최갑수 교수의 국역본 서문에 따르면 아직도 주요한 위치에 있는 (일단 로베스피에르에 대한 결정적인 사료가 추가로 발견된 게 없으므로) 전기라고 한다. 불어 위키를 참고하면 322쪽 정도의 분량인 책이 국역본에서 (물론 뒤의 제법 자세한 인물사전 및 곳곳의 삽화/초상화를 감안해야겠지만) 750쪽 짜리 사전두께가 된 것은 인상적이다. 교양인은 프로이트 전기도 그렇고 좋은 책을 내주는 건 참 고마운데(이 출판사의 <문제적 인간> 시리즈는 대체로 좋은 책들이 좋은 번역으로 나오고 있는, 전문가와 대중 양자가 모두 참고할 수 있는 시리즈다)...가격 유지해도 괜찮으니까 보관하기에 편하게 볼륨 좀 줄여주면 더 고마울 것 같다.

독서 자체에 관해서는, 설령 비평적인 전기임을 감안하더라도 이렇게 사람의 마음을 뒤흔들 수 있는 책은 찾아보기 쉽지 않다고 말해야겠다. 부분적으로는 19세기 초반에 대한 나의 관심사, 그리고 읽으면서 로베스피에르의 약점과 결함을 나 자신의 것과 비추어보게 된다는 점들 때문인 면도 있겠지만, 마생이 열과 성을 다해서, 그리고 꼼꼼한 사료추적과 전기사가에게 필수적인 사려깊음을 겸비하고 그려내는 프랑스 혁명/로베스피에르의 진로 자체가 어떤 숙고와 경의의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로베스피에르>가 실질적으로 초점을 맞추고 있는 기간은 삼부회에서부터 테르미도르 9일의 반동쿠데타에 이르기까지로, 마생은 로베스피에르의 정치적인 경력과 순전한 의미에서의 프랑스대혁명이 분리될 수 없는 것임을 강조한다. 보통 웬만큼 나이브한 사가가 아니라면 특정한 역사적 사건과 누군가의 삶을 이렇게까지 근접시키기는 어려울텐데, 마생은 그 자신의 사유가 얕아서가 아니라 로베스피에르 자신이 그만큼 독특한 성격의 인물임을 설득력있게 제시한다. 한 마디로 말해 막시밀리앙 드 로베스피에르(de 가 붙긴 하지만 귀족집안은 아니다- 로베스피에르는 부모가 없는 집에서 자라 변호사가 되었다)는 공적인 이념 그 자체를 체현한다; 이 책을 끝까지 읽은 독자는 그에게 붙은 '부패할 수 없는'(incorruptible)이란 수식어가 실제로 그의 삶에 비해 무척이나 모자라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이념을 체현한다는 것이 그가 지나치게 관념적임을 뜻하지는 않는다; 흔히 나타나는 '과도하게 이성적인 괴물'과 같은 상이야말로, 실제로 그러한 인물이 아무런 지지기반도 없이 수없는 반대파들과 맞서 정국의 주도권을 잡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는 현실을 생각한다면, 순진한 것이다(나는 곧바로 90년대에 출간된 닐 게이먼의 그래픽노블 <샌드맨>을 떠올린다...그리고 프랑스혁명에 대해서 많은 말들을 쏟아낸 영국인들도!). 로베스피에르는 대체로 현실적인 인물이었으며, 그의 경쟁자 중 한 명이었던 마라와 비교해볼 때도 (혁명을 대체로 오로지 정치적이고 도덕적인 문제로 간주했다는, 마생의 표현을 빌면 "루소주의적인" 사고방식에 묶여있었다는 점 때문에) 사태를 가장 근본적인 지점까지 생각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마생은 그가 때로 지나치게 문제를 현실적인 지점에서 생각했기 때문에 제약을 받은 사례들을 꺼낸다; 어떤 면에서 "최고 존재"에 대한 예배라든가 이성종교와 같은 것들을 도입한 것조차 부분적으로는 공리적인 계산에 의한 것이듯.

앞서 말했듯 마생은 로베스피에르와 혁명정국을 분리하지 않는다. 바꾸어 말하면 그가 로베스피에르에 대해서 꼼꼼하고 사려깊은 전기사가가 될 수록 혁명정국에 대해 보다 성실한 해설자가 된다는 뜻이기도 하다. 궁극적으로 맑스-레닌의 혁명모델을 무오류의 정답으로 간주한다는 점에서 마생의 논지는 오늘날 조금 어색하게 읽히는 면이 있긴 하지만, 적어도 프랑스혁명 진행과정 상에서 다양한 세력들의 갈등관계가 어떻게 진전되었는지, 그리고 그것들이 새로운 통치자들--신흥 부르주아지들--에게 어떤 해결책을 유도했는지를 이 정도로 꼼꼼하게 설명하는 문헌은 적어도 한국에서 쉽게 찾기 어려운 것 같다. 확실히 말해 단순히 마생의 열정에 설득당해서가 아니라 그가 방대한 증거들을 바탕으로 매우 디테일하게 그려내는 혁명의 전개과정에 동의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프랑스 혁명에 대해 지금까지 내가 갖고 있던 인상들이 지나치게 피상적인 것이었다고 이야기할 수밖에 없다(사실 19세기 영국을 주된 연구대상으로 삼는 이가 영국인들이 당대 프랑스 혁명을 어떻게 생각했는지만 보게 되는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긴 했지만-). 예컨대 루이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는, 그들이 단순히 국내와 해외에 수많은 지원군들을 갖고 있어서만이 아니라 그 힘들을 가능한한 능동적으로 사용하고자 했기 때문에, 혁명정부의 필연적인 적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이 점에서 에드먼드 버크는 과도하게 낭만적이어서가 아니라 프랑스 내의 정세를 전혀 모르면서 말했기 때문에 잘못을 범한 것이다. 우리는 권력의 작동을 피상적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마생이 잘 그려내듯이 루이 16세 부부가 유폐되었다고 해서 그때까지 그들의 권력을 가능하게 해왔던 갖가지 토대들이 사라지는 것은 전혀 아니다. 예컨대 박정희가 죽은 뒤 수십년이 지나서 (심지어 지지자들조차도) 정치적으로 무능력하다고 간주되는 그 딸이 집권하는 게 가능하다는 사실은, 지배적이었던 권력을 뿌리뽑는다는 게 결코 "왕의 목을 자르는" 것만으로 가능하지 않다는 걸 오늘날에도 보여주는 사례인 것이다. 로베스피에르를 비롯한 혁명의 주동자들이 싸워야했던 대상은 부분적으로 파리에서의 숙청작업 이후에도 사람들의 뇌리에 여전히 강하게 박혀있던 구체제적 심성이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필요하다면 구체제의 잔존물들과 결탁해서라도 이윤을 최대화하고자 했던 새로운 지배계급의 욕망 그 자체였다. 어떤 면에서 로베스피에르의 몰락은, 단순히 전통적인 지지 기반도 없으면서 적을 너무 많이 만들었던 그의 전술적인 미숙함에서만이 아니라 구 지배계급, 신 지배계급과 모두 척을 지면서 상퀼로트들의 이해관계를 여전히 가장 중요한 고려요인으로 삼고자 했던--그러면서도 그들을 통제하고자 했던--그의 입장이 낳은 필연적인 귀결이기도 하다. 언제나 몰락의 운명과 가까이 있었다는 것은 단순히 로베스피에르의 편집증의 소산만이 아니며 엄연한 현실적 가능성이기도 했던 것이다; 실제로 프랑스에서 반혁명은 굉장히 큰 규모로 존재했으며 직접적인 무력행사 외에도 국내외의 지배계급은 혁명을 되돌리기 위해 매우 필사적으로 움직였다--루이 16세를 비밀리에 조언했던 미라보, 오스트리아와 협상하여 정국을 장악하려 했던 라파예트, 반혁명자들과도 결탁할 준비가 되어 있었던 당통, 그리고 기타 수많은 배신자들의 목록은 오히려 로베스피에르가 의회라는 형식을 유지하고자 했던 사실을 기이하게 느끼게 한다. 그는 목표에 맞춰 가장 맞는 수단을 곧바로 생각한다는 점에서 현실적이었던만큼 목표에 근본적으로 충실하다는 점에서 관념적인 인간이었고, 이것이 그를 모범적인 혁명가로 만들어준 동시에 (마생이 비교대상으로 삼는) 레닌이 피할 수 있었던 몰락을 회피할 수 없게 만든 이유이기도 하다. 로베스피에르는 상퀼로트들, 즉 피지배계급을 포괄하는 개념으로서 '민중'의 대변자였지만, 부르주아지들과 상퀼로트들의 '경제적' 충돌이 단순히 그들을 하나의 프랑스로 호명한다고 해서 해결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점까지는 보지 못했다.

"사람들이 자유를 사치로 여기고서, 프랑스 민중들에게 평화와 빵을 주기만 한다면 그들이 자유 없이도 살아갈 수 있다고 여기는 것,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것, 그런 원칙을 가지고 그렇게 추론하는 것에 나는 놀라지 않습니다. 그러나 자유를 숭배하고, 자유 없는 사람들이나 자유 없는 국민들에게는 행복도, 번영도, 도덕도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으로서 그러한 제도들을 혐오하는 나는 여러분의 정의, 즉 자유로운 물라토들을 위한 인류애, 정의, 국민적 관심을 요구한다고 선언하는 바입니다." (191-92, 식민지의 노예문제에 관한 로베스피에르의 연설)

"1791년 말 자코뱅은 일사불란하지는 않더라도 적어도 단합된 하나의 진영을 형성했다. 그러나 머지 않아 그들은 적대적인 두 개의 당파, 즉 브리소파(미래의 지롱드파의 맹아)와 로베스피에르파(미래의 산악파의 맹아)로 분열했다. 처음에 두 정파는 오직 전쟁이냐 평화냐 하는 문제로 갈라졌다. 그리고 그 문제를 둘러싼 투쟁이 끝났을 때 두 정파간 대결의 쟁점은 전혀 다른 것으로 변했다. 그들은 주로 상퀼로트의 정치적 사회적 입자을 두고 대립했다(동시에 그 시기에 이르러 설명될 급격한 변화에 의해 산악파는 철저한 주전파가 되고, 지롱드파는 타협에 의한 평화로 기운다). 따라서 두 정파의 정치적 변화를 이해하려면 처음부터 전쟁의 문제와 사회적 경제적 문제 사이에 존재했던 강력한 연관성을 반드시 지적해야 한다." (207-08)

"혼란과 분열의 시대에는 군 지휘관들이 나라의 운명의 중재자가 되고, 자신들이 지지하는 당파를 우세하게 만든다. 만일 그들이 카이사르나 크롬웰이라면, 그들은 스스로 권력을 차지할 것이다. 그들이 개성 없는 신하에 불과하다면 권력을 자기 주인의 발 앞에 내려놓고, 그의 제1의 시종이 된다는 조건 하에 그가 전제 권력을 되찾도록 도울 것이다." (220, 로베스피에르의 카이사르주의에 대한 언급)

"4월 15일의 축제를 위해 선택되었던 표어, 즉 몇 달 후 프랑스 자체의 표어가 될 '자유, 평등, 우애'에 맞서 6월 3일을 위해 선택된 표어 '자유, 평등, 소유권'은 신랄한 반격처럼 대비를 이루었다. 그러나 4월 15일의 축제가 민중들의 놀랄만한 열광 속에서 평화롭게 진행되었던 반면, 6월 3일의 축제는 군대의 행렬 속에서 진행되었다. 오직 부르주아들만이 그 축제에 참석했고, 민중들은 집에 남아 있던가 의미심장하고 무거운 침묵 속에서 그것을 그저 지켜보았다." (270)

"혁명에 맞서는 반혁명과의 전쟁은 사활을 건 전쟁이었다. 로베스피에르도, 마라도, 그리고 다른 어느 누구도 그 점을 인식하고 있었다고 해서 환각에 사로잡힌 것은 아니었다. 브라운슈바이크가 망명 귀족들을 동반하고 파리에 입성했더라면, 스파르타쿠스의 패배 이후 로마의 아피아 가도에 세워진 십자가만큼의 교수대가 거리에 세워졌을 것이고, 전날의 죄수들인 반혁명 혐의자들이 애국파를 거기에 매달지 않았으리라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랑발 부인의 운명을 탄식하기에 앞서 더 많이 숙고해보고, 마리 앙투아네트의 심복이자 공모자인 그녀가 어떤 심정으로 파리인들의 대량학살에 자신의 우아한 손가락 끝으로 박수 갈채를 보냈을지를 깨닫는 것이 좋을 것이다." (318)

"사회의 일차적 목적은 무엇입니까? 시효의 대상이 될 수 없는 인간의 권리들을 보존하는 것입니다. 이 권리들 중 첫 번째는 무엇입니까? 생존권입니다. 따라서 사회의 으뜸이 되는 법은 모든 사회 성원들에게 생존의 수단을 보장하는 법입니다. 다른 모든 법은 이 법에 종속됩니다. 소유권은 이 법을 공고히 하기 위해서만 수립되거나 보장되었습니다. 소유권이 인간의 생존과 대립할 수 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인간의 삶에 필수적인 양식은 삶 자체만큼이나 신성합니다. 삶을 유지하는 데 필요불가결한 모든 것은 사회 전체의 공동 재산입니다. 오직 잉여만이 개인들의 소유가 되고 상인들의 산업에 맡겨지는 것입니다. 나의 동포를 희생시켜 행하는, 돈벌이를 위한 투기는 교역이 아닙니다. 그것은 도적질이자 형제살해입니다." (361, 로베스피에르의 식량 문제에 대한 발언)

"17세기의 영국 혁명은 프랑스의 혁명가들에게 하나의 횃불이었다. 18세기 말의 모든 유럽 국가 중에서 사법(로베스피에르는 이 보고서에서 그것을 크게 찬양했다)과 정치에서 가장 자유로운 나라는 영국이다. 영국은 이러한 이유로 프랑스 계몽사상가들에게 찬사의 대상이 되었다. 마지막으로, 영국에서 출현한 대기업의 발전은 프랑스의 혁명적 부르주아지의 비상을 위한 모델로 제시되었다.--대다수 국민공회 의원들은 영국이 25년간 전례 없이 악착스럽게 반 프랑스 동맹을 지휘하는 것이 바로 이 마지막 이유에서라는 점을 이해하지 못했다. 영국은 상공업에서 유일하게 자신의 경쟁자가 될 수 있는 프랑스의 도약을 용인할 수 없었다. 프랑스인들이 가장 가깝다고 믿었던 국민, 자유로운 환경으로 그들에게 가장 많은 격려를 제공했던 국민이 가장 큰 국민적 단결과 단호함으로 반혁명전쟁을 수행하는 국민이 되었던 것이다. 바로 그러한 이유에서 로베스피에르와 다른 의원들이 품었던 애정어린 실망이 결국 증오로 변했다. 사람들이 가장 미워하는 것은 동료를 배신한 자이다. 경제의 일차적 중요성에 무지한 탓에 이원론적 사고를 가질 수밖에 없는 사람들의 눈에 영국 총리 피트는 사탄의 화신이 되었다." (520-21)

"[로베스피에르의 연설] 언제까지 독재자들의 분노는 정의로, 민중의 정의는 야만이나 반란으로 불려야 합니까? 사람들은 압제자들에게는 관대하고, 압제당하는 자들에게는 가혹합니다! 다음의 사실보다 더 자연스러운 것은 없습니다. 범죄를 미워하지 않는 자는 아무도 덕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둘 중 하나는 굴복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왕당파에 대한 관용을 외칩니다. 악당들에게 자비라니요! 안 됩니다! 무고한 사람들에게 자비를, 약자들에게 자비를, 불행한 사람들에게 자비를, 인류에게 자비를!
...
여기에서 로베스피에르는 단지 <비외 코르들리에>에 답하고 있는 것만은 아니었다. 그에게 혁명으로 인해 사람들이 흘려야 했던 피를 수치스럽게 느끼도록 만듦으로써 혁명의 가치를 훼손시킬 수 있다고 믿을 모든 사람들에게 미리 대답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더구나 백색 테러를 태연하게 용인할 사람들이었다.--그들은 여전히 '9월 학살'을 상기하면서도, 1790년 8월 낭시에서 부이예가 라파예트의 박수를 받으며 학살한 수백 명의 비무장 병사들이나 1791년 7월 17일 라파예트와 바이이가 샹 드 마르스에서 사살한 수백 명의 파리 시민들, 그리고 1793년 3월, 방데 반란 초기의 며칠 간 방데 군에게 살해된, 마쉬쿨 읍에서만 545명에 이르는 민간인 남자, 여자, 아이들을 전혀 생각하지 않는 바로 그 사람들이다.--그들은 또한 공포정치 시기 프랑스 전역에서, 주로는 서부와 남동부의 군사작전 지역에서 합법적으로 이루어진 약 17,000건의 사형 선고 앞에서 공포에 사로잡혀 성호를 긋겠지만 1848년 6월 봉기의 진압과 1871년 코뮌의 진압에서 희생된 노동자들의 수는 결코 헤아려보려 하지 않는 바로 그 사람들이다." (523-24)

"부르주아지의 절대 다수에 대항하여 로베스피에르는 부르주아 혁명을 승리로 이끌었다. 그는 이 혁명을 앞으로 멀리까지 밀어붙였으므로 그 혁명은 19세기 내내 온갖 장애를 물리치고 그 약동하는 힘을 퍼트릴 수 있었다. 그는 외국의 침입으로부터 자유의 나라를 구했다. 그는 왕과 특권층의 반혁명이 어떠한 지속적인 재건도 실현할 수 없게 될 만큼 그것을 확실히 무력화했다. 그는 인간 권리들의 민주주의, 여전히 부르주아적인 민주주의를 그것이 허용할 수 있는 평등의 극한까지 밀어붙였다. 그는 그의 후계자들로 하여금 사회주의로까지 나아갈 수 있게 할 사회적 평등과 소유권 제한이라는 궤적을 마련했다. 그는 마라 이후 처음으로 혁명정부의 이론을 제시했고, 그것을 효과적으로 실현했다. 그는 처음으로 상퀼로트 민중을 정치적 활동의 경험 및 정치권력의 행사과 결바헀다. 요컨대 바로 이러한 것이 그의 활동에 대한 혁혁하고도 긍정적인 결산이다.
그러나 그는 그 이상은 할 수 없었다. 그것은 경제적 조건들이 대혁명 자체가 여전히 부르주아 혁명일 것을 요구했기 떄문이다. 그의 실패는 테르미도르의 48시간 동안 결정된 것이 아니었다. 여러 달 전부터 불가피한 실패가 예측되었다. 처음부터 사람들은 그의 성공의 변증법적 대가로서 실패를 예견할 수 있었다." (639-40)

"[로베스피에르의 처형 후] 그리고 또 다른 공포정치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비록 백색 공포정치라 불릴 만큼 깨끗하고, 어떤 은행가, 어떤 귀족도 공격하지 않을 만큼 독특하고, 역사 교과서들이 거의 언급하지 않을 만큼 정상적인 공포정치이긴 했지만. 여기서 권좌에 오른 부르주아지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1789년 7월 14일 봉기와 1792년 8월 10일 봉기에서 죽은 상퀼로트들, 발미와 제마프, 와티니와 가이스베르크에서 전사한 상퀼로트들의 피가 더는 부르주아지가 살아 있는 상퀼로트들의 동의를 꼭 받지 않아도 되게 해주었으므로. 여기에서 '재산 소유자들이 다스리는 나라'의 필요성을 설명하는 테르미도르파 부아시 당글라--그는 파리에 아름다운 거리를 가지고 있는 반면 로베스피에르는 그렇지 못하다--에게 발언권을 넘기는 편이 나을 것이다.

우리는 뛰어난 사람들의 통치를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약간의 예외는 있지만, 여러분은 단지 재산을 소유한 사람들, 그 재산이 속한 나라, 그 재산을 보호하는 법, 그 재산을 유지시켜주는 공공질서에 애착이 있는 사람들, 그리고 이 재산과 그것이 제공하는 유복함 덕에 교육을 받아 나라의 운명을 결정하는 법률들의 장단점을 현명하고 올바르게 토론하기에 적합해진 사람들 중에서 그들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678-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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